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翎腸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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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翎腸 戰鬪
韓國 戰爭 의 一部
날짜 1950年 7月 17日 - 7月 25日
場所
慶尙北道 尙州市 花翎腸 一帶
結果

大韓民國 國軍 의 勝利

  • 洛東江 防禦線 形成
  • 北韓軍 의 戰略 祈禱 沮止
  • 國軍과 美8軍의 再編成 및 電線 調整 時間 獲得
交戰國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兵力
國軍 第 17聯隊 北韓軍 第 15師團
被害 規模
40餘名 600餘名
花翎腸 은 現 行政區域으로 慶北 상주시 화서면의 面所在地에 있는 山峯里의 마을이름이다. 花翎腸은 太白山脈에서 西쪽으로 뻗은 小白山脈 中間地帶이며 海拔 1000m의 山岳地帶로 慶北과 忠北의 境界地域에 位置해 있다. [1]

花翎腸戰鬪(Battle of Sangju Hwaryeongjang) 韓國 戰爭 初期인 1950年 7月 17日 부터 7月 25日 까지 國軍이 小白山脈 一帶에서 遲延戰을 實施하는 過程에서 있었던 戰鬪이다. 北韓軍 第 15師團이 花翎腸-尙州 軸線으로 攻擊을 한다는 諜報를 入手한 陸軍은 急히 國軍 第 17獨立連帶에게 防禦 任務를 附與하였고 이에 제 17聯隊는 花翎腸 一帶에서 埋伏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溪谷으로 南下中인 北韓軍 第 15師團을 奇襲 攻擊하여 敵 主力 2個 連帶를 擊滅하였다.

花翎腸 [ 編輯 ]

花翎腸 은 現 行政區域으로 慶尙北道 尙州市 화서면 신봉리의 마을이름이며, 海拔 1,000m의 山岳地帶로 慶北과 忠北의 境界地域(喪主와 報恩의 中間)에 位置해 있다.

道路網은 報恩-花翎腸-喪主를 잇는 25番 道路와 槐山-갈令-花翎腸-喪主를 잇는 977番 道路가 發達되어 있었다. 花翎腸 周邊에는 俗離山, 구병산, 871高地, 鳳凰山, 형제봉 等 500m~1,000m 안팎의 險峻한 山들이 散在해 있었다.

作戰的 地形 評價 [ 編輯 ]

花翎腸은 韓國 戰爭의 版圖를 바꿀 수 있는 重要한 地形이었으나 國軍 第 1軍團은 槐山-尙州 道路의 重要性을 크게 認識하지 못하고 있었다. 萬若 北韓 15師團이 最初 計劃대로 起動을 實施하여 花翎腸-喪主를 突破하여 金泉을 早期에 占領한다면 大田地域에서 血鬪를 벌이고 있는 美 第 24師團 主力의 退路가 遮斷되고 各種 物資의 補給線이 遮斷될 뿐 아니라 美軍의 前方 增員에 많은 蹉跌을 招來하게 된다. 또한 UN軍의 戰線은 東西로 分離되어 此後 作戰에 커다란 어려움에 直面하게 되었을 것이다.

反面 花翎場에서의 勝利는 第 15師團으로 하여금 作戰 速度를 한段階 늦추게 하여 喪主-金泉-大邱를 잇는 軸線을 北韓軍이 早期 占領하는 것을 拒否하였고 나아가 美8軍 司令官이 計劃 中인 洛東江防禦線을 形成할 貴重한 時間的인 餘裕를 提供할 수 있었다.

