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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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원 (徐敬元, 1937年 7月 28日 ~ )은 大韓民國 의 農民運動家, 民主化 運動家이자 第13代 國會議員이다. 本貫은 利川 이며, 全羅北道 淳昌郡 出身이다.

光州民主化運動 關聯者이자 1988年 8月 祕密裏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訪問, 2泊 3日間 金日成 國家主席과 虛談 副總理 等과 會談하고 歸國하였으며 1989年 6月末 스스로 이 事實을 밝히고 國家安全企劃部 (安企部)에 自進 出頭했다. 安企部 調査 過程에서 金日成 의 손금을 그려온 것을 公開하여 話題가 되기도 했다. [1] 홀로 訪北해 김일성 主席을 만나고 5萬弗의 工作金을 受領했다. 大法院에서 10年型 確定判決을 받고 間諜으로 收監되어 8年 6個月을 收監하고 김대중 大統領의 特別 赦免을 받았다. [2]

生涯 [ 編輯 ]

幼年期 [ 編輯 ]

그는 初等學校를 조금 다니다 萬 "無學"李 아니라 말 그대로 學校 門턱에도 간 적도 없는 "無學"이다. 동무들이 冊褓를 끼고 몰려 다니는 것이 부러워서 울며 졸라보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日本놈들 밑에서 工夫하는 것은 안 좋다’며 그를 學校에 보내지 않았다. 日帝가 最後의 發惡을 하던 1940年代 끝까지 神社參拜를 拒否하자 日帝의 눈 밖에 난 이들 家族은, 山 속으로 들어가 生活하였다. [2] 山짐승을 벗 삼아 生活하던 어린 서경원에게 읽고 接할 수 있는 것은 聖經冊뿐이었다. [2]

1945年 8月 好奇心 때문에 日本 사람에게 몰래 新聞을 얻어다 보던 서경원은 '解放'이란 말을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單걸음에 내려갔다 오신 아버지는 덩실 춤을 추며 “日本놈들이 물러갔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解放과 함께 山에서 내려와 父母와 團欒한 家庭을 이루며 살았던 때도 있었지만, 韓國 戰爭 이 나자 그는 父母와 헤어져 孤兒院인 '桐光源'으로 보내졌다. [2]

孤兒院 生活 [ 編輯 ]

桐鑛員은 이세종과 弟子 이현필이 孤兒들을 돌보기 위해 세웠던 孤兒院이기도 하고 純潔, 淸貧, 順命, 禁慾을 原則으로 세운 修道院이기도 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共同體 生活을 하며 家庭生活은 멀리하고, 勞動을 통해 自給自足하면서 버려진 이들을 보듬어 함께 살았다. 서경원의 아버지도 이들의 影響을 받아 修道院 生活을 하였다. [2]

韓國 戰爭 이 터지자 동광院에는 戰爭孤兒들이 모여들었다. 서경원은 이들과 함께 聖經工夫를 하고, 勞動을 하면서 어린 時節을 보냈다. 이들 共同體는 戰後 復舊 時期에 京畿道 陵谷 YMCA 農場에서 農事를 짓기도 했다. 그의 回顧에 依하면 '하루는 收穫이 끝난 쌀을 달구지에 싣고, 아스팔트가 없어 덜그럭 대는 길을 따라 陵谷에서 搜索을 지나 鍾路 YMCA까지 갔다. 서울 YMCA 總務였던 현동완 은 ‘그냥 가져가서 아이들 먹여라’고 밀어내고 달구지를 끌던 어른은 ‘안 된다. 받아라’ 하고 되內密고...... 어른들끼리 ‘아름다운’ 실랑이를 벌인 탓에 함께 간 아이들은 덜덜 떨며 YMCA 天幕에서 밤을 지샜다. [2] '고 한다.

