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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49年前 北送船’이 남긴 아픔|東亞日報

[窓]‘49年前 北送船’이 남긴 아픔

  • 入力 2009年 4月 30日 02時 57分


6寸 오빠 만난 60代 脫北者
“北現實 모르고 北에 間 先親, 故鄕親戚 꼭 찾으라고 遺言”

“돌아가신 아버지가 양수복 氏 맞습니까?”

“그렇습네다. 寫眞으로만 봤던 양만식 오빠가 맞습네까?”

28日 午後 2時 서울 양천警察署 5層 講堂. 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지난해 9月 脫北한 襄某 氏(60·女)가 이름만 알고 있던 6寸 오빠 양만식 氏(74)와 처음 만난 것이다. 한 番도 만난 적은 없지만 이들은 첫눈에 같은 핏줄임을 確認했다. 오빠를 끌어안은 동생 襄 氏의 머리엔 世上을 떠난 아버지의 한 맺힌 삶이 走馬燈처럼 스쳐갔다.

아버지는 1940年頃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日本으로 强制 徵用됐고 그곳에서 日本人 女性을 만나 結婚했다. 아버지는 늘 故鄕인 忠南 公州郡 사곡면 해월리를 그리워했다. 日本에서의 生活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故鄕 親戚들에게 便紙와 함께 學用品 等을 小包로 보냈다. 하지만 1960年 1月 아버지는 北韓에 가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總聯의 宣傳에 眩惑돼 家族과 함께 北送船을 탔다.

北韓에서의 生活은 생각과 달랐고 아버지는 後悔하기 始作했다. 恨을 풀지 못한 아버지는 1983年 8月, “故鄕을 찾아가 꼭 親戚을 만나보라”는 遺言을 남기고 62歲로 世上을 떠났다.

딸 襄 氏는 아버지의 遺言을 지키고 싶었다. 結局 北에서 結婚한 男便 等 家族과 함께 지난해 9月 韓國行을 擇했다. 中國, 미얀마, 泰國 等을 거쳐 3個月間의 險難한 旅程 끝에 서울에 到着했다.

襄 氏 家族은 3月 末 서울 양천구 신정2洞의 한 아파트에 定着했다. 襄 氏는 곧바로 양천警察署 최순자 經緯(46)를 만나 “제발 6寸 오빠 좀 찾아 달라”고 付託했다. 28日 만남은 그렇게 해서 이뤄졌다. 初老의 女同生은 公州에서 올라온 오빠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正말 꿈같은 일이 이뤄졌습네다. 崔 警衛에게 고맙지요. 근데 아버지 生前에 이런 만남이 있었더라면….”

황형준 記者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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