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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渡河 作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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甕津半島 戰鬪
韓國 戰爭 의 一部
날짜 1950年 6月 25日 ~ 6月 30日
場所
結果 朝鮮人民軍 의 勝利, 大韓民國 國軍 撤收
交戰國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指揮官
대한민국 白善燁 第1師團長 大領
대한민국 최경록 第11聯隊長 大領
대한민국 고한조 第1大隊長 大尉
대한민국 정영홍 第2大隊長 少領
대한민국 김재명 第3大隊長 少領
대한민국 김점곤 第12聯隊長 大領
대한민국 신현홍 第1大隊長 少領
대한민국 한순화 第2大隊長 少領
대한민국 이무중 第3大隊長 少領
대한민국 김익열 第13聯隊長 大領
대한민국 金眞僞 第1大隊長 少領
대한민국 尹天台 第2大隊長 少領
대한민국 유재성 第3大隊長 少領
不明

行主導하 作戰 韓國 戰爭 初期 退路가 막힌 國軍 第1師團이 金浦 半島 행주 地域에서 漢江 以南으로 敢行한 南珍 渡河 作戰이다.

背景 [ 編輯 ]

當時 開城, 문산 戰鬪 에서 敗하고 봉일천 戰鬪 에서 뜻밖으로 反擊作戰을 遂行한 第1師團 戰術指揮所는 主抵抗線의 回復도 實現될 수 있을 것으로 樂觀하고 있던 中 6月 28日 正午 서울 이 北韓軍의 手中에 들어갔다는 不確實한 諜報가 入手되었고, 14:00頃에는 녹번리 에 北韓軍 電車가 나타나 道路를 遮斷하고 있다는 事實이 確認되었다.

第1師團長 白善燁 大領은 前날 陸軍本部 作戰地圖班長이 漢江渡河 撤收를 勸告한 事實과 서울 의 戰況을 想起하고 漢江 을 渡河할 수밖에 다른 方法이 없음을 直視하여 행주 및 이散脯 나루터를 都下地點으로 選定하고 撤收命令을 下達하였다.

戰鬪 過程 [ 編輯 ]

6月 27日 第15聯隊의 撤收에 따라 社團은 금촌 北쪽의 主陣地 回復을 위한 反擊命令을 下達하였으나 밤 사이에 迂廻浸透韓 北韓軍의 良習으로 우일선 第13聯隊가 殆半의 主陣地를 喪失하여 千名과 더불어 동거리 南쪽에서 沮止陣地를 編成케 되었다.

한便 第2線에 配置된 第11聯隊가 밤사이에 난데없이 主抵抗線 部隊가 되어 이날 05:30에는 座一線 第1大隊가 北韓軍의 急襲을 맞게 되었다.

이리하여 해大隊는 1番道路上으로 集中하는 大隊規模의 北韓軍을 進展에서 沮止코자 前 火力을 집중시키는 同時에 砲兵火力까지 支援받아 이들의 衝勢를 꺾었다.

그러나 날이 밝자 또 한 무리의 追跡이 西側을 威脅하였다. 聯隊長 최경록 大領은 代代로부터 緊急報告를 받자 금촌 北쪽에서 攻擊準備를 갖춘 김재명 少領이 이끄는 第3代대로 하여금 豫定된 攻擊開始時間보다 40分이 빠른 07:20에 第1大隊 西側으로 機動케 하여 北韓軍을 側方으로부터 構築토록하는 한便 08:10에는 봉일천 에 配置된 정영홍 少領이 이끄는 第2大隊를 등원리方向으로 攻擊케 하였다.

이리하여 連帶의 各 除隊가 一齊히 前方에 나서게 되자 師團長은 해連帶와 第13聯隊와의 벌어지게 될 間隔을 保全하기 위하여 박희동 少領이 이끄는 第20聯隊 3大隊를 第11聯隊의 東쪽에서, 그리고 서울特別連帶의 混成兵力을 다시 그 東側에서 攻擊토록 하였다.

