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定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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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定方
蘇定方
本名 消熱(蘇烈)
정방(定方)
시호 腸(莊)
出生日 592年
出生地 寄主 무邑
死亡日 667年 (76歲)
國籍 隋나라 唐나라
作爲 임청현공
形局공
經歷 광도部 折衷 → 左舞後中郞將 → 左衛中郞將 → 愚鈍위將軍 → 左孝위大將軍 → 左舞偉大將軍 → 左孝위大將軍 兼 幼主都督(事後 追贈)
忠誠 對象 唐나라
最終階級 左舞偉大將軍
主要 參戰 唐나라-突厥 戰爭
西突厥 과의 戰爭
私缺과의 戰爭
新羅의 백제 征伐
與黨戰爭

蘇定方 (蘇定方, 592年 ~ 667年 )은 唐나라 將軍 이다. 消熱 (蘇烈)李 本名이지만, 人 정방으로 더 알려져 있다. 冀州(冀州) 무邑縣 (武邑縣) 사람이다. 還甲 을 넘겨서야 注目받았다. 强行軍과 速攻을 驅使하여 西突厥 , 私缺, 百濟 의 세 나라 를 滅하고 그 을 모두 生捕하였다. 高句麗 平壤 까지 攻擊하였으며 老患으로 中國 에서 病死했다.

生涯 [ 編輯 ]

수말唐草瓦 긴 無名機 [ 編輯 ]

어린 時節부터 날래고 사나우며 果敢한 데다 膽力이 絶倫하여 10餘 살부터 아버지 邵雍(蘇邕)을 따라 隋나라 末期에 일어난 마을 盜賊 을 討伐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그 무리를 代身 이끌어서 盜賊 장금稱(張金稱)과 量恭敬(楊公卿)을 擊破하니 마을 사람 들은 蘇定方을 依支하였다. 後에 두건덕 을 섬겼고 그의 部下 將帥 고아현(高雅賢)의 눈에 들어 養子가 되었다. 두건덕 死後에도 有黑疸 (劉黑?) 밑에서 여러 專攻을 세웠다. 有黑疸과 고아현이 唐나라에 敗해 모두 죽자 故鄕으로 돌아왔다.

630年 ( 定款 4年) 唐나라의 光度部 折衷(匡道府折衝)이 되어 李霆 의 指揮 下에 敵區(?口)에서 突厥 힐리加한 과 싸웠다. 蘇定方은 200名의 起兵 과 함께 先鋒에 서서 안개 속에서 移動하였다. 突厥軍과의 距離가 1 程度 되었을 때 突然 안개가 걷혀 本震이 보이길래 냅다 쳐서 約 100名을 죽였다. 힐리可汗과 그 否認 利子 隋나라의 公州 였던 義城公州(義成公主)와 兵士들은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者들은 모두 降伏 했다. 이 공으로 左舞後 中郞將 (左武候中?將)李 되었다. 靈휘 年間에 座僞勳一部中郞將(左衛勳一府―)으로 옮겼다.

老年에 온 機會 [ 編輯 ]

655年 정명진 (程名振)과 함께 적은 病死로 夭壽 를 넘어 高句麗 를 襲擊했다. 高句麗軍이 얕보고 귀斷水(貴端水)를 건너와 逆攻하기에 奮戰하여 千餘 名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그 外郭과 村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1] 그래서 愚鈍위將軍(右屯衛將軍)에 오르고 임청현공(臨淸縣公)에 封해졌다.

656年 ( 懸磬 元年) [2] 銃酸度대총관(?山道―) 座偉大將軍 정지절 (程知節)의 西突厥 征伐에 先鋒으로 從軍했다. 西突厥의 可汗 餓死나하로 (阿史那賀魯, 사발라加한)는 20,000名의 騎兵을 應四천(鷹娑川)으로 보내 막으며 掃海艇(蘇海政)과 攻防을 벌였다. 여기에 突厥의 不足 서니視(鼠尼施) 等 2萬餘 騎兵이 追加로 더 오고 있었다. 蘇定方은 작은 고개 를 사이에 두고 暫時 쉬다가 먼지 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500名의 騎兵으로 突擊하여 西突厥君을 크게 무너트렸다.

