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
제나라(齊나라)
의
안영(晏嬰)
은 귤(橘)이
회하(淮河)
(
淮
河
)를 건너면
탱자
가 된다고 했는데 이를
사자성어(四字成語)
로 표현(表現)하면 '
남귤북지(南橘北枳)
(
南
橘
北
枳
)'.
[16]
[17]
또
삼국지(三國志)
의 등장인물(登場人物)
육적(肉的)
은 모친(母親)을 위해
원술(怨讐)
의 귤(橘)을 빼돌린
회귤유친
의 일화(逸話)가 유명(有名)하다.
한국(韓國)에서는 귤(橘)을 삼국시대(三國時代) 이전(以前)부터 재배(栽培)해왔으나 한반도(韓半島) 본토(本土)에서 기르기 힘들어, 제주도(濟州島) 정도(程度)를 제외(除外)하면 왕족(王族)이나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탐라지에 따르면 백제 문주왕 2년(年)(476)
탐라국(耽羅國)
에서 지역(地域) 특산물(特産物)로 귤(橘)을 바쳤다고 하며,
고려사(高麗史)
에 고려(高麗)
문종(文宗)
6년(年)(1052)에 탐라국(耽羅國)에서 세금(稅金)으로 받아오던 귤(橘)의 양(量)을 늘린다는 부분(部分)이 있어 이때부터 귤(橘)을 진상(進上)했음을 알 수 있다.
[18]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서도 태조(太祖) 원년(元年)(1392)부터 공물(貢物) 기록(記錄)이 계속(繼續) 나온다. 세종(世宗) 8년(年)(1426)에는 호조(戶曹)의 게시(揭示)로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남해안(南海岸)에 유자(柚子)와 감자를 각(各) 관서(官署)에 심게 했다고 한다. 세조실록(世祖實錄) 2권(卷)에는 '감귤(柑橘)은 종묘(宗廟)에 제사(祭祀)지내고 빈객(賓客)을 접대(接待)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重要)하다'는 기록(記錄)도 있어 당시(當時) 귤(橘)이 그만큼 귀(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귤(橘)을 왕실(王室) 전용(專用)
온실(溫室)
에서도 길렀다는데
세종대왕(世宗大王)
이 총애(寵愛)하는 후궁(後宮)한테 직접(直接) 귤(橘)을 준 이야기,
문종(文宗)
이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들에게 귤(橘)을 내렸는데 학사(學士)들이 귤(橘)보다는 접시에 문종(文宗)이 친필(親筆)로 쓴 시(詩)를 더 탐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매년(每年) '황감제(黃柑製)(黃柑製)'라 하여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에게 감귤(柑橘)을 하사하고 치른 시험(試驗)도 있었다.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책(冊)을 빌려줬다고 고맙다는 편지(便紙)와 같이 귤(橘) 3개(個)를 같이 보내준 양반(兩班)이 있었는데 그 귤(橘)을 받은 양반(兩班)이 "이렇게 귀(貴)한 것을!" 놀라서 무척 고마워했다는 일화(逸話)가 기록(記錄)에 남아있을 정도(程度)로 귤(橘)은 비싸고 쉽게 구(求)해 먹을 음식(飮食)이 아니었다.
해방(解放) 이후(以後) 1970년대(年代)까지도 비슷해서
한때 귤(橘)은 쌀보다 비쌌다.
후술(後述)하듯이 그 무렵에
제주도(濟州道)
사람들은 귤(橘) 나무 한 그루 잘 키우면 애를 대학(大學)까지 공부(工夫) 시킬 수 있다는 의미(意味)에서 귤나무(橘나무)를
대학(大學)나무
라고 하였다.
[19]
그래서
4.19 혁명(革命)
당시(當時)
이기붕
의 부정축재(不正蓄財)를 깔 때 그의 집에서 귤(橘) 한 박스가 나온 것이 언급(言及)되기도 했다.