背景 [ 編輯 ]

1950年 6月 25日 不法南侵韓 北韓軍 은 3日만인 1950年 6月 28日 서울을 占領하고 破竹之勢로 南進한다. 韓國軍과 美國軍은‘평택-충주-울진’을 잇는 防禦線을 構築하여 北韓軍의 進擊을 沮止하려 했지만 失敗하고 美軍은 錦江 南쪽 地域으로, 韓國軍은 小白山脈 의 ' 梨花嶺 - 鳥嶺 - 竹嶺 ’地域으로 後退한다. 이에 北韓軍은 包圍 殲滅 作戰을 實行하기 위해 人民軍 15師團을 尙州地域을 通過하게 指示하였다. 以後 陸軍本部 는 이를 對應하기 위해 ‘ 聞慶市 - 檻倉 - 尙州 ’로 이어지는 地域에 防禦線을 構築하려 했으며, 第1軍團 에 所屬되어 있던 國軍 第17聯隊가 第2軍團 으로 倍速 轉換되어, 檻倉으로 移動하였다. [2]

北韓軍의 計劃 [ 編輯 ]

7月 7日 以後 北韓軍의 計劃은 機動力을 내세워 UN軍의 小白山脈 防禦線을 突破 및 壞滅시키는 것이 計劃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兵力을 迂廻시켜 UN軍을 包圍 殲滅시킬 必要가 있었고 이를 遂行하기 위해 喪主를 貫通하여 大田에서 戰鬪 中인 美軍 24師團을 壞滅시켜야 했다. 이렇게 된다면 人民軍은 UN君이 洛東江 防禦線을 形成하기도 前에 UN軍의 戰鬪力을 喪失시켜 大韓民國을 赤化統一 시킬 수가 있게 된다.

陸軍本部의 對應 및 措置 [ 編輯 ]

이에 國軍은 尙州市 花翎腸 一帶가 人民軍에 넘어 간다면, 國軍 6師團과 美軍 主力의 生存性에 問題가 생길 것이라고 判斷하였다. 이에 陸軍本部는 美24連帶를 投入하기로 하였으나 24聯隊는 敵의 砲火를 못이겨 後退한 狀況이었다. 따라서 陸軍本部는 1軍團에 配屬된 17連帶를 2軍團에 配屬시켜 2軍團의 不足한 兵力 數를 補充하게 하였고 尙州 地域의 防衛를 命令한다. 또한 1軍團에 配屬된 首都師團과 野戰砲兵 1個中隊를 2軍團에 베속시켜 2軍團의 戰鬪力을 높혔다.

展開 [ 編輯 ]

上달리 戰鬪 狀況도이다.(7월17일) [3]

상곡리 戰鬪 (上달리 戰鬪) [ 編輯 ]

首都師團에 配屬되어 있던 國軍 第 17聯隊는 第2軍團 地域에 敵의 壓力이 加重됨에 따라 7月 16日 24:00時附로 第2軍團에 配屬되어 17日 06:00時까지 檻倉에 到着해야 했다. 負傷을 當해 後送된 백인엽(白仁燁) 大領을 代身해 部隊를 이끌고 檻倉으로 向하던 國軍 第17聯隊 副聯隊長 김희준(金熙濬) 中領은 報恩에서 整備 中인 第 1大隊(大隊長 少領 이관수 陸士3期, 大領 豫編)를 檻倉으로 먼저 출발시키고, 淸州에서 撤收中에 있는 第2大隊(大隊長 少領 송호림)와 第 3大隊(大隊長 少領 오익경)은 集結되는 대로 卽時 後續하도록 措置하였다.

車輛을 利用해 喪主로 가던 第1大隊는 花翎腸을 지날 무렵 엄봉림이라는 住民으로부터 적에 關한 申告를 받았다. 移動 中 北韓軍의 移動狀況을 確認한 第17聯隊 1大隊長 이관수 少領은 部隊를 花翎初等學校에 집결시키고 상곡리로 偵察을 나갔다. 11:00景 大隊長 一行은 977番 道路上에서 自轉車를 타고 北上하는 北韓軍 傳令 1名을 生捕하여 심문한 結果 그의 所屬은 北韓軍 第 15師團 第 48聯隊(聯隊長 臺座 김치규)이고, 連帶의 任務는 喪主를 占領하는 것이며, 連帶의 主力部隊가 이날 午後에 先發隊를 後續하여 尙州로 進出하며, 금곡리 一帶에서 休息할 에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4]