이리 하여 이날 11:15에는 이들 除隊가 內火山-79高地-두分洞, 그리고 國道 東側의 둔전동을 連하는 線까지 進出하였다. 그런데 이날 正午무렵에 서울 陷落 消息을 傳해들은 師團長은 이의 對策을 講究키 위하여 隸下 主要指揮官을 師團 指揮所에 緊急召集하였는데 이 때에 入手된 諜報는 北韓軍이 서울 市內에 侵入하고, 이미 한강교가 爆破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諜報를 뒷받침하듯이 師團의 患者後送車輛이 서울市內에 들어가다가 北韓軍 電車가 녹번리 道路를 遮斷하고 있는 것을 보고 師團으로 되돌아왔고, 또한 搜索에 彈藥受領車 갔던 補給車輛이 途中에 射擊을 받고 돌아오는 等으로 서울에 이르는 後方道路가 遮斷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따라서 孤立된 狀況 下에서 如何히 行動하느냐가 焦眉의 問題로 擡頭되었는데 여기에서 師團長이 내린 決心은 6月 30日 08:00까지 全 部隊를 始興 으로 撤收集結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師團長 白善燁 大領은 渡河場의 選定에 對하여 選任聯隊長인 第11聯隊長 최경록 大領과 제15연대장 최영희 大領에게 意見을 물었는데 이에 對하여 최경록 大領은 이散脯를 최영희 大領은 행주나루터를 各各 建議하게 되었다.

이렇듯 2個 渡河場을 報告받은 師團長은 師團의 主力을 同時에 撤收시키려면 最小限 2個 도하場所가 必要할 것으로 보고 이들 양 聯隊長에게 細部的인 都下支店의 選定과 渡河場의 事前準備를 위하여 現地를 實地偵察할 것을 指示하고, 師團長 自身도 이날 午後에 이散脯와 행주等地를 돌아보았는데 행주의 도하準備를 맡은 최영희 大領은 그 附近의 倉庫를 헐어서 그 材木으로 船着場을 만들고 배 2隻을 묶어서 車輛을 運搬할 수 있게끔 準備하였다.

또한 오재기 中尉로 하여금 金浦쪽에 對한 偵察을 시켰던 바 이미 大規模의 北韓軍이 飛行場을 占領한 事實을 알게 되어 渡河場 附近에 集結된 部隊 中 兵力 1個 小隊를 뽑아 兩大眼科 車安邊에 對한 警戒에 臨하도록 雅語 措置하였다.

한便 앞서 會議에서 撤收命令이 내려지자 各部隊別로 빠르게 撤收한 部隊들도 있었으나 大部分은 이날 15:30에서 16:00사이에 撤收하게 되었다. 그러다 攻擊中인 最前線部隊까지 命令이 잘 傳達 되지 않는 곳도 있었다.

卽 서울特別聯隊長 유해준 中領은 前方에 나갔다가 作戰會議에 參席치 못한 關係로 撤收에 關한 事情을 모르고 있었으며 또한 第20聯隊 3大隊長 박희동 少領은 攻擊途中에 隣接 部隊가 없어진 것을 알고 뒤늦게 撤收하여야만 하였다.

特히 이들 第5師團에서 增員된 部隊들은 해地域의 그 地域의 軍事地圖를 普及받지 못한 채 前方에 投入된 까닭으로 撤收時 兵力收拾에 어려운 고비를 여러 番 넘겨야만 하였다.

한便 第13聯隊長 김익열 大領은 師團의 作戰會議가 끝난 뒤 高陽 南쪽 河川 堤防에서 聯隊 自體의 指揮官會議를 열고 撤收問題를 論議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제1대대장 金眞僞 少領은 最後의 一角까지 싸우다가 玉碎하자고 提議한데 反하여 第2大隊長 윤천봉 少領과 제3대대장 유재성 少領은 三角山 에 들어가서 遊擊戰을 展開하여 友軍이 反擊하여 올 때까지 抗戰하자고 하였다.

