奎章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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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章閣
奎章閣
基本 情報
位置 서울特別市 鍾路區 와룡동
座標 北緯 37° 34′ 44.5″ 東經 126° 59′ 22.2″  /  北緯 37.579028° 東京 126.989500°  / 37.579028; 126.989500
狀態 戰時 中
氣功 1776年 3月
用度 王室 圖書館   · 學術 및 政策 硏究機關
Map
昌德宮 後援 부용지 周邊에 세워진 奎章閣

奎章閣 (奎章閣, 中世 韓國語 : ㅋㆋㅇ쟈ㅇ각? )은 朝鮮 後期의 王室 學問 硏究 機關이자 王室 圖書館 으로, 只今의 國立中央圖書館 格이다. 歷代 임금의 詩文과 咀嚼, 고명(顧命)·儒敎(遺敎)·仙步(璿譜) 等을 保管하고 蒐集하였다.

歷史 [ 編輯 ]

設立 計劃 [ 編輯 ]

朝鮮 世祖 때에 양성지 가 賃金의 詩文을 保管할 奎章閣을 두기를 請하였으나 [1] , 實施하지는 않았다. 以後 朝鮮 肅宗 때에는 작은 殿閣을 마련하여 奎章閣이라 이름하였으나 [2] , 職制는 갖추지 않았다.

設立 [ 編輯 ]

正祖 가 卽位한 뒤인 1776年 11月 5日 (正祖 1年 陰曆 9月 25日 )에 昌德宮 錦園 의 北쪽에 奎章閣을 세우고, 提學·直提學·直角(直閣)·대교(待敎)·檢書官(檢書官) 等의 官吏를 두었다. [3] ‘圭璋’(奎章)은 임금의 詩文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奎章閣은 그 이름대로 歷代 王의 글과 冊을 蒐集 保管하기 위한 王室 圖書館의 役割을 하였다. 正祖는 여기에 祕書室의 機能과 文翰(文翰) 機能을 統合的으로 附與하고 過去 試驗 의 主管과 文身 敎育의 任務까지 附與하였다. 奎章閣은 朝鮮 後期의 文運을 불러일으킨 中心機關으로 많은 冊을 編纂했으며, 여기에는 實學者와 庶孼 出身의 學者들도 採用되었다. 主要 人物은 朴齊家, 柳得恭, 李德懋 그리고 서이수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正祖는 奎章閣 制度를 整備하여 自身을 支持하는 精銳 文臣들로 親衛 勢力을 형성시켜 “愚問지치(右文之治)”와 “作認知化(作人之化)”를 奎章閣의 2代 名分으로 내세우고 文化 政治를 標榜하였다. [4] '愚問지치'는 文治主義와 文化國家를 追求하는 政策으로, 正祖는 많은 冊을 出版하도록 하였다. [4] '作認知化'는 人材를 養成하겠다는 意志 表明으로, 奎章閣에서 正祖가 儒生들을 모아 그 中에서 젊은 文臣(文臣)을 뽑고, 뽑힌 臣下들을 自身이 直接 가르치고 試驗을 보게해서 評價하였다.정조가 不時에 問題를 내고 맞히지못하는자는 부용지안의 작은 섬에 流配를 보내기도 하였다. [4]

그러나 正祖가 奎章閣을 設置한 目的은 當時 王權을 威脅하던 陟里(戚里)·宦官의 陰謀와 橫暴를 누르고, 學問이 깊은 臣下들을 모아 傾斜를 討論케 하여 政治의 得失과 百姓의 疾苦(疾苦) 等을 살피게 하는 데 있었다. 또한 文敎를 振興시키고 墮落한 當時의 風習을 純化시키려는 目的도 있었다.

異說 [ 編輯 ]

1781年 (正祖 5年) 闕內各司 地域으로 移設되었다.

改編 [ 編輯 ]

1894年 甲午改革 宮內府 傘下로 再編되었다가, 1910年 庚戌國恥 로 廢止되었다. 解放 以後에 一部 남아 있는 圖書가 서울대학교 奎章閣 (現 서울대학교 奎章閣韓國學硏究院 [5] )으로 移管되었다. 요즈음의 國史編纂委員會 나 敎育諮問館에 該當한다.

奎章閣의 構成 [ 編輯 ]

奎章閣에는 文官 總 6名, 雜職 總 35名, 吏屬 總 86(82, 86)名이 있었다.

品階 官職 庭園 備考
(正1品) 大提學(大提學) [6]
種1品
情2品
種2品
提學(提學) 總 2名
種2品
情3品 堂上官
直提學(直提學) 總 2名
情3品
種3品
情4品
種4品
情5品
種5品
情6品
種6品
直角(直閣) 總 1名
情5品
種5品
情6品
種6品
情7品
種7品
大橋(待敎) 總 1名
文官 總員 總 6名

雜職(雜職)으로 閣監(奎章閣 廳舍 管理) 2원, 私權(圖書 및 文獻 總括) 2원, 檢書官(圖書 管理) 4원, 英첨(文獻의 이름標 管理) 2원, 四子管(文書 筆師 管理) 8원, 화사(그림 資料 管理) 10원, 甘薯(書籍 數量 管理) 6원, 檢律(法律書籍 管理) 1원과 臨時職으로 兼檢書(檢書官 補佐)가 있었다.

行政 實務를 擔當하는 吏屬으로는 서리 14人(大典通編에서 10人을 두었으나 大典會通에서 다시 14人으로 復元), 敍事 2人, 兼리 6人, 情緖조보리(朝報의 備置와 管理) 2人, 閣童 10人, 職 2名, 大淸職 2名, 司令 15名, 引陪 4名, 間倍 4名, 조라치 2名, 紡織 2名, 水攻 2名, 軍事 7名, 驅從 6名, 政院使令 2名, 闕外大領司令 1名, 近仗軍士 2名, 檢書官司令 1名이 있었다.

外奎章閣 [ 編輯 ]

1782年 江華島 外奎章閣 (外奎章閣, 外角)李 完成되자 元來의 奎章閣을 내奎章閣(內奎章閣, 內閣)으로 이르고, 書籍을 나누어 保管하도록 하였다. [7] 1866年 丙寅洋擾 가 일어나면서 외규장각이 消失되고, 書籍 프랑스 로 掠奪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意義 [ 編輯 ]

歷代 임금의 詩文과 咀嚼, 고명(顧命)·儒敎(遺敎)·仙步(璿譜) 等을 保管하고 蒐集하였다는 點에서는 國立中央圖書館 과 비슷하며, 《 日省錄 》 等의 특정한 主題의 記錄物을 刊行하는 일도 擔當했다는 點에서는 오늘날의 國會 圖書館 과 비슷하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世祖實錄》 卷30, 世祖 9年(1463年) 5月 30日(戊午)
  2. 《正祖實錄》 卷13, 正祖 6年(1782年) 5月 29日(乙丑) 2番째 記事
  3. 《正祖實錄》 卷2 正祖 卽位年 9月 25日 繫辭(癸巳)일 兆.
  4. 오주석 (1998). 《團員 金弘道》. 열화당. 37쪽.  
  5. 서울대학교 奎章閣韓國學硏究院 웹사이트
  6. 提學이 情1品의 領議政 , 左議政 , 右議政 官職에 任命되면 大提學으로 職銜을 올린다는 規定이 《大典會通》에 있었으나 實際 適用된 事例는 없다.
  7. 《正祖實錄》 卷13 正祖 6年 2月 14日 神社(辛巳)일 兆.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