大隊長의 命令에 따라 各 中隊는 14:00景에 陣地構築 및 僞裝 等 戰鬪準備를 完了하였다. 北韓軍 第 15師團 第 48聯隊는 徒步部隊와 더불어 40餘 臺의 牛馬車에 各種 砲와 彈藥을 실고 南下하여 상곡리 一帶에서 休息을 取하였다. 第17聯隊는 상곡리(上달.금곡 等 6個 自然部落을 合한 行政洞 이름) 一帶에서 大隊單位 埋伏作戰으로 北韓軍 第15師團 第 48聯隊에 殲滅的 打擊을 加하였다. 17-18日 兩日間의 熾烈하게 展開된 戰鬪에서 國軍은 北韓軍 250餘名을 射殺하고 30餘名을 生捕하였으며, 迫擊砲 20門, 45밀리 對戰車砲 7門, 小銃 1,200餘 情 그리고 多量의 通信裝備와 軍需品을 鹵獲하는 戰果를 올렸다. [5]

동관리 戰鬪 狀況도이다.(7월21일) [6]

동관리 戰鬪 [ 編輯 ]

7月 18日 第 17聯隊의 偵察 命令에 依據하여 聯隊 情報主任 유창훈(陸士 5期, 所長 豫編) 大尉가 引率하는 搜索隊가 갈令을 搜索 偵察하는 過程에서 12:30分頃 自轉車를 타고 갈令을 넘어오는 敵兵 2名을 生捕하였다. 이들은 北韓軍 第 15師團長 박성철 小將이 第 48聯隊長 김치구 中佐에게 보내는 傳令으로서 2通의 文書를 携帶하고 있었다. 1統은 北韓軍 第 15師團長이 제 48聯隊長에게 中間報告를 督促하는 內容이었고, 다른 1統은 作戰命令書로써 後續하는 第 45聯隊(聯隊長 臺座 이철룡)와 함께 金泉方向으로 進出할 準備를 갖추라는 內容이었다. 이 鹵獲文書를 통해 北韓軍이 그들의 第 48聯隊가 擊滅된 事實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것과 제 45聯隊도 곧 이곳을 通過할 것임을 알게 된 제 17聯隊長은 後續하게 될 제 45連帶마저 捕捉 殲滅하기로 決心하였다. 豫備人 2大隊(大隊長 少領 송호림)를 鳳凰山 北쪽으로 진출시켜 後續하는 敵을 埋伏 攻擊하도록 하고, 第 1大隊는 상곡리의 原位置를 確保토록 하여 殘敵 蠢動에 對備하였으며, 第 3大隊는 連帶의 豫備로서 花翎張에 集結하도록 하였다. 그곳은 바로 아래에 道路, 맞은 便에는 740高地, 468高地 等 높은 山이 있어 急한 傾斜로 인해 地域에 들어오는 敵은 絶對 도망칠 수 없는 國軍에겐 最上의 埋伏地域이었다.

第 2大隊 兵力은 花翎場에서 鳳凰山 東側稜線을 넘어 동관리로 進出하여 20:00頃부터 左路부터 제 7中隊, 第 5中隊, 第 6中隊 巡으로 配置하였다. 第 7中隊의 1個 小隊를 746高地 와지선에 配置하고 重火器 中臺의 機關銃 小隊는 中隊 間의 間隔을 메無挑錄 하였다. 81밀리 迫擊砲는 갈令 쪽을 射擊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大隊觀測所는 大隊 前 地域을 내려다 볼 수 있는 鳳凰山 5部 稜線에 設置하였다.