또한 作戰主任 최대명 少領은 『四面楚歌인데 別수 있느냐, 차라리 部下들을 各個 行動케 하고 우리는 自決을 하자』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自決問題에 對하여서는 모두가 反對하였고 이때 美軍 爆擊機가 문산 을 爆擊하는 것을 보고 『美軍이 參戰한 以上 우리가 躊躇할 것이 없다. 漢江을 건너서 싸우자.』고 聯隊長 김익열 大領이 結論을 내렸다.

于先 連帶 憲兵隊長 박충치 少領으로 하여금 憲兵을 指揮하여 행주에서 連帶의 도하準備를 하도록 措置하고 部隊의 철수는 第2, 1, 3大隊 順으로 決定하였으며 第3大隊는 聯隊本部 兵力까지 統合 指揮하여 主力部隊의 撤收를 掩護한 다음에 撤收하라고 指示하였다.

이리하여 各 大隊는 撤收하기 始作하고, 聯隊長 自身도 作戰主任 최대명 少領을 帶同하여 連帶의 無線指揮網인 3/4톤 通信車 1臺를 뒤따르게 하여 행주에 내려와 渡河場을 確認한 다음 無電機로써 撤收部隊를 陵谷-행주方向으로 誘導하였으나 交信狀態가 좋지않아 행주에서 다시 봉일천으로 向하였다.

그러나 陵谷 에 올라왔을 때에는 이미 봉일천-陵屬間의 312番道路가 撤收車輛과 兵力等으로 길이 막혔으므로 陵谷에서 내려오는 2個大隊와 連帶直轄隊를 행주로 誘導하다가 이들과 함께 이날 밤 小型배 5隻을 割當받아 渡河하게 되었다.

한便, 第11聯隊는 師團의 作戰會議가 끝나는 卽時 攻擊中인 前方大隊에게 撤收命令을 下達하는 等으로 撤收準備를 서두르고 있었는데, 이날 15:30이 되어 突然 連帶의 後方으로부터 北韓軍의 迫擊砲射擊을 받게 되었다.

北韓軍 騎馬隊가 連帶 東側房에 있는 銀골로부터 連帶後方地域을 奇襲하는 한便 그들의 一部 步兵部隊가 撤收時의 混亂을 틈타 이날 아침까지 제2대대가 確保하고 있던 봉일천의 111高地에 나타나, 連帶 觀測所가 있는 東側地 西側傍의 獨立高地와 107高地 南쪽에 있는 連帶 指揮所 地域에 迫擊砲射擊을 開始한 것이다. 마치 連帶가 敵의 包圍網 속에 갇히게 된 양 敵 砲彈이 後方으로부터 날아오자 一大 混亂을 빚게 되었다.

卽 觀測所에서 撤收準備 中이던 최일영大尉는 재빠르게 觀測所 要員을 引率하여 敵의 砲擊을 避하면서 一山으로 撤收하고, 連帶 指揮所 周邊에서 補給品을 後送하려던 普及將校 한근호 中尉는 普及下士官 윤기열 中士等과 같이 于先 대기시켜 놓은 車輛에 總鰭類부터 摘載하고 이어서 彈藥과 食糧(白米 100餘입)을 車에 실으려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北韓軍 砲彈이 그 옆에 쌓아둔 彈藥箱子에 落彈하였으므로 이의 連鎖暴發을 避하여 그길로 車를 몰아 一山으로 빠져나왔다. 이무렵 師團 指揮所가 撤收한 뒤의 봉일천 初等學校에서는 原因 모르는 火焰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第 11聯隊의 主力은 이러한 光景을 멀리 바라보면서 日傘을 거쳐 이날 저녁무렵에 이散脯에 當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附近에서 蒐集한 小型漁船으로 渡河하였는데 행주나루터나 이散脯할 것 없이 雲集한 各 部隊의 戰鬪要員들은 앞을 다투어 도하에 血眼이 되었다.

