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자 (138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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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자 (金叔滋, 1389年 8月 24日 1456年 3月 2日 )는 朝鮮 初期의 文臣, 性理學 者, 哲學者 이자 敎育家로 本貫은 선산(善山), 初名은 者(滋), 字는 자배(子培), 號는 强豪(江湖)·江湖散人(江湖散人)으로 불렸다. 諡號는 門講(文康)이다. [1] 別稱은 靑數百石(淸水白石)이다. 선산 出身의 道學者이자 儒學者이며 士林의 道通으로 指目된다. 冶隱 吉再 (冶隱 吉再), 윤상 (別洞 尹祥)의 文人이다.

1414年 (太宗 14) 生員試에 合格하여 成均館 에서 受學하였고, 1419年 (世宗 1) 式年 文科 에 丙科로 及第하여 官職에 올랐으나, 本妻와의 離婚 經歷으로 要職에 任命될 때마다 거듭 司憲府 에서 論啓하였다. 아들 김종직 에 依하면 前妻의 아버지 한邊이 誣陷했다 하나, 司憲府 等에서는 그의 離婚 經歷을 繼續 問題삼았다. 以後 高齡 縣監 을 거쳐 1436年 (世宗 18年) 몸가짐을 바르게 한 선비를 推薦할 때 으뜸으로 뽑혀 世子友情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善山郡의 敎授官으로 나갔다가 改令縣監이 되고, 司宰監 不正에 任命됐다. 사예(司藝), 中訓大夫에 이르러 官職을 辭職하고 1456年 妻家인 密陽 으로 내려가 餘生을 보냈다. 官僚生活과 喪中에도 門下生을 길러냈으며, 아들이자 門下生인 김종직 을 통해 정몽주 의 學統을 後代에 傳授하였다.

事後 原從功臣 으로 法典에 따라 1階級 特進 追贈되어, 1457年 (世祖 3) 10月 中直大夫 (中直大夫) 藝文館 直提學 春秋館 記注官 (藝文館直提學兼春秋館記注官)에 追贈 되고, 1845年 (憲宗 11年) 議政府 領議政 권돈인 의 追贈 및 시호 下士 建議로 吏曹判書 兼 祭酒(吏曹判書兼祭酒)에 加增됐다. 1646年 (仁祖 24) 先山 駱峯서원(洛峯書院)에 祭享되고, 1787年 (正祖 11) 賜額이 내려졌다. 1905年 (光武 8) 居昌 男上 日遠征 (一源亭)에 配享되었다. 1871年 (高宗 8) 3月 16日 王命으로 門講(文康)의 證市(贈諡)가 내려졌다.

生涯 [ 編輯 ]

初期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金叔滋는 1389年 (高麗 昌王 1)에 慶尙道 先山 영봉리(迎鳳里, 現 龜尾市 선산읍 )의 祖父 김은유의 司祭에서 태어났다. 强豪先生實錄에 依하면 8月 24日 해시(亥時) 生이라 한다. 처음 이름은 자(滋)인데 뒤에 숙자(叔滋)로 고쳤다. 高麗 門下侍中 純忠功(順忠公) 김선궁 (金宣弓)의 後孫으로, 高祖父는 年(延), 曾祖父는 量溫感 令(良?監令) 狂位(光偉), 할아버지는 司宰監 令(司宰監令)으로 增 參議에 追贈된 김은유(金恩宥)이고, 아버지는 김관(金琯)으로 眞사이고 事後 增 戶曹參議와 增 參判에 追贈되었다. 어머니는 인동 劉氏(仁同兪氏)로, 高麗 末 奉善大夫 小부소윤((奉善大夫 少府少尹)을 지낸 유인귀(兪仁貴)의 딸이다.

