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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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任士洪
前 조선국 兵曹判書
(前 朝鮮國 兵曹判書)
任期 1502年 ~ 1506年
君主 朝鮮 燕山君 易融

身上情報
出生日 1445年
出生地 朝鮮 漢城府
死亡日 1506年 陰曆 9月 2日 (享年 62歲)
死亡地 朝鮮 漢城府 에서 暗殺(殺害)됨.
國籍 朝鮮
學歷 1465年(世祖 11) 謁聖文科 及第
經歷 文身, 作家, 外戚, 政治人, 思想家
正當 勳舊派 勢力
父母 임원준 (簿)
配偶者 本部인 全州 李氏 ( 寶城郡 合意 딸)
그 外 妾室 1名
子女 膝下 4男 2女(그 中 長男 임광재 , 次男 임희재 , 3男 임문재 , 4男 임숭재 )
親姻戚 임견 (祖父)
寶城郡 離合(匠人)
南치新(外叔父)
宗敎 儒敎 ( 性理學 )

임사홍 (任士洪, 1445年 ~ 1506年 陰曆 9月 2日 )은 朝鮮 時代 前期의 文臣이자 外戚, 思想家, 性理學 者이다. 本貫은 풍천 初名은 賃事의 (任士毅), 者(字)는 異議(而毅)이다. 신수근 等과 함께 廢妃 尹氏 四史 事件을 연산군 에게 알려 甲子士禍 의 빌미를 提供한다. 淫書 로 出仕한 뒤 司宰監 事情과 社稷을 거쳐 1465年 (世祖 11年) 謁聖文科에 及第하여 官職은 崇祿大夫 知中樞府事(崇祿大夫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作爲는 풍성군(豊城君)이다.

朝鮮 王室의 姻戚이자 겹査頓으로 효령대군 의 孫女이며 寶城郡 의 딸인 全州 李氏와 結婚하여 王室의 姻戚이 되었으며, 그 아들 임광재 는 睿宗의 딸 賢淑公主 와 婚姻하고, 다른 아들 임숭재 는 成宗의 딸 휘숙翁主 와 婚姻하여 두 임금의 査頓이기도 했다. 다른 아들 임희재 士林派 政治人이었다. 官僚生活 初盤 한명회 를 糾彈하는 等 所信으로 活動하다가 1478年 의 흙비 問題를 놓고 금주와 謹愼을 主張하는 臺諫에 對해 대단하지 않은 變故에 술을 禁止할 必要가 있느냐고 批判했다가 言官들과 갈등하다 12年間 流配上활을 했다.

以後 司譯院 承文院 에서 漢語 를 가르치다가 吏曹判書 (吏曺判書), 兵曹判書, 崇政大夫가 되었다가 1504年 풍성군에 封해지고, 右參贊 , 左參贊 을 거쳐 崇祿大夫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한 때 三政丞 의 物望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中宗反正 直後 殺害된 뒤 20日만에 剖棺斬屍當했다. 글재주에 能하여 많은 神道碑와 墓碑銘을 썼고, 著書와 作品을 남겼으나 墓碑銘을 除外한 作品들은 大擧 失傳되었다.

그 뒤 아들 임숭재 연산군 의 寵愛를 얻어 政界에 復歸했다. 以後 廢妃 尹氏 追崇 問題를 놓고 士林派 (士林派)와 갈등하던 연산군 에게 유자광 , 신수근 等과 함께 長興郡夫人 신氏 와의 相逢을 周旋한다. 士林派 를 해치기 위해 甲子士禍 를 일으켰다는 說이 通說로 提起되어 왔으나 甲子士禍 때는 그를 辯護하던 勳舊派 人士들이 大擧 犧牲되었고, 직접的인 怨恨關係에 있는 人物은 妻조카 이심원 만이 唯一했으므로 1970年 代 以後 宮中派臺 府中派의 葛藤이라는 새로운 視角이 擡頭되었다. 셋째 아들 임희재 김종직 의 弟子였고, 연산군 中宗 때의 士林派 政治人 南袞 (南袞)은 그의 外四寸 동생이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初期 活動 [ 編輯 ]

任士洪은 1445年 議政府 左贊成 임원준 남규 (南珪)의 딸인 貞敬夫人 宜寧 南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규 (南珪)는 開國 功臣 南在 의 後孫이며, 연산군 中宗 때의 士林派 政治人인 指定 南袞 의 親할아버지로, 그는 南袞 의 外四寸 兄이기도 했다.

그러나 南袞은 任士洪을 안좋게 보았는데, 中宗 김안로 를 除去하면서 김안로 가 임사홍보다도 더 邪惡한 人間이라 指目했다. "임사홍(任士洪)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怒氣(盧杞)의 재주도 안로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김안로는 임사홍과 怒氣를 합쳐 한몸이 된 사람이다. 우리들이 어떻게 끝까지 그 사람의 手足(手足)을 牽制할 수 있겠는가? 그가 하루를 밖에 있으면 調整이 하루가 便安하고, 한 해를 밖에 있으면 朝廷이 한 해가 便安할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滿足하겠는데 ( ‘任士洪愚人也, 盧杞之才, 不及安老。 安老則合任、盧而爲一身者也。 吾輩豈能終?此人之手足哉? 〔彼在外一〕 日, 則朝廷安一日, 在外一年, 則朝廷安一年。 如是而足矣。 ) [1] "라는 것이다.

처음 이름은 社의(士毅)였으나 뒤에 社洪(士洪)으로 改名하였다. 효령대군 의 孫女딸이자 寶城郡 離合 의 딸인 全州 李氏와 結婚하여 王室의 姻戚이 되었다. 그를 非難한 이심원 寶城郡 의 아들 平成道政 의 아들로 妻 李氏의 배다른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記憶力이 좋았고 글을 잘 지었다. 그 뒤 漢城府 의 著名한 文人에게 修學하였으나 그가 後日 奸臣의 代名詞로 몰렸으므로 그의 스승이 누군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靑年期 [ 編輯 ]

以後 門下에서 受學하다가 家門의 蔭德으로 淫書 로 出仕하게 된다. 淫書 (蔭敍)로 出仕하여 司宰監事情(司宰監司正)에 이르렀다. 그 뒤 成均館 에 入學하여 成均館 儒生으로 受學하였다.

1465年 (世祖 11年) 世祖 의 王命을 받고 特別히 經書를 講論하였다. [2]

司宰監 事情을 거쳐 辭職(司直)으로 在職 中인 1465年 (世祖 11年) 謁聖文科에 3等으로 及第하여 要職에 拔擢되었다.

科擧 及第와 官僚生活 初盤 [ 編輯 ]

1466年 다시 過去 試驗 에 凝視하였으나 다른 應試者와 答이 같다는 理由로 及第하지 못하였다. 그 뒤 다시 司宰監 事情 (司宰監司正)을 거쳐 弘文館 敎理 等을 지냈다. 그는 朝廷의 功臣들과 外戚들이 權力을 濫用한다고 批判하였으며 當代의 權臣인 한명회 , 신숙주 等의 越權行爲를 줄기차게 非難하기도 했다.