農村 啓蒙 運動 [ 編輯 ]

共同體 生活이 답답했던 서경원은 二十代 初盤이던 1958年 어머니와 함께 修道院에서 나와 谷城郡에서 農村 靑年啓蒙運動을 벌였다. 40餘名 남짓한 洞네 靑年들을 모아 ‘工夫를 해야지, 農事만 하면 無視 받는다’고 說破하며 夜學을 꾸렸다. 4H(頭腦 Head, 마음 Heart, 손 Hand, 健康 Health) 運動에 參與한 것이다. 靑年會에서 共同으로 農事도 짓고 삯으로 會費를 모아 夜學 建物도 지었다. 또 ‘ 沈淸傳 ’ 映畫가 流行할 때 映畫필름을 求해서 한집에 半 되씩 쌀을 걷어서 布帳을 치고 映畫를 틀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映畫를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2] 谷城 靑年會의 이름은 '向進回'라 지었는데 '農村이 前進한다'는 進取的인 뜻이다. 서경원은 全羅南道 光州 에서 열린 함석헌 의 講演會에 參席했다가, 함석헌 講演會를 主催하던 主催側이 高麗大 '向進回'라는 모임인 것을 보고 令監을 얻어 모임의 이름을 向進會라 이름붙였다고 한다. [2]

서경원은 當時 農村의 4H 靑少年 運動에도 加擔하였다. 그러나 後에 서경원은 當時 參與했던 4H運動에 對해 ‘美國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라고 評價했다. 美國 第2次 世界大戰 以後 自身의 統治를 받는 나라들에 4H 出身의 美國 顧問團을 보냈는데, 結局 이를 통해 第3世界 統治를 위한 ‘美國물 들이기’ 卽 思想的, 文化的 侵略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軍隊 生活 [ 編輯 ]

그는 農村 夜學의 先生으로도 農民들을 啓蒙하였다. 그러나 1962年 스물넷에 令狀을 받고 軍隊에 徵集되어 入隊, 除隊 後 다시 光州로 돌아와 보자 夜學 建物은 팔려서 酒幕집이 되어 있었다. 除隊 後 高麗大學校 勞動問題硏究所의 敎育을 修了했다. 李佑宰 , 김낙중 等이 中心이 되어 指導되던 高麗大 노연은 勞動者, 農民들을 모아 敎育을 進行했고, 이는 1974年 크리스천 아카데미 敎育으로 이어지면서 70年代 勞動運動, 農民運動에 加擔하였다.

가톨릭에 귀의 [ 編輯 ]

4泊 5日의 敎育을 받은 後 서경원은 말 그대로 눈이 뜨였다 한다. 그의 回顧에 依하면 이제까지는 農事를 지으면서 生産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정작 重要한 것은 제값 받고 파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 敎育 期間 동안 가톨릭農民會와 因緣을 맺게 되면서 本格的으로 農民運動에 뛰어들게 되었다. [2] 1976年 咸平고구마 鬪爭의 因緣으로 서경원은 天主敎 領洗를 받고 天主敎에 歸依하였다. 1972年 가톨릭 農民會(가농)가 出帆하자 加擔하였다..

가농 活動 [ 編輯 ]

가톨릭 農民會 活動 [ 編輯 ]

그는 가농 活動 外에 直接 農土를 사서 그는 農事를 짓기 始作한다. 서경원은 全南 咸平 地域에서 가농 活動을 始作한 後 1974年부터 ‘쌀 生産費 調査’를 始作했다. 當時에 쌀 한가마니를 生産하는 데 生産費가 85,000원이 들었는데, 政府는 이를 73,700원에 收買했다. 明白하게 赤字였다. 하지만 그 때까지 農民들은 正確한 生産費가 얼마인지, 남는 收益이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損害認知에 對해 正確히 計算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의 쌀 生産費 調査는 歷史 以來 처음 進行된 것이었다. 農民들은 自身들이 뼈 빠지게 農事를 지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原因이, 農民의 犧牲을 통해 經濟開發을 일으키는 朴正熙 政權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始作했다.

咸平 고구마 鬪爭 [ 編輯 ]

1976年 "咸平 고구마 鬪爭"이 始作됐다. 그 해 前南道 농협은 件고구마(얇게 썰어 말린 것) 形態로 收買하던 것을 生고구마로 收買하겠다고 發表했다. 市價 1千원 程度였던 生고구마를 件고구마 水準인 1千317원에 全量 收買하겠다는 約束은 農民들에게 큰 希望이었다. 農協 職員들은 고구마 農家를 찾아다니며 농협이 製作한 砲隊까지 나눠 주면서 希望을 부풀렸다. [2]