할아버지 김온유는 高麗 말 冬眠圖鑑 判官 (東面都監判官), 司宰監 嶺을 歷任하고 事後 朝鮮朝에 와서 增 通政大夫 병조참의에 追贈되었다. 아버지 김관은 공민왕 때 進士試에 合格했으나 官職에 나가지 않고 進士에 머물렀다. 事後 好調 參議 (戶曹參議)에 追贈됐다가 다시 (贈) 嘉善大夫 兵曹 參判 (嘉善大夫兵曺參判)으로 追贈 되었다. 누이 一線金氏는 世宗 때 左軍事情(左軍司正)을 지낸 安東 下廻(下回) 出身 兪泓(柳洪)과 婚姻했으며, 그의 外조카 柳韶(柳沼)는 後日 西厓 유성룡 의 高祖父가 된다.

아버지 김관은 末年에 愛妾을 두었는데, 이 일로 어머니 忍冬劉氏 夫人과 葛藤했다. 어머니 柳氏는 그 일로 속을 태우다 死亡했다. 아들 김종직 에 依하면 金叔滋는 이를 가슴 아파하며 決코 妾을 두지 않았다 한다.

酉年, 少年 時節 [ 編輯 ]

그의 故鄕 영봉리는 15名의 科擧及第者를 輩出했다 하여, 마을에 장원방(壯元坊)이라는 別名이 있었다. 隣近 이문리, 노상리, 완전리 一帶에도 大科, 小科 等 이런저런 過去 及第者들이 多數 輩出되었다. 영봉리가 장원방이라는 別名이 있던 것은 그의 아들 김종직 이 紹介하면서 알려졌으며, 이중환 擇里志 에도 言及된다. 그의 어린시절에 對한 記錄은 傳하지 않으나, 아들 김종직 에 依하면 그는 7,8歲 무렵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强豪先生實錄에 依하면 9歲 때부터 讀書를 始作했다.

金叔滋는 12歲 때부터 吉再 (吉再)로부터 『小學』과 經書를 배우기 始作하였다. 易學에 밝은 當時 朝鮮 儒學者 別棟 윤상(別洞 尹祥)李 황간縣監으로 任命되어 내려와 있다는 消息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걸어가서 배움을 請하자 윤상은 찾아온 그의 熱意를 보고 『 主役 』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윤상은 다시 圃隱 정몽주 (鄭夢周)의 門下生 中 한 사람인 조용(趙庸)李 1392年 (太祖 1) 易姓革命 을 反對하다가 醴泉 에 流配되어 誤字, 조말생(趙末生)·背講(裵?) 等과 함께 조용을 찾아가 그를 師事하여 文人이 되었다. 金叔滋는 吉再 外에도 윤상의 門下에서 受學하면서 정몽주 의 學統을 이었다. 그밖에 그는 조용, 김말 等과도 交流하였다.

1402年 (太宗 2) 鄕校(鄕校)에 가서 글을 배웠다. [2] 1407年 (太宗 7) 開城 으로 가서 開慶寺마시(開京司馬試)에 應試했으나 落榜하였다. [2] 그는 曲韓韓氏 韓辯(韓變)의 딸과 結婚했으나 離婚하고 다시 私財感情 密陽 박홍신(朴弘信)의 딸과 再婚하였다. 金宗直에 依하면 한邊이 自身의 딸이 貢女로 끌려간다며 하소연하자, 그를 불쌍히 여긴 할아버지 김은유(金恩宥)가 한邊의 딸과 그를 婚姻시켰다 한다. 그러나 이는 두고두고 論爭거리가 되었다.

數學科 過去 及第 [ 編輯 ]

1414年 (太宗 14) 봄 禮曹判書 黃熙 (黃喜), 禮曹 參議 (禮曹左參議) 權遇 (權遇), 成均館 大司成(成均大司成) 이맹균(李孟畇) 等이 主管하는 司馬試에서 生員試 2等으로 合格하고, 바로 成均館 에 들어가 修學했다. 司馬試에 合格한 後 이름을 字에서 숙자(叔滋)로 고쳤다. 成均館 修學할 때 문정(文貞) 조용(趙庸), 문숙(文肅) 변계량(卞季良), 參判 박이창(朴以昌), 提學 조상치(曺尙治) 等이 庚戌(經術)과 문행(文行)에 뛰어나다며 推薦을 받았다.