7月 19日 午後, 第2大隊는 奇襲攻擊으로 敵 普及 牛馬車 10餘臺를 擊破하였다. 7月 21日 05:30景 갈令方向에서 第2大隊長 송호림 少領은 7中隊長으로부터 敵이 나타났다는 無電을 받고 射擊命令을 함에 따라 새벽녘 鳳凰山에서 交戰이 일어났다. 대대는 北쪽 갈令 方向에는 81밀리 迫擊砲로 射擊하고 中隊 間에는 重機關銃으로 交叉 射擊을 하며 道路 건너의 開豁地와 山에는 中臺의 60밀리 迫擊砲로 制壓할 수 있도록 하였다. 08:00景 977番 道路 胃와 논바닥에는 屍體와 裝備가 널려 있었다. 第 2大隊長은 自身은 大隊觀測所에서 빨간 手記로 部隊를 指揮하였고, 第 6中隊로 하여금 殘賊掃蕩을 하도록 指示하였다. 第 2大隊가 7月 21日 14:00景 掃蕩作戰을 끝낸 結果, 敵 射殺 356名, 砲로 26名, 迫擊砲 16門, 反轉車包 2門, 機關銃 53梃, 小銃 186梃, 無電機 1代, 電話機 1臺 等의 戰果를 올렸다. 反面 2大隊는 戰死 4名, 負傷 30名의 被害를 입었다.

以後 北韓軍 第15師團은 强力한 砲兵 射擊과 함께 逆襲을 敢行하여 왔지만 제 17聯隊는 이날 尙州에서 花翎張으로 北上한 美 第25師團 第24聯隊 第2大隊와 함께 이를 훌륭히 防禦해 냈다.

北韓軍의 장자동 一帶 攻擊 [ 編輯 ]

15師團 隸下 2個 聯隊의 戰鬪力이 瓦解된 北韓軍은 977番 道路 左右側人 장자동과 동관리를 連結하는 線에 兵力을 再配置하고 花翎腸 一帶에 對해 多量의 砲兵 攻擊을 實施하였다. 國軍은 花翎腸을 통한 敵의 喪主占領 氣道를 事前에 粉碎하기는 했으나, 이미 大戰이 陷落됨에 따라 戰線을 再調整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國軍 第 17連帶를 大邱로 이동시키고, 報恩에 있던 國軍 第 1師團을 花翎腸 地域으로 投入하여 北韓軍과 對峙하게 하였다. 國軍 第 1師團은 7月 23日부터 7月 25日까지 갈令과 장자동 一帶에서 激戰을 벌이며 北韓軍의 進出을 沮止하였다.

意義 및 評價 [ 編輯 ]

花翎腸 戰鬪의 結果와 意義 [ 編輯 ]

北韓軍의 戰略 祈禱 沮止 [ 編輯 ]

北韓軍은 我軍의 主力을 大田과 小白山脈 줄기의 東南部에서 各個 包圍 消滅하고 그 餘勢로 一擧에 大邱 占領 및 洛東江線으로 進出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洛東江을 渡河하여 UN君 擊滅에 유리한 條件을 形成하려고 했다.

이때 國軍은 北韓軍을 沮止 擊滅함으로써 北韓軍의 計劃을 흔들어 놓았다. 花翎場에서 北韓軍 15師團을 擊滅하지 못했더라면 UN君은 東西로 分離되어 此後 作戰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金泉-大邱 軸線을 早期에 確保하여 UN軍의 洛東江防禦線 形成을 妨害하려는 北韓軍의 戰略氣道를 瓦解할 수 있었다.

國軍과 美8軍의 再編成 및 調整 時間 獲得 [ 編輯 ]

花翎腸 戰鬪의 勝利로 約 1週日間의 貴重한 時間을 獲得함으로써 UN軍의 戰線 調整에 決定的인 寄與를 하였다. UN君은 大田 戰鬪에서 美 第 24師團이 敗北한 以後 洛東江 防禦線을 早期에 準備하기 위해 戰線을 調整하고 國軍과 美 8軍의 再編成을 實施하였다. 이 當時 國軍은 2個 軍團, 5個 師團으로 再編成되었고 檻倉-醴泉-安東 北方-盈德을 連하는 線에서 洛東江線을 固守하기로 決定하였다. 美 8軍 亦是 第 24師團은 義城, 軍威地域에서 再編成하게 하였고 第 25師團을 尙州地域에 配置하여 國軍을 增員하도록 措置하였다.

