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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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
朴珍景
出生日 1918年 12月 22日 ( 1918-12-22 )
出生地 日帝 强占期 慶尙南道 南海郡
死亡日 1948年 6月 18日 ( 1948-06-18 ) (29歲)
死亡地 大韓民國 濟州道 北濟州郡
本館 密陽朴氏 (密陽朴氏) 밀성대군 (密城大君)
父母 박병철의 5男
配偶者 진양정공 정임환의 딸 정봉운
子女 * 兩者 그 백형인 陣容 氏의 아들 익주 君을 入養
* 박익주 (朴翊柱) 1野戰軍 情報處長, 第5管區 副司令官을 거쳐 1980年 陸軍 准將 豫編, 第11代, 12代 國會議員(慶南 河東·南海)
服務 * 日本軍 38軍團 所謂 (濟州島에서 勤務)
* 國防警備隊 總司令部 人事局長
* 朝鮮警備隊 第9聯隊長 (中領) /11聯隊長 (大領進級 1948年6月1日部)
服務期間 1946.2月부터 1948年 6月 18日
最終階級 大領
指揮 濟州島 4.3 事件
기타 履歷 * 大韓民國 件軍紀의 軍人. 김익렬 中領의 뒤를 이어 第9聯隊長이 되었다가 第 11聯隊長이 되어 濟州 4.3 事件 初期 남로당 武裝隊에 對한 大遊擊作戰을 指揮하였으나 암살당했다. * 박진경의 葬禮式은 陸軍腸 第1號로 記錄되었다. 1952年 11月 7日 濟州島民 및 軍警後援會 名義로 朴大領殉職忠魂碑를 세웠다.
徐薰 1950年 12月 30日 을지武功勳章
박진경
한글 表記 : 박진경
漢字 表記 : 朴珍景
改正 로마字 表記 : Bak Jingyeong
매큔-라이샤워 表記 : Pak Chinky?ng
예일 表記 : Pak Cinkyeng

박진경 (朴珍景, 1918年 12月 22日 [1] ~ 1948年 6月 18日 )은 美軍 指揮下에 警備隊 第 11聯隊長으로서 제9연대 1大隊를 配屬받아 4個 代代로 濟州 4.3 事件 을 일으킨 남로당 遊擊隊에 對한 鎭壓作戰(臺遊擊作戰)을 펼쳤으나 1948年 6月 18日 當時 警備隊 內의 손선호와 問喪길에게 暗殺 當했다.

生涯 [ 編輯 ]

1918年(或은 1920年) 12月 22日 慶尙南道 南海郡 南面 홍현리에서 박병철의 5男으로 出生했다. 眞珠高等普通學校 를 優秀한 成績으로 卒業하고 日本 오사카外國語大學 英語科 卒業 後 第2次世界大戰 時 에는 學兵으로 徵集되어 日本 마쓰도 陸軍工兵 豫備士官學校 를 卒業하고 空甁 少尉로 任官 되어 濟州島에서 服務하였다. 그리고 8.15 光復 以後에는 釜山에서 右派團體인 慶南國軍準備大와 附設 軍官學校에서 活動하다가 제5연대 創設 要員으로 1946年 1月 29日에 勇士(二等中士)로 入隊하였으며 優秀下士官으로 推薦되어 少尉로 現地 任官(1946.4.25) [2] 하였다. [3] 그리고 1中隊 補給官과 重大 人事係, 1大隊 副官(現在 人事將校), 連帶副官을 거쳐서 송호성 朝鮮警備隊 總司令官 專屬副官과 祕書室長 等을 거쳐 警備隊 司令部 人事局長이 되었다. [4] 그리고 1948年 5月 6日~15日까지 제9연대장, 1948年 5月 15日부터 6月 18日 새벽 暗殺 時까지 第11聯隊長(33日) 等을 歷任했다. 박진경은 11聯隊長으로서 1948年 5月 30日부터 6月 17日까지 남로당이 일으킨 4.3 事件의 鎭壓作戰을 끝내고 그날밤에 濟州島 知事가 베푼 大領進級祝賀宴에 參席하고 돌아와 就寢中에 部下들인 남로당 프락치들에게 暗殺 當했다.

