封建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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封建制 (封建制)는 政治·社會 體制의 한 形態이다. 古代 中國과 中世 유럽의 封建制度는 一部 共通性이 있지만 서로 相異한 制度이나, 漢字文化圈 에서는 유럽에서 施行되었던 feudalism 을 中國의 封建 制度로 飜譯하여 같은 用語로 使用하고 있다. 中央 政府가 地方에 直接 行政官을 派遣하여 統治하는 中央集權的인 郡縣制 와 달리 中央 政府는 首都와 一部 要衝地만 直接 統治하고 다른 地方에는 諸侯나 領主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制度이다.

유럽의 封建制. 中國의 封建制
  • 契約에 依한 主從 關係
  • 契約 不履行 時 解約
  • 血緣에 依한 君臣 關係
  • 封土 世襲
  • 諸侯는 週(周)나라 王室을 種실로 崇拜

中國의 封建制 [ 編輯 ]

封建制는 中國 周나라 때 施行된 것으로, 王族과 功臣들을 要衝地의 諸侯로 봉하여 周나라 王室을 지키는 藩屛(藩屛)으로 삼은 것에서 始作되었다. 周나라 王族 및 功臣으로 이루어진 50餘 諸侯國들이 任命되어 中國 各地에 남아 있던 旣存의 800餘 諸侯들을 아우르도록 한 것이다. 周나라 以前부터 存在했던 800 諸侯에서 볼 수 있듯이 旣存에도 封建制度와 類似한 形態의 體制는 있었지만, 周나라 때 政治·社會 制度로서 로 整備되어 實施된 것으로 보는 것이 一般的이다.

鳳(封)은 天子가 諸侯를 任命하고 土地를 하사하는 制度를 가리키는 漢字語이다. 封建制度는 土地를 下賜(封)하여 나라를 세운다(建)는 意味이다. [1] 이렇게 諸侯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諸侯國을 삼는 것을 分封(分封)이라 하며, 諸侯들에게 땅과 함께 爵位를 내리는 것을 封爵(封爵)이라 하였다. 大部分의 諸侯는 周나라 王族이 任命되었으며, 諸侯들은 다시 血族을 中心으로 卿大夫(卿大夫)를 任命하고 채읍(采邑)을 나누어 줌으로써 계층적인 統治 體制가 나타났다. 周나라의 封建制度는 血緣을 바탕으爐韓 宗法(宗法) 秩序를 통해 中央 政府의 統制力을 維持하였다. 그러므로 宗廟와 社稷에 祭祀를 올리고 宗法 秩序를 確認하는 일이 크게 重視되었으며, 諸侯들에게는 祭祀에 參與하고 祭祀에 쓸 貢物을 供給하는 責務가 附與되었다.

그러나 時間이 지나면서 諸侯들의 勢力이 漸次 强化되고 여러 世代가 흘러 諸侯와 周나라 王室間의 血緣 關係도 弱化되면서 宗法 秩序를 中心으로 한 統制 體制가 弱化되기 始作하였다. 그리고 周나라 王室이 異民族의 侵略으로 首都를 喪失하고 洛邑(洛邑)으로 옮겨오면서 實質的인 國力 優位마저 사라지게 되자 中央 政府의 統制力이 完全히 消滅되고 混亂期가 찾아왔다. 이 混亂期를 春秋 戰國 時代 라고 하며, 前半期人 春秋 時代 에는 周나라 王室의 權威를 尊重하여 諸侯들이 敗者 를 中心으로 王室을 保護하는 樣相이었으나 後半期인 戰國 時代 가 되면 諸侯들이 모두 王을 自稱하고 周나라 王室과 同等한 獨立國으로 行勢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周나라의 制度로서의 封建制度는 完全히 消滅되었다.

한나라 以後 中國의 여러 王朝는 皇族들을 諸侯王으로 冊封하는 封建 傳統은 形式的으로 復活하여 維持되었으나, 實質的인 制度는 周나라의 封建制度와 달랐다. 分封된 諸侯王들은 實權을 가지지 못했으며, 諸侯王들의 領地를 包含한 모든 地域은 皇帝가 임명한 行政官이 일정한 任期 동안 다스리는 郡縣制로 統治되었다. 諸侯王들의 諸侯國은 이름만 國(國)이고 行政官의 職名만 달랐을 뿐 實質的으로 軍(郡)과 差異가 없었다.

유럽의 封建制 [ 編輯 ]

