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이름의
김소은
에 關해서는 該當 文書를 參照하십시오.
김소운
(金素雲,
1907年
1月 5日
~
1981年
11月 2日
)은 大韓民國의
是認
이며
隨筆家
,
飜譯
文學家
였다.
[週 1]
本名은
김교중
(金敎重)이고 乙酉 光復 以後 23年이 지난 1968年
김소운
(金素雲)으로 改名하였으며, 號는 삼오당(三誤堂), 疏韻(巢雲)이다.
本館
은
金海
(金海)이고
慶尙南道
釜山
出生이다.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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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族 關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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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
김한림
- 아들:
김인범
- 딸:
김영
- 딸:
김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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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釜山
出身으로 13歲에
日本
에 건너갔다. 日本인 是認
其他하라 하쿠슈
(
日本語
:
北原白秋
) 門下에서 詩를 工夫한 뒤 日本 詩壇에서 活動을 始作했다. 以後 韓國의 民謠와 童謠, 詩를 日本에 飜譯 紹介했고, 隨筆도 活潑히 創作했다.
作品으로는 書簡體 長篇 隨筆로 日本에서도 反響을 일으킨 《목근통신》(1952), 隨筆集 《삼오당雜筆》(1955) 等이 있고, 物質的으로 가난하지만 精神的으로는 幸福한 夫婦 세 雙의 逸話를 紹介한 隨筆 〈가난한 날의 幸福〉이 잘 알려져 있다.
日本 滯留 中
第1共和國
政府를 批判했다는 理由로
李承晩
에 依해 入國이 거부되어
1965年
에야 永久 歸國했다.
1968年
에
김소운
으로 改名한 以後
1980年
에 文壇에서 電擊的으로 隱退했다. 1981年 하세.
2002年
發表된
親日 文學인 42人 名單
과
2005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發刊을 위해 發表한 豫備名單에 包含되었다. 2002年까지 發見된 親日 著作物 數는
1943年
《
每日申報
》에 發表한 〈야마모토 怨讐의 國葬日〉 等 3篇이다.
[1]
金素雲의 親日 嫌疑에 對해서는, 親日 作品 發表 時期가 强壓的인 雰圍氣가 造成된
日帝强占期
末期에 몰려있고 篇數도 적은 點, 平生에 걸친 主要 關心事가 韓國 文學의 飜譯 紹介였고 日本에 韓國의 文化를 알리는 데 一助한 공으로
1980年
銀冠
文化勳章
을 받았다는 點, 普通學校 在學 中 密航으로 逃逸한 김소운에게는 日本이 文學的인 故鄕이었다는 點 等 여러 要素로 인해 遺家族의 不當하다는 抗辯이 있었다.
[2]
2008年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서는 除外되었다.
否認 김한림은
民主化實踐家族運動協議會
의 前身인 謳歌協 創設을 主導했고, 딸
김윤
은
民靑學聯 事件
으로 服役한 農民運動家이다.
[3]
큰딸 김영의 딸은 日本 歌手
사와 도모에
.
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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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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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容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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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照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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