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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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李泰俊
作家 情報
本名 이규태
李奎泰
出生 1904年 11月 4日 ( 1904-11-04 )
大韓帝國 江原道 鐵原郡 墓場面 眞名利
死亡 1978年
慈江道
國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職業 作家
學歷 日本 措置 大學 哲學 과 中退
活動期間 1924年 ~ 1943年
장르 小說
父母 利用하(양부)
이창하(生父)
순흥 安氏 (生母)
配偶者 이순옥
子女 2男 3女
(그 中 長女 이소명, 長男 이유백)
兄弟 누이同生 2名

이태준 (李泰俊, 文化語 : 리태준, 本名 이규태,  本名 漢字 :  李奎泰, 1904年 11月 4日 ~ 1978年)은 日帝令 朝鮮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小說家 이다. 雅號는 尙虛 (尙虛), 別名은 朝鮮의 모파상 . [1]

江原道 鐵原郡 出身. 어린 나이에 父母를 모두 잃고 親戚집을 轉轉하였다. 以後 家出하여 여러 곳을 放浪하다가 元山 等地에서 客主집 使喚 따위 일을 하며 2年餘를 보내다 外祖母가 찾아와 보살펴주었다. 1921年 휘문高等普通學校 에 入學, 1924年 6月 13日 同盟休校의 主謀者로 指摘당하여 退學당하고 度日하여 措置大學 豫科에 入學하였다. 日本에서 《朝鮮文壇》에 〈오몽녀〉를 投稿, 入選하였으며 《時代日報》에 發表하여 登壇하였다.

大學을 中退하고 記者로 入社하여 여러 職責을 두루 지냈으며 學校에도 出講하여 作文을 가르쳤다. 1930年 이화여전 을 갓 卒業한 이순옥과 結婚. 1931年 以後 作家로서 旺盛한 活動을 벌였으며 文壇에서의 交遊도 活潑하여 具仁會 를 結成, 카프 의 目的文學에 反對하는 等 自身의 文學的 色彩를 뚜렷이 드러내었다. 1939年 《문장》의 編輯을 맡아 新人推薦制度를 導入, 임옥인 , 최태응 等 作家를 推薦하였다.

1943年 江原道로 落鄕하여 解放 前까지 蟄居하였다. 解放 以後 귀경하여 林和 , 김남천 等 카프 系列 作家와 어울리며 朝鮮文學課同盟 의 副委員長을 맡아 活動한다. 1946年 突然 越北, 8月 모스크바를 訪問하여 《蘇聯紀行》을 쓴다. 6.25 勃發 以後 韓國軍이 平壤을 收復했을 때 南韓側 人士들이 救出하려 했으나 失敗하였고 1956年 肅淸당한 뒤 항흥 노동신문사 校正員, 咸興 콘크리트 블록 工場 破古鐵 蒐集勞動者를 지내는 等 갖은 苦生을 하였다. 1964年 中央黨 文化部 創作 第1室 專屬作家로 復歸했으며 김진계의 口述記錄에서 1969年 1月 江原道 章動炭鑛 勞動者 地球에서 夫婦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마지막 消息으로서 鳶島 未詳으로 死亡한 것으로 推定된다.

生涯 [ 編輯 ]

登壇하기 前까지 [ 編輯 ]

1904年 11月 4日 江原道 鐵原郡 墓場面 眞名利에서 父親 이창하(李唱夏), 母親 순흥 安氏(順興 安氏)의 1男 2女 中 長男으로 태어났다. 父親 이창하는 者를 문규(文奎), 號를 매헌(梅軒)이라 하였고, 鐵原公立普通學校 敎員과 德源監理徐主事(德原監理署主事)를 歷任하였다. 舊韓末 開化派的 知識이었던 것으로 推定되는 父親은 當時 義兵에게 親日派라 誤解받았고 이것은 故鄕을 떠나는 決定的인 原因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父親은 "四方에 흩어져 있는 同志들과 連絡해 가지고는 서울의 頑迷한 勢力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북간도 一帶를 中心으로 거기 널려 있는 朝鮮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日本의 維新과 相應하는 이곳 維新을 일으킬 큰 뜻"을 품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로 亡命하였다. 그러나 채 뜻을 펼쳐보기도 前에 1909年 가을 35歲 나이로 死亡하고 만다. [2]