王문도의 시샘 [ 編輯 ]

不대총관 王門度 가 그 功을 猜忌하여 정지절에게 建議하기를 “비록 이番에 勝利를 거두기는 했지만 官軍 亦是 死傷者가 많으니, 只今부터 防塵(方陣)을 짜서 輜重隊는 안쪽에 配置하고 甲옷 을 갖춰 입은 채 守備하고 있어야 敵이 와도 바로 應할 수 있어 스스로 萬全을 保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皇帝 의 命令을 거짓으로 꾸며 정지절이 自身의 勇猛을 믿고 輕率하니 王門道路 하여금 節制를 시켰다고 속였다. 정지절이 이에 넘어가서 더 깊이 行軍하지 않았다.

終日토록 말을 타고 臨戰態勢로 待機하니 말들은 말라 죽고 兵士들은 疲弊해졌다. 蘇定方은 오히려 敗하게 생겼다며 問題를 提起하고 當場 王門徒를 가두라고 抗議하였으나 먹히지 않았다. 한便 달毒性(?篤城)李 降伏했다. 王門도는 그들이 暫時 唐軍을 避하려는 것일 뿐 돌아가면 다시 敵이 될 것이라며 모두 죽이고 財物을 取해야 한다고 했다. 反面에 蘇定方은 스스로 敵을 만드는 行爲이니 어떻게 征伐에 成功할 수 있겠냐며 反對했다. 그러나 亦是 無視되었다. 掠奪 한 財物을 分配할 때 蘇定方만이 唯一하게 한푼도 取하지 않았다. 以後 歸還하자 王門도는 죽을 罪가 當然했지만 庶民으로만 降等되었다.

西突厥 征伐 [ 編輯 ]

657年 다시 西突厥을 征伐하는데 이려도행군대총관(伊麗道―)으로 拔擢되었다. 唐나라 回紇 (?紇)의 混成部隊를 組織하여 임我相 (任雅相)과 回紇의 派尹(婆潤)을 副摠管으로 삼았다. 唐나라와 協力하던 突厥 出身의 餓死나미사(阿史那彌射)와 餓死나보진(阿史那步眞)도 類似도안무臺詞(流沙道安撫大使)가 되어 南쪽에서 別途로 따라갔다. [3] 먼저 錦山(金山) 北쪽의 처목곤(處木昆) 部落을 쳐부수니 그 사근(俟斤) 難讀錄(?獨祿)李 萬餘 張(帳)을 거느리고 投降하였다. 이들을 慰撫하고 그中 1,000名의 騎兵을 더한 後 돌기시部(突騎施部)로 나아갔다.

餓死나하로는 10星 部落 의 病魔를 動員하여 100,000名으로 豫질하(曳?河)에서 맞섰는데 蘇定方軍이 10,000餘 名밖에 없음을 보고는 가벼이 여기며 包圍 했다. 蘇定方은 장창 步兵 으로 언덕에서 [4] 密集隊形을 갖추게 하고 自身은 親히 騎兵을 이끌고 그 北쪽에 待機했다. 西突厥 軍이 먼저 3番 들이쳐왔으나 隊伍는 흩어지지 않았고 勝勢를 탄 蘇定方이 騎兵으로 逆襲하여 크게 이겼다.다음날 部隊를 整備하고 다시 進擊하자 호록玉(胡祿屋) 과 5 노실筆 (弩失畢)李 모두 降伏했고, 나머지 5 돌六 (?陸)의 部落들마저 이 消息을 듣고는 南쪽의 아사나보진에게 投降하였다. 이로써 西쪽 番(蕃)을 平定했다.