이러한 要因은 배가 對岸에 건너가기만 하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데에 問題가 있었으나 이보다도 所屬을 달리하는 여러 部隊가 統制를 無視하고 도하順序를 지키려 하지 않는 데에 根本問題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上流나 下流地域을 더듬어서 배를 救하여 渡河하거나 뗏木을 만들어 건너는 等으로 아예 秩序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擧皆의 將校가 階級章을 떼고 있어 누가 將校인지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어느새 私服을 한 사람도 적지 않았으니, 여기에는 相關이나 部下도 없었다.

더욱이 各部隊의 撤收車輛이 이곳에 集中되어 遺棄되었던 關係로 車輛으로 이곳까지 後送된 戰傷者에 對하여서도 都下의 優先權이나 이들을 위하여 손을 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들은 諦念한 나머지 車內에서 自決하겠다며 手榴彈을 달라고 했고 더러는 차라리 쏴달라도 呼訴하는 者도 있었다. 여기에는 다만 對等한 人間으로서 어떻게 하면 배를 救하여 渡河하느냐 하는 理性을 잃은 人間들의 삶의 追求만이 온 江邊을 支配하였다.

그리고 제13연대 搜索中隊의 김호 所謂, 第7中隊의 김홍주 所謂 그리고 姑母 中尉等은 행주를 目標로 撤收하다가 傳貰의 不利를 慨歎한 끝에 自決하였다.

김호 所謂 先任下士官 홍원기 上司에게 먼저 가라고 한 다음 3名만이 運命을 같이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가 北韓 共産治下에서 越南하여 언젠가는 北韓에 있는 父母兄弟들을 求하겠다고 軍門에 들어왔던 것인데 이제 北韓軍들에게 首都가 陷落되고 國軍이 悲慘한 敗退를 하는 마당에 우리의 갈곳이 어데냐고 서로 論議한 끝에 自決하였다는 것이다.

한便 第13聯隊 3大隊는 掩護部隊의 任務를 마치고 夜間撤收를 하였는데, 다음날인 6月 29日 날이 밝을 무렵에 수색동 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더 以上의 部隊行動이 不可能하다고 判斷한 大隊長 유재성 少領은 大隊를 수색동 北쪽 山에 집합시켜 一方訓示로써 그間의 勞苦를 致賀한 다음, 『只今부터 大隊는 小集團으로 行動하여 始興 方面에 集結하여야 한다.』고 强調하고 携帶武器를 그 附近에 이몰한 뒤 部隊를 解散시켰다. 그리하여 自身은 몇 名의 部下와 함께 私服으로써 이 날 밤 광장교로 빠져나갔다.

또한 6月 27日 밤 금촌 北쪽에서 撤收한 최병순 少領이 이끄는 15聯隊 5大隊는 흩어진 兵力을 봉일천 南쪽에서 蒐集하다가 7月 18日 에야 陵谷 附近까지 내려간 兵力을 겨우 蒐集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大隊는 이날의 反擊에도 除外된 채 撤收도 他部隊보다 빠를 수가 있었다. 이들은 이날 週間에 搜索役을 거쳐 蘭芝島로 나왔는데, 大隊의 兵力은 搜索에서 蒐集한 他 部隊의 兵力까지를 合하여 1200名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江邊에서 兵力을 풀어 배를 찾게하는 한便 이 무렵 蘭芝島內 到處에서 原因 모르게 불타고 있는 집들 主人이 없는 草家를 헐게하여 여기서 얻은 板子나 통나무 한 個씩을 全員이 갖게한 뒤 도하조를 編成하여 이날 19:00에 永登浦 염창동 쪽으로 渡河하였다. 그러나 板子나 통나무에 매어달린 채 건넌 關係로 大部分이 물에 떠내려가 55高地(염창동 北쪽 1.5km)아래 江邊에서 上陸하였는데 個人병기는 全員이 携帶한 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밖의 部隊도 6月 28日 저녁부터 6月 29日 아침사이에 행주와 이散脯로 渡河하였으며, 師團長 白善燁 大領도 師團 司令部와 함께 행주나루를 건너 撤收하였다.

