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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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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福 (徐福), 또는 徐市 (徐?)은 古代 中國 (秦)나라 사람이다. 臺灣 또는 韓國이나 日本에 到來했다는 傳說이 있지만 虛構로 알려져 있다.

槪要 [ 編輯 ]

紀元前 255年 齊나라 에서 태어났다. 《 詐欺 》權6 秦始皇本紀 및 卷118 淮南衡山列傳(淮南衝山列?)에 따르면, 紀元前 221年 秦始皇 은 不老長生을 위한 靈藥을 求하기 위해 臣下들을 내보내 不老草를 求하러 四方으로 보냈으나 不老草를 求해오지 못했다. 徐市은 이때 自己가 不老草를 求하러 가야 할 次例임을 알고 紀元前 219年 (秦始皇 28年), 皇帝에게 上疏를 올렸다.

齊人徐市等上書言 "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方丈、瀛洲, 僊人居之. 請得齋戒, 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 入海求僊人.
第(齊) 사람 徐市 等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저 멀리 바다 건너 蓬萊(蓬萊), 方丈(方丈), 榮州(瀛洲)의 三神山(三神山)에 神仙이 사는데, 童男童女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이에 鉏불을 보내 童男童女 數千을 뽑아 바다로 나가 神仙을 찾아오게 하였다.

? 《詐欺》(史記)權6 秦始皇本紀(秦始皇本紀)

又使徐福入海求神異物,還??辭曰:『臣見海中大神,言曰:「汝西皇之使邪?」臣答曰:「然。」「汝何求?」曰:「願請延年益壽藥。」神曰:「汝秦王之禮薄,得觀而不得取。」?從臣東南至蓬萊山,見芝成宮闕,有使者銅色而龍形,光上照天。於是臣再拜問曰:「宜何資以獻?」海神曰:「以令名男子若振女與百工之事,?得之矣。」』秦皇帝大說,遣振男女三千人,資之五穀種種百工而行。徐福得平原廣澤,止王不來。
또한 徐福(徐福)으로 하여금 바다에 들어가 新鮮에게 奇異한 物件을 求하게 하니, 그는 돌아와 거짓으로 말하기를 "新(臣)李 바다 속의 커다란 新(神)을 만났는데, '네가 棲遑(西皇)의 獅子냐?'라고 묻기에 신이 '그렇습니다'라고 對答하자 '너는 무엇을 求하느냐?'라고 묻기에 '壽命을 延長시키는 藥을 願합니다'라고 對答했더니, 그 神은 '너는 辰王(秦王)의 예(禮)가 迫害 그 藥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 取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바로 神을 데리고 東南쪽에 있는 蓬萊山(蓬萊山)으로 갔습니다. 領地初(靈芝草)로 이루어진 宮闕이 보이고 私子가 있었는데, 구릿빛에 龍의 形象이었으며, 그 光彩가 하늘까지 비추었습니다. 그래서 神이 栽培(再拜)하고 '마땅히 어떤 禮物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묻자 해신(海神)은 '良家집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百空(百工)의 製品을 바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라 했습니다. 秦始皇은 크게 기뻐하며 童男童女 3千名을 보내고 五穀의 種子와 여러 匠人들의 만든 것을 가져가게 했습니다. 筮卜은 平平한 들판과 넓은 못을 얻자 거기에 머물러 王이 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詐欺》權118 淮南衡山列傳(淮南衝山列?)

그리하여 紀元前 219年에서 210年 사이에 그의 두番에 걸쳐 不老草를 찾으러 다닌다. 秦皇島 를 떠난 筮卜은 日本이나 韓國에 到來했다는 傳說이 있지만 寫實性은 없으며 虛構로 알려져 있다. 그의 旅行에는 60隻의 배와 5,000名의 一行, 3,000名의 童男童女와 各各 다른 分野의 匠人들이 同伴했다고 한다. 紀元前 210年 그는 秦皇島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中國 南部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戰勝 [ 編輯 ]

中國에서의 徐福 戰勝 [ 編輯 ]

中國의 《 三國志 》와 《 後漢書 》 記錄에는 徐市이 中國을 떠나 短珠(亶洲) 또는 移住(夷洲)에 到達하였다고 나온다. 中國에서 移住(夷洲)는 只今의 타이완 을, 短珠(亶洲)는 日本 을 가리킨다고 主張한다. 하지만 이것은 傳說일 뿐 虛構이다.