1417年 (太宗 17) 봄 重成均試(中成均試)에 一等 第一인(第一人)으로 合格하였으나, 그 해의 會試(會試)에는 落榜하였다. [3] 1418年 (太宗 18年) 아버지 김관의 名으로 本妻 韓氏와 離婚, 親庭으로 돌려보냈다. 1419年 (世宗 1) 安東 鄕市 (安東鄕試)에 第2等으로 合格하여 漢陽 으로 上警, 1419年 (世宗 1) 式年 文科 에 甁과 1等으로 及第하였다. 將仕郞 權知 成均館 學諭에 任命되거 故鄕으로 돌아왔다.

이때 前妻인 韓氏와 離婚하였다. [2] 前妻 韓氏의 姊妹의 男便 김주(金宙)는 醫術 재주가 있었는데, 金週는 성주牧師 이상선(李相善)에게 그가 過去 에 合格한 後 아내를 出處했다고 告하였고, 이는 그대로 藝文館 에 報告되었다. [2]

官僚 生活 [ 編輯 ]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1420年 봄 박홍신의 딸 密陽朴氏와 再婚했고, 그해 12月 學諭(學諭)에 任命되었다. 後日 그는 後妻의 親庭이 있는 密陽郡 부북면 대동리(現, 密陽市 부북면 제대리)에 定着, 그곳에 追遠再 를 짓고 居處로 삼았다. 後日 아들 김종직 이 태어난 김종직 生가지가 된다. 1421年 봄 學諭에 다시 任命되고 이듬해 1月 漢陽 으로 올라가 官職을 始作하였고, 史官(史官)에 任命되었다.

1422年 (世宗 4年) 5月 從仕郞으로 昇進, 成均館 학록이 되었다. 아들 金宗直에 依하면 1423年 金株價 漢城으로 간 뒤, 丈人 韓辯(韓變)을 불러서 司憲府 에 訴訟을 提起하였다고 한다. 司憲府 에 召喚된 그는 對質審問을 받았으며 落職(落職)당하고 故鄕으로 내려왔다 한다. [2] 高齡縣監을 거쳐, 1423年 (世宗 5) 7月 성균 直學(成均直學)李 되었을때, 司憲府 世宗大王 에게 그가 子息이 있는 糟糠之妻를 망령되이 庶孼(庶?)이라 일컬어 아무 까닭도 없이 버려 離別하였으니, 刑律에 依據하면 棍杖 80臺를 치라는 契를 올렸다. [4] 김종직 에 依하면 前妻의 아버지 한邊이 誣陷했다 한다. 이 일로 辭職퇴하고 물러났다. 1424年 慶尙右道 處置社(慶尙右道處置使) 이순몽(李順蒙)李 禮(禮)를 갖추어 그를 幕僚(幕僚)로 招聘, 巨濟島 山달포(山達浦)로 가서 3年間 지냈다.

1427年 (世宗 9年) 경상좌도 處置社(慶尙左道處置使) 金乙新(金乙辛)李 禮를 갖추어 請하여, 그의 幕僚가 되어 釜山 釜山浦 (釜山浦)로 갔다. 1431年 7月 母親 柳氏가 죽어 密陽에서 奔喪했는데, 8月 아버지도 死亡하였다. 그는 할머니 金氏夫人 墓所 下에 殯所를 마련하였다. 以後 3年間 卜相하였다. 1433年 가을 喪服을 벗고 密陽 으로 돌아왔다. [2] 1434年 경상우도 兵馬節制使(慶尙右道兵馬節制使) 조비형(曺備衡)李 禮를 갖추어 請하자, 幕僚가 되어 馬山 합포(合浦)로 갔다.

成均館 在職 [ 編輯 ]

1435年 (世宗 17) 9月 에 漢城으로 돌아가 그해 10月 成均館학록에 復職했으며 [2] , 12月 에 虐政(學正)으로 昇進하고, 또 通事랑(通仕郞)으로 다시 昇進, 成均館 進德博士 兼 養賢庫 錄事(成均館進德博士兼養賢庫錄事)에 任命되었다. 1436年 에 經明行修(經明行修)의 선비 推薦에서 첫 番째로 꼽혀 世子友情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後 先山의 敎授官으로 나갔다가 改令縣監이 되었다. 9月 務功郞 成均館 박사겸 養賢庫 乘이 되었다. 1437年 12月 宣務郞 에 拜謝하고 繕工監 主婦에 任命되었으며, 이듬해 2月 禮賓寺 主婦, 6月 內資寺 主婦 等을 歷任했다.