그 뒤 1468年 外戚인 남이 康純 等이 逆謀를 한다고 非難할 때, 그들이 逆謀를 했다고 믿지 않던 그는 남이 , 康純 攻擊에 加擔하지 않았다. 그러나 1469年 ~ 1474년 사이( 朝鮮 成宗 在位 期間) 朝廷의 大臣들에게 ‘小人輩’라는 말을 들을 만큼, 任士洪은 朝廷 大臣들의 큰 公共의 敵으로 몰리게 된다. 그러나 1478年 言官들과의 些少한 일로 摩擦을 빚게 된다.

1468年 (睿宗 1年) 睿宗 卽位 後 奉常寺 添丁(奉常寺僉正)李 되고, 1469年 (睿宗 2年) 1月 1日 司贍寺情(司贍寺正) 최영린(崔永潾)과 禮賓寺 否定(禮賓寺副正) 金신몽(金信蒙)·성균 四星(成均司成) 고태정(高台鼎) 等과 함께 明나라 使臣을 接待하기 위한 願接使節團의 一行으로 開城 에 派遣되었다. [3] 尹 2月 에 되돌아와 通訓大夫로 昇進, 司宰寺 情(司宰寺正)李 되었다.

官僚 生活 [ 編輯 ]

言官, 經筵官 活動과 直言 [ 編輯 ]

글씨에도 自他가 認定하는 當代 最高였던 그는 成宗 卽位 初, 成宗 의 命을 받아 월산대군 (月山大君) 李霆(李?)의 信徒鼻紋(神道碑文)을 지었다. 以後 承文院 (承文院)에 補職되었다가 諫官들의 彈劾을 받고 罷職되었다가 王이 諫官들을 解任한 뒤에 다시 登用되었다.

成宗 卽位 後 行 藝文館 傳한 知製敎 兼 競演 侍講官(行藝文館典翰知製敎 兼經筵侍講官)이 되어 競演에 參與하였고, 이어 弘文館 傳한(弘文館典翰)과 承文院 參校(承文院參校)를 겸하였으며 그 뒤 春秋館 修撰官(修撰官)을 겸하여 《 世祖實錄 》 編纂과 《 睿宗實錄 》 編纂에 參與하였다.

改革, 監察 活動 [ 編輯 ]

그 뒤 私財感情(司宰監正)이 되었다. 1469年 成宗 卽位 直後 그는 調整에 內佛堂 (內佛堂)을 撤去할 것을 請하는 上訴를 여러 番 올렸다. 1470年 다시 內佛堂 을 撤去할 것을 請하는 上疏를 올렸다. 그의 上疏에 王室은 內佛堂을 옮길 것을 決定하고 代身들에게 適當한 곳을 物色하게 했다. 그해 4月 藝文館 을 兼官하였다. 1471年 1月 에는 競演侍講官(侍講官)이 되었으며, 그때 競演場에서 대간 이 佛經을 사올 것을 建議한 것을 論駁하고, 凶年을 對備한 穀食 輸送을 督促할 것을 建議하였다. 그 뒤 다시 私財感情이 되어 靈性府院君(寧城府院君) 崔沆(崔恒)으로부터 文章力을 認定받아 推薦되었다.

1471年 초에는 한명회 , 신숙주 等과 競演侍講官의 한사람으로 成均館 文廟에서 競演을 講論하였고, 그해 10月 9日 에는 王에게 《國朝寶鑑(國朝寶鑑)》을 講論하고 上으로 활 1張(張)을 下賜받았고, 10月 11日 에는 밤에 競演을 剛하고 留意(?衣)를 膳物로 받았다. 그해 12月 世祖實錄 編修官(編修官)에게 賞을 하사할 때 아마 1匹과 香表裏(鄕表裏)를 賞으로 받았다.

1471年 말 藝文館 傳한(藝文館典翰)이 되고 1472年 1月 平安道 兵馬節度使 의 宣慰使로 派遣되었다. 그 뒤 弘文館 敎理 로 있을 때 剛直한 性品으로 所信으로 直言을 했다. 그해 承政院 承旨로 拔擢되었다가 經筵官이 되었다.

後날 그가 27歲의 나이에 承旨로 拔擢되어 話題가 되기도 했다. [4]

1472年 經筵官으로 競演에서 宰相도 禁止令을 어기고 잘못하면 容恕함이 없이 罰을 주어야 된다고 建議했다가 承政院 承旨 들이 問題삼았으나 成宗이 '任士洪이 아뢴 말을 무엇 때문에 逼迫하여 쓰게 하였는가'며 承旨들을 꾸짖었다. [5]

6月 行 司憲府 집의(行司憲府執義)가 되었다. 7月에는 宗親과 結託하여 不法을 行한 김지경·김계창·防護련 等을 處罰할 것을 建議하였고, 7月 21日에는 腐敗行爲 等을 恣行한 이숙(李塾)·강의산(康義山)·김정광(金庭光)·이숭수(李崇壽) 等을 彈劾하였다. 그러나 王이 撫摩시키자 이틀 뒤 다시 김계창, 김지경 等을 彈劾하였다. 8月에는 司諫院 大司諫(司諫院大司諫) 成俊(成俊)과 함께 오백창(吳伯昌) 等을 獄事를 그르쳤다 하여 彈劾하는 等 不法이나 違法行爲를 恣行한 大小愼慮들을 가리지 않고 攻擊하였다.

이러한 그의 能力과 글재주로 成宗 初盤 王의 寵愛를 받았으며 司諫院 大司諫 , 禮曹 參議 等을 거쳐 承政院 都承旨 , 李朝 板書 가 되었다.

競演 活動 [ 編輯 ]

1472年 (成宗 3年) 9月 에는 藝文館의 官員을 70名을 選拔한 것이 不足하니 더 選拔해야 된다는 副提學 유권의 建議에 反撥하여 適當하다고 反論을 提起하였다. 12月 에는 江原道 平昌 의 地方官으로 發令되었으나 規避하고 赴任을 미룬 김순성(金順誠)을 彈劾, 敍用夏至 말 것을 建議하였다. [6] 그러나 12月 8日 다시 司憲府 집의로 王에게 한명회 를 죄줄 것을 上疏했다가, 그로 인해 司憲府 의 官員이 모두 갈리게 되었다. 司憲府 大司憲 權減(權?)李 責任지고 引責辭退하려 하였으나 다른 司憲府 官員들과 함께 스스로 辭職을 請하였고 곧 遞差되었다. 1473年 1月 成均館 사예 가 되었다.

이미 過去及第 直後부터 經筵官을 겸하여, 1466年 以後 本職 外에도 每日 競演에 參與하였다.

1473年 11月 에는 사예(司藝)로 宣政殿(宣政殿)에 나가 고림情(高林正) 이훈(李薰)·豐盛 否定(?城副正) 李堈(李?)과 文身(文臣)인 사예 장계이(張繼弛), 生員(生員) 손집경(孫執經) 等과 함께 競演을 强하였다. 1474년 (成宗 5年) 1月 通政大夫 藝文館 副提學 (藝文館副提學)으로 昇進하였다.