北送 의 政治家이자 詩人이었던 歐陽脩 가 지은 『日本刀가』(日本刀歌)에는 「그 祖上은 서복이 秦의 百姓을 꾀어서는/약을 캐러 간다고 童男童女를 그곳에서 늙게 했지/온갖 匠人과 五穀을 그들에게 주어 살게 했으니/오늘날까지 만든 것이 모두 精巧하다네(其先徐福詐秦民 採藥淹留?童老 百工五種與之居 至今器玩皆精巧)」라고 말한 內容에서 日本을 가리킨 部分이 存在하기도 한다. 하지만 徐市이 正確히 어디로 逃亡하였는지 當時 中國人들도 모르고 있으며 日本에 到着했을 것이라는 推測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옛 허구 傳說이 韓半島와 日本에도 傳해져 많은 이것을 實際로 보는 많은 創作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記錄에 依해 現代 中國人들은 徐市이 日本에 到着하여 日本 政權을 이룩했을 것이라는 漠然한 推測과 期待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虛構 傳承이 널리 알려져 있다.

韓國에서의 徐福 戰勝 [ 編輯 ]

서복이 지나갔다고 傳하는 西歸浦의 正房瀑布. 이곳에 '筮卜科次'라는 네 글字가 새겨져 있었다고 傳한다.

濟州島는 이미 《三國志》 및 《後漢書》에 주호(州胡)라는 이름으로 登場하고 있는데, 제주시 용담동의 山地項에서 傳한 時代의 貨幣인 五銖錢 을 비롯해서, 新나라 때에 만들어진 華川 (貨泉), 大川五十(大泉五十), 火砲(貨布) 및 구리거울 等이 發掘되었다. 高麗 이인로 의 《 破閑集 》 및 朝鮮 初 신숙주 의 《 海東諸國記 》에는 서복이 言及한 三神山은 모두 韓半島를 가리킨 것이며, 蓬萊山과 瀛州山, 방장산은 各各 韓國의 金剛山 漢拏山 , 頭流山 이라고 比定하였다. [1] 特히 濟州特別自治道 西歸浦市 의 指名 및 正房瀑布 의 서불과지(徐福過之)라는 글字는 오래 前부터 中國을 떠난 서복이 濟州島에 到着했다는 痕跡으로 指目되고 있다. [2] 이 傳說에 따르면 當時 秦始皇의 名으로 不老草를 求하러 바다로 나온 서복이 濟州島에 왔고, 이곳을 지나면서 '서복이 이곳을 지나간다(徐市過此)'라는 글字를 巖壁에 새겼다는 傳說에서 由來한 것으로, 濟州에서 不老草 를 救한 서복이 '西쪽(西向)을 向해 歸路(歸路)에 오른 浦口(浦口)'라는 意味에서 西歸浦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傳한다. 濟州島 現地에는 이곳 西歸浦에서 북을 두드리며 놀면 交龍이 나와 같이 춤을 춘다는 傳說이 傳하는 等, 西歸浦는 濟州島에서도 歷史的, 景觀的 價値가 있는 名勝地로 남아 있다. 한便 濟州島에 到着한 서복이 맨 먼저 到着한 곳은 只今의 조천읍 兆천포(朝天浦)였다고 한다.

徐福 集團이 正말 濟州島에 이르렀는지, 《詐欺》에 言及된 瀛州山이 正말 只今의 濟州道인지에 對해서는 論難의 餘地가 남아있으며, 濟州를 訪問했을 可能性이 있는 徐福 船團의 性格에 對해서는 秦始皇의 東邦 開拓 政策의 一環(윤명철)이라는 等의 다양한 主張이 있다.

日本에서의 徐福 [ 編輯 ]

서복이 日本에 到着했다는 中國의 傳承은 日本에도 傳達되었다. 하지만 서복이 日本에 到着했다는 證據는 없으며 日本에서도 認定하지 않는 事實이다. 하지만 中國에서는 徐福 傳說이 誇大 包裝되어 日本人들이 서복의 後裔라는 잘못된 認識까지 퍼져 있다. 하지만 日本 學界에서는 該當 이야기를 認定하지 않고 있다. 韓國의 申叔舟가 지은 《海東諸國記》에는 日本의 傳說的인 天皇으로 分類되는 高레이 天皇 때에 不老不死藥을 찾으러 온 서복이 日本의 기슈 에 닿았으며, 스眞 天皇 때에 죽어서 神이 되었고 日本 사람들이 筮卜을 祭祀지냈다는 傳承을 적었으나 이것은 中國에서 퍼진 헛所聞을 적은 그대로 적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單孤 半島(丹後半島)에 있는 니이사키 神社(新井崎神社)에 傳해지는 《신대명新舊비기》(新大明神口碑記)라는 古文書에는 中國의 傳說을 그대로 引用하여 서복의 일이 記錄되어 있다.