全南 海南, 無顔과 함께 고구마 主産地였던 咸平郡에서는 그 해 豐年이 들었다. 그러나 農協 은 收穫이 끝난 11月이 되도록 40%에 못 미치는 數量만 收買했고, 農家 倉庫에서는 농협의 約束만 믿고 내다 팔지 않은 고구마들이 썩어가기 始作했다. 結局 農民들은 砲隊 黨 400원의 歇값으로 고구마를 팔아야 했다. 가톨릭農民會는 咸平 고구마被害補償對策委員會를 꾸려 調査를 벌였고, 9個 마을 160 農家의 總 被害額人 309萬원을 補償하라는 鬪爭을 始作했다. 咸平郡 全體 被害額은 1億4千萬 원이었다. [2]

結局 그는 咸平 고구마 鬪爭에 加擔하였다. 처음엔 17名이 모여 싸움을 始作했지만 해를 넘기고도 問題가 解決되지 않자 全南地域 全體의 鬪爭으로 번져갔다. 가농 전남연합회가 이듬해인 1977年 4月 光州 계림동 聖堂에서 祈禱會를 開催하고, 600餘 名 會員들이 농협 全南支部長 面談을 要求하며 거리 行進을 벌인 것이다. 이들은 서울, 大田, 釜山 等 大都市 等을 다니며 事件의 眞相을 暴露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경원은 當局의 注視를 받게 되면서 큰 苦楚를 겪었다. 그를 ‘빨갱이’로 몰아가려는 試圖가 繼續되었고 ‘죽고 싶지 않으면 操心하라’는 公公然한 脅迫을 받기도 했다. 天主敎 聖職者들의 入校 勸誘 外에 ‘天主敎 信者도 아닌데 무슨 꿍꿍이로 가농 活動을 하느냐’는 陰害를 받은 것 亦是 귀의 契機가 되어 그는 天主敎에 歸依해 洗禮를 받기도 한다. [2]

拘束과 釋放 [ 編輯 ]

安東 씨감자 事件으로 拘束 [ 編輯 ]

서경원은 이듬해인 1979年 安東 씨감자鬪爭과 關聯되어 拘束됐다. 政府가 썩어버린 씨앗을 나누어줘서 감자農事를 망친 安東 農民들이 被害補償을 要求하자, 이에 앞장선 가농 會員 오원춘을 當局이 보름 남짓 拉致, 監禁한 事件이었다. 오원춘이 가톨릭 안동교구에서 言論에 良心宣言을 하자 私服警察은 敎區廳까지 亂入해 神父와 가농 指導部를 强制 連行했다. 이 일로 緊急措置 違反으로 拘束된 狀態에서 10月 26日 朴正熙 의 死亡 消息을 接하였다.

1980年 [ 編輯 ]

서경원은 咸平에서 머물고 있던 中 新軍部에 依해 5·18 光州 民主化 運動 關聯者로 指目되어 1980年 6月 8日 警察에 拉致되어 咸平 警察署에 37日間 拘禁됐다가, 光州 保安隊로 移牒된 後 極甚한 拷問에 시달렸다. 5·18 光州 民主化 運動과 無關했던 그는 영문도 모르고 잡혀가 拷問을 當한 後 ‘內亂煽動罪’로 拘束됐다가 그해 겨울 滿身瘡痍가 되어 出所했다. [2]

當時 그는 短期間 拷問 後遺症을 앓았는데, 그의 回顧에 依하면 '아직 젊을 때라 病院에 가면 돈이 많이 든다며 혼자서 몸을 추스르고 農事일을 했던 서경원. 한참 지난 後날에야 拷問 後遺症이 얼마나 深刻한 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2] '고 한다.

農民 運動과 政界 入門 [ 編輯 ]

1981年 3月부터 서경원은 가농 全國會長職을 맡아 農民運動을 이끌었다. 1980年代 民主化 運動 불길이 거세지면서 農民 代表로 1985年 民主統一民衆運動聯合(민통련)에 參與했고 1987年 6月 抗爭 共同代表 [2] 로 選出되었다. 그 밖에 天主敎使徒職協議會 中央常任委員, 民主統一 民衆運動聯合 共同代表, 拷問 및 容共造作 防止對策委員會 共同代表 等으로 活動했고, 1987年 朴鍾哲 이 死亡하자 故 박종철烈士 追悼大會 共同代表에 選出되었다.