그는 官僚生活 外에도 小學 부터 經學 等 學問을 가르쳤고, 아들 김종직 外에도 탁중(卓中), 이재인 , 면재 손조서(勉齋 孫肇瑞), 노촌 이약동(老村 李約東) 等의 文人이 그의 門下에서 輩出되었다. 金叔滋의 文人 中에서 優秀한 弟子 9名은 世稱 아홉 현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1438年 (世宗 20) 10月 內資寺 主婦(內資侍主簿)로 在職 中 西燕 亭子(書筵正字) 職에 兼任되었다. 이때 司諫院 左正言 이예장(李禮長)으로부터 前에 糟糠之妻(糟糠之妻)를 버리고 罪를 얻어 沈滯되었다가, 이제 罪를 容恕 받고 다시 벼슬길이 열렸사오나 잘못을 뉘우치는 行跡을 듣지 못하였다는 批判을 받았다. [5] 以後 集賢殿 主婦(注簿)로 옮겼다.

1439年 (世宗 21) 世宗大王 이 政丞들에게 命하여 經學에 밝고 行實이 닦여진 사람을 뽑아서 事由(師儒)의 자리에 두도록 하자, 政丞들로부터 數千(首薦)으로 推薦을 받아 卽時 成均館 主婦 兼 世子友情者(成均注簿兼世子右正字)에 任命됐다. 그런데 그 무렵 當時 司諫院 사간 박중림(朴仲林)의 누이가 막 自己 男便에게 이혼당해 쫓겨났다. 박중림이 한참 憤心을 품고 있던 中, 그 憤心을 그에게 옮겨 出處(出妻)韓 일을 上疏하여 論難이 됐고 그는 友情者에서 파면당했다. 成均館 에 勤務하던 中 어느 時點에 風習(風濕, 류머티즘 )에 걸렸다 한다. 風習病은 낫지 않고 繼續 그를 괴롭혔다. 廬墓살이를 하면서 風習은 더 심해졌다.

1439年 (世宗 21) 4月 李朝 에서 그를 東部 敎授官(東部敎授官)으로 發令하였다. 그러나 司憲府 에서 離婚한 일로 繼續 彈劾 喪主를 올려, 王命으로 事由錄(師儒錄)에서 削除당하였다. [6] 司憲府 에서는 그를 推薦한 集賢殿 , 李朝 官吏들의 處罰도 같이 常住했으나 世宗大王 이 拒絶하였다. [6] 그해 5月 에 中部 영(中部令)으로 任命되었다.

地方官 在職 [ 編輯 ]

1439年 (世宗 21年) 6月 에 先山 敎授官(善山敎授官)으로 나갔다. 1440年 (世宗 22年) 7月 宣敎郞 (宣敎郞)으로 昇進했고, 1441年(世宗 23) 1月 金海敎授官 老胡(盧浩)와 補職償還 變更되어 金海 로 내려갔다. 그가 先山敎授官 在職 中이던 1441年 老胡(盧浩)가 金海 敎授官(金海敎授官)이 되었는데, 自己 어머니가 先山에 있는 關係로, 그에게 글을 보내 서로 자리를 바꿔 주기를 請하자, 그의 事情을 봐주어 任地를 서로 바꿔 金海로 내려갔다.

1442年 2月 南部令(南部令)李 되었다가 特別히 同伴職을 받아 承義校尉(承義校尉)에 祭需되고,중군섭부사직 兼 成均館 主婦(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그해 다시 成均館 主婦(成均館主簿) 兼 男學校樹冠(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月 承訓郞(承訓郞)李 되어 高齡 縣監 (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年 2月 承義郞이 되었다가, 地方의 守令들의 職級을 1階級씩 降下한다는 命에 따라 降任되었다.