1474년 (成宗 5) 成宗 義警世子 (義警王)의 追加 諡號를 請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며 反對하였으나 王이 듣지 않았다. [7] 그해 12月 參贊官(參贊官)이 되었다. 한便 1475年 새로 刑房承旨가 되어 競演 에 對한 것을 모르는 新正(申瀞)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를 두고 實錄은 '신정은 性品이 말을 잘하여 일찍이 刑房 承旨(刑房承旨)가 되어서는 아뢰는 일이 자못 仔詳하였다. 그러나 배우지 아니하고 재주가 없어, 賤人(天人)의 理致를 그가 아는 것이 아니고, 任士洪의 말을 따라서 모르는 것을 억지로 급작스럽게 함부로 對答을 하니, 듣는 者가 그를 비웃었다.'라며 誹謗하기도 하였다. [8]

1475年 6月 17日 通政大夫 同副承旨(同副承旨)가 되고 6月 25日 王命으로 신숙주 의 殯所를 弔問하고 돌아왔다.

7月 承政院 右副承旨(承政院右副承旨), 1476年 3月 左副承旨(左副承旨)가 되었다가 닷새만에 右承旨(右承旨)로 昇進하였다. 77年에는 明나라 에 派遣되는 聖節使와 注文社가 모두 功臣이라 하여 衡平性에 어긋남을 論하기도 하였다. [9]

1477年 廢妃 尹氏가 成宗의 容顔을 긁은 일로 臺諫과 司憲府, 義禁府 等의 彈劾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王妃는 世子 융(後日의 연산군)의 生母이므로 世子를 봐서라도 彈劾해서는 안 된다며 剛하게 反對하였다. 그러나 廢妃를 反對한 일로 그는 奸邪한 人物이라는 人身攻擊을 當하게 된다.

寡婦 再婚事件 [ 編輯 ]

1477年 (成宗 8年) 承政院 承旨가 되었다. 이때 유자광 과 結託, 地平 김언신(金彦辛)을 使嗾하여 自身의 조카사위이며, 효령대군 의 孫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承政院 都承旨 현석규 (玄錫圭)를 ' 王安石 (王安石)과 같은 消印'이라고 彈劾하도록 使嗾하였다.

依支할 곳이 없던 寡婦 조氏는 仲媒를 통해 김주와 再婚하였다. 그러나 그女에게 依存하던 親庭오라비와 兄夫는 조氏의 財産이 김주에게 넘어가는 것을 念慮하여, 조氏를 暴行하면서까지 둘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들은 金株價 조氏를 强姦했다고 訴狀을 提起하였으나 無故임이 드러났고, 이들은 여러 官廳에 賂物을 바쳤다. 이들에게 賂物을 받은 承政院 의 韓確은 都承旨 현석규 를 除外한 다른 承旨인 임사홍, 洪貴達을 說得하였다. 그리하여 同副承旨 洪貴達이 最終 決定을 내려 '김주라는 사내가 조氏의 집에 寄宿하는 것을 보았으니 오라비 된 立場에서 强姦으로 誤解할 수 있다'며 그들을 辯護하였다.

그런데 이때 都承旨 현석규 가 自身만 빼놓고 決定한 것에 憤怒하여 홍귀달과 싸움이 붙었다. 火가 난 成宗 은 承旨들을 모두 解任했고 그도 이때 遞職되었다. 그러나 현석규에 對한 批判이 繼續되자 成宗은 오히려 현석규를 4資級을 승진시켰고, 얼마 뒤 任士洪이 都承旨 職에 오르게 된다.

김언신 에 이어 유자광 이 直接 현석규 를 彈劾하는 上疏를 올렸는데, 成宗은 이를 朋黨을 만들어 自己 便을 擁護한 일로 보고 김언신을 下獄하였다. 뒤에 이 일이 任士洪의 使嗾에 依한 것으로 밝혀져 그는 義州로, 유자광 은 東來로 各各 流配되었다.

士林派와의 葛藤 [ 編輯 ]

承政院 都承旨 로 在職 中인 1478年 (成宗 9年) 4月 비가 많이 쏟아졌는데, 흙으로 된 흙비가 내리는 變怪가 생겼다. 司諫院·司憲府·弘文館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警告로 받아들여 謹愼해야 하며, 當分間 술을 一切 禁止해야 한다는 合同 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任士洪은 지나치게 强勁해진 대간을 批判한다.

그런데 이때 任士洪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 變怪인데, 이제 곧 國家의 祭祀가 연이을 只今 술을 一切 禁止하는 것은 適切치 않다"고 主張했다. 대단하지 않은 變怪를 하늘의 警告라고 主張하는 것은 過하다는 것이 王과 承旨들의 共通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三社의 態度는 매우 强勁했다. 이때 任士洪이 "無條件 言論에서 하라는 대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抗議를 하였다.

三社는 곧바로 任士洪을 猛烈하게 聲討하였다. 그의 批判 中 술을 禁해야 한다는 要求를 反對한 것은 '頹廢 享樂 風潮를 부추겼다'는 嫌疑를 걸기 좋았고, 흙비의 重大性을 낮춰 보았으니 “하늘의 뜻을 우습게 알았다”고 非難하기 알맞았다. 任士洪이 효령대군 의 孫女사위이며 두 아들이 睿宗 成宗 의 사위로서 王室의 겹査頓이었던 點은 '外戚의 跋扈를 警戒해야 한다'는 太宗 이 세운 朝鮮 政治論의 原則에 符合하였다. 言官들의 猛烈한 聲討로 罷職되어 流配되었고, 아무도 그를 나서서 救濟하지 않았다.

1478年 (成宗 9年) 1月 通政大夫 吏曹參議, 4月 承政院 都承旨(承政院都承旨)가 되었으나 言官들로부터 繼續 攻擊당했고, 그해 유자광 等과 함께 派黨을 만들어 橫暴를 恣行했다는 理由로 流配되었다. 곧 며느리인 公主가 보고 싶어한다는 理由로 流配에서 풀리지만, 朝鮮 成宗 在位 期間에는 큰 活躍을 하지 못하였다.

流配 生活 [ 編輯 ]

그가 沒落하자 그의 周邊에 오던 親舊들도 往來를 끊었고 그는 失意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流配地에서 글과 書藝를 가르치며 消日하였다. 그 뒤 成宗 의 特別 指示로 1488年 11月 折衷 將軍 副護軍(折衝將軍副護軍)에 除授되었다.