1987年 한겨레新聞 創立에 參與, 한겨레新聞創刊發起人 共同代表에 選任되었다.

以後 民主化 鬪爭을 이끌던 在野人士들과 學生 運動圈 出身을 迎入하면서 平和민주당 에 集團 入黨하였다. 그 亦是 다른 在野人士 및 學生運動圈 人士들과 함께 制度 政治權에 進出하게 되었고, 1988年 金大中 前 大統領이 總裁職을 맡고 있던 평민당 所屬으로 第13代 國會議員 選擧에 出馬해 當選됐다. 同年 7月 서경원은 祕密裏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訪問해 主席 金日成 을 만났다.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訪問 [ 編輯 ]

서경원은 1984年 世界農民會에 參席했다가 獨逸 民主人士들을 만났고, 성낙영 牧師를 통해 入北이 可能한지 打診하게 됐다.

1988年 그는 在野 運動家들과 連絡 打電 끝에 北韓으로부터 承認을 받아 체코슬로바키아 를 經由해 訪北하게 된 것이다. 國會議員 生活을 하면서 ‘政治活動만으로 農民이 解放될 수 없다. 分斷 問題를 먼저 解決해야 한다’는 苦悶이 가득했던 참이었다. 入北하기 前부터 김일성 主席을 直接 만나겠다고 要請한 끝에 許可를 받았고 金 主席과 40分間 마주 앉아 統一問題를 討論할 수 있었다.

그는 當時를 回顧하면서 “내가 만난 金 主席은 反共敎育 속의 人物이 아니었다. 黃金椅子에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갔더니 野黨 國會議員인 나를 맞이하기 위해 먼저 나와 있었고 옷차림도 나보다 더 疏脫했다. 꼭 敬語를 使用했고, 의전을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便하신 대로 하라’고 말했다. (테러威脅 等이 있을 수 있는데) 들고 간 가방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게 했다. 처음엔 그래서 假짜인 줄 알았다. 複道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먼저 人事를 건네는데 목소리가 마이크에 댄 것처럼 왕왕 울렸다”고 말했다. [2]

서경원은 40分間의 會談에서 統一問題에 對한 여러 意見을 提示했다. 主로 ‘ 88 서울올림픽에 參席해 달라 ’ ‘日帝 때 進行되던 경평蹴球對抗戰 을 復元瑕疵’ ‘休戰線에서 南側에 誹謗放送 하지 말라’ ‘優秀 農産物, 家畜 種子交流를 推進하자’ ‘ 金壽煥 樞機卿이 平壤에서 傳敎할 수 있게 門을 열어라’ ‘유엔 監視 下에 相互 軍縮을 하자’ ‘아들에게 權力 承繼 하지 마라’ 等의 內容이었다.

金 主席은 이에 對해 ‘樞機卿님 언제든 오시면 門 열어놓겠다. 누가 와도 門 열어놓겠다’고 말하는 等 大體로 肯定的이었고, 올림픽 參席의 境遇 南側과 會談을 했는데 決裂됐다고 說明했다고 한다. 서경원은 그 때의 對話에 對해 “金 主席의 主張은 ‘(民間交流 等이) 다 좋은데 그 前에 不可侵條約을 맺어야 한다, 서로 왔다 갔다 하면 좋지만 한 쪽이 銃을 쏘면 戰爭 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고, 나는 ‘民間交流가 먼저 있어야 認識의 變化가 오고, 不可侵 條約까지 가는 段階로 進入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 部分에 見解差가 있었다”고 記憶을 되짚었다. [2] 7月 19日부터 21日까지 2泊 3日間의 平壤 訪問은 以後 10個月 동안이나 世間에 알려지지 않다가, 1989年 6月 29日 그가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拘束되면서 알려졌다. 늦봄 문익환 牧師 訪北이 있은 直後였던 데다, 野黨 國會議員 身分이었기 때문에 事件의 波長은 컸다. [2]

87年 6月 抗爭으로 噴出된 民衆들의 民主化 熱望에 降伏하다시피 6·29 宣言 을 發表했던 노태우 政權은 1988年 總選에서 ‘與小野大’ 構圖가 形成되면서 權力의 基盤이 狹小해진 狀態였다. 5.18 眞相調査 聽聞會가 이어졌고 1989年 1月에는 民主化 勢力이 全國民族民主運動聯合 (전민련)을 建設하였다. [2]