1445年 1446年 의 凶年己에 境內 百姓들을 救濟하여 人望을 얻었다. 水災와 겨울 한재, 暴風, 雨雹 等의 災害가 있으면 반드시 廚房長에게 自身이 먹는 飮食의 가지 數를 줄이게 하였고, 監獄의 罪囚 中에 가벼운 罪를 지은 사람은 모두 赦免해주었다. 日蝕과 月蝕에는 몸소 스스로 흰 옷을 입고 홀을 받들고 官廳 뜰에 섰다가 日蝕과 月蝕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그만두었다. 每年 年例 行事로 朝廷에 올리는 貢物은 모두 官廳에서 스스로 準備하게 했고, 百姓들에게 따로 거두지 않았다. 또한 結婚 할 때를 놓친 處女와 總角은 돈과 物資를 넉넉히 주어 시집보내주고 장가보내주었다. 이렇게 하자 民心이 安定되고 盜賊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가까이 이웃한 10餘 고을도 모두 그 恩澤을 입었는데, 隣近 住民들은 그를 靑數百石(淸水白石)이라 呼稱하였다.

1447年 (世宗 29) 10月 다시 承義郞으로 還給되고, 任期滿了로 高齡縣 을 떠나게 되자 百姓들이 去思碑(去思碑)를 세워주었다. 1447年 11月에 成均館 主婦 兼 男學校樹冠, 1448年 7月 校書館 敎理(守校書館校理)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前提敬差官(田制敬差官)에 任命되어 全羅道 南原 , 玉과 (玉果), 長興 , 順天 , 長興 等을 巡視하고 그해 10月 에 奉訓郞(奉訓郞)으로 昇進한 뒤, 12月에 都城으로 되돌아왔다. [2] 그해 12月 田品(田品) 매기는 일을 맡아보았다.

1450年 (文宗 卽位) 銀風眩 이 풍기군으로 昇格되자, 그해 8月 13日 지風紀軍事(知豊基郡事)로 發令, 赴任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1452年 (뭉種 2年) 8月 朝奉大夫(朝奉大夫)로 昇進했다가 그해 10月 朝散大夫(朝散大夫)로 昇進했다.

1453年 (端宗 元年) 12月 司宰監 否定, 54年 2月 成均館 사예(司藝)를 거쳐 8月 奉列大夫로 昇進하여 星州郡 敎授官이 되어 내려왔다. 成均館 勤務 中 發病한 風習(風濕)李 廬墓살이 하면서, 땅에 거적깔고 베고 生活하다가 심해졌다. 甚해진 病으로 인해 地方官職을 自願하자 許諾받았다. 그해 12月 奉正大夫(奉正大夫)로 昇進, 中訓大夫(中訓大夫)로 昇進되었으나, 1455年 12月 辭職하고 1456年 妻家가 있는 密陽 으로 내려갔다.

1456年 2月 아들 김종석의 科擧 及第 消息을 接했으나 같은 달 病席에 누웠다. 그 해 3月 2日 密陽郡 부북면 대동리(大洞里) 正寢에서 病으로 죽었다. 1455年 (世祖 1年) 12月 12日 世祖反正 에 參與하거나 寄與한 官僚들을 左翼 原從功臣 으로 褒賞할 때 左翼 原從功臣 3等에 책록되었다. 그는 世祖 에 依해 左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지만 官職을 辭退하였다. 그는 世祖 밑에서는 벼슬하지 않겠다고 落鄕을 擇했다. [7] 著書로는 1934年 後孫 김진식(金鎭植)李 엮고 整理한 《강호실機 (江湖實記)》가 傳한다.

16世紀에 士林 에 依해 確立된 都統(道統)의 系譜에서 吉再의 學問을 아들 김종직 (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性理學 의 系譜 中, 程朱學 (程朱學)을 發展시켰다. 그는 孝誠이 至極해 『小學』의 法度를 따라서 어버이를 모셨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를 권태롭게 여기지 않아, 親喪(親喪) 中에 廬幕 곁에 書齋를 만들어 朝夕을 올린 뒤에 가르쳐, 修學하는 이에게 感動을 주었다 한다.