濟州 4.3事件 鎭壓 및 被殺

濟州道에서에 4.3 事件이 勃發했는데 警察力으로는 鎭壓이 어렵자 美軍政은 警備隊 投入을 決定하였는데 4月 20日에 警備隊 第5聯隊에서 1個 大隊(大隊長 오일균, 5月1日附로 第11聯隊 1大隊)가 濟州島에 投入되었다. 한便, 第9聯隊長 김익렬 中領은 남로당 遊擊隊 司令官 김달삼과 會談을 하였고 5月 5日에는 딘 軍政長官이 主宰한 會議에서 조병옥 警務部長과 몸싸움을 한 後 다음날로 解任되었다. 警備隊 司令部는 鎭壓部隊로 5月1日附로 創設된 第11連帶를 指名하였고 鎭壓部隊 指揮官으로 박진경 中領을 임명하였다. 1948年 5月6日, 박진경 中領은 第9聯隊(實兵力 1個大隊)場에 就任하였다. 이어 박진경 中領은 濟州島로 移動한 第11聯隊長(3個大隊)場에 5月 15日附로 就任하게 되고 제9연대 1 大隊를 配屬받음으로써 4個 大隊를 指揮하게 된다. [5] 그리고 思想이 의심스러운 1大隊長 오일균 少領을 司令部로 보내고 11聯隊의 2個 大隊와 9聯隊 1個 大隊 等 3個 大隊長(大尉 서종철, 大尉 김용주, 大尉 菰根興)을 5月 24日 充員 받았고 連帶 參謀 諮問 遙遠 3名(大尉 최갑중, 中領 김종평, 少領 백선진)도 補强된 後인 5月30日부터 4個 代代로 鎭壓作戰을 展開한다.

鎭壓作戰은 警察이 海岸에서 5Km까지 海岸 地域을 擔當하고 警備隊는 5Km 以上되는 山岳地域을 擔當하였는데 5月 30日부터 6月 2日까지 4日間은 濟州島를 西쪽에서 東쪽으로 搜索하는 것이고 6月 14日부터 17日까지 4日間은 漢拏山을 4個 方向에서 包圍하여 漢拏山 頂上쪽으로 搜索하는 것이었다. [6] 作戰이 끝난 後 밤에 道知事가 베푸는대령진급 祝賀宴에 參席하였다가 돌아와서 執務室에서 就寢 中, 18日 새벽 3時頃 公算 프락치人 問喪길 中尉 等 部下들에 依해 暗殺되었다. 그리고 葬禮는 陸軍腸 第1號로 서울에서 치러졌다.

한便, 1948年 5月 6日 박진경 中領이 航空便으로 서울을 떠나 濟州島로 向하자, 이를 探知한 남로당 中央黨은 急히 指導員(올區)을 濟州島로 보냈는데 指導員은 5月 7日에 濟州島에 到着했고 3日 後인 5月 10日에는 남로당 濟州島黨 代表 2名(軍事責任者 김달삼, 組織責任者 김양근)과 警備隊 남로당 프락치 代表2名(11聯隊 1大隊長 오일균 少領, 9聯隊 情報將校 이윤락 中尉, 副官 나희필 小委는 大隊長 遂行要員) 等 4名이 박진경 聯隊長 肅淸을 決定하였다. [7] 그리고 박진경 聯隊長 暗殺은 6月 18日 남로당 프락치人 問喪길 中尉 一黨이 實行하였다. 따라서 暗殺은 남로당 中央黨 올區(指導員)의 指令으로 이루어졌으므로 暗殺犯의 背後는 남로당 中央黨이다.(북한과 남로당의 主張: 朴振驚異 殺人魔 였고, 보다 못한 部下 將校인 23살 靑年 問喪길이 部下들과 함께 殺人魔를 處斷한 것이다.)

論難 [ 編輯 ]

濟州 4.3 事件 鎭壓 當時에 死亡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慶尙南道 地域에서 國家有功者로 取扱되어 왔었다. 當場 濟州島에서는 忠魂墓地에 그의 追悼비가 1952年 세워졌고, 創軍同友會와 5連帶創設同志會에 依해 1990年 南海郡 郡民公園에는그의 銅像이 建立되었다.

