北關大捷碑

北關大捷碑
(北關大捷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國寶
大韓民國 서울에 位置한 景福宮에 展示된 北關大捷碑 複製品
種目 國寶 第193號
時代 朝鮮
住所 咸鏡北道 김책시 임명리

北關大捷碑 (北關大捷碑)는 咸鏡北道 北評事 職을 맡고 있던 정문부 將軍이 壬辰倭亂 中 義兵을 모아 倭軍을 擊退한 공을 기려 朝鮮 肅宗 때 北評事 최창대가 咸鏡北道 吉州郡 任命面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咸鏡北道 김책시 임명동)에 세운 專攻 記念 碑石이다. 높이 187cm, 너비 66cm.

槪要 [ 編輯 ]

北關大捷碑의 正式 이름은 「 有名 조선국 咸鏡道 臨津 義兵 大捷碑 」(有明朝鮮國咸鏡道壬辰義兵大捷碑)이며, 碑文에는 壬辰倭亂 當時 關北, 只今의 咸鏡道 地域에서 일어난 義兵 들의 活動과 功勞가 1500餘 글字로 記錄되어 있다. 1592年 을 친다는 名分 아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大規模 兵力을 보내 朝鮮을 侵攻하고, 首都 漢城은 陷落되고 宣祖는 西北쪽으로 달아난 채 朝鮮 國土가 倭兵에게 유린당하는 가운데, 倭軍 長壽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는 各自 軍士를 이끌고 北進해왔다. 宣祖는 倭兵에 맞설 軍士를 모으기 위해 王子 임해군 순화군 을 各其 咸鏡道 江原道 로 派遣하지만, 王子라는 身分을 내세워 倨慢하게 구는 臨海君의 行動에 咸鏡道 住民들은 오히려 憤慨했으며, 會寧의 衙前이었던 국경인과 국세필 等이 나서서 臨海君과 순화군을 잡아 倭兵에게 바치고 降伏해버렸다. 국경인 等은 그 功勞로 咸鏡道의 責任者로 任命되었다.

이때 京城 사람이었던 이붕수가 몰래 최배천ㆍ지달원ㆍ강문우(姜文佑) 等과 함께 平射(評事) 정문부 를 主張으로, 宗姓府使 정현룡ㆍ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를 次長으로 推戴하여 義兵 百餘 名을 얻었다. 鄭文孚는 때마침 北쪽에서 野人 의 움직임이 尋常치 않음을 들어 국세필에게 함께 北쪽을 防備하자고 꾀어 城으로 들어간 뒤, 이튿날인 9月 16日 아침 이들을 生捕해 處刑한 다음 群衆에 돌리고, 南쪽 明川으로 가서 앞서 국세필 等에 加擔했던 明川의 衙前 정말수(鄭末守) 等도 잡아 죽이는 한便 倭兵 數十 名을 京城에서 쳐부수었다. 나아가 倭兵과 交戰하여 10月 30日에는 吉州 장평에서 倭兵 825名, 12月 10日에는 雙包에서 倭兵 100餘 名(《實錄》에는 60餘 名)을 戰士시키고 이듬해 1月 23日에는 倭兵 100餘 名을 端川에서 쳐부수었다. 이에 倭兵은 1月 28日에 關北에서 물러났다고 碑文은 傳하고 있다. 義兵은 최배천을 보내어 사잇길로 가서 勝戰 消息을 報告했고, 宣祖는 이붕수에게 監察을, 최배천에게는 早産(朝散)의 가자(加資)와 明紬 한 匹의 賞을 주고, 鄭文孚는 吉州 牧使로 삼았다.

倭兵을 相對로 功을 세운 鄭文孚는 自身의 功을 觀察使 윤탁연에게 가로채여 제대로 된 論功行賞도 받지 못했고, 終戰 뒤에는 南原 府使와 眞珠牧師 等을 歷任했으나 仁祖反正 뒤 박홍구 獄事事件에 連累되어 苦楚를 겪다 結局 1624年 11月 19日에 獄死하였다. 40年 뒤에야 嫌疑가 풀려 左贊成에 追贈되었고, 1709年 咸鏡道 住民들의 發議로 北關大捷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返還 [ 編輯 ]

1905年 러日 戰爭 當時 日本軍 第2師團 所長 이케다 쇼스케(池田正介)가 發見하여 日本으로 가져갔고, 그 後 返還될 때까지 야스쿠니 神社 에서 保管하였다. 러일戰爭의 戰勝國이었던 日本은 北關大捷碑를 「戰利品」 取扱하여 天皇에게 바치는 禮式을 치르고 야스쿠니 神社로 보냈다. [1]