[20]
2023년(年) 12월(月) 11일(日)
두시(時)의 데이트
에서 한
청취자(聽取者)
가
오렌지
를 고등학교(高等學校) 때 처음 먹어봤다고 얘기하자, 이에 당시(當時) 일일(一日)DJ였던
배철수(裵哲秀)
도 그때의 귤(橘)은 부잣집(富者집)만 먹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1970년대(年代) 이후(以後)에는 워낙 과잉생산(過剩生産) 되는데다 경제발전(經濟發展)으로 사람들의 소득수준(所得水準)이 올라갔고 지구온난화(地球溫暖化)로 인한 기후변화(氣候變化)로 제주도(濟州道) 외(外) 남부지역(南部地域)까지 재배가능지역(栽培可能地域)이 넓어지기까지 해서 제철이 되면 장바구니(場바구니)에 담기 가장 만만한 싸디 싼 과일로 등극(登極).
다국적(多國籍) 기업(企業)
의 힘으로 재배(栽培), 가공(加工)되어 들어오는 오렌지 주스보다 국내산(國內産) 가공품인(加工品人) 제주감귤(祭主柑橘) 주스가 가격(價格)이 1/3 정도(程度) 쌀 정도(程度)니까 말 다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제주도산(濟州島産) 귤(橘) 품종(品種)과 현대(現代) 제주귤(濟州橘) 품종(品種)은 다르다.
[21]
당시(當時) 제주도(濟州島) 및 남해안(南海岸)에서 기르는 귤(橘)은 다 진상품(進上品)으로 바쳐야 했는데,
정약용
의 기록(記錄)에서 여름에 귤(橘)이 녹색(綠色)으로 작게 열리면 나무둥치에 몇 개(個)인지 표시(標示)해 놨다가 귤(橘)이 익으면 그 양(量)만큼 바쳐야 해서, 바람에 떨어지거나 하면 다른 곳에서 사서 바쳐야 하는 등(等) 그 부담(負擔)이 컸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관리(官吏)들의 수탈(收奪)도 있어서 결국(結局) 이에 시달리다 못한 농민(農民)들은 일부러 귤나무(橘나무)를 죽이기도 했다.
[22]
제주도민(濟州島民)들이 좋은 토종귤(土種橘) 품종(品種)을 다 죽이다보니 토종귤(土種橘)의 품질(品質)이 낮아졌고, 개량종(改良種)에게 자연스럽게 밀려난 뒤에는 현대(現代)에도 제주(濟州) 전통귤(傳統橘)은 그 명맥(命脈)을 잇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보기 힘들지만 한방(韓方)에서는 약귤(約橘)이라고 토종귤(土種橘)을 쓰기도 한다. 제주(濟州) 재래귤(在來橘) 품종(品種) 가운데 하나인 동정귤(洞庭橘)(洞庭橘)은
멸종(滅種)
했다고 알려졌었으나
애월읍(涯月邑)
광령리에서 수령(守令)이 200년(年)이 넘는 나무가 한 그루 발견(發見)되었다. 그나마도
제주(濟州) 4.3 사건(事件)
때 불나서 고사(固辭)할 뻔했다고.
또다른 제주도(濟州島)의 토종귤(土種橘)로는 청귤(靑橘)이 있는데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자생(資生)해온 재래종(在來種)으로 추정(推定)한다. 현대(現代)에는 시중(市中)에 나오지 않고 감귤연구소(柑橘硏究所)나 감귤박물관(柑橘博物館)
[23]
에서 보존용(保存用)으로 10그루 내외(內外)만 자생(自生)한다.
한국(韓國)에서 자주 먹는 귤(橘) 품종(品種)은
온주밀감(溫州蜜柑)
[24]
이며
일본(日本)
의
규슈
로 건너가 씨가 없는 감귤(柑橘)로 개량(改良)된 품종(品種)으로
재일교포(在日僑胞)
들이 친척(親戚)에게 보내준 묘목(苗木)에서 조금씩 생산(生産)하기 시작(始作)해 제주(提州)를 대표(代表)하는 산업(産業)으로 성장(成長)한 것이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는 일본산(日本産) 귤(橘)이 유통(流通)되었으나 그 이후(以後) 일본산(日本産) 귤(橘)이 수입(輸入)되지 못한 영향(影響)이 컸다.