民主化 以後, 4.3 當時 그가 施行했던 無差別 逮捕作戰이 正말로 4.3을 解決하는데 도움을 주었냐부터 以前 司令官인 김익렬과의 比較에 이르기까지 많은 批判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南海에서는 2005年에 그의 銅像을 撤去하려는 움직임이 市民團體들로부터 일었으나 銅像은 現在도 如前히 남아 있다. 2017年에는 창원시의 顯忠日 追念式에서 박진경의 位牌가 慶南代表로 올라가 物議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事實 박진경 大領은 美軍政의 指示에 따라 5.10 制憲議員 選擧와 大韓民國 政府樹立을 反對하고 朝鮮民主主義 人民共和國 樹立을 위해 武裝 鬪爭을 하였던 濟州道 남로당 人民 遊擊隊에 對한 大遊擊作戰(對게릴라 作戰)을 한 것이다. 그의 山中 住民들에 對한 逮捕作戰은 正常的인 臺遊擊作戰(現在 軍 敎理上 後方地域 作戰中의 하나임)을 實施한 것이었다. 박진경 大領은 1948年 5月 6日 赴任하여 6月 18日까지 總 2回의 聯隊級 作戰을 實施하여 約 650餘名의 捕虜를 捕虜 審問팀에 引繼하는 等 大遊擊作戰에서 要求되는 節次에 따라 作戰을 한 것이다. 各種 1次 資料를 細部的으로 分析해 보면 作戰間 射殺 人員은 25名이었다. 이러한 作戰結果를 두고 無差別 民間人 虐殺로 罵倒하는 것은 明白한 事實關係 歪曲이다. 박진경 聯隊長의 住民과 山中 人民遊擊隊를 分離한 作戰은 남로당 人民遊擊隊의 强壓으로 濟州島 남로당의 5月 10日 選擧에 對한 妨害工作의 一環으로 人民遊擊隊에 依해 强制로 山으로 끌려갔던 濟州島 住民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박진경 追悼非 [ 編輯 ]

  • 全面: 고(故) 陸軍大領(陸軍大領) 박진경(朴珍景) 追慕碑(追慕碑)
  • 右側面: 이 비(碑)는 當初(當初)에 세운 碑(碑)의 悲鳴磨耗(碑銘磨耗)로 內容識別(內容識別)李 어려워 書記(西紀) 1985年(一九八五年) 6月(六月) 日(日) 다시 세웠으며 元妃(原碑)는 非(碑) 앞에 묻었음.
  • 後面: 공(公)은 密陽朴氏(密陽朴氏) 밀성대군(密城大君)의 後裔(後裔)로서 생지(生地)는 慶南(慶南) 南海郡(南海君) 南面(南面) 홍현리(虹峴里) 36番地(三十六番地)에서 短期(檀紀) 4253年(四二五三年) 1月 22日(一月二十二日) 出生(出生)하셨다. 否認(婦人)은 南海郡數(南海郡守)를 歷任(歷任)韓 진양정공(晉陽正公) 임환(任煥) 氏의 따님이다. 공(公)李 殉職(殉職)하신 後(後) 兩者(養子)로서 그 白兄(伯兄)인 陣容(珍鎔) 氏의 아들 익주(翊柱) 君을 入養(入養)하였다. 공(公)은 진주고보(晉州高普)를 卒業(卒業)하고 이어 日本(日本) 오오사카(大阪) 외국어대학교(外國語大學校) 英語科(英語科)를 卒業(卒業)韓 後(後) 우리나라 光復(光復)과 더불어 國軍(國軍) 創設(創設)의 主役(主役)으로 一翼(一翼)을 擔當(擔當)하여 獻身(獻身)하고 國防警備隊(國防警備隊) 總司令部(總司令部) 人事局長(人事局長)을 歷任(歷任)韓 後(後) 11聯隊長(十一聯隊長)으로 就任(就任)과 同時(同時)에 陸軍大領(陸軍大領)으로 昇進(昇進)하여 濟州道(濟州道) 共匪掃蕩(共匪掃蕩)에 不撤晝夜(不撤晝夜) 首都위민(守道爲民)의 衷情(忠情)으로 先頭(先頭)에서 指揮(指揮)하다가 不幸(不幸)히도 短期(檀紀) 4281年(四二八一年) 6月18日(六月十八日) 壯烈(壯烈)하게 酸化(散華)하시다. 이에 우리 三十萬(三十萬) 道民(道民)과 軍警援護回(軍警援護會)가 合同(合同)하여 그 公的(功績)을 기리기 위하여 袒褐(短碣)을 세우고 追慕(追慕)의 뜻을 遷推(千秋)에 기리 前(傳)한다. 短期(檀紀) 4285年(四二八五年) 11月(十一月) 7日(七日). 濟州島民(濟州道民) 級(及) 軍警援護回(軍警援護會) 一同(一同).