臺諫들의 말대로라면 그는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10] 그러나 成宗 은 이를 끝까지 拒否했고, 그를 귀양에서 풀어주려 애쓰다가 안되자 둘째 아들 임숭재 와 自身의 庶女 휘숙翁主 를 婚姻시키기까지 했다. 任士洪이 워낙 寵愛하던 臣下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스스로도 任士洪의 嫌疑라는 것이 의심스러워져서이기도 했다. [10]

敎育, 外交 活動 [ 編輯 ]

그러다 漢學 中國語 에 能通하였고 日本語 , 여진어 等도 驅使하는 재주를 인정받아 1490年 (成宗 21年) 明나라 에 派遣되는 官壓死(管押使)가 되어 年庚 에 다녀왔으며, 1491年 9月 承政院 都承旨 가 되었다. 그러나 以前에 흙비 때 過度한 謹愼을 批判한 일로 繼續 言官들의 彈劾에 시달렸다. 1491年 다시 宣慰使(宣慰使)로 明나라 에 다녀왔다. 歸國 以後에는 司譯院 에서 漢語 (漢語)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2年 (成宗 23年) 2月 그를 宣慰使로 삼은 것이 옳지 못하다며 司憲府 司諫院 이 彈劾하였다. 以後 1492年 한 해동안 司憲府 司諫院 에서 繼續 그를 彈劾하였다. 그해 9月 承文院 에 出仕하여 漢語 (漢語)를 가르쳤다.

1496年 (成宗 26年) 行 副護軍(行副護軍)이 되었다.

政界 復歸와 戊午士禍 前後 [ 編輯 ]

연산군 卽位 後 功臣嫡長者에 對한 加資로 1階級 昇進하여 嘉善大夫가 되었다. 1497年 (燕山君 3年) 4月 가선(嘉善) 上護軍(上護軍)이 되었다. 이때 臺諫이 그의 가자가 不當하다고 論駁하였으나 연산군 이 듣지 않았다. 그해 12月 다시 가선 代父 上護軍(嘉善大夫上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 그 아들 임숭재 가 駙馬(駙馬)로 임금의 寵愛를 얻자, 그 緣줄로 갑자기 높은 品階에 올랐다. 그러나 아들 임희재 김종직 의 門下生으로 戊午士禍 當時 棍杖 100대를 맞고 咸鏡道 終聲으로 流配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러나 희재는 뒤에 1504年 甲子士禍 때 죽임을 當하였다.

甲子士禍 때 이극균과의 親分 때문에 처형당할뻔 하나 廢妃尹氏를 辯護한 일로 罪를 면한다. 그는 坊坊曲曲을 다니며 얼굴 반반한 女子를 찾아내 燕山君에게 바치는 '採紅使' 中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羞恥心을 느낀 그는 이를 侮辱的인 待遇라고 여겨 연산군 이 附與한 採紅使 일을 태만하게 하였다. [11]

燕山君은 그가 美女를 데려오는 實績이 神通치 않음을 指摘하며 "다 죽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 身世에서 救해줬거늘, 쓸모없는 늙은이가 恩惠도 모르는구나" 하며 競演 章에서 그에게 公開的으로 面駁을 주기도 했다. [11]

採紅使 拒否와 연산군과의 葛藤 [ 編輯 ]

任士洪은 士禍 以後 正式으로 登用되어 兵曹判書 가 되었지만 決코 朝廷의 元老大臣 取扱을 받지 못했다. 主 任務는 如前히 글씨 쓰기와 묏자리 알아보기, 그리고 採紅使로서 地方을 다니며 美人들 모아오기였다. [12]

그가 採紅使 노릇을 했다는 事實은 後代에 奸臣으로 손가락질받게 되는 根據의 하나인데, 事實 그가 積極的으로 臨했던 것 같지는 않다. 美人이 많다고 소문난 平安道에서 美人을 뽑아오라고 보냈더니 뽑기는 뽑았지만 基準에 두루 맞는 美人이 하나도 없어 안되겠다는 報告를 올린 內容이 實錄에 記錄되어 있다. [12] 그는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避하다가 마지못해 採紅使로 坊坊曲曲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연산군 은 벌컥 성을 내며 臣下들 앞에서 그를 罵倒하였다. [12]

이미 뽑았다면 거느리고 와서 復命(復命)함이 옳거늘, 달랑 報告만 올리는 것이 무엇이냐? 前에 社홍이 여러 사류(士類)에게서 排斥을 받기 거의 數十年에, 내가 特別히 任用하여 마치 물에서 건지고 불에서 救해준 것과 같으니, 나라를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쳐야 하거늘! 社洪은 若干의 재주가 있다고 하나 덜 떨어진 者이다. [12]

以後에도 그는 採紅使를 回避하거나 消極的으로 하였다. 그러자 燕山君은 그가 이극균 과 親했던 點을 言及하며 그를 威脅하기도 했다.

生涯 後半 [ 編輯 ]

廢妃尹氏 事件 擴大 [ 編輯 ]

卽位 直後 史草의 記錄을 偶然히 찾아 본 연산군 정현왕후 가 自身의 生母가 아니며 生母인 廢妃 尹氏 가 社史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산군 은 生母인 廢妃 尹氏 를 王后로 追崇하려는 事業을 試圖했고, 이때 士林派 官僚들은 先王 成宗 의 維持를 理由로 廢妃 尹氏의 追崇을 反對했다.

後代의 士林들의 主張에 다르면 이時期에 任士洪은 自己집에 몰래 찾아온 燕山君에게 廢妃尹氏의 死刑事實을 알려 甲子士禍를 일으켰다고 主張한다. 다른 主張에서는 더 나아가 신수근 , 유자광 等과 함께 廢妃 尹氏 의 生母 長興郡夫人 신氏 연산군 과 만나도록 周旋한다. 任士洪은 신수근과 함께 闕內에 出入하던 유자광 을 통해 燕山君에게 線을 댔다. 生母의 四史 外에 外할머니가 그때까지 生存해 있다는 事實을 처음 알게 된 연산군 은 任士洪을 통해 外할머니 高靈郡夫人 신氏 를 만났고 申氏가 傳해 준 피묻은 적삼을 보고 理性을 喪失해 甲子士禍를 벌였다고 後代의 士林들은 主張한다.

그러나 정작 임소홍은 甲子士禍가 한창이던 狀況에 燕山君에게 죽었던 이극균과의 親分關係가 發覺되어 유자광과 같이 死刑當할뻔한 사람이었다. 비록 廢妃 尹氏를 積極的으로 辯護한 過去로 處罰은 免했지만 任士洪이 甲子士禍를 積極的으로 主導했다는 主張은 前後關係를 살펴볼때 信賴하기 어려운 記錄이다. 나머지 記錄들도 信憑性이 不足한게 燕山君은 이미 卽位 初부터 生母의 事實을 어느程度 알고 있었고 事件의 契機라는 外할머니 長興郡夫人 신氏 도 이미 卽位初부터 素材를 把握해 漢陽에서 살게하면서 쌀과 穀食을 자주 支給해주고 있었다.(연산 2年 陰曆 10月 21日)

任士洪의 셋째 아들 임희재 도 甲子士禍 도중인 陰曆 10月 28日 能治處事로 死刑을 當했다. 後代 士林들의 主張에 따르면 當時 任士洪은 아들 희재가 죽임을 當하던 날에도 슬픈 내色을 하지 않고, 平日과 다름없이 그의 집에서 宴會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風樂을 울리니, 燕山君이 사람을 시켜 이를 엿보고는 더욱 信任과 恩寵을 더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사람이라며 警戒하였다는게 士林들의 主張이나, 정작 當時 實錄 記錄에는 任士洪은 같은시각 緣坐制로 投獄되어 있다가 任熙載의 處刑 前날에 漢陽에서 추방당한 狀況이라 信憑性이 不足한 記錄이다.