家長을 잃은 一家는 이듬해 故國으로 向했으며 母親이 배에서 둘째 딸을 낳는 바람에 豫定을 바꾸어 가까운 浦口인 咸北 배기미에 내려 隣近 訴請(素淸) 距離에 定着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母親이 飮食店을 經營하여 얼마間 安定을 찾게 되자 李泰俊은 書堂에 보내져 工夫를 하게 되었다. 當時(唐詩)에 興味를 느꼈고, 글짓기를 좋아하여 詩會(詩會)에서 賞을 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2年 母親마저 여의고 猝地에 三男妹는 孤兒가 되었다. 李泰俊의 나이 9살 때의 일이었다. [2]

三男妹는 外祖母 손에 이끌려 故鄕에 돌아와 친적집에 맡겨졌으나, 周邊에서의 同情과 親戚집의 恝視는 李泰俊을 크게 傷處입혔다. 1918年 私立 봉명학교를 優等으로 卒業하고 한 달 後 家出하여 여러 곳을 放浪하다 元山 客主집의 使喚으로 定着하였다. 2年餘를 여기서 보내던 中 上京하여 苦學을 하다 1921年 휘문高等普通學校 에 入學, 習作生活에 沒頭하였다. 21살 되던 1924年에는 學藝部長으로 活動하여 《휘문》 2號에 嘉藍 李丙琪 의 線으로 紀行文 〈不旅行〉李 1等으로 뽑힌 것을 비롯하여 6篇의 글을 發表하였다. 그러나 6月 同盟休校의 主謀者로 指摘當해 4學年 1學期에 除籍되었다. 휘문高普 벗인 김연만의 助力으로 度日하여 나도향 等과 어울려 '空氣만을 먹고사는' 悽慘한 苦學生活을 하였다. [2]

登壇하다 [ 編輯 ]

1925年 日本에서 短篇小說 〈오몽녀〉를 《 朝鮮文壇 》에 投稿하여 文壇에 처음으로 나섰다. 1927年 4月 도쿄 措置大學 에 入學하지만 어려운 苦學生活을 이겨내지 못하여 同年 가을 自退하였다. 歸國하여 母校와 여러 新聞社 等에 자리를 알아보았으나 失敗하고 한동안 彷徨하였다. 1929年 개벽사에 入社하여 《 學生 》이나 《 新生 》 等의 編輯에 關與하는 한便 《 어린이 》에 많은 童話를 發表하였다. [2]

1930年 5月 이화여전 音樂科를 갓 卒業한 이순옥과 結婚하여 家庭을 꾸렸다. 作家로서의 本格的인 活動은 이때부터 始作되었다. 1931年 《 中外日報 》 記者로 入社했으며 以後 新聞廢刊과 함께 이름을 뜯어고친 《 조선중앙일보 》의 學藝部長이 되었고 이화여전·이보·警報 等에 作文敎師로 出講하였다. 이 時期를 李泰俊 文學의 全盛期로 보고 있다. 李泰俊의 代表作의 大部分이 이때에 쓰여졌으며 具仁會 構成에도 앞장서는 等 社會的 位相도 드높아졌다. 1933年에서 1937年까지의 作品을 통해 李泰俊은 '非傾向文學이 낳은 最大의 作家'라는 評價를 받기 이르렀다. 그러나 1937年에 접어들어 時局이 急變하면서 李泰俊은 只今까지의 自身의 作品을 몽땅 習作이라 낮추어보면서 새로운 傾向의 作品의 創作을 다짐하였다. [2]

1939年 《 文章 》의 創刊에 關與하고 責任編輯을 맡으면서 植民地 末期 朝鮮文學을 지키는 데 남다른 貢獻을 했다. 이 雜誌를 中心으로 李泰俊은 李丙琪 의 主導 아래 古典復興에 盡力하며 擬古主義적 趣向을 表出하기도 하였다. [2]