評價 [ 編輯 ]

4.3 硏究가 박명림 은 박진경의 鎭壓作戰에 對해 다음과 같이 評價하였다. 박진경은 이러한 無差別 逮捕 作戰은 警備隊의 힘을 誇示함으로써 一般 民衆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遊擊隊와 그들을 分離시켰으며 遊擊隊를 더욱 깊은 山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點에서는 成功이었다. 그러나 그의 作戰은 民衆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警備隊에 對한 相對的 好感을 反好感으로 轉換시켰으며 警備隊 內部를 동요시켰고 遊擊隊에게 警備隊도 警察과 마찬가지로 自身들의 敵이라는 認識을 심어주어 더 큰 對立과 葛藤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을 더욱 깊은 山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事態를 오히려 長期化시켰다는 點에서 失敗였다."

그러나 4.3 硏究가 나종삼은 다음과 같이 評價했다. 박진경 大領은 美軍政의 濟州道 作戰 責任者 브라운 大領의 指針에 따라서 作戰을 遂行했다. 作戰 內容은 海岸에서 大略 5Km(一周道路에서는 4Km)까지의 人口 密集地域은 警察이 擔當하고 海岸으로부터 5Km 以上의 山岳地域은 警備隊가 擔當하여 鎭壓作戰을 遂行했다. 警察과 警備隊는 捕虜와 入山 住民은 捕虜審問센터에 引繼하였다. [8] 이들의 審問은 警備隊, 美軍, 警察等으로 構成된 合同 심문조가 하였다. 審問은 남로당 遊擊隊와의 對共容疑點 把握과 남로당 遊擊隊에 對한 情報蒐集이 그 目的이었다. 이는 大遊擊作戰의 基本이다.

박진경 大領은 警備隊 4個大隊(15個 中隊 3,800餘名) [9] 을 指揮하여 5月 30日에서 6月2日까지의 1車作戰과 6月14 日부터 17日까지의 2次 作戰을 實施 하였다. 作戰 結果, 警備隊 作戰의 情報가 漏泄되어 남로당 遊擊隊 主力은 놓쳤으나 1次 作戰時 入山 住民 595名과 2次 作戰時 砲로 53名 等 650 餘名을 合同審問센터에 引繼하였다. [10] 警察이 捕虜審問센터에 引繼한 住民 數字에 關해서는 記錄이 없어 確認이 困難하다.

6月 16日子 美軍 側 記錄에 依하면 捕虜審問센터에는 3,000 餘 名이 引繼되었는데 審問 後 大部分 釋放하고 575名은 4個 審問팀의 審問中에 있었다. [11] 그리고 警備隊 作戰은 11聯隊의 美顧問官 두르스 大尉에 依해 作戰 內容이 司令官에게 報告되었다. 따라서 捕虜에 對한 拷問이나 虐殺 等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左派 人士들은 暗殺犯 들의 法廷 陳述을 擧論하면서 박진경 聯隊長이 6,000 餘名을 逮捕하여 虐殺하였다고 主張하나 이는 根據 없는 主張이다. 이들의 主張은 김일성의 指令을 받고 南派된 間諜 성시백이 運用한 朝鮮中央日報 1948年 6月 12日子 記事(濟州4.3委員會, 濟州4.3事件 資料집 2卷 133쪽)를 引用한 것인데 그 記事에도 警備隊와 警察에 붙잡힌 暴徒들이 6,000餘名이며 이들을 裁判하기 爲해 서울에서 判檢事들이 派遣되어 裁判했다라고 되어있다. 그 記事 內容을 仔細히 보면 約 6,000 名이라는 數字는 4.3事件 以後부터 6月 12日까지 警察과 警備隊에게 逮捕된 暴徒들의 總 數字임을 알 수 있다. 深刻한 歪曲이 아닐 수 없다. 박진경 大領은 5月 6日 濟州島에 赴任했다.

作戰司令官 命令 없이 作戰을 遂行하는 部隊長이 獨斷으로 虐殺 命令을 내릴 수 없고 그런 命令을 내린 事實도 없다. 1995年에 齊民日報 4.3取材班이 作成한 文件(4.3은 말한다 3卷, 419쪽부터 428쪽)에는 박진경 大領 在任 期間 作戰 中 남로당 遊擊隊를 射殺한 前과는 作戰 中 射殺 25名뿐이다. 이中 11名은 6月 3日 警備隊와 警察의 合同作戰의 前科이다.

