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大韓民國)의 온주밀감(溫州蜜柑) 최초(最初) 재배(栽培)는 20세기(世紀) 초(初)
프랑스
출신(出身)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宣敎師) 에밀 타케(Emile Taquet, 1873~1952) 신부(神父)다.
[1]
1911년(年) 타케 신부(神父)는
일본(日本)
의
아오모리
에서 선교(宣敎)하는 위르뱅 포리(捕吏) 신부(新婦)에게 왕(王)벚나무 묘목(苗木)을 보낸 답례(答禮)로 온주밀감(溫州蜜柑) 묘목(苗木) 14그루를 받아 서귀포시 서홍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韓國殉敎福者聖職修道會)
'면형(面兄)의 집'에 심었다. 2019년(年) 마지막 남은 한 그루가 고사(枯死)하게 되면서 제주(濟州) 최초(最初)의 감귤(柑橘)나무는 역사(歷史)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기사(記事)
. 제주(濟州)에서는 에밀 타케 신부(新婦)가 심(沈)은 때를 기(期)해 제주(濟州) 감귤(柑橘) 100주년(周年) 행사(行事)를 기획(企劃)한 적도 있었지만 윗사람이 바뀌고, 토종귤(土種橘)의 역사(歷史)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근거(根據)로 +α 해서 무산(霧散)되었다.
한편(한便) 타케 신부(神父)의 온주밀감(溫州蜜柑)이 잘 크는 것을 본 일본인(日本人) 미네(峯)가 1913년(年) 온주밀감(溫州蜜柑) 2년생(年生) 묘목(苗木)을 도입(導入), 나중에 제주농원(濟州農園)이 된 서귀읍(西歸邑) 서홍리에 심어 대량(大量) 상업화(商業化)를 시도(試圖)한다.
[2]
또한 일본인(日本人) 미(美)네는 조선인(朝鮮人)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온주밀감(溫州蜜柑)뿐 아니라 워싱톤 네블,
[3]
하밀감(夏蜜柑)(夏蜜柑) 등(等)을 1910년경(年頃) 전파(傳播)하면서 1920년(年)부터 매년(每年) 귤나무(橘나무) 7천(千)~8천(千) 본(本)이
일본(日本)
에서
제주(濟州)
로 유입(流入)되었다고 한다.
중국(中國)
저장성(저장省)
의
원저우
에서 온주밀감(溫州蜜柑)이
일본(日本)
의
규슈
로 건너가 씨가 없는 감귤(柑橘)로 개량(改良)된 품종(品種)도 전파(傳播)되었고
재일교포(在日僑胞)
들이 친척(親戚)에게 보내준 묘목(苗木)에서 조금씩 생산(生産)하기 시작(始作)해 제주(提州)를 대표(代表)하는 산업(産業)으로 성장(成長)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는 일본산(日本産) 귤(橘)이 유통(流通)되었으나 그 이후(以後) 일본산(日本産) 귤(橘)이 수입(輸入)되지 못한 영향(影響)이 컸다. 단(單),
제주도(濟州道)
의 감귤재배(柑橘栽培)가 확산(擴散)되는 계기(契機)는 1964년(年) 2월(月)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이 연두순시(年頭巡視)에서 제주도(濟州島)의 감귤(柑橘)을 중점적(重點的)으로 키우라는 지시(指示)를 내린 것이었다. 이듬해 1965년(年)부터 감귤심기(柑橘心氣) 붐이 일어났다. 박정희(朴正熙) 정부(政府)는
일본(日本)
농림성(農林省)으로부터 감귤(柑橘) 묘목(苗木)을 수입(輸入)해 농가(農家)에 보급(普及)하였다. 과거(過去) 귤나무(橘나무)는 키가 커서 사다리를 타고 귤(橘)을 수확(收穫)해야 했는데, 현대(現代)의 관목(灌木)처럼 키가 작은 귤나무(橘나무)는 바로 이때 일본(日本)에서 도입(導入)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