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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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學會 (韓?學會, 英語 : Korean Language Society )는 한글 韓國語 를 硏究하는 民間學術團體이다. 1908年 에 ‘國語硏究學會’라는 이름으로 創立되었으며, [1] 여러次例 學會 名稱이 變更되었으나 1949年에 이르러 ‘한글學會’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2] 1907年에 設置되었던 ' 國文硏究所 '를 繼承하며 우리말과 글의 硏究.統一.發展을 目的으로 하고 있다. 한글學會는 1926年 11月 4日 한글날 (가갸날)을, 1933年 한글맞춤法統一案 을 制定하고, 한글을 普及하고자 努力했다. 解放 後, 學會는 한글專用 을 主張해 國漢文混用 을 한글專用으로 쓰는 것을 奬勵했다.

歷史 [ 編輯 ]

學會 創立 [ 編輯 ]

우리말과 글의 硏究·統一·發展을 目的으로, 1908年 8月 31日 주시경 先生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서울 奉元寺(새절)에서 創立總會를 열고 ‘國語硏究學會’를 創立하였다. [3] 그러나 1910年 韓日合倂이 이루어지며 國語라는 말이 日本語를 뜻하게 되면서 1911年 9月3日 ‘배달말글몯음’(朝鮮諺文會)으로 이름을 變更하였다. [4] 1913年 3月 23日에 다시 ‘한글모’로 바꾸고, 1921年 12月3日 ‘朝鮮語硏究會’, 1931年 1月 10日 ‘朝鮮語學會’로 이름을 고쳐 活動하다가 1942年 日帝에 依해 恣行된 朝鮮語學會 事件 으로 큰 試鍊을 맞게 되었다. [2] [1]

創立年度 訂正 [ 編輯 ]

한글學會는 그間 學會의 起源을 “1921年 12月 3日, 朝鮮語硏究會”로 알고 各種 記念行事를 進行해왔다. 그런데 1976年에 널리 公開된 周時經 先生의 自筆 履歷書의 記錄內容, 1981年 12月에 한글學會에서 主催한 學會 創立 記念 圖書 展示會를 통하여 入手하게 된 『한글母竹모기』라는 이름의 筆寫本의 內容, 1908年 8月 27日子 『大寒마일信保』와 『皇城新聞』의 內容을 綿密히 檢討해본 結果 學會의 創立日은 1908年 8月31日에 서울 奉元寺에서 設立된 ‘國語硏究學會’라고 結論 내리게 되었다. [1]

따라서 1987年 3月 9日의 한글學會 理事會에서는 創立日 受精에 關한 問題를 定期總會에 上程하기로 決定하였다. 같은해 3月 23日에 열린 定期總會에서 學會의 淵源과 創立日의 修正 問題를 案件으로 내놓고 長時間 討論이 있었는데, 그 結果 한글學會의 發想을 “1908年 8月 31日, 國語硏究學會(國語硏究學會)” 로 바로 잡기로 決定하였다. [1]

創立 後 活動 [ 編輯 ]

創立 以後 우리나라 語文政策 세우기와 갖가지 講演, 學術大會를 연 바, 한글날 制定(1926), 同人誌 ‘한글’創刊(1927), 學會誌 ‘한글’創刊(1932), 한글맞춤法 統一案 制定(1933), 標準말 事情(1936), 外來語 表記法 統一案 制定(1940)等 活潑한 活動을 展開하였다.

朝鮮語學會 事件 [ 編輯 ]

沿革 [ 編輯 ]

  • 國語硏究學會(1908~1911)
  • 배달말글몯음/朝鮮諺文會 (1911~1913)
  • 한글모(1913~1921)
  • 朝鮮語硏究會(1921~1931)
  • 朝鮮語學會(1931~1949)
  • 한글學會(1949~)

光復 後 活動 [ 編輯 ]

光復 後 活動을 再開한 朝鮮語學會는 初·中等 敎科書 編纂(1945), 訓民正音 元本 英人 (1946), 世宗 中等 國語敎師 養成所 設置(1948) 하였다. 아울러 1949年 9月 25日 ‘한글學會’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以後 큰 辭典 編纂(1957), 한글 打字機 統一 글字板 發表(1962), 쉬운말 辭典(1967), 月刊誌 ‘한글새消息’ 創刊(1972), 우리말의 로마字 適期 發表(1984), 第1回 우리 말글 練修會(1985), 한국지명총람 編纂(1986), 文學한글 創刊(1987), 한힌샘 주시경 硏究/敎育한글 創刊(1988)等의 일을 했다. [1]