1940年代에 접어들면 이태준度 몇몇 親日的 글을 發表한다. 1943年 故鄕인 鐵圓 近處로 紹介하였다 그곳에서 解放을 맞이하였다. [2]

光復 以後 [ 編輯 ]

光復 後에는 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의 傾向派 文學과는 距離를 두었던 以前까지의 傾向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 民主主義民族戰線 左派 系列에서 活動했으며, 韓國 戰爭 이전인 1946年 經에 越北하였기에 以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의 行跡이나 世上을 떠난 時期가 分明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李泰俊은 金日成 을 英雄化하라는 勞動黨의 指示를 正面으로 批判, 拒否했다는 理由로 肅淸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3]

1956年 肅淸 되어 咸興 으로 追放, 咸興勞動者新聞 校正員으로 配置되었으며, 以後 다시 咸興콘크리트블록工場의 破古鐵 蒐集 勞動者로 配置되었다. 1964年 朝鮮勞動黨 中央黨 文化部 創作室 專屬作家로 復歸하였으나, 몇 年 後 江原道 章動炭鑛 勞動者地區로 追放, 그 곳에서 死亡한 것으로 傳해진다. [4] 死亡 時期도 1968年頃을 비롯한 1960年代 末부터 1980年代 初까지 다양한 主張이 있었으나, 現在는 1970年頃이 가장 有力한 死亡 時期로 推定되고 있다. [5] 2000年代 들어 脫北 作家인 최진이 가 李泰俊의 딸들이 쓴 日記를 보았다며, 이들의 家族史를 證言한 바 있다. [6] 只今까지 大韓民國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行跡은 66살이던 1969年 江原道 章動炭鑛 勞動者 地球에서 社會保障으로 夫婦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만이 傳해지고 있을 뿐이다. [7]

生家는 戰爭으로 消失되었고, 現在 生家는 철원읍 율이리 용담마을에 밭으로 利用 中이나 生家터임을 알리는 작은 牌말이 서 있다. 서울에서 居住하던 城北區 의 自宅은 서울市 民俗資料 第11號로 指定되어 있다. [8] 只今은 1999年 外從孫女 祖上名이 1933年 李泰俊이 지은 堂號인 壽宴山房을 내걸고 茶집을 열었다.

評價 [ 編輯 ]

이태준에 對한 文學的 評價는 短篇文學의 代價라는 말로 收斂된다. 민충환은 " 김동인 이 주춧돌을 놓고 현진건 이 갈고 닦은 韓國現代 短篇小說을 完成한 代價"라고 하였다. [1] 小說의 技巧에 關하여 김기림 은 李泰俊을 "우리들이 가진 가장 優秀한 스타일리스트"로 評하였으며, 최재서 는 "人間像을 描出하는 데 ... 明確한 手腕을 가진 作家"라 稱하며 "스케치的 筆致로 그 人物의 말이나 行動을 점점이 터치하여 가는 동안에 於焉間 鮮明한 人間像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박태원 은 "벌써 漠然히 一家를 이룬 그 自身의 獨特한 藝術魂을 가진 極히 尊重을 받아 마땅한 作家"라고 評한 바 있다. [9]

歷史的 現實을 세련된 文學的 技法과 잘 어울려서 完成度 높은 藝術作品으로 만들었다고 評價된다. 初期 小說들은 정갈한 外裝이나 抒情的 雰圍氣 속에서 窮乏한 時代의 斷面을 銳敏하게 드러내고 있다. 李泰俊의 藝術的 成就는 미적技巧가 完熟期에 접어드는 1930年代 後半 作品에서 그 眞價를 限껏 發揮한다. 特히 1930年代 末 發表된 〈까마귀〉, 〈福德房〉, 〈밤길〉 等 作品은 韓國 小說文學의 價値를 드높이는 데 크게 寄與하였다. 越北 後의 作品은 하나같이 南韓側의 殘虐性을 告發하는 한便, 이를 통해 積極的인 鬪爭意志를 鼓吹하는 內容이다. 韓國戰爭期의 作品에는 反美的 性向이 特히 剛하게 나타나 있다. 北韓體制에 副應하는 것 外에도 李泰俊 自身이 平素 가지고 있던 西洋人에 對한 否定的 見解가 作用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小說들은 北韓에서 積極 收容되지 못하였고, 李泰俊의 肅淸과 더불어 北韓 文學史에서 사라져버렸다. [1]