當時 日本 留學生이던 趙素昻 이 야스쿠니 神社에서 이 碑를 發見하고는 『大韓興學報』에 「咸鏡道臨津義兵大捷碑」(咸鏡道壬辰義兵大捷碑, 1909年 )이라는 글을 寄稿하여 "누가 이 事實에 憤慨하지 않을 것이며 (北關大捷碑를 빼앗긴) 큰 罪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며 呼訴하였다. 그러나 當時 韓國의 國權이 日本에 넘어가던 어수선한 狀況에서 누구도 어떠한 措置를 取하지 못한 채 韓日合邦 을 맞았고, 東亞日報 1926年 6月 19日子 記事에는 이생(李生)이라고만 알려진 無名의 投稿者가 北關大捷碑의 消息을 簡略하게 傳하면서, 碑石 옆에 "大捷이라 하였지마는 그 때의 事實과는 全然 서로 다르니 世人은 이 碑文을 믿지 말라"고 쓴 나무牌가 서있었다고 證言하고 있다. 解放 以後에도 6.25 戰爭 의 混亂 속에서 北關大捷碑에 對한 問題는 言及조차 되지 않았다.

야스쿠니 神社에 所藏되어 있을 當時의 北關大捷碑의 모습.

1978年 在日 韓國人 學者 최서면(崔書勉, 當時 國際한국연구원長, 명지대 敎授)이 우연하게 趙素昻이 쓴 글을 읽게 되었고, 야스쿠니 神社의 뒤뜰을 뒤진 끝에 北關大捷碑를 찾아냈다. 그는 「75年ぶりに確認された咸鏡道壬辰義兵大捷碑」라는 論文을 發表하고, 當時 朴正熙 政府에 이 事實을 通報하였으며 韓國의 「朝鮮日報」 1978年 4月 12日子에 報道되었다. 이때 韓國 政府는 처음으로 日本에 北關大捷碑 返還을 要請하였다. 정문부의 後孫인 海州 鄭氏 宗親會는 碑石이 確認된 直後부터 야스쿠니 神社에 返還請願書를 냈고, 紳士의 卷弓師(權宮司)를 만나보기도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便 日本에서 1960年 부터 返還 運動을 벌였던 僧侶 街키누마 센神이 2000年 韓國의 僧侶 醋酸과 함께 「北關大捷碑 民族運動中央會」를 創設하고, 2003年 12月 18日, 韓國의 外交通商部 는 "北關大捷碑 返還을 위해서는 南北間 調整이 必要하며 紳士에 返還을 强制할 수 없다"는 日本 政府의 立場과 "南北間 協議 後 日本 政府의 公式 要請이 있을 境遇, 비를 返還할 수 있다"는 야스쿠니 神社의 立場을 確認했다(야스쿠니 紳士의 立場은 街키누마 센神이 야스쿠니 神社의 弓師로부터 받은 公式 書翰의 內容이기도 했다).

2005年 3月 28日, 韓日 佛敎福祉協議會가 北韓의 조선불교도연맹 側과 베이징 에서 만나 最終的으로 北關大捷碑를 北韓에 返還하기로 合意하였고, 그 合意文 採擇結果를 駐韓 日本大使館에 通報했다. 4月 23日, 李海瓚 當時 國務總理 는 김영남 常任委員長에게 北關大捷碑 返還을 위한 協議를 아시아-아프리카 頂上會議에서 提議했다. 5月 12日 韓國 政府는 北關大捷碑 返還을 위한 南北 文化財 當國間 會談을 北韓에 正式 提案하였고, 20日에 駐韓 日本大使館은 "南北 當國間 合意 뒤 韓國 政府의 要請이 있으면 返還이 可能하다"라는 回信을 하였다. 6月 20日, 韓日 정삼회담에서 盧武鉉 大統領과 日本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總理가 北關大捷碑 返還에 對해 合意했다. 6月 23日 서울에서 開催된 第15次 南北 長官級 會談에서는 "南과 北은 日本으로부터 北關大捷碑를 返還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實務的 措置를 取하기로 하였다"는 合意 發表가 이루어지고 外交通商部를 中心으로 返還 要請 作業이 加速化되어, 6月 28日 韓國 政府는 日本 政府에 北關大捷碑 返還을 公式 要請하였다.

