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식
(朴賢植,
1929年
3月 11日
~
2005年
8月 20日
)은 前
大韓民國
의
野球
選手(
外野手
)이자 監督이다.
金晋榮
과 더불어 "
仁川
野球의 代父"로 불리는 野球人이다.
'
아시아
의 鐵人'이란 別名을 가졌던 그는 1950~1970年代 最高의 홈런 打者였다.
1929年
平安南道
鎭南浦
에서 태어난 그는 7歲 때 家族과 함께
仁川
으로 내려와서 成長했으며,
韓國 戰爭
때에는 카투사로 服務하여 參戰하였다. 東山中學校 時節에는
投手
로 이름을 날렸지만,
金融組合聯合
(
1949年
), 陸軍 팀(
1950年
-
1959年
)을 거치며
外野手
로 轉向하여 活躍했다.
1954年
第1回
아시아 野球 選手權 大會
부터
1965年
第6回 大會까지 國家代表팀으로 連續 出戰한 그는
필리핀
에서 열린 第 6回 大會에서 特別賞(鐵印象)을 받으며 ‘
아시아
의 鐵人’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8年
第一銀行
을 끝으로 選手 生活을 마치고 監督 生活을 始作할 때까지 20餘 年間 112個의 홈런을 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以後
第一銀行
의 監督을 맡았던 그는
1975年
부터
1977年
까지 暫時
野球
를 접고
第一銀行
에서 銀行員으로 勤務했다.
1978年
京畿高
野球部 監督으로 現場에 復歸한 後, 下位에 屬했던 팀을
花郞待機 全國高校野球大會
準優勝,
鳳凰臺旗
4强으로 올려 놓았다.
대한야구협회
에서 競技 理事와 審判 理事로 일한 後,
1981年
12月 15日
仁川
軟膏의
삼미 슈퍼스타즈
의 創團 監督에 就任했는데 한때
MBC 靑龍
創團 監督 物望에 올랐으나
[1]
50代 中盤이라 挫折됐고 本人(박현식) 外에도
김동엽
金榮德
배성서
等이 擧論됐지만 해태行(김동엽) OB行(金榮德) 比重-認知度 面에서 못 미친 點(배성서) 탓인지 霧散됐으며 難航 끝에
백인천
이 初代 監督으로 選任됐고 이 過程에서 百 監督의 動機인
이재환
유백만
이 코치로
[2]
拔擢됐다. 비록 13競技(3勝 10敗)만에 監督 자리에서 解任되며
KBO 리그
歷代 最短命 監督의 記錄을 남겼지만, 그의 後任이었던 이듬해
金晋榮
監督이 不美스러운 일로 一線에서 指揮를 할 수 없게 되자 暫時
삼미 슈퍼스타즈
로 돌아와서 監督 代行을 맡기도 했다.
1984年
부터
1989年
까지
KBO
의 審判 委員長을 歷任하였고,
1991年
LG 트윈스
2군 監督을 맡은 것을 끝으로 野球界에서 물러났다.
末年에는
胃癌
으로 鬪病하여 時限附 宣告를 받았고, 他界하기 1달 前이었던
2005年
7月 16日
仁川
文學野球場
에서 열린 올스타戰의 始球를 맡아 마지막 모습을 보였다.
2005年
8月 20日
새벽에
서울
에서 世上을 떠난 後,
慶尙北道
永川市
고경면
청정리 素材 參戰勇士 墓域인
國立永川護國원
에 安葬되었다.
[3]
한便, 選手 隱退 後 골프에 情熱을 쏟아 골프에서도 頭角을 드러냈으며
[4]
이를 契機로 後輩 野球選手
유백만
에게 골프를 傳受했는데
[5]
유백만
의 初等學校(초량) 後輩인 개그맨
이경규
는 演藝界에서 代表的인 싱글플레이어로 有名하고
[6]
유백만
과 野球 同期이자 本人(박현식) 等
MBC 靑龍
初代 監督 候補에 올랐던 사람들이 이런저런 事情으로 固辭한 뒤 千辛萬苦 끝에 MBC 初代 監督이 된
백인천
은 日本 프로野球 入團부터 골프를 배웠으며
[7]
프로 元年 當時 主戰이었던
김재박
李珖은
하기룡
等이 이 때부터
[8]
골프를 배웠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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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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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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