餓死나하로 生捕 [ 編輯 ]

餓死나하로 와 그 아들 亞사나질운(阿史那?運)은 本震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逃走했다. 小井方道 繼續 따라가려 했는데 많은 이 내리는 바람에 장수들이 暫時 쉬기를 請하였다. 하지만 餓死나下로도 눈을 믿고 唐軍이 오지 않을 것이라 여길테니 只今 쉬면 잡지 못할 것이라 하고 오히려 行軍을 더 재촉했다. 雙下(雙河)에 이르러 餓死나미사, 아사나보진과 合郡하고 金牙山(金牙山)으로 接近했다. 餓死나하로가 放心하고 사냥 하려 할 때에 兵士를 한꺼번에 풀어 크게 깨트리고 數萬 名을 사로잡았다.

아나沙下로 富者는 이려수(伊麗水, 只今의 이리虛(伊犁河))를 넘어 石國(石國, 只今의 타슈켄트 )의 소돌性(蘇?城)까지 다시 내달렀지만 그 星州 李열달間(伊涅達干)의 協助로 [5] 蘇定方의 部長(副將) 蘇事業 (蕭嗣業)과 餓死나미사의 아들 餓死나원상(阿史那元爽)에게 마침내 사로잡혔다. 前後 驛과 哨所를 設置하고 길을 닦고 住民들의 生業을 도와 어려움과 괴로움을 달래고 屍身 을 收拾하여 돌아왔다. 高宗 은 그곳에 (州縣)을 設置하여 안서都護府 에 隸屬시키고, 蘇定方을 左孝위大將軍(左驍衛―)에 任命하고 形局공(邢國公)에 封했으며, 아들 소경節(蘇慶節) 또한 무邑縣공(武邑縣公)에 封했다.

私缺 征伐 [ 編輯 ]

659年 [6] 私缺(思結)의 闕祀筋(闕俟斤) 度만(都曼)이 여러 (胡)를 진정시키고 소륵 (疏勒), 駐舊派(朱俱波, 朱俱般 等), 갈반타(喝槃陀, 喝盤陀 等. 只今의 타스쿠얼간(塔什庫爾幹)) [7] 의 세 나라 와 함께 黨에 反旗를 들었기에 安武大使가 되어 그 討伐을 命받았다. 曄曄수(葉葉水)에 當到하자 私缺은 마두천(馬頭川)을 지켰다. 이에 嚴選한 兵士 10,000名과 말 3,000匹로 하루 만에 300里를 强行軍하여 社決意 本據地에서 西쪽으로 10里 떨어진 곳까지 갔다. 크게 놀란 度만이 急히 城門 밖에서 邀擊했으나 失敗하고 마보성(馬保城)으로 退却했다. 以內 後續附帶와 함께 城을 包圍하자 度만이 可望이 없음을 알고 降伏했다. 蘇定方은 道만을 살려줄 것을 請했고 高宗은 이를 許諾했다. 이로써 總領 西쪽까지 모두 平定되었다. 이 공으로 형주(邢州) 거록眞邑(鉅鹿眞邑)의 500號 [8] 食邑 으로 더하고 左舞偉大將軍(左武衛―)에 올랐다.

百濟 攻略 [ 編輯 ]

660年 3月( 陰曆 ) [9] 新舊禹이마한웅진(神丘?夷馬韓熊津) 等 14度대총관 [10] 을 除授받고 新羅 와 聯合軍을 編成하여 百濟 討伐할 것을 命받았다. 6月(陰曆) 13萬 名의 兵力으로 산둥半島 의 城山(成山, 只今의 산둥省 룽靑 時 )에서 黃海 를 건너 德물도 에 닿았다. 新羅의 太子 김법민 (後날 문무왕)과 作戰을 樹立하여 唐나라는 海路를, 新羅는 陸路를 통해 兩쪽에서 백제의 수도 私費 로 곧장 들어가기로 하였다. [11]