家族 [ 編輯 ]

1930年 이화여전 音樂科를 갓 卒業했던 이순옥과 結婚했다. 膝下에 1931年生 長女 疏明, 1932年生 長男 乳白, 1934年生 次女 소남, 1936年生 次男 有進, 1940年生 三女 소현이 있었다. [10]

事後 [ 編輯 ]

李泰俊은 여러 方面에서 많은 業績을 남겼음에도 北韓에서는 反動作家라는 굴레에 갖혀 사라졌고, 南韓에서도 한동한 越北作家라는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잊혀졌다. 1988年 7月 19日 南韓政府의 月·拉北作家의 作品에 對한 解禁 措置 以後 硏究室에서 조심스럽게 進行되던 이태준에 對한 文學硏究가 갑작스레 活氣를 띠며 尙虛學會를 中心으로 相當한 水準의 成果物을 量産하게 되었다. [1]

2012年 11月 20日에 開通된 京元線의 白馬高地驛 이 李泰俊의 生家 터(철원읍 율이리 所在)와 比較的 隣接해 있어, 이 役의 名稱을 이태준逆으로 하자는 主張이 一角에서 있었으나, 2012年 9月 鐵原郡에서 住民들을 對象으로 進行한 設問調査 結果를 바탕으로 白馬高地逆으로 驛名을 定하였다.

主要作品 [ 編輯 ]

短篇小說 [ 編輯 ]

  • 〈오몽녀〉 (1925)
  • 福德房
  • 〈까마귀〉
  • 〈밤길〉
  • 〈영월영감〉
  • 〈토끼 이야기〉
  • 〈달밤〉 (1933) 中央
  • 〈産月이〉
  • 〈故鄕〉 (1933)
  • 〈不遇先生〉 (1933)
  • 〈패강랭〉 (1938)
  • 〈農軍〉 (1939)
  • 〈돌다리〉 (1943)
  • 〈解放前後〉 (1946)

長篇小說 [ 編輯 ]

  • 《第2의 運命》
  • 《王子 好童》
  • 《靑春 茂盛》
  • 《黃眞伊》
  • 《農土》
  • 《思想의 月夜》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민충환 (2016). “이태준론―短篇美學의 代價가 보여주는 現實의 單層”. 《文藝運動》 (132): 67-79.  
  2. 박헌호 (1999年 10月 30日). 《李泰俊과 韓國 近代小說의 性格》. 소명출판. 30-34쪽.  
  3. 《박헌영 評傳》, 안재성 지음. 실천문학사.
  4. 越北作家 李泰俊, 그는 自身의 小說이 藝術이기를 所望했다 , 강원일보.
  5. “越北文人 朴泰遠과 이태준” . 2013年 7月 23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 “日帝時代 最高의 文章家 李泰俊의 痛恨의 家族史” . 《KEYS》 (第7號). 2000年 11月.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8月 26日에 確認함 .  
  7. 《월간조선》 2000年 11月號, 최진이 <越北作家 李泰俊의 痛哭의 家族史>
  8. 遊仙戱 (2005年 7月 6日). “北岳스카이웨이를 걸어보자!” . 한겨레. 2016年 3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6月 10日에 確認함 .  
  9. 진보영 (2017). “이태준 小說의 創作方法 硏究”. 중앙대학교 大學院: 1-2.  
  10. 이태준 (2015年). 〈作家 年譜〉. 尙虛學會. 《이태준 全集 1 : 달밤 外》. 소명출판. 495-498쪽. ISBN   979-11-86356-19-7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