사실(事實) 제주도(濟州島)에
온주밀감(溫州蜜柑)
을 도입(導入)한 사람은 20세기(世紀) 초(初)
프랑스
출신(出身)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宣敎師) 에밀 타케(Emile Taquet, 1873~1952) 신부(神父)다.
[25]
1911년(年) 타케 신부(神父)는
일본(日本)
아오모리
에서 선교(宣敎)하는 위르뱅 포리(捕吏) 신부(新婦)에게
왕(王)벚나무
묘목(苗木)을 보낸 답례(答禮)로 온주밀감(溫州蜜柑) 묘목(苗木) 14그루를 받아 서귀포시 서홍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韓國殉敎福者聖職修道會)
'면형(面兄)의 집'에 심었다.
[26]
제주(濟州)에서는 에밀 타케 신부(新婦)가 심(沈)은 때를 기(期)해 제주(濟州) 감귤(柑橘) 100주년(周年) 행사(行事)를 기획(企劃)한 적도 있었지만 윗사람이 바뀌고, 토종귤(土種橘)의 역사(歷史)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근거(根據)로 +α 해서 무산(霧散)되었다.
한편(한便) 타케 신부(神父)의
온주밀감(溫州蜜柑)
이 잘 크는 것을 본 일본인(日本人) 미네(峯)가 1913년(年) 온주밀감(溫州蜜柑) 2년생(年生) 묘목(苗木)을 도입(導入), 나중에 제주농원(濟州農園)이 된 서귀읍(西歸邑) 서홍리에 심어 대량(大量) 상업화(商業化)를 시도(試圖)한다.
[27]
또한 일본인(日本人) 미(美)네는 조선인(朝鮮人)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온주밀감(溫州蜜柑)뿐 아니라 워싱톤 네블,
[28]
하밀감(夏蜜柑)(夏蜜柑) 등(等)을 1910년경(年頃) 전파(傳播)하면서 1920년(年)부터 매년(每年) 귤나무(橘나무) 7천(千)~8천(千) 본(本)이 일본(日本)에서 제주(濟州)로 유입(流入)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種類)의 감귤(柑橘) 묘목(苗木)이 제주(濟州)에 도입(導入)되었지만 농가(農家)에서 재배(栽培)가 활성화(活性化)되지는 않았고 정원수(庭園樹)로 몇 그루 정도(程度) 심어진 것에 그쳤다고 한다. 이에 일본인(日本人) 중심(中心)의 농민회(農民會)가 감귤(柑橘) 묘목(苗木)을 나눠주며 생산량(生産量)을 늘리려 했지만 이미 일본(日本)에서 생산(生産)된 감귤(柑橘)이 자유롭게 들어왔기 때문에 제주감귤(祭主柑橘)이 비싼 값을 받을 수 없어 판매(販賣) 판로(販路)가 뚫리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年) 광복(光復) 이후(以後)
우장춘
박사(博士)가 감귤(柑橘)의 품종(品種) 개량(改良)을 시도(試圖)하였지만
6.25 전쟁(戰爭)
으로 혼란(混亂)한 와중(渦中)에 무산(霧散)되었고, 제주(濟州)에서는 1948년(年)
제주(濟州) 4.3 사건(事件)
이 터지면서 농민(農民)들이 생활(生活)터전을 잃어 감귤재배(柑橘栽培)에 관심(關心)을 가질 수 없었고 1955년(年)에야 본격적(本格的)으로
일본(日本)
에서 감귤묘목(柑橘苗木)이 도입(導入)되었다.