가르칠 때에는 처음에 『艟艨수지(童蒙須知)』 儒學者設定續篇(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暗誦시킨 다음 『小學』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 梟獍 』·『 四書五經 』·『 資治通鑑 』 및 諸子百家의 筍을 밟았다.『소학』을 앞세우면서 實踐을 重視하는 學問 姿勢는 高麗 의 儒學者 吉再 에게서 물려받았으며, 16世紀에 이르러 士林 사이에 一般的인 것이 되었다. 아들 김종직 이 쓴 선공기年 第2篇에 依하면 집안이 貧寒하여 不得已 3月場으로 치뤘고, 그해 12月 에 自身의 外祖母 閔氏의 墓所 西쪽에 葬禮를 치렀다 한다.

事後 [ 編輯 ]

屍身은 追遠再 近處 밀양부 西쪽 6里 帶同村(大洞村, 現 慶尙南道 密陽市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 厚祿) 左側 고암산(高巖山) 分貯穀(粉底谷) 第2强 新座元(辛坐原) 언덕에 埋藏되고, 後日 그의 夫人 朴氏 墓所가 그의 墓 바로 뒤便에 造成되었다. 否認 密陽朴氏의 墓所 뒤에 墓所 1期 건너便에는 孫子이자 김종직 의 아들 承事郞 김숭년의 墓所가 造成되었다. 墓所에는 石物과 長明燈, 碑石 外에 20世紀 以後에 세운 墓道비가 있고, 뒤便 夫人의 墓에는 舊 碑石과 20世紀 以後에 다시 세운 烏石 碑石이 兩쪽에 서 있다. 그의 家族 墓域 앞山 너머에는 아들 果糖 김종유의 墓가 造成되었다. 墓域은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 厚祿으로, 密陽市內에서 무안면 方向의 地方도 1080番道路邊, 마흘리 고개로 넘어가기 前 道路 위쪽 山에 所在海 있다.

1457年 (世祖 3) 10月 原從功臣 이었으므로 法典에 따라 1階級 特進 追贈되어, (贈) 中直大夫 (中直大夫) 藝文館 直提學 春秋館 記注官 (藝文館直提學兼春秋館記注官)에 追贈 되었다. [2] 以後 士林 의 學脈, 道通의 淵源을 言及할 때 그는 정몽주 , 吉再 의 道通을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 等에게로 이어준 人物로 여러 番 膾炙되었다.

1489年 (成宗 20年) (贈) 資憲大夫 戶曹判書 兼 지 春秋館 社(資憲大夫 戶曹判書 兼 知春秋館事)에 追贈 되었다.

1646年 (仁祖 24) 先山의 駱峯서원(洛峯書院)에 祭享되었고, 1786年 (正祖 10) 김광형(金光泂)을 小斗로 하는 輕傷 , 忠淸 , 원춘(原春), 京畿道 等 4度 儒生의 死厄 下士 建議로 이듬해 賜額이 내려졌다. 1905年 (光武 8) 設立된 居昌 남相議 日遠征 (一源亭)에는 아들 김종직 및 스승 吉再 , 정몽주 , 기타 김굉필 , 정여창 等과 같이 配享되었다.

1845年 (憲宗 11) 4月 25日 議政府 領議政 권돈인 (權敦仁)가 幽玄 禮遇 追贈 및 시호 下士 建議로, 그해 6月 2日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지義禁府春秋館社(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春秋館事)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成均館 祭酒 五衛都摠府 都摠管(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成均館祭酒 五衛都摠府都摠管)에 加增되었지만 諡號는 내려지지 않았다. 高宗 議政府 右議政 조두순 이 그의 諡號를 請하는 上疏를 올려 1871年 (高宗 8) 3月 16日 高宗의 王命으로 시호 (諡號)가 追贈 되었는데, 道德朴問曰門 淵源流通왈강(道德博聞曰文 淵源流通曰康)이라 하여 門强攻(文康公)李 되었다.