後代 士林들은 任士洪을 甲子士禍의 主犯으로 規定하고 甲子士禍때 怨恨을 가진사람들에게 福壽海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剖棺斬屍(斬屍)하였다. 後代의 士林派 들이 記錄한 實錄의 評價에 依하면 온 調整이 그를 승냥이나 虎狼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세 신氏(愼氏), 卽 신수근 · 신수겸 · 신수영 兄弟라 할지라도 또한 조심스럽게 섬겼다고 한다.

家庭의 不幸 [ 編輯 ]

그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아들 희재를 잃었다. 임희재 는 어려서부터 學問을 좋아해 김종직 의 弟子가 되었다. [13]

燕山君 4年 아버지 임사홍과 關聯된 醜聞을 克服하고 壯元及第를 하기도 하였다. 野史에 따르면 임희재 는 집 屛風에다가 연산군 秦始皇 에 비기며 그의 暴政을 批判하는 詩를 썼다. 연산군 이 어느 날 任士洪의 집에 찾아갔다가 이 屛風을 보고 激怒했다. 그리고 임희재를 죽이겠다고 하자 任士洪이 "그렇지 않아도 이놈이 不肖하여 제가 먼저 處置하시라고 아뢰려 하였습니다"라고 對答했다. [13] 아들이 죽던 날, 그는 平素와 다름없는 態度로 잔치를 벌이고 흥청거리며 놀았다. [13] 그날 저녁에야 연산군 一行이 떠나간 뒤 世人의 耳目을 避해 大聲痛哭했다 한다.

다른 野史에서는 任熙載가 아버지의 잘못을 諫하자 燕山君에게 그가 讒訴하여 죽이게 했다 한다. [13] 최용범 은 이 說의 信憑性을 疑心한다. '事實이라면 참으로 非情한 아버지, 人間性이 缺如된 사람으로 보인다. [13] '고 評하였다 그러나 實錄에는 임희재 戊午士禍 에 犧牲된 耳目 의 道黨으로서, 耳目 의 집을 搜索했을 때 時局을 批判하는 임희재 의 便紙가 나왔기 때문에 犧牲된 것으로 적혀 있다. [13]

임사홍 自身도 유자광 과 함께 이극균 의 親舊였다 하여 처형당할 뻔하기도 했다. [13]

임사홍보다 연산군 에게 더 가까웠던 또 다른 아들 임숭재 亦是 연산군 에게 籠絡당했다. 임숭재 는 個人的으로 美人을 斡旋해서 연산군 에게 供給하고 있었는데, 그 中에는 自身의 누이同生인 문성정 (文城正) 以上의 夫人도 있었다. [13]

僞善과 野蠻性에 對한 諦念 [ 編輯 ]

총명한 사람이던 任士洪은 이런 跛行의 歲月이 언제까지나 繼續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14] 그리고 未久의 그 날이 오면 自身이 먼저 犧牲될 것도 認識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 의 暴走를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自身에게 加해진 侮辱도 淡淡히 받아들였다. 그는 自身도 責任의 一部를 쓰고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과 같았다. [14] 그는 社會가 뒤집어쓰고 있던 僞善의 껍질을 벗기는 것으로 滿足하고, 그래서 풀려난 野蠻性에 犧牲되기를 避하지 않았다. [14]

그는 自身의 아들 희재, 四寸 동생 南袞 等이 連累되었으나 아무도 救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事件을 推鞠하는 형관이 되는 것은 限死코 拒否하였다. 다만 임사홍 本人부터가 甲子士禍 때 連累되어 死刑 直前까지 몰렸던 사람인 것은 念頭에 둘 問題이다.

生涯 後半 [ 編輯 ]

1504年 , 甲子士禍가 벌어진다 中宗때 史官들이 이 甲子士禍가 任士洪이 以前에 當한 일에 對한 報復으로 연산군 의 妻男인 신수근 과 謀議하여 연산군 의 生母인 廢妃 尹氏 事件을 報告하여 甲子士禍 를 일으켜 士林派들을 肅淸했다고 後代의 史觀들은 主張하지만 정작 任士洪은 甲子士禍 때 이극균과의 親分이 걸려 같이 死刑當할뻔했으며 甲子士禍度 이미 燕山君이 卽位 直後부터 廢妃尹氏 事件의 顚末을 안다는 情況證據들이 매우 많아 中宗때 主張된 任士洪이 甲子士禍의 主犯이라는 評價는 信憑性이 매우 떨어진다. 甲子士禍 當時 前述한대로 本人도 이극균과의 親分問題로 死刑當할 뻔했으나 過去 王妃尹氏의 廢黜을 막은 功勞로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아들인 임희재 도, 外四寸 동생인 南袞 김종직 (金宗直)의 文人이었던 까닭으로 禍를 입었으나 救濟하지는 못했다.

1504年 6月 自獻 代父(資憲大夫) 풍성군(豊城君)을 거쳐 兵曹判書 가 되었다. 7月 初 兼 藝文館 提學(兼藝文館提學), 以後 吏曹判書 가 되었다가 다시 兵曹判書 에 이르렀지만 士林派 로부터 연산군 의 惡行과 廢倫的인 行動을 부추긴 人物로 指目되어 指彈의 對象이 되었다. 1495年 에는 아들 임광재 1505年 아들 임숭재 를 病으로 잃었다.

1504年 8月 初 그의 집에서 病이 나았다는 理由로 特別히 加資되어 [15] 8月 16日 種1品 崇政大夫의 品階를 받아 崇政大夫 兵曹判書(崇政大夫兵曹判書)가 되었다. [16]

1505年 朝鮮 에 入國한 明나라 使臣을 맞이하는 遠接使로 任命된 吏曹 判書 김수동(金壽童)李 願接社稷을 辭讓하는 바람에 그가 遠接使가 되었다. 그해 9月 崇祿大夫(崇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0月 兵曹判書로 연산군 에게 建議하여 平安道 觀察使 로 赴任하는 이에게는 家族을 데리고 함께 赴任할 수 있게 配慮해줄 것을 請하여 성사시켰다. [17] 그 뒤 平安道 兵馬節度使 로 赴任하는 이 亦是 家族들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便宜를 봐줄 것을 建議하였으나 司憲府, 司諫院의 批判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最後 [ 編輯 ]

1506年 4月 吏曹 判書 김수동(金壽童)李 母親喪을 當하여 辭職하므로 다시 吏曹判書 가 되었다. [18] 이어 辭職을 請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4月 中國 使臣에게 缺禮를 犯했다 하여 國文을 當하였다. [19]

