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
(鄭鎭弘,
1855年
陰曆 3月 22日
~
1926年
陽曆
4月 16日
)은
日帝强占期
에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를 지냈다. 號는 能才(能齋)이며 본적은
京城府
필운동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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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8年
成均館
進士가 된 뒤
大韓帝國
의 官僚로 勤務했다.
濟衆院
, 內部, 會計員,
宮內府
等地에서 일하다가,
1895年
명성황후
가 日本人들에게 殺害된
乙未事變
에 連累되어
日本
으로 亡命했다. 亡命 生活 中 日本의 發達한 文明을 經驗한 정진홍은 以後 積極的인
親日派
로 活動하게 되었다.
日本에서 敎師 生活 및 官公署 見習 等을 轉轉하다가,
러日 戰爭
에 勝利한 日本이 朝鮮에
統監府
를 設置하면서
1906年
特別赦免令이 내려져 歸國하여 統監府 囑託으로 일할 수 있었다. 이 무렵은 日帝의 保護 統治를 擁護하거나 더 나아가
韓日 倂合 條約
締結을 促求하는 團體들이 盛行하고 있었는데, 정진홍은 日本의 文明化를 弘報하거나 오랜 亡命 生活 끝에 歸國하는
박영효
歡迎 모임에 參加하고
儒敎
系列 團體인
大同學會
와
孔子敎會
에도 加擔하는 等 活潑한 社會活動을 했다.
1907年
에는 農水産部에 農務局長으로 官職에도 復歸했고,
1910年
韓日合邦이 成事된 뒤
朝鮮總督府
傘下에 設置된 中樞院 副贊儀에 任命되었다.
1921年
中樞院 改編 때 參議에 任命된 뒤 任期 中이던 1926年 死亡할 때까지 5年間 在職하여 中樞院 在任 期間은 總 16年에 이른다. 中樞院 副贊儀로 있던
1920年
中樞院內地視察團으로 日本을 다녀온 바 있고,
1924年
에는 一線融和를 標榜하는 11個 團體가 聯盟을 맺고 韓日倂合은 時代的 要求라는 聲明書를 發表했을 때
誘導振興會
代表로 署名하기도 했다.
日本 政府로부터는
1912年
韓國倂合記念章
과 1924年 勳4等 서보장을 받았다. 1924年 總督 官邸에서 開催된
다이쇼 天皇
의 生日 祝賀宴인 천장절 記念 行事에 招待받기도 했다.
2002年
公開된
親日派 708人 名單
,
2008年
친일인명사전
編纂을 위해 整理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選定되었다.
2007年
大韓民國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9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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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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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7年 12月).
〈정진홍〉
(PDF)
. 《2007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821~831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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