그런데 앞서 6月 27日 에 師團을 訪問한 金弘一 所長은 當日 陸軍本部에 復歸하는 卽時 第1師團의 撤收問題를 總參謀長 채병덕 所長에게 具申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무렵 北韓軍의 住公이 미아리 地域으로 集中되어 首都房水의 成敗가 謦欬之間에 놓여있는 超緊迫한 狀況下에 몰려있었으므로 總參謀長 스스로가 이에 對한 明確한 指示조차 내리지 못한채로 水原 으로 後退한 것으로 보인다.

第1師團 및 中院部隊의 漢江渡河 狀況
* 師團司令部 및 直轄隊, 第15連帶本部 및 直轄隊 : 第1車路 행주나루터에서 大小 船舶 5~6隻으로 漢江을 渡河하여 始興 으로 撤收하였다.
  • 서울特別連帶(-), 第20聯隊 3大隊(-) 第12聯隊의 一部兵力 : 행주나루터에 뒤늦게 到着하여 6月 28日 저녁부터 6月 29日 밤사이에 漢江을 渡河하였으나 一部兵力은 分散되었다.
  • 第13聯隊 : 連帶 主力은 第3大隊의 掩護 下에 陵谷을 經由 행주나루터에서 漢江을 渡河하였다. 그러나 제3대대는 夜間 撤收中 方向을 잃고 헤매다 6月 29日 아침 수색동 으로 撤收하게 되었다. 이때 大隊長은 大隊를 解散시켜 小規模單位로 分散 撤收하여 始興에 集結하도록 指示하였다.
  • 第11聯隊 : 위전리~봉일천에서 師團主力의 撤收를 掩護한 後 一山 을 經由하여 이散脯 나루터에서 제 12聯隊(-)와 其他附帶의 落伍兵을 收拾하여 漢江을 渡河하였다. 그때에는 이미 金浦 半島 에 北韓軍이 進出하고 있었기 때문에 小規模單位로 分散되어 始興과 水原으로 撤收하였다.

※ 第13聯隊 後發隊와 기타連帶 落伍兵 130名은 漁船에 乘船하여 漢江 河口를 거쳐 群山 으로 航海한 끝에 7月 5日 曾坪 에서 本隊와 合流하였다.

  • 第15聯隊 3大隊 : 6月 28日 午後 他部隊보다 한발 먼저 撤收를 開始하여 搜索 附近에서 落伍兵을 收拾해 兵力이 1200名으로 增加되었다. 대대는 蘭芝島 로 건너가 草家집을 헐어서 그 木材로 뗏木을 만들어 漢江을 都下, 영등포에 集結하였다.

結果 및 影響 [ 編輯 ]

이렇듯 第1師團의 漢江渡河作戰은 撤收計劃의 未備와 全面撤收라는 緊迫한 事態에 衝擊을 받은 將兵들이 自制力을 잃고 動搖되어 大混亂이 惹起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나루터에서는 서로 먼저 船舶에 타기 위해 앞을 다투게 되었고, 代案으로 건너간 後에는 배를 되돌려 보내지 않는 惡循環이 되풀이되어 도하時間이 遲延되었다. 雪上加霜으로 6月 29日 부터는 金浦 半島 로 進出한 적이 漢江을 渡河한 國軍을 攻擊하는 狀況이 頻發하여 많은 被害가 있었다.

이와 같은 極限 狀況 下에서 漢江을 渡河한 第1師團은 6月 29日부터 다시 落伍兵을 收拾하면서 部隊整備에 着手하였으나 모든 重裝備와 公用火器의 大部分을 漢江 以北에 遺棄하였으므로 大幅的인 兵力의 補充과 裝備의 再補給이 없이는 戰鬪任務를 遂行하기 어려운 實情이었다.

參考 資料 [ 編輯 ]

  • 용산 戰爭記念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