7月 20日 右參贊 으로 昇進 [20] 7月 29日 에는 다시 左參贊 이 되었다. 8月 17日 支社로 前任하였다가 닷새만에 藝文館 의 製述을 맡아보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特히 蜀體(蜀體) 해서(楷書)에 能하였으며, 作品으로는 光州의 서거정 의 墓碑銘, 衿川 노사신 神道碑 文, 楊州의 박중선墓碑文, 光州의 이계손墓碑銘, 韓確 墓碑銘, 漣川의 永遠윤호墓碑銘, 월산대군 의 悲鳴 等이 傳한다. 以後 政丞 의 物望에 올랐지만 競爭者였던 신수근 , 김수동 等에게 밀리고 끝내 1506年 陰曆 9月 2日 中宗 反正 때 아우 임사영 과 함께 反正軍에게 붙잡혀 擊殺되었다. 享年 62歲였다. 그의 屍身은 서둘러 驪州郡 능현리 先塋에 장사되었다. 그러나 任士洪이 죽은 뒤 20餘日 後에 새 임금 中宗 에게 義禁府가 아뢰기를 “任士洪은 先王朝에서 朋黨과 結託하여 朝廷을 紊亂케 하였으되 오히려 觀戰(寬典)을 입어 處斷을 謀免하더니 肺王朝에 이르러서는 그 아들 임숭재를 緣줄로 하여 나인 장녹수 에게 빌붙어 온갖 꾀를 다 부리며 惡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百姓을 塗炭에 빠뜨리며 임금을 不義에 빠뜨려 宗社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罪는 剖棺斬屍(剖棺斬屍)하고 籍沒加算(籍沒家産)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21] 結局 그는 剖棺斬屍되었고, 後에 누군가 屍身을 다시 收拾하여 埋葬하였다.

事後 [ 編輯 ]

京畿道 驪州郡 여주읍 능현리 산24-8의 先塋에 安葬되었다. 近處에 아버지 임원준 , 할아버지 임견 의 墓所가 있다.

셋째 아들 任熙載는 김종직 의 文人으로 禍를 當하였으므로 連坐되지 않았고, 그의 外四寸 동생 南袞 亦是 김종직 의 弟子인 士林派 政治人으로 戊午士禍 甲子士禍 로 流配生活을 하였으므로 連坐되지 않았다. 南袞 은 流配 中 연산군 을 逐出하자는 박원종 , 성희안 等의 擧事에 同調, 支持를 보내기도 한다. 1489年 (成宗 20年)에 그를 批判하여 論難이 된 妻조카 主計否定 이심원 [22] 亦是 士林派 人士로 김종직 의 文人이었다.

宣祖 以後 士林派 가 執權하면서 그는 奸臣의 代名詞로 批判 一色이었다. 許筠 (許筠)의 洪吉童傳 에서 조차 그는 奸臣으로 罵倒된다.

大韓民國 作家 정비석 의 作品인 《小說 연산군》에서는 그가 燕山君을 衝動한 人物로 描寫되었다. 그러나 1995年 以後 연산군 에 對한 再評價가 始作되면서 一方的으로 奸臣으로 몰린 任士洪이 艱辛이거나 甲子士禍 의 直接的인 原因提供者는 아니라는 異見도 擡頭되고 있다. 特히 士林들이 强力하게 主張했던 甲子士禍의 主犯이라는 記錄부터가 實錄을 細部的으로 살펴보면 오히려 甲子士禍의 被害者 쪽에 가까운 것이 確認되면서 任士洪의 評價가 過度하게 펌하받았다는 意見도 있다. 元來는 中宗때 史官들의 評價에 따라 任士洪이 士林派 를 해치기 위해 甲子士禍 를 일으켰다는 說이 通說로 提起되어 왔으나, 정작 當時 實錄記錄을 살펴보면 甲子士禍 때 主要 被害者들이 過去 任士洪을 辯護하던 勳舊派 人士들이었으며, 直接的인 怨恨關係에 있는 人物은 妻조카 이심원 만이 唯一했으므로 임사홍 本人도 自身을 擁護해준 勳舊派人士들과의 親分 때문에 같이 숙청당할뻔 한 事實들이 밝혀지면서 1970年 代 以後 宮中派臺 府中派의 葛藤이라는 새로운 視角이 登場하였다.

家族 關係 [ 編輯 ]

關聯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作品 [ 編輯 ]

  • 서거정墓碑銘 (徐居正墓碑銘)
  • 노文觀公社新信徒悲鳴 (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
  • 월산대군李霆悲鳴 (月山大君李?碑銘)
  • 이계손墓碑銘(李繼孫墓碑銘)
  • 韓確 墓碑銘(韓確墓碑銘)
  • 박중선墓碑銘(朴仲善墓碑銘)
  • 永遠윤호墓碑銘(鈴原尹壕墓碑銘)
  • 大司憲정경조墓碑銘 글씨

思想과 信念 [ 編輯 ]

公正性 [ 編輯 ]

成宗이 정희왕후, 인수王妃 等의 뜻에 따라 內佛堂을 設置했을 때 앞장서서 反對했으며, "宰相이라고 해도 法을 어기면 斷乎하게 處罰해야 합니다"라고 眞言하기도 했다. [23] 그는 地位高下를 莫論하고 越權行爲나 賂物 收受, 犯法行爲를 하면 假借없이 彈劾하였고, 그 中에는 功臣들과 功臣子弟들도 있었다.

忠臣 登用 [ 編輯 ]

그는 임금에게 忠臣과 어진 臣下를 가려서 쓰고, 奸臣을 分別할 줄 알아야 된다는 뜻을 여러番 建議하였다.

"忠臣과 奸臣을 잘 區分하여 忠臣을 높이고 奸臣을 물리치는 것이 政治의 要諦입니다. 殿下께서는 부디 留念하소서. [23] "라고 間하기도 했다. [23]

評價와 疑問 [ 編輯 ]

그의 글씨는 自他가 公認하는 當代의 으뜸이었다. 中國語 에도 能通해 中國 에 여러 次例 使臣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司譯院 承文院 에서 中國語를 가르치기도 했다. [23] 최용범에 依하면 그는 '유자광과는 比較도 안되는 名文 酒類이자, 世祖 時代의 한명회나 유자광처럼 博學多才(博學多才)하여 거친 데라고는 없는 優雅한 선비였다. [23] '고 評하였다.

弘文館 敎理 等 請要職에 있을 때의 그는 所信이 뚜렷하며 바른 말을 잘 한다는 評價를 받았다. [23]

최용범은 "燕山君도 임사홍度 時代의 矛盾이 낳은 私生兒들이었다. 그들은 破格과 暴力으로 채워지지 않는 虛無를 채웠다. 勿論 그 虛無를 克服하여 더 높은 次元으로 승화시킬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成人(聖人)에게나 可能했다. 그리고 어느 時代, 어느 社會에서든지 普通의 人間에게 成人이 될 것을 期待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24] "라 하여 그 亦是 混亂期에 權力의 暗鬪로 未來를 豫測할 수 없었던 時代의 犧牲者로 보기도 했다.

