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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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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현 (閔耆顯, 1751年 ~ 1811年 8月 1日) 朝鮮 時代 後期의 文臣이자 外戚으로 여양府院君 민유중 의 아들 민진후 의 曾孫이며 吏曹判書를 지낸 민익수 의 孫子였다. 女性府院君 민치록 의 아버지이며 명성황후 의 할아버지였다. 本貫은 여흥(驪興)으로 字는 자경(子慶), 號는 移送擧事(二松居士)이다.

1773年 生員 試驗에 合格하였으나 아버지 민백분(閔百奮)李 京畿道 驪州 로 落鄕하여 隱居하자 그는 官職에 나가지 않고 어버이를 奉養하며 學問에만 專念하였다. [1] 孝行 으로 特別 薦擧되어 1798年 (正祖 22年) 繕工監 假監役 (繕工監假監役)에 任命되었다가 辭退하였다. 그 뒤 高敞縣監을 除授하였다.

1800年 正祖 死亡 前, 정시문과(庭試文科)에 及第하여 여러 職責을 거치고 弘文館 副修撰 等을 지냈다. 1801年 司憲府 執義를 거쳐 春秋館 編修官(春秋館編修官)으로서 《 正祖實錄 》 編纂에 參與하였다. 그 뒤 抄啓文臣(抄啓文臣)에 選拔되었고, 咸鏡道 暗行御史로 나가 吉州牧使 里徵만 等 여덟 고을 守令의 封庫罷職하고 報告하였다. 그 뒤 堂上官으로 昇進하여 忠淸道 觀察使 等을 거쳐 副提學 , 司諫院 大司諫 等을 지냈다. 그 뒤 李朝 參議 , 副提學 을 지냈다.

그 뒤 都承旨 , 1809年 禮曹 參判 을 거쳐 1811年 開城府 有數(開城府留守)로 赴任하였다. 開城府 留守로 赴任한 지 3個月 만에 죽었다. [1]

家族 關係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世宗新聞 - 驪州포커스” .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1月 12日에 確認함 .  

같이 보기 [ 編輯 ]

京畿道 開城府 留守
1811年 ~ 1811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