徐福 關聯 傳說은 中國과 韓國, 日本에 흩어져 있으며, 徐福 傳說의 스토리는 地域에 따라 다양하다. 《후지文獻》(富士文?)은 후지요시다 市의 미야시타가(宮下家)에 傳해져 내려온 미야시타가 古文書(宮下家文書)를 包含한 古文書로, 漢字語와 萬요가나 를 使用한 分類로 日本의 歷史를 記錄하였는데, 이 冊을 編纂한 것이 筮卜이라는 傳承이 있다. 《海東諸國記》에서 高레이 天皇의 臺에 서복이 日本으로 왔다는 技術과 미야시타가 古文書의 內容이 서로 一致하는 것이 指摘되는데, 다만 미야시타가 古文書는 이른바 「枯死苦戰」(古史古?)에 包含되는 部類의 冊으로 文體나 發音을 보아도 에도 時代 後期나 近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評價되며, 記述된 內容에 對해서도 正統 歷史學者들은 認定하지 않고 있다.

現在 [ 編輯 ]

1982年 에 中國은 『中華人民共和國地名辭典』(中華人民共和?地名?典) 編纂에 즈음하여 現地 調査를 施行했는데, 장쑤 省 롄윈강 時 間위현 錦山眞(金山?)에 있던 西部(徐阜)라는 마을이 淸나라 乾隆帝 時代 以前에는 「鉏복촌」(徐福村)이라 불렸고, 筮卜과 關聯된 傳承과 遺跡이 所在한 것으로 判明되었다. 다만 1980年 臺까지 現地 옛 집에는 「우리 先祖는 名臺(明代)에 이 땅에 移住하였다」는 傳承이 있었고, 筮卜이라는 人物이 實在했느냐는 自體가 의문스러운 데에서, 이는 「日本에서 오는 觀光客들을 誘致하기 위하여 造成한 마을이 아니냐」는 指摘을 받기도 했다. 實際로 西部村에는 日本人 觀光客이 多數 찾아오는데, 名物 「筮卜車(徐福茶)」도 好評을 받는다.

2000年 3月 30日에 츠시 時에는 筮卜記念館(徐福記念館)李 開館되었는데, 이를 契機로 日本의 徐福 硏究者와 中國 現地人과의 交流가 始作되었고, 이듬해 2001年 가을에는 같은 詩 三北進(三北?)의 문완南路(文宛南路)에 「筮卜小學校(徐福小?校)」가 開校하였는데, 學校의 揮毫는 日本 鉏福會(日本徐福?)의 名譽會長을 지낸 하타 쓰토무 가 썼다.

2013年 6月 6日에는 第10次 한.中 女性指導者 포럼에 參加했던 中國代表團의 이해봉 中國全國精筴 副主席 等 15名이 社團法人 濟州筮卜文化國際交流協會(理事長 이영근)의 招請으로 서귀포시의 筮卜展示館을 訪問해 不老長生을 象徵하는 黃漆나무 두 그루를 記念 植樹했다.

徐市 關聯 遺跡 [ 編輯 ]

韓國 文學 속의 徐市 [ 編輯 ]

  • 沈淸歌
  • 船上歎(船上歎), 蘆溪集(蘆溪集) 中 朴仁老의 歌詞, 1605年(宣祖)

關聯 書籍 [ 編輯 ]

  • 太白일사 (太白逸史)/ 소도경傳本勳(蘇塗經典本訓)
  • 司馬遷 詐欺 / 秦始皇本紀(秦始皇本紀)와 淮南衡山列傳(淮南衡山列傳)
  • 三國志 (三國志) 五署·오주권展(吳書·吳主權傳)
  • 後漢書 (後漢書) 東夷列傳(東夷列傳)
  • 淮南衡山列傳(淮南衡山列傳)
  • 봉선서(封禪書)
  • 서복이 韓半島에 남긴 遺跡과 文明의 成果, 이형석(第6回 筮卜文化 東亞細亞 國際學術大會, 2007.10.19)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강임 (2003年 10月 14日). “鉏不過 童男童女는 어디로 갔을까?” . 오마이뉴스 . 2008年 4月 21日에 確認함 .  
  2. 이형석 (2007年 10月 19日). “서복이 韓半島에 남긴 遺跡과 文明의 成果”. 《第6回 筮卜文化 東亞細亞 國際學術大會》.  

外部 링크 [ 編輯 ]

  • 위키미디어 公用에 徐福 關聯 미디어 分類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