洛東江 防禦線 形成에 寄與 [ 編輯 ]

花翎腸 戰鬪의 勝利는 곧바로 洛東江 防禦線을 위한 貴重한 時間을 確保하는데 큰 寄與를 하였다. 當時 釜山橋頭堡 確保는 國家의 運命을 左右하는 重要한 問題였기 때문에 UN君은 後退를 繼續하면서 美 本土로부터 增援軍 展開를 위한 時間과 洛東江 防禦線 構築을 위한 時間을 確保하기 위해 加用한 모든 努力을 傾注하였다. 美 8軍 司令官 워커 將軍은 UN君이 兵力 增員을 위해 苦心하였고 UN君 司令官 맥아더 元首가 仁川 上陸 作戰 에 編成 豫定했던 美 第 1해병사단과 第 2師團을 卽刻 洛東江 戰鬪에 投入하기로 決定할 程度로 緊迫한 狀況이었다.

勝利의 要因 [ 編輯 ]

持續的인 情報 蒐集 및 活用 [ 編輯 ]

花翎腸 戰鬪는 情報의 原則을 잘 適用한 成功的인 前例이다. 國軍은 敵의 實體와 作戰地域 情報 뿐만 아니라 민·관의 다양한 情報環境을 利用하였다. 第 17聯隊 1大隊長은 上級部隊의 諜報를 入手하고 搜索埋伏을 活用해 移動中인 赤軍 傳令을 捕獲하여 貴重한 敵 部隊의 移動計劃을 獲得하였다. 도한 地域 住民들에게 도움을 要請하고 함께 現地 偵察을 實施하였다. 이처럼 緊迫한 狀況 속에서도 蒐集된 諜報를 土臺로 狀況을 實時間으로 傳播함과 同時에 埋伏陣地를 準備하여 成功的인 奇襲攻擊을 達成할 수 있었다.

地形을 利用한 奇襲攻擊 [ 編輯 ]

第 17聯隊長은 敵에게 獲得한 諜報를 가지고 埋伏을 準備하고 北韓軍에게 奇襲攻擊을 實施하여 敵 連帶 兵力을 2次例에 걸쳐 殲滅하였다. 絶對 兵力에서는 我軍이 不利했지만 完全 祈禱庇匿을 維持하고 敵의 主力部隊가 警戒를 늦출 때까지 기다린 後에 奇襲 攻擊을 實施하였고, 이로 인해 我軍의 被害는 最少化되었다.

徹底한 指揮統制 [ 編輯 ]

第 17聯隊 1大隊長은 埋伏陣地를 周到綿密하게 準備하고 祈禱庇匿과 함께 徹底한 射擊軍紀를 維持함으로써 敵 48聯隊의 主力部隊를 適時에 殲滅할 수 있었다. 特히 奇襲을 위해 3時間 넘게 기다리는 等 徹底한 射擊 統制를 實施하였기에 我軍의 被害를 最少化하면서 最大의 戰果를 올렸다. 2大隊長 亦是 自身의 同意 없이 射擊을 한 中隊長들을 問責하며 嚴格한 射擊 軍紀를 强調하였다. 이로 인해 敵의 움직임을 追跡하면서 敵을 埋伏 地點 앞까지 誘引시켜 成功的으로 敵을 殲滅한다.

各州 [ 編輯 ]

  1. 大韓民國 陸軍協會. 《우리가 겪은 6.25戰爭 2》.  
  2. 두산百科 <花翎腸 戰鬪>
  3. 大韓民國陸軍協會. 《우리가 겪은 6.25戰爭 2》.  
  4.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6.25戰爭史: 錦江-小白山脈選 遲延作戰》 4板. 256~257쪽.  
  5. 大韓民國陸軍協會. 《우리가 겪은 6.25戰爭2》.  
  6. 大韓民國陸軍協會. 《우리가 겪은 6.25戰爭 2》.  

參考 文獻 [ 編輯 ]

  • 花翎腸 戰鬪의 軍事的 再照明과 意義(軍史 : 第73號, 2009, 장삼열, p101-140)
  • 우리가 겪은 6.25戰爭2(大韓民國陸軍協會, p6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