拘束 事態 前後 [ 編輯 ]

安企部는 서경원 議員 訪北事件을 ‘間諜活動’으로 發表했다. 그가 工作金 5萬 달러를 北에서 받아왔으며, 김대중 當時 평민당 總裁는 對北親書를 傳達했고 工作金 中 1萬 달러를 받았다고 發表했다. 또 不告知罪로 평민당, 가농 主要 人物을 連行하고, 서경원이 訪北 事實을 告白했던 宗敎 指導者 金壽煥 樞機卿, 함세웅 神父에 對해서도 不告知罪 適用 與否를 檢討했다. [2] 祕密裏에 訪北한 事件으로 그는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懲役 10年을 宣告받았고 議員職을 喪失했다. [2]

連行 25日 만에야 이루어진 첫 番째 辯護人 接見에서 서경원은 間諜活動 部分을 否認했고, 調査 過程에서 拷問을 받았다고 陳述했다. 特히 정형근 局長에게 直接 拷問을 받은 事實을 暴露했다. [2] 安企部 調査 過程에서 金日成 의 손금을 그려온 것을 公開하여 話題가 되기도 했다. [1] 이는 言論에 公開되어 話題가 됐다.

出所한 後 그가 言論 인터뷰에서 밝힌 內容에 따르면 정형근은 ‘北韓에 세 番 갔다 온 것 안다’ ‘訪北 前에 김대중이 시킨 것을 밝히라’고 要求하며 甚한 暴行을 加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事件 當時 가장 爭點이었던 평민당 背後說에 對해 “나는 갈 때나 올 때 黨과 一切 連繫 없이 갔다”고 말했고, 5萬 달러에 對해 “내가 統一 事業한다고 要求했다. 그 部分은 내가 모두 陳述했다. 安企部側은 이를 工作金으로 發表해버렸다”고 했다. [2]

以後 그는 金大中 의 政治資金 收受 關聯者로도 指目되어 調査받았다. 金大中 總裁 1萬 달러 授受說에 對해 “사나흘 동안 나를 죽일 程度로 몰아치는 바람에 檢察調査에서 내가 一旦 1萬 달러를 주었다는 要求대로 自白을 했다. 그랬다가 裁判에서 이를 全面 否認했다”고 말하면서 “주려면 5萬 달러 다 주지, 恥事하게 1萬 달러만 주겠냐”고 一蹴하기도 했다. [2]

다음날 아침 내 얼굴을 보니 멍이 들어 까만色이 돼버렸다. 顧問 앞에는 天下壯士가 없다. 내가 하고픈 말을 하기라도 하면 卽刻 주먹이 날아오니까... (以下 省略)... [2]

拘束 이듬해에 英國 , 네덜란드 , 스위스 , 스웨덴 , 美國 , 日本 , 프랑스 等과 國際赦免委員會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獨逸 大統領 等이 서경원 議員 釋放 決議案을 採擇하기도 했다.

1990年代 以後 [ 編輯 ]

1993年 金永三 政府 出帆 直後 그에 對한 釋放 輿論이 나왔으나 默殺되었다. 그는 懲役 10年型을 言渡받고 收監 9年만인 1998年 假釋放되었다.

2000年代 以後 [ 編輯 ]

2002年 美軍 裝甲車에 依한 中學生 壓死 事件 當時 大規模 集會를 마치고 示威隊가 地下鐵로 移動하다가, 한총련 所屬 大學生들과 美軍 兵士 존 머피 二兵 等 3名 사이에 실랑이가 붙자 이를 말리다가 美軍에게 暴行을 當하기도 했다. [2]

以後에도 社會正義硏究所 所長, 汎民族運動團體協議會 首席副總裁, 民族和解自主統一協議會 拷問 等에 選出되어 活動하였다.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88年 總選 13代 國會議員 全南 咸平郡·靈光郡 平和민주당 64,220 票
74.79%
1位 初選
2000年 總選 16代 國會議員 서울 鍾路區 無所屬 768 票
0.94%
8位 落選

各州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