咀嚼 [ 編輯 ]

  • 《강호실機 (江湖實記)》
  • 이준록, 그의 行跡을 整理한 冊

活動 [ 編輯 ]

國家觀, 學問觀 [ 編輯 ]

아들 金宗直에 依하면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土地가 있고 百姓이 있으면 또한 우리 留學을 實行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地方官으로 在職하며 迷信 風速을 革罷하고 六行(六行)을 奬勵하는데 힘썼다. 봄과 여름마다 自身을 遂行하는 始終 數를 最大限 줄이고, 農地를 直接 다니며 農事를 監督하였다. 百姓 中에 種子(種子)가 없는 이에게 種子를 빌려주고, 먹을 것이 없는 百姓에게는 食糧을 賙恤해 주었다. 부지런한 百姓을 慰勞하는 한便 게으른 百姓을 懲戒하였다. 그리고 官廳의 빈 땅에 뽕나무 를 심어, 百姓들이 와서 苗木(苗木)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各 고을 守令(守令)들은 모두 公金流用 疑惑을 두려워하였기에 義昌(義倉)의 穀食이 떨어지면,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을 보기만 하고 救濟하지 않고 放置하였다. 그러나 그는 "옛날에 韓蘇(韓韶)는 丘壑(溝壑)에 뒹구는 百姓들을 살리고서 웃음을 머금고 땅속에 들어가고자 하였고, 汲黯(汲?)은 詔勅(詔勅)을 假稱해 官昌을 열어 百姓을 救濟하면서 處罰받는 것을 辭讓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百姓을 살리는 데에 마음을 둔다면 어찌 法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하고는, 郡守(軍須)를 몽땅 들어내어 百姓들에게 나누어주어 救恤하였다.

敎授學習 方法 [ 編輯 ]

그는 學生, 선비를 가르칠 때에는 艟艨수지(童蒙須知), 儒學者設定續篇(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暗誦, 이해시킨 다음 小學(小學)을 가르쳤다. 弟子가 小學의 뜻을 理解하면 孝經(孝經), 四書五經(四書五經)을 익히게 했으며, 그 뒤에 資治通鑑(資治通鑑), 및 諸子百家를 講義하였다.

當時 高麗 朝鮮 에서는 父母, 家族의 喪事 때에는 모든 일을 中斷하고 三年喪, 1年喪을 했다. 그러나그는 自身의 家族의 初喪 때에도 學生을 받아들여, 廬幕 곁에 書齋를 만들어 朝夕을 올린 뒤에 가르쳐 學業을 받으러 찾아오는 者를 받아들였다.

嶺南士林의 發興 [ 編輯 ]

金叔滋는 스승 吉再의 가르침에 確信했고, 그걸 弟子들에게 가르쳤다. 김종직 은 아버지 金叔滋의 이 가르침을 平生을 두고 지켰다. 어릴 때부터 冊 目錄을 定해 놓고, 그 順序대로 읽는 習慣을 따랐다고 한다. ‘小學’을 中心으로 한 이러한 實踐 强調 學風은 김숙자- 김종직 을 거쳐 16世紀에 이르러 士林 사이에 一般的인 것이 될 程度로 큰 說得力을 發揮했다. 뒤에 嶺南士林派의 큰 學者로 드러난 김굉필 은 스스로 ‘소학동者’라고 指稱하면서 30歲까지 ‘小學’에만 穿鑿했을 程度였다. 吉再 에서 金叔滋를 거쳐 김종직 에 이르는 程朱學 (程朱學)의 學統이 이렇게 始作되었다.

吉再 는 많은 弟子를 길러 냈는데, 가장 먼저 立地를 세운 이가 김숙자였다. 以後 그의 弟子들이 續續 中央政界에 進出했다. 特히 世祖 때부터 金叔滋와 김종직 父子 等 여러 新進 士類가 過去 及第 等을 통해 中央政治 舞臺로 進出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强力한 勢力을 形成하였다. 이른바 ‘嶺南士林派 ’의 登場이었다. 以後에 이중환 이 ‘ 擇里志 ’를 통해 “朝鮮 人材의 半은 嶺南에서 나왔고, 嶺南 人材의 半은 先山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김숙자 以後에 ‘嶺南士林派 ’의 發興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8]

김굉필 (金宏弼), 정여창 (鄭汝昌)은 그의 아들 김종직 의 文人이면서, 金叔滋의 또다른 門下生인 면재 또는 格再 손조서에게서도 修學했다.