百濟軍이 웅진강 河口 기벌포 [11] 에 駐屯하고 있었으므로 東쪽 海岸 갯벌 버드나무 로 엮은 자리를 깔고 [12] 迂廻 上陸했다. 에 陣을 치고 서로 激烈하게 싸우니 바다 를 뒤덮어 繼續 이어졌다. 百濟軍이 敗하여 數千 名이 죽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 밀물 이 차올라 들은 櫓를 빠르게 저으며 잇따라 으로 들어가고, 陸軍 을 치고 高喊을 지르며 함께 進擊하였다. 泗沘城 이 20里 程度 남았을 때 百濟軍이 나라를 기울여 戰力으로 맞서온 것도 물리치고 萬餘 名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곧바로 追擊하여 外姓까지 들어가니 의자왕 과 太子 [13] 熊進 으로 逃走했고 蘇定方은 耐性을 包圍했다.

이 틈을 타 義慈王의 次男 부여태 가 스스로 王을 稱했다. 嫡孫 부여문사 는 ‘王과 太子가 비록 性을 나갔어도 叔父가 멋대로 王을 稱했으니 唐軍이 물러나면 우리 父子(父子)는 安全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 側近을 데리고 城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갔는데 附與態度 말릴 수 없었다. 蘇定方이 兵士에게 命을 내려 城에 올라 唐나라 旗발 을 꽂게 하니 마침내 부여태는 城門을 열고 降伏했다. 예군(?軍)과 禮式 (?植) 兄弟 는 義慈王과 太子를 잡아 왔고, [14] 다른 星州(城主)들도 모두 投降했다.

黃昏 [ 編輯 ]

蘇定方이 멸망시킨 나라가 세 나라이고 그 王을 모두 生捕했으며 下賜받은 珍貴한 寶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 아들 小勁節이 相連奉御(尙輦奉御)까지 올랐다. 661年 ( 鎔鑠 元年) 第2次 與黨戰爭 에 평양도行軍대총관으로서 6部隊 中 1部대로 參戰하였다. [15] 黃海를 건너 곧장 高句麗 의 數도 平壤 으로 나아갔다. 8月(陰曆) 浿江 (浿江, 只今의 大同江 ) 河口의 緯度(葦島) [16] 에서 高句麗軍을 罷하고 마邑産(馬邑山)을 빼앗아 軍營을 세우고 平壤城을 包圍했다.

鐵勒 의 叛亂으로 2個 部隊가 撤收하면서 戰況이 어려워지고 普及先導 끊겼다. [17] 이 해 겨울 은 유난히 추워서 牌江이 얼은 德分에 各種 孔性兵器로 四方에서 攻擊하였음에도 成果를 거두지 못했다. [18] 662年 2月(陰曆) 新羅에게서 4,000섬과 22,000섬을 普及받았지만 [19] 다른 部隊의 指揮官 임我相 방효태 (龐孝泰)가 戰死 하고 [20] 많은 눈까지 내리면서 더以上 作戰을 持續할 수 없어 撤軍했다. 663年 양주안집大事(?州安集大使)를 받고 吐谷渾 (토곡혼)을 도와 吐蕃 過度 싸웠다. [21] 667年 ( 件棒 2年)에 죽으니 나이 76歲였다. 左孝위大將軍 柳州 都督 (幽州都督)을 追贈 하고 시호 는 腸(莊)이라 했다.