왜냐하면 士林派 執權 以後 그는 成宗 의 維持를 깨고 연산군 에게 生母 廢妃 尹氏 의 일을 꺼내 舞蹈하게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는 批判이 加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事件의 顚末을 傳하기 以前에 연산군 廢妃 尹氏 의 存在를 알고 있었고, 外祖母와 外叔父의 釋放에 앞장서기도 했다.

연산군 이 士禍를 일으킨 것은 母親 廢妃 尹氏를 追崇하는데 反對한 士林派의 行動을 王權에 挑戰한 것으로 看做한 것도 하나의 原因이었다. 1990年 代에 가서야 그가 士禍를 일으킨 張本人인가 하는 輿論에 對한 疑問이 提起되기 始作하였다.

밝혀진 內容으로는 任士洪의 父親 임원준 世祖 의 命을 忠實히 따라 醫藥· 風水·曆術 等에 該博한 造詣를 쌓았는데 後날 士林派 의 大夫가 된 김종직 은 當時 朝鮮 의 士大夫가 雜學을 배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反對해 世祖 의 노여움을 받아 罷職된 事例가 있는 것을 보면 어느程度 輿論의 歪曲을 把握할 수 있다.

김종직 임원준 의 態度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임사홍 亦是 그의 父親 못지않게 雜學에 解縛하여 先入感으로 이어진 김종직 과 任士洪의 父親 임원준 과의 오랜 惡緣이 적잖이 作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特히 任士洪을 '奸臣은 겉으로 봐서는 모르는 法입니다. 임사홍 같은 境遇 恒常 점잖고 寬大하여 人格者처럼 보였습니다'라는 表現에서 士林派에 依하여 歷史에서 徹底히 버림받은 사람으로 임사홍에 對한 歪曲이 露出되고 있다. [25]

當時 任士洪의 아들인 임희재 와 外四寸 동생인 南袞 김종직 의 文人이었는데 士林派 로 몰려 禍를 입었지만 勳舊派 에서 救濟받지는 못했다. 이것이 士林派 에서 任士洪을 不俱戴天之元帥(不俱戴天之怨讐)로 생각할 만큼 朝鮮 中期에는 家門마다 勳舊派 士林派 의 區分이 明確하지 않았다는 證據로 歪曲을 바로잡고 올바르게 評價를 해야 하는 端初가 되고 있다.

論難과 疑惑 [ 編輯 ]

甲子士禍 背後說 [ 編輯 ]

甲子士禍 는 任士洪이 士林에 對한 個人的인 復讐를 위해 연산군 을 부추겨 일으킨 것이라는게 中宗 以後의 解釋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無理가 있다. 犧牲者들 中에서 任士洪이 怨恨품었을 법한 사람은 自身의 妻조카이면서 自身을 那落으로 밀어넣었던 이심원과 그 아들 이유녕 뿐이었다. [26] 이극균이나 어세겸, 홍귀달 等은 오히려 任士洪을 斗頓해 온 便이었던 것이다. 연산군 은 自身의 復讐를 했을 수 있으나 任士洪의 復讐를 해주지는 않았던 셈이다. [26]

오히려 甲子士禍 當時에 任士洪은 앞서 言及한 이극균과의 親分 때문에 참수당할 危機까지 處했기에 中宗때 士林들이 말하는 任士洪의 甲子士禍 背後說은 더더욱 說得力이 不足하다.

發言 波紋 [ 編輯 ]

갑자기 大司諫에 任命된 任士洪은 司諫院을 제대로 掌握하지 못했다. 그래서 以內 禮曹參議로 옮겼고, 다시 吏曹參議를 맡았다가 都承旨로서 賃金을 補佐하게 했다. 그런데 成宗 9年 4月 21日 任士洪은 別 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가 마침내 那落으로 떨어지고 만다. [27]

當時 흙비가 내리는 川邊이 있었다 하여, 大簡의 要請으로 술을 一切 禁하기로 했었다. 任士洪은 이에 對하여 連이어 祭祀가 있는데 술을 全部 禁할 수 있겠느냐며 "若干의 흙비가 내렸다고 그것을 川邊이라 하여 무턱대고 삼가는 것은 지나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臺諫들이 强力하게 奏請하니 어쩔수 없지 않은가"라는 成宗 의 對答에 "臺諫의 말이라고 無條件 들어주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對答했다. [27] 이는 司諫院, 司憲府에게 攻擊의 빌미를 提供한다.

禁酒令에 對한 任士洪의 말은 하늘의 꾸지람을 謙虛히 받아들이는 賃金의 姿勢를 否定하고 賃金이 '奢侈 享樂'에 빠져들도록 부추긴 것이며, 臺諫에 對한 말은 바로 言論을 彈壓하고 暴君을 養成하려는 陰謀라는 것이었다. 言論 3社가 一齊히 任士洪을 奸臣으로 指目하고 處罰할 것을 主張했다. [27] 大簡의 言論權을 늘 尊重해 왔던 成宗 [27] 은 任士洪의 말을 多少 마땅치 않게는 여겼지만, 죄줄 일이라고 보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言論은 任士洪의 아버지 임원준까지 끌어들이면서 處罰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28]

"任士洪은 小人이며 임원준은 탐욕스럽고 腐敗하였다"는 理由였다. 成宗 은 마침내 臺諫들을 召集하여 임사홍 富者를 그토록 彈劾하는 理由를 물었는데, 別로 뾰족한 根據가 나오지 않았다. 成宗 은 臺諫들을 罷職시켜 버리고, 어쨌든 임사홍度 滯賃시킨다. 任士洪이 말失手를 했다 하여 그의 職牒度 거두었다. [28]

親戚들과의 葛藤 [ 編輯 ]

1478年 4月 9日 主計否定 이심원이 世祖 때의 勳舊派 大臣을 起用하지 말 것을 常住했다. 같은 날 그가 돌아가자 都承旨 任士洪은 成宗 에게 上訴하기를 朝臣들이 말을 쉽게 한다고 指摘했다. 4月 1日 흙으로 된 비가 내리자 4月 7日 言官들이 이를 災殃이라고 主張하며 王은 謹愼하고 술도 마셔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4月 21日 4月 28日 任士洪은 겨우 黃沙 때문에 謹愼하라는 것은 지나치다고 反駁했다.

이런 理由로 任士洪은 諫官들에게 여러番 攻擊을 當했다. 1478年 4月 28日 大司憲 維持(柳?)가 그의 發言에 對해 모두 나라를 亡하게 하는 말로서 聰明(聰明)을 막고 덮으며 대간을 沮害하고 抑制한다고 指摘한 以後 그에 對한 攻擊은 繼續되었고, 成宗은 弘文館·藝文館에서 任士洪이 素人임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며 鞠問을 加했다.