또한, 韓國 땅이름 큰辭典 編纂(1991), 우리말 큰辭典 編纂(1991), 第1回 外國人 韓國語 發表 大會(1999), 學會 發行 論文集 學術情報 製作(2000), 첫 番째 우리말글 지킴이 委囑(2000), 우리 土박이 말 辭典 編纂(2001), 첫 番째 아름다운 우리말 가게이름 選定(2001), 第1回 全國 한말글이름 가진 이 글짓기 大會(2004), 한글 무늬옷 입기 運動(2005), 한글날 큰잔치 組織委員會 結成(2006), 한글을 빛낸 자랑스러운 人物 4篇(한힌샘 주시경.외솔 崔鉉培.健在 정인승.고루 이극로)編纂(2008.2009)等의 일을 하였다. 1996年에는 非營利 學術團體로는 처음으로 누리집(홈페이지)을 만들어 누리그물(인터넷)을 통하여 갖가지 情報를 提供하고 情報 交換의 마당을 마련해 놓고 있으며,정기 刊行物 『한글』,『文學한글』, 『敎育한글』, 『한힌샘 硏究』, 『한글 새消息』 等을 누리집에서 提供하고 있다. [1]

한글 專用 運動 [ 編輯 ]

日本帝國 敗亡뒤人 1945年 11月 8日 以後, 한글學者들은 한글萬쓰기운동을 벌였다. 그 結果로, 解放直後의 超·中等敎科書에는 한글만 쓰여졌으며, 必要時 括弧 (道琳) 안에 漢字가 標示되었다. 但, 中學校에서는 漢文敎育을 實施하여 中國과의 交流, 苦戰(古典)에의 接近을 考慮하였다. 公文書에는 한글이 轉用되었다.

1949年 에는 다시 '漢字專用案'에 依해 文書에 漢字를 섞어쓰게 되었다.

이에 反對하여 1964年 聲明書를 통하여 한글 學會가 主張한 內容은 다음과 같았다.

  • 日常生活에서 한글만 使用하자.
  • 글字生活의 機械化를 위해 한글을 使用해야 한다.
  • '한글專用'은 漢字語를 排斥하는 것이 아니며, 漢字語를 한글로 쓸뿐이다.
  • 學校科目의 用語는 쉬운 한글로 表記하자.
  • 더 徹底히 漢文을 가르치고 배워야한다.
  • 漢字로 적힌 古典은 한글로 飜譯되어야 한다.
  • 新雜誌는 모두 한글로 써야 한다.

1968年 에는 政府 次元에서 '한글專用5個年計劃'을 세우고, 이를 다시 短縮하여 '한글專用促進7個項', '한글專用硏究委員會' 等이 생겨났다. (10.7 宣言) 이에 맞추어, 學者들을 中心으로 '한글專用國民實踐會'가 組織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한글學會50돐記念事業會, 《한글學會50年史》, 한글學會, 1971

各州 [ 編輯 ]

  1. [https://web.archive.org/web/20211122100423/https://www.hangeul.or.kr/%EB%B0%9C%EB%8F%8B%EC%9B%80 Archived 2021年 11月 22日 - 웨이백 머신 [한글學會] 學會消息 (발돋음)]
  2. [네이버 知識百科] 朝鮮語硏究會 [朝鮮語硏究會] (두산百科) .....國語硏究學會는 1911年 9月 3日 '배달말·글모음'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3年 3月 23日 '한글모'로 改稱하였다가 1921年 朝鮮語硏究會로 變更·組織되었다. 1931年 1月 10日에는 朝鮮語學會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9年 9月 25日 以後 한글學會로 정해져 오늘에 이른다.
  3. [네이버 知識百科] 國語硏究學會 [國語硏究學會]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創立總會는 1908年 8月 31日 敦義門 밖 奉元寺(奉元寺)에서 夏期國語講習所 卒業生들과 國語硏究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열었다. 이날 김정진(金廷鎭)을 會長으로 뽑고, 私立청년학원(私立靑年學院)에 學會의 位置를 定했다. 周時經의 履歷書에 依하여 ‘國文硏究會(國文硏究會)’ 或은 ‘國文硏究學會(國文硏究學會)’로 알려져 왔으나, 이규영(李奎榮)이 編纂한 『한글母竹보기』가 發見됨으로써, 이 團體의 正確한 名稱과 沿革이 밝혀졌다.
  4. 한글學會 <한글學會 100年史> 2009年 p31 ....1911年 9月 3日 (일) 下午 2時에서 4時까지, 周時經 先生 宅에서 가진 1911年 總會에서 學會이름을 "배달말글 몯음(朝鮮言文會)"으로 바꾸었다. 가장 直接的인 理由는 庚戌國恥를 當한 뒤 "國語"가 一般的으로 日本語를 가르키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