中世 유럽에서 形成된 地方 行政 制度이자 政治·社會 體制이다. 영주와 農奴로 이루어진 壯元 (莊園)을 基礎 單位로 하여 各 莊園의 統治者인 榮州( 記事 )는 雙務的 契約을 통해 上位 榮州 (臺榮州)의 가신(家臣)이 되고 臺榮州 또한 더 上位의 領主로 이어져 窮極的으로 國王 또는 皇帝와 雙務的 契約 關係를 맺어 계층적인 가신 關係가 形成된 體制이다. 國王을 包含한 모든 階層의 支配者들은 모두 壯元을 다스리는 諸侯이며, 國王 等의 諸侯는 所有下에 있는 多數의 壯元을 臺영주에게 分蜂하여 다스리게 하거나, 한 段階 낮은 中間영주의 忠誠을 얻음으로써 廣大한 領土를 維持하게 된다. 例를 들어 英國 의 國王은 英國이라는 나라를 構成하는 모든 臺領主들의 首長이면서 同時에 國王令에 屬하는 領主들의 首長인 諸侯였으며, 또한 首都 런던을 包含한 國王 直轄領을 다스리는 領主였다. 이러한 累層的인 關係는 영주가 가지는 作위에서도 드러나는데, 英國의 國王인 엘리자베스 2歲 의 公式 爵位를 例示로 보면 英國 및 英聯邦 國家의 國王 이外에도 노르망디 工作, 랭커스터 工作, 맨 섬의 榮州, 에든버러 工作(女), 메리오네스 伯爵(女), 그리니치 男爵(女) 等 多樣한 爵位가 있다.

이렇게 계층적인 關係는 麾下 영주 및 技士들의 封建法 相議 忠誠을 維持하기 위한 方便이었다. 麾下 臺영주를 實質的으로 統制하기 위해서는 臺영주를 凌駕하는 直轄領의 存在가 必要했다는 것이다. [2] 프랑스 카페 王朝 初期의 狀況이 代表的으로, 프랑스의 國王으로 領主들에 依해 選出된 위그 카페 日드프랑스 地域의 榮州로 다른 臺영주를 壓倒할 수 있는 權力이 不足하였고 事實上 일드프랑스와 오를레앙 地域만 다스릴 수 있었다. 反對로 英國 노르만 王朝 는 征服을 통해 形成된 强力한 權力과 함께 本據地인 노르망디 地域의 힘을 바탕으로 臺영주를 壓倒할 수 있었다.

血緣에 기초한 宗法 秩序를 中心으로 統制力을 維持했던 中國의 封建制와 달리 유럽의 封建制는 血緣이 아닌 雙務的 契約 關係 로 統制力을 確保했다. 朱君은 保護를 提供하고 家神은 忠誠을 提供한다는 相互間의 義務를 基礎로 契約을 맺는 것으로 主君과 영주 사이의 關係가 이에 該當했다. 영주와 上位 榮州 間에도 基本的으로는 같은 契約이지만 細部的으로 영주는 稅金과 一定 期間의 軍事的 奉仕를 提供하고 上位 영주는 土地( 封土 )를 提供하는 關係였다. 封土의 所有權과 忠誠 契約은 世襲되었으며, 婚姻과 相續을 통해 移轉될 수 있었다. 또한 雙務的 契約이었으므로 義務가 지켜지는 限 영주의 去就는 자유로웠으며, 이를 통해 여러 名의 上位 영주를 섬기고 多數의 封土를 받는, 或은 婚姻과 相續을 통해 多數의 封土를 獲得함으로써 여러 名의 上位 영주를 가지게 되는 境遇가 많았다. 甚至於 國王조차도 이러한 婚姻과 相續을 통해 직할령 或은 直屬 영주를 擴大하는 政策을 取했다. 忠誠을 盟誓한 上位 영주가 多數이다보니 軍事的 奉仕를 提供할 때 어느 領主를 優先으로 두는지에 對한 契約 關係가 따로 存在하기도 했다.

封建 諸侯 [ 編輯 ]

封建 領主는 經濟的 基礎가 自給自足的이고 交通도 發達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든 적든 獨立 傾向을 갖게 되지만, 큰 것은 形式上으로는 國王의 家臣이면서 스스로 많은 家神을 두고 事實上의 獨立 國家를 이루었다. 이러한 封建領主를 諸侯(諸侯)라고 한다. 諸侯는 오래된 많은 不足的인 統合體 위에 君臨하는 首長的인 性格이 剛하다. 王權이 發達하지 못했을 境遇에는, 一部 諸侯는 王의 領土보다도 넓은 地域을 支配하고 있는 境遇도 極히 드물지 않다. 많은 諸侯들이 强力한 힘을 가지게 되면 나라는 封建的 分裂狀態로 빠지게 된다.

日本의 封建制 [ 編輯 ]

日本 에도 時代 에 存在한 다이묘 와 이들이 다스렸던 等의 制度를 封建 制度라 불렀다. 이는 當代 日本 儒學者들이 自國의 政治·社會 狀況이 中國의 封建 制度와 類似했다고 보고 같은 呼稱으로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中國의 封建 制度와는 相當한 差異가 있으므로 다르다고 봐야 한다. 一旦 다이묘는 에도 時代 以前부터 내려져 오는 制度였고, 當時 日本은 누군가가 임명한 것이 아니라 自體的인 武力으로 亂立한 여러 領主들에 依해 뺏고 빼앗기는 戰國時代를 거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一旦 中央政府라는 것도 없었고 政府에 依한 統制力 따위는 存在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實權이 없는 象徵的인 王家만 存在했을 뿐이다. 이는 같은 文化圈을 共有하지만 統一 되지 않은 여러 部族들이 亂立한 形態라 봐야한다. 卽, 部族國家 形態인 것. 勿論 統一이 된 日本의 에도時代 以後에 한해, 日本의 政治 制度는 유럽과 類似한 封建制度의 形態로 發展했다고 評價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封建 諸侯"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