10月 3日에 야스쿠니 神社의 理事會는 北關大捷碑 返還을 最終的으로 決定하였으며, 이에 따라 韓國의 文化財廳 傘下機關인 國立文化財硏究所 保存科學室의 팀이 야스쿠니 神社에 派遣되어 9日부터 北關大捷碑 以前 解體 作業에 들어갔다. 12日, 大韓民國 政府와 日本 政府는 北關大捷碑 印度文書에 署名하였고, 撤去에 必要한 技術的 支援을 하기로 合意하였다. 10月 15日, 大韓民國과 日本의 各界 人士가 參與한 가운데, 日本 야스쿠니 神社에서 北關大捷碑 返還을 앞둔 傳統儀禮人 告由祭(告由祭)가 擧行되었으며, 20日 대한항공 貨物機가 北關大捷碑를 싣고 韓國에 着陸하였다. 韓國으로 들어온 北關大捷碑는 10月 28日, 서울 용산구로 新築 移轉된 國立中央博物館 以前 開館式 때 노무현 大統領을 비롯한 各界 人士와 一般人들이 參與한 가운데 一般에 公開되었고, 博物館의 전시동 으뜸홀에 暫時 備置되어 展示된 後, 景福宮 으로 옮겨졌다.

11月 17日 公式 除幕式이 이루어졌다(이 날은 乙巳勒約 締結 100年이었다).

2006年 2月 13日 : 南北間에 北關大捷碑 北韓 歡送에 關한 協議를 가져, 3月 1日에 開城工團 이 있는 開城 을 거쳐 引導하기로 했다. 2006年 2月 20日에 北關大捷碑 還送 固有제가 景福宮에서 開催되었으며, 2月 28日에 北關大捷碑의 主人公이기도 한 정문부의 墓所가 있는 議政府市 에서 충의공 祭享 意識이 行해졌다. 3月 1日 個性을 거쳐 北韓으로 送還된 北關大捷碑는 3月 23日 元來 자리에 다시 세워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國寶 第193號로 指定되었다. 4月 25日, 北關大捷碑의 福제비가 景福宮에 展示되었다.

各州 [ 編輯 ]

  1. 日本의 아시아 歷史資料 센터에 남아있는 「가토 기요마사 定한 記念碑 下部 出願의 건(加藤?正征韓記念碑下付出願の件)」(레퍼런스 코드: C03026852200)라는 文書에는 "自國(朝鮮) 君의 忠義를 讚揚한 碑文이 새겨진 記念碑는 우리 나라(日本)에게는 좋지 못한 것으로, 陸士出征軍(六四出征軍)에서 이를 發見했을 때 이 碑石의 存在가 韓日 兩國의 親善에 妨害가 될 것이 걱정되어 建立한 사람의 子孫의 承諾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고 되어 있으며, 日本의 學者 나카무라 히사시로(中村久四郞)는 이 1次 史料의 內容대로 "이케다 쇼스케가 韓日 兩國間 感情을 해칠 이 碑石의 撤去에 對한 趣旨를 地域 住民들에게 말하니 地域 住民들이 所長의 知性있는 態度에 感動하여 所長에게 讓渡했고 미요시 當時 제2사단장의 改善에 부쳐 도쿄로 보냈다"고 主張하고 산케이 新聞 도 韓國이 北關大捷碑에 '掠奪'이란 單語를 붙이고 있다며 反日에 文化財를 利用한다는 非難을 담은 記事를 報道하고 있으나, 在日 韓國人 學者 최서면은 러日 戰爭 當時 戰利品이 없던 日本軍으로서는 北關大捷碑는 그렇게 適切한 戰利品이 아니었으며, 日本으로서는 不便한 敗戰의 記錄을 담은 北關大捷碑를 否定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主張했다.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도 가토 기요마사의 軍이 敗했다는 事實을 朝鮮 民族이 記憶하지 못하게 하려는 意圖에서 北關大捷碑의 日本行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1943年에 朝鮮總督府 에서 各地의 警察署長에게 보낸 「儒林의 肅正 및 反 時局的 古跡의 撤去에 關한 건」이라는 機密文書에서는 朝鮮 各地에 세워져 있던 過去 日本과의 戰爭에서의 朝鮮軍의 勝利를 記念하는 碑石들을 撤去 및 破壞할 것을 指示하고 있었는데, 破壞를 命한 20個의 碑石에는 南原 雲峯의 黃山大捷碑와 海南의 명량대첩비 도 包含되어 있었다.

關聯 作品 [ 編輯 ]

  • 「100年만의 歸還 - 北關大捷碑」(KBS HD 역사스페셜 ) - 2005年 10月 21日 放送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