餘談 [ 編輯 ]

  • 蘇定方이 新羅 尙州 에서 毒殺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蘇定方이 백제와 高句麗를 치고 또 新羅까지 치려고 했는데, 김유신 이 그 陰謀를 看破하여 唐나라 軍士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獨走를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으며, 그 자리에 있는 다리 가 當校(唐橋)라는 內容이다.(삼국유사 記載, 新羅고기 認容)
  • 蘇定方은 祠堂 에 모셔지기도 했는데, [22] 이는 羅唐戰爭 以後 唐나라와의 關係가 改善되고 옛 백제에 對한 安定的 支配를 위한 政治的 過程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23] 高麗 時代에는 國家에서 重要하게 여겨 봄가을로 보낸 使臣 이 蘇定方을 모시는 祠堂에서 祭祀를 지냈다. [24]
  • 扶餘郡 에는 蘇定方이 백제를 攻擊할 때 비바람을 멈추기 위하여 白馬 를 미끼로 을 낚았다는 釣龍臺(釣龍臺)가 있다. 그리고 그 江은 白馬江 理라 한다. [25]

家計 [ 編輯 ]

  •  : 邵雍(蘇邕)
    • 무신 : 蘇定方
      •  : 소경節(蘇慶節)

蘇定方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映畫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資治通鑑 》199卷 當期 第15 靈휘 6年
  2. 《舊唐書》4卷 本紀 第4 高宗 理致上 懸磬 元年. 657年이라는 정지절 列傳의 記錄은 잘못이다.
  3. 《新唐書》215卷下 列傳 第140下 突厥下
  4. 《舊唐書》蘇定方展, 《新唐書》突厥戰은 步卒據原. 《新唐書》小井放電은 步卒據高
  5. 《舊唐書》194卷下 列傳 第144下 突厥下 餓死나하로
  6. 《新唐書》3卷 高宗皇帝 理致 懸磬 4年
  7. 《舊唐書》에는 갈반타가 아닌 總領이라 되어있으나 《新唐書》, 《資治通鑑》을 따른다.
  8. 《新唐書》에는 300號
  9. 《新唐書》3卷 高宗皇帝 理致 懸磬 5年
  10. 〈대당평백제국非〉 《新唐書》本紀, 蘇定方展, 《資治通鑑》은 代表로 新構圖라 하였고 《舊唐書》小井放電은 熊進道라 하였다.
  11. 三國史記 》5卷 新羅本紀 第5 태종무열왕 7年
  12. 《三國史記》42卷 列傳 第2 김유신中
  13. 백제의 마지막 太子에 對해 《舊唐書》, 《新唐書》, 《資治通鑑》, 〈대당평백제국非〉, 〈黨類人猿記功碑〉 等 中國의 記錄은 부여융 理라 하고, 《三國史記》는 扶餘孝 라 한다. 《三國史記》28卷 백제본기 第6 義慈王 20年, 44卷 列傳 第4 김인문
  14. 권덕영, 〈백제 流民 예씨일족 墓誌銘에 對한 斷想〉, 《史學硏究》no.105, 韓國史學會, 2012
  15. 《新唐書》3卷 高宗皇帝 理致 鎔鑠 元年
  16. 《舊唐書》4卷 本紀 第4 高宗 理致上 鎔鑠 2年
  17. 《資治通鑑》200卷 當期 第16 高宗 鎔鑠 元年
  18. 日本書紀 》27卷 除名天皇 7年
  19. 《三國史記》6卷 新羅本紀 第6 문무왕 2年
  20. 《資治通鑑》200卷 當期 第16 高宗 鎔鑠 2年
  21. 《資治通鑑》201卷 當期 第17 高宗 鎔鑠 3年
  22. 《新增東國輿地勝覽》20卷 忠淸道 大興縣(大興縣), 《 東國李相國集 》38卷 〈제蘇定方將軍門〉
  23. 변동명, 〈城隍神 蘇定方과 大興〉, 《歷史學硏究》vol.30, 湖南史學會, 2007
  24. 강성복 (2009). “大興 小島毒蛇와 邑治 성황사” . 《백제硏究》 (忠南大學校 백제硏究所) 49 : 97?122.   UCI G704-000844.2009..49.001
  25. 《三國遺事》2卷 第2 기이 南夫餘, 《新增東國輿地勝覽》18卷 忠淸道 扶輿峴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