4月 29日 主計否定 이심원은 임사홍과 그의 아버지 임원준 을 彈劾하면서 任士洪이 神의 叔母部(叔母夫)이기 때문에 그 사람됨을 仔細히 아는데, 참으로 小人이라 하면서 言官들의 罷免이 不當하다고 常住했다. 同時에 성녕대군의 養子 源泉軍이 情實에게는 아들이 없고 첩에게만 아들이 있었다. 임원준 성녕대군 집의 財産이 많은 것을 알고 源泉軍의 庶子 代身 寶城郡을 성녕대군의 養子로 入養시키려던 것도 指摘하였다. 그러자 같은 날인 4月 29日 寶城郡 離合이 直接 가서 任士洪의 便을 들면서 待罪하였다. 成宗은 같은 날 이심원과 임사홍, 임원준을 불러 對質審問을 시키기도 했다. 뒤에 寶城郡 合은 主計否定 이심원을 不孝罪로 告訴하여 事件이 擴大되었다.

南袞 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酷評하였다. [29]

기타 [ 編輯 ]

  • 甲子士禍 연산군 이 自身의 生母 廢妃 尹氏 를 追崇하는 過程에서 先王의 維持를 理由로 强力하게 反對한 士林派 와의 葛藤 속에서 發生하였다. 그가 甲子士禍 의 直接的인 原因 提供者라 보기는 어려우나 그가 反正軍에게 죽은 以後 燕山君의 暴政의 原因을 그가 부추긴 것처럼 傳來되었다.
  • 朝鮮 時代에는 王陵 以外에는 武人石을 세우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1504年 아버지 임원준 이 죽자, 무덤을 造成하면서 武人石을 配置해 놓았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中宗實錄 65卷, 1529年(中宗 24年, 名 家庭 8年) 5月 24日 戊午 1番째記事, "軟性位 김희가 金安老의 赦免을 求하는 上言을 올리다. 그에 對한 三空의 論議"
  2. 世祖實錄 37卷, 世祖 11年(1465 乙酉 / 名 聖火(成化) 1年) 10月 15日(己丑) 1番째記事 "憊眩合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儒生 任士洪 等에게 經書를 强하게 하다"
  3. 睿宗實錄 3卷, 睿宗 1年(1469 己丑 / 名 聖火(成化) 5年) 1月 1日(丙辰) 5番째記事 "明나라 使臣의 地帶는 鋼玉과 김보의 例에 따르고 윤자운으로 主管케 하다"
  4. 成宗實錄 268卷, 成宗 23年(1492 임자 / 名 紅치(弘治) 5年) 8月 12日(庚戌) 3番째記事 "臺諫이 朴元宗의 個差를 請하므로 議論하게 하니 모두 改差하기를 請하다"
  5. 成宗實錄 17卷, 成宗 3年(1472 臨津 / 名 聖火(成化) 8年) 4月 26日(壬辰) 5番째記事 "任士洪이 宰相도 禁令을 犯하면 벌하도록 請한 것을 承旨들이 論罪하려 하다"
  6. 成宗實錄 25卷, 成宗 3年(1472 臨津 / 名 聖火(成化) 8年) 12月 7日(技士) 2番째記事 "집의 任士洪이 김순성을 敍用夏至 말 것을 請하다"
  7. 成宗實錄 46卷, 成宗 5年(1474 甲午 / 名 聖火(成化) 10年) 8月 24日(丙午) 4番째記事 "任士洪이 義警王의 追封을 天子에게 奏請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上訴하다"
  8. 成宗實錄 51卷, 成宗 6年(1475 乙未 / 名 聖火(成化) 11年) 1月 20日(경오) 3番째記事 "夕講에서 火災가 發生하는 理致에 對해 묻다"
  9. 成宗 81卷, 8年(1477 精油 / 名 聖火(成化) 13年) 6月 25日(更新) 2番째記事 "右承旨 任士洪이 聖節使와 注文社가 모두 功臣임을 아뢰다"
  10. 최용범, 다시 쓰는 奸臣熱戰 (페이퍼로드, 2007) 149페이지
  11. 임사홍ㆍ原菌度 할 말은 있다
  12. 최용범, 다시 쓰는 奸臣熱戰 (페이퍼로드, 2007) 156페이지
  13. 최용범, 다시 쓰는 奸臣熱戰 (페이퍼로드, 2007) 157페이지
  14. 최용범, 다시 쓰는 奸臣熱戰 (페이퍼로드, 2007) 158페이지
  15. 演算 55卷, 10年(1504 甲子 / 名 紅치(弘治) 17年) 8月 8日(乙丑) 2番째記事 "임사홍 집에서 病이 나았다 하여 임 富者와 議員 等에게 加資하다"
  16. 燕山君日記 55卷, 燕山君 10年(1504 甲子 / 名 紅치(弘治) 17年) 8月 16日(戒喩) 6番째記事 "임숭재·임사홍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17. 燕山君日記 60卷, 燕山君 11年(1505 乙丑 / 名 紅치(弘治) 18年) 10月 8日(기미) 1番째記事 "兵曹 判書 任士洪이 平安道 節度使는 家族을 데리고 赴任하기를 請하다"
  18. 刑曹 判書 이손(李蓀)李 兵曹判書가 되고, 신수영(愼守英)李 刑曹判書가 되었다.
  19. 燕山君日記 62卷, 燕山君 12年(1506 病인 / 名 定德(正德) 1年) 4月 17日(病人) 2番째記事 "中國 使臣의 實例를 責한 任士洪을 鞠問하다"
  20. 燕山君日記 63卷, 燕山君 12年(1506 病인 / 名 定德(正德) 1年) 7月 24日(新築) 1番째記事 "任士洪 等을 승진시키다"
  21. “임사홍” . 2013年 12月 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1月 16日에 確認함 .  
  22. 효령대군-寶城郡-平成群-主計否定
  23. 최용범, 다시 쓰는 奸臣熱戰 (페이퍼로드, 2007) 144페이지
  24. 최용범, 다시 쓰는 奸臣熱戰 (페이퍼로드, 2007) 159페이지
  25. '朝鮮의 王과 臣下 富國强兵을 論하다(살림에서 出版(2007.11), 신동준 저)와 '다시 쓰는 奸臣熱戰(페이퍼로드에서 出版(2007.01), 함규진 저) 參照
  26. 최용범, 다시 쓰는 奸臣熱戰 (페이퍼로드, 2007) 153페이지
  27. 최용범, 다시 쓰는 奸臣熱戰 (페이퍼로드, 2007) 146페이지
  28. 최용범, 다시 쓰는 奸臣熱戰 (페이퍼로드, 2007) 147페이지
  29. 中宗實錄 65卷, 1529年(中宗 24年, 名 家庭 8年) 5月 24日 戊午 1番째記事, "軟性位 김희가 金安老의 赦免을 求하는 上言을 올리다. 그에 對한 三空의 論議"

參考 文獻 [ 編輯 ]

  • 中宗實錄 》14 집 71 면.
  • 大東野乘
  • 燃藜室記述
  • 國朝榜目
  • 국조인물지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