招待 파월司令官을 歷任하였던 채명신(陸士5期,當時 9聯隊 1大隊 3中隊 小隊長)將軍은 다음과 같이 證言했다. "한쪽에서는 박진경 大領이 良民을 虐殺했다고 하는데 그는 良民을 虐殺한게 아니라 죽음에서 救出하려고 했습니다. 4.3 初期에 警察이 處理를 잘못해서 많은 住民이 入山했습니다. 그런데 朴大領은 暴徒들의 討伐보다는 入山한 住民들의 下山에 作戰의 重點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良民保護作戰은 人道的이면서 戰略的 次元의 行動입니다.(정부 4.3事件 眞相步社報告書. 218쪽) (中略). 그는 住民들을 宣撫工作으로 入山 武裝隊로부터 分離시키는데 注力했습니다. 遊擊戰에서 遊擊隊와 住民은 물과 물고기의 關係 입니다. 이는 毛澤東의 理論입니다. 따라서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수 없으므로 遊擊隊를 殲滅하려면 于先 住民을 遊擊隊와 分離시켜야 합니다. 내가 越南에서 作戰할 때도 베트공과 住民을 分離시키는데 作戰의 主案을 두었습니다." [12]

그리고 陸軍參謀 總長을 歷任한 이세호(陸士2期, 當時9聯隊 1大隊 部隊隊長)將軍은, "박진경 大領은 眞짜 人格者이고 살아계셨다면 參謀總長이나 國防長官까지 하실분이시다. 性品이 獨裁型이 아니다."라고 證言했다 [13] . 또한 合參 本部長을 歷任한 류근창(陸士2期, 當時 제11연대 軍需課長) 將軍은, "박진경 大領은 훌륭한 분이셨다, 良民을 無條件 虐殺할 性品이 아니다. 모두들한테 尊敬받는 人品의 所有者다."라고 證言했다. [14]

박진경 大領은 先輩, 同僚, 部下로부터 尊敬 받는 참軍人이었다.

參考 文獻 [ 編輯 ]

  • 문창송, 『漢拏山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事件의 眞相 (人民遊擊隊 鬪爭報告書를 中心으로) 』 (1995. 8.15., 濟州市; 大林印刷社)
  • 齊民日報 4·3取材班, 『4·3은 말한다』1~5(전예원, 1994~1998)
  • 濟州道·(寺)濟州4·3硏究所, 『濟州4·3遺跡』Ⅰ(各, 2003)
  • 濟州4·3委員會, 『濟州4·3事件 眞相調査報告書』(2003)

各州 [ 編輯 ]

  1. 出生日은 遺族이 除籍謄本을 보고 提供
  2. 陸軍本部, 將校任官順 大將
  3. 創軍參戰勇士들, 『 國軍의 뿌리(50同友會便) 』, 삼우사, 309-311쪽.
  4. 創軍參戰勇士들, 『 國軍의 뿌리(50 同友會便 』. 삼우사, 309-311쪽
  5. 陸軍本部 軍史監室, "陸軍歷史일지, 第1輯" 1948.5.15.
  6. 陸軍本部 軍史監室, "陸軍歷史일지 第1輯" 1948.6.14.
  7. 문창송, ?漢拏山은 알고 있다(제주도 人民遊擊隊 鬪爭報告書?, 1995.8.15. 78-79쪽, 濟州4.3委員會, ?濟州4.3事件 資料집 12卷?, 270-271쪽
  8. 現代日報, 1948年 6月 3日
  9. 문창송, 『漢拏山은 알고 있다.』, 83쪽; 『濟州 4.3事件 資料집 12卷』, 273쪽.
  10. 駐韓美 陸軍司令部 一日 情報報告書, 1948.6.4 및 1948.6.15.
  11. 駐韓美 陸軍司令部 民間人 顧問團(Josep E. Jacobs) 報告書, "濟州島 騷擾事態" 1948.7.2.,
  12. 채명신(2001.4.17. 4.3委員會 專門委員 나종삼 採錄) 證言
  13. 이세호(2001.7.15. 國防軍事硏究所 정석균 採錄) 證言
  14. 유근창(2001.7.27. 國防軍事硏究所 정석균 採錄) 證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