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冊갈피 속의 오늘]1955年 畫家 李仲燮 個人展|東亞日報

[冊갈피 속의 오늘]1955年 畫家 李仲燮 個人展

  • 入力 2005年 1月 17日 18時 12分


코멘트
“…/바다가 잘 보이는 窓가에 앉아/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동경에서 아내가 오지 않는다고.”(김춘수의 ‘내가 만난 李仲燮’ 中)

굵은 붓으로 뛰쳐나올 듯한 소를 그린 作品들로 널리 알려진 ‘소의 畫家’ 李仲燮(李仲燮).

그는 靈魂을 쏟아 한 女人을 그리워한 男子이기도 했다.

1955年 1月 18日 李仲燮은 서울 ‘미도파’ 畫廊에서 個人展을 열었다. 겉보기에는 盛況이었으나 그림값을 제대로 내지 않은 사람이 많아 經濟的으로는 大失敗였다. 돈을 마련해 아내가 있는 日本으로 가려던 꿈도 무너졌다.

1916年 平壤의 富者집에서 태어난 그는 日本 留學時節 運命의 女人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를 만났다.

李仲燮은 日本에서 天才 畫家로 名聲을 떨쳤지만 2次 大戰이 막바지에 이르자 繼續 머무를 수가 없었다. 1943年 혼자 歸國한 그는 그림을 그려 만든 100餘 點의 葉書를 야마모토에게 보냈다. 사랑의 象徵으로 염소 孃 사슴 等을 그렸다.

1945年 美國이 日本 攻襲에 나섰을 때 야마모토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朝鮮으로 건너왔다. 李仲燮과 結婚한 그는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글 이름을 갖게 됐다.

어렵게 이룬 家庭은 6·25戰爭으로 깨졌다. 元山에서 釜山으로 다시 濟州島로 避亂을 다니던 渦中에 營養 不足과 疾病으로 家族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李仲燮은 家族을 日本으로 보냈다.

그는 家族에 對한 그리움을 사흘마다 그림葉書를 그려 日本에 보내는 것으로 달랬다.

“사랑하는 사람은 함께 있지 않아선 안 되는데…세상에서 第一로 所重한 사람, 나의 멋진 기쁨인 남덕…當身과 아이들을 가슴 가득 채우고 힘을 내 製作하고 있고…이제 한 고비만 참으면….”

李仲燮은 ‘한 고비’를 넘기 위한 1955年 個人展을 失敗했고 이듬해 9月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쓸쓸히 숨졌다.

1.3坪 골房에서 海草로 延命했지만 네 食口가 함께 살아 幸福했다고 그는 濟州島 避亂 時節을 回想했다. 2002年 濟州 서귀포시에 ‘李仲燮 美術館’이 建立됐다. 觀覽客들은 ‘게와 家族’ 等 그림 9點을 통해 李仲燮의 ‘온 마음을 다한 사랑’을 느끼고 있다.

김승진 記者 sarafin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