제주도(濟州道)
의 감귤재배(柑橘栽培)가 확산(擴散)되는 계기(契機)는 1964년(年) 2월(月)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이 연두순시(年頭巡視)에서 제주도(濟州島)의 감귤(柑橘)을 중점적(重點的)으로 키우라는 지시(指示)를 내린 것이었다. 이듬해 1965년(年)부터 감귤심기(柑橘心氣) 붐이 일어났다. 박정희(朴正熙) 정부(政府)는
일본(日本)
농림성(農林省)으로부터 감귤(柑橘) 묘목(苗木)을 수입(輸入)해 농가(農家)에 보급(普及)하였다. 과거(過去) 귤나무(橘나무)는 키가 커서 사다리를 타고 귤(橘)을 수확(收穫)해야 했는데, 현대(現代)의 관목(灌木)처럼 키가 작은 귤나무(橘나무)는 바로 이때 일본(日本)에서 도입(導入)된 것이다.
1975년(年) 제주도(濟州島) 감귤재배면적(柑橘栽培面積)이 1만(萬) ha에 달(達)했고 1990년대(年代) 중반(中盤)에는 2만(萬) 5000여(餘) ha에 감귤(柑橘) 생산량(生産量)은 60만(萬) 톤에 이르렀다.
[29]
이후(以後) 생산량(生産量)은 60만(萬) 톤 내외(內外)를 계속(繼續) 유지(維持)하고 있다.
1980년대(年代)에는 일본(日本)에서 '스다치'라는 품종(品種)이 제주도(濟州島)로 들어왔는데 제주도(濟州島)의 옛 이름
영주(榮州)
를 따서
영귤(英橘)
이라고 불렀다. 영귤(英橘)은 크기는 탁구공(卓球공)만 하고 겉껍질이 초록색(草綠色)이라서 청귤(靑橘), 풋귤(橘)과 헷갈릴 수 있지만 엄연히(儼然히) 다른 감귤(柑橘) 품종(品種)이다.
1998년(年)부터
UPOV
가 발효(醱酵)되어
지적재산권(知的財産權)
이 강화(强化)된 바람에 일본(日本)으로부터의 신품종(新品種) 도입(導入)이 어려워지며 로열티를 물어야 하기에 독자적(獨自的) 품종개량(品種改良)이 중요(重要)해지고 있다. 또한 농산물(農産物) 시장(市場) 개방(開放)으로 수입(輸入) 오렌지와의 경쟁(競爭)도 불가피(不可避)해졌다.
2008년(年)
이명박(李明博) 정부(政府)
가 출범(出帆)하면서
북한(北韓)
에 감귤(柑橘)보내기 사업(事業)을 하기도 했으나 2010년(年) 북한(北韓)이
천안함 피격(被擊) 사건(事件)
을 일으킨 이후(以後)로 중단(中斷)되었다.
2012년(年)
한미(韓美) FTA
가 발효(發效)되면서 미국산(美國産) 만다린의 관세율(關稅率)이 2012년(年) 144%에서 점점(漸漸) 낮아져 2021년(年) 기준(基準) 48%까지 내려갔고 2026년(年) 완전(完全) 철폐(撤廢) 예정(豫定)이라 제주도(濟州島)에서 대책(對策) 마련이 시급(時急)해졌다.
2018 남북정상회담(南北頂上會談) 평양(平壤)
때 북한(北韓)이 선물(膳物)로 보내줬던
송이버섯(松耳버섯)
2톤의 답례(答禮)로 청와대(靑瓦臺)에서 귤(橘) 200톤을 공군(空軍) 수송기(輸送機)를 이용(利用)해 보냈다.
#
참고(參考)로, 북한(北韓)에서 귤(橘)은 기후(氣候)때문에 재배(栽培)가 불가능(不可能)하다. 그래서 중국(中國)에서 귤(橘)을 수입(輸入)해 먹는데, 중국산(中國産) 귤(橘)은 북한(北韓) 기준(基準)으로 가격대(價格帶)가 비싸기 때문에 아무나 못먹고,
[30]
평생(平生) 못 먹어보는 경우(境遇)도 많다. 그래서 선물용(膳物用)으로 애용(愛用)된다, 이게 남으면 측근(側近)들에게 선물(膳物) 형식(形式)으로 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