家族 關係 [ 編輯 ]

  • 曾祖父 : 김광위(金光偉)
    • 할아버지 : 김은유(金恩宥)
    • 할머니 : OO金氏(金氏), 山원동정 김련(金鍊)의 딸
      • 伯父 : 金巖(金巖)
      • 伯父 : 김선웅(金善雄)
      • 아버지 : 김관(金琯, 1359年 ~ 1431年 8月 1日 )
      • 어머니 : 忍冬劉氏(仁同兪氏, ? ~ 1431年 7月 21日 ) 유인귀 딸
        • 동생 : 김숙치(金叔淄)
        • 누이 : 先山金氏, 류홍(柳洪)의 妻, 西厓 유성룡 (西厓 柳成龍)의 5代祖
      • 前妻 : 谷山韓氏(谷山韓氏), 韓辯(韓變)의 딸(2男1女)
        • 長男 : 김종보(金宗輔)(滿山縣監)
        • 長孫 : 金的(金績)
        • 利子(二子) : 김종익(金宗翼)
        • 子婦 : 俳優의 딸
        • 딸 : 一線金氏
        • 사위 : 김중로(金仲老), 喪主인
        • 딸 : 一線金氏
        • 사위 : 강척(康?), 彰信校尉 歷任
      • 後妻 : 密陽朴氏(密陽朴氏, 1400年 11月 28日 ~ 1479年 12月 21日 , 私財感情 박홍신(朴弘信)의 딸 (3男 3女)
        • 三南 : 金鍾奭(金宗碩, 1423年 11月 ~ 1460年 3月 )
        • 사남(四男):김종유(金宗裕)
        • 오남(五男): 김종직 (金宗直)佔畢齋
        • 子婦 : 조계문의 딸
        • 子婦 : 門隙正義 딸
        • 딸 : 一線金氏
        • 사위 : 민제(閔除)
  • 妻父 : 박홍신
  • 장某 : 여흥閔氏, 三司使 左尹 民위(閔暐)의 딸
    • 妻祖父 : 박천경(朴天卿)

기타 [ 編輯 ]

아들 김종직 의 선공기年에 依하면 그는 아들을 장가들이고 딸을 시집보낼 때면, 반드시 相對方이 世族(世族)인지, 그리고 家訓(家訓)이 있는 집안인지를 알아보고 確認했다. 그리고 婚姻 約束이 이미 決定된 다음에는 누구도 말하지 못하게 막았다 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民族文化大百科》,김숙자(金叔滋), 韓國學中央硏究院
  2. ?畢齋集?尊錄 ?畢齋集?尊錄 (上) 子通訓大夫前善山都護府使宗直撰, 先公紀年第二
  3. ?畢齋集?尊錄 ?畢齋集?尊錄 (上) 子通訓大夫前善山都護府使宗直撰, 先公紀年第二
  4. 世宗實錄 21卷, 1423年(世宗 5年, 明 零落 21年) 7月 4日 壬午 3番째記事, "성균 直學 金叔滋를 處罰하다"
  5. 世宗實錄 83卷, 1438年(世宗 20年, 名 正統 3年) 10月 26日 丁丑 2番째記事, "淫祀는 本宮의 隱密한 곳에서 行하도록 하다"
  6. 世宗實錄 85卷, 1439年(世宗 21年, 名 正統 4年) 4月 14日 辛卯 8番째記事, "金叔滋를 事由錄에서 削除하다"
  7. 이이화, 《그대는 敵인가 同志인가》 (김영사, 2009) 49페이지
  8. 嶺南士林의 基盤을 構築한 김숙자(金叔滋) 영남일보(2013.06.28) 記事 參照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