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양길승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양길승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양길승 ( 1949年 7月 20日 ~ )은 大韓民國 의 醫師이다.

生涯 [ 編輯 ]

1949年 全羅南道 羅州에서 5男 5女의 막내로 태어났고 初等學校를 마친 뒤 서울 留學길에 올라 대광中學校, 서울大學校師大附屬高等學校를 卒業했다. 1967年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數學科에 入學했으나 8個月 만에 學業을 中斷하고 落鄕했다. 1年半 동안 彷徨하다 ‘醫師가 되어서 社會奉仕를 하겠다’는 決心을 굳힌 뒤 1969年 서울대學校 醫科大學에 다시 入學했다. 醫豫科 1學年 때부터 興士團 아카데미에 參與하고 醫科大學 內에 ‘보리會’와 ‘社會醫療硏究會’를 結成하는 等 本格的인 學生運動에 뛰어들었다. 여름放學 때 江原道로 農活을 갔다가 어느 農夫로부터 '너희들 잘난 척하기 위해 이런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고 이에 對해 '率直히 奉仕만 해주면 農民들이 좋아할 줄 알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要求한 것은 엘리트들의 自己滿足이 아닌, 보다 根本的인 일이었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1] [2]

영등포 문래동 板子村에서 無料診療活動을 펼치던 途中 1974年 緊急措置 1, 2號 違反으로 學業을 中斷해야만 했고 1975年 醫大間諜團 事件과 金芝河 의 良心宣言文 配布 事件으로 逮捕돼 1年間 服役했다. 1980年 ‘ 서울의 봄 ’으로 復學했으나 ‘光州事態 背後操縱者’로 指目돼 除籍된 뒤 苦楚를 겪었다. 中央情報部로 끌려가 63日間 酷毒한 拷問을 받았고 이런 自身의 經驗과 수많은 良心犯들의 事例를 土臺로 뒷날 ‘拷問 先進國’ 칠레에서 열린 學會에서 ‘拷問이 人間의 精神에 미치는 影響’을 主題로 論文을 發表했다. [1] [2]

양길승은 1979年 이화여자대학교 앞에서 ‘다락房’이란 書店을 經營하면서 이혜경 을 만났고 後에 이들은 結婚했다. 이혜경(71學番, 一名 '큰 이혜경')과 同名異人이자 이혜경의 演劇班 後輩이기도 한 이혜경(73學番, 一名 '작은 이혜경', 유인태 와 結婚)과 고은광순 等 이화여자대학교 演劇班 學生들과 함께 양길승은 파울루 프레이리 의 ‘페다고지’를 講讀했는데, '작은 이혜경'李 自身과 이름이 같은 先輩 '큰 이혜경'을 이에 합류시킨 것이 因緣이 됐다. [1] [2]

1982年 獨逸 海外基督敎宣敎財團의 奬學金을 받게 되었고 金壽煥 樞機卿과 光州敎區 윤공희 主敎의 도움으로 배우자 이혜경과 함께 出國할 수 있었다. 金大中 의 美國 亡命 件으로 天主敎 側의 도움을 請하러 왔던 盧信永 安企部長에게 金壽煥과 윤공희가 ‘우리가 양길승의 身元을 保證하겠다’고 말을 해주어서 可能했던 일이었다. 양길승은 獨逸 보쿰에서 暫時 머문 뒤 이듬해 아일랜드 골웨이 醫科大學에 編入해 그곳에서 醫師資格을 取得했다. 이혜경은 獨逸에서, 양길승은 아일랜드에서 各各 留學生活을 하였다. [1] [2]

留學을 마치고 돌아와 이혜경은 女性文化運動에, 양길승은 勞動者 職業病 硏究 等 醫療運動에 愛情을 쏟았고 녹색병원은 그 産物이었다. [2]

參與連帶 出帆 때부터 市民委員長을 맡아 執行委員長, 運營委員長을 歷任했다. [3]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