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出生
| 1907年
8月 21日
大韓帝國
黃海道
松禾郡
|
---|
死亡
| 1949年 3月 21日
(
1949-03-21
)
(41歲)
|
---|
言語
| 韓國語
,
日本語
,
러시아語
|
---|
職業
| 作家, 敎育인
|
---|
學歷
| 日本 도쿄 外國語學校 러시아語學科 中退
|
---|
活動期間
| 1928年 ~ 1949年
|
---|
장르
| 文學評論, 小說
|
---|
함대훈
(咸大勳,
1907年
8月 21日
~
1949年
3月 21日
)은
日帝强占期
와
大韓民國
建國 初期의 演劇人이자 小說家이다. 雅號는 一步(一步)이다.
生涯
[
編輯
]
黃海道
松禾郡
出身이다.
中央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하고
日本
에 留學하여
도쿄 外國語學校
에서 러시아文學을 專攻했다. 留學 時節부터 外國文學을 專攻하는
도쿄
留學生들과 함께 海外文學硏究會를 組織하여 《海外文學》, 《文藝月刊》 等 文學 雜誌에 飜譯物과 評論을 揭載해 活動을 始作했다.
1931年
海外文學硏究會 同僚들인
김진섭
,
이하윤
,
정인섭
等과 함께
劇藝術硏究會
를 組織하였다. 劇硏의 創團 公演作은
니콜라이 고골리
의 諷刺劇인 《檢察官》이었는데 함대훈이 飜譯한 것이다. 이 時期에 러시아文學 專攻者 가운데 獨步的인 人物로서 新劇 運動에 많은 影響을 끼쳤다.
以後
유치진
과 함께 劇藝術硏究會의 後身인 극연좌에서 活動하였고 男女間 愛情을 中心으로 한 通俗 小說도 發表했다. 小說 가운데 가장 有名한 作品은 《純情海峽》으로,
신경균
이 同名의 映畫로 製作하기도 했다.
1933年
카프
系列의 傾向派 文學을 代表하는
林和
와 함께,
白鐵
의 右傾化된 人間描寫論을 攻擊하면서 벌어진 '形象 論爭'도 有名하다.
[1]
林和와 咸大勳은 이 論爭을 契機로 프로 文學의 本質에 對한 定見 差異를 드러냈다.
[2]
日帝 强占期 末期에 정인섭, 柳致眞과 함께 親日 演劇 團體인
國民演劇硏究所
를 세우고 所長을 맡았고
[3]
,
朝鮮文人協會
에서도 活動했다.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演劇/映畫 部門에 包含되었다.
1940年
《
每日申報
》에 〈우리들과 志願兵〉을 寄稿하는 等 總 11篇의 親日 著作物이 確認되어
親日 文學인 42人 名單
에도 들어 있다.
[4]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太平洋 戰爭
終戰 直後 《
漢城日報
》 編輯局長을 歷任했다. 곧이어 警察에 投身하여
美軍政
의 軍政廳 公安局長과 公報局長을 맡았으며,
國立警察專門學校
校長을 歷任했다. 國立警察專門學校 校長 在職 中 腦溢血로 死亡했다.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