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年에게는 兄이 있었다. 父母님은 野球를 좋아하는 兄弟에게 글러브를 사줬다. 하나는 野獸 글러브, 또 하나는 砲手 글러브였다. 兄이 먼저 野獸 글러브를 골랐다. 동생은 捕手 글러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화곡초등학교에 다니던 1979年 學校에 野球部가 생겼다. 野球 選手를 꿈꾸는 아이들이 테스트를 받았다. 數十 名의 아이 中 捕手 글러브를 가진 건 少年이 唯一했다. "그럼 네가 捕手 해." 監督의 이 한마디로 그의 人生은 決定됐다. 30年이 지난 2009年. 그는 如前히 捕手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는 히어로즈 捕手 金東秀(41)다.
●아들 같은 後輩와 그라운드 누벼
올해를 始作할 때 그의 이름 앞에는 '플레잉 코치'란 修飾語가 붙었다. 하지만 그는 如前히 現役이다. 5月 15日 처음 1軍에 올라온 뒤 22競技에 나가 打率 0.375에 2홈런 11打點. 흔들리던 投手陣은 老鍊한 그가 마스크를 쓴 뒤 安定을 찾았다. 前半期 막판 暫時 2군에 내려갔지만 김시진 監督은 30日 다시 그를 1軍에 복귀시켰다.
1968年生이니 41歲. 프로野球 選手 全體를 통틀어 野獸로는 最古參이다. 投手를 包含해도 한화 宋鎭禹(43)에 이어 두 番째다. 金東秀는 "올해 入團한 고원진이나 강윤구 같은 新人이 태어난 1990年에 나는 韓國시리즈에서 뛰고 있었다"며 웃었다. 게다가 體力的으로 가장 힘들다는 砲手. 그가 20年을 한결같이 選手로 뛸 수 있었던 祕訣은 무엇일까.
●韻(運)과 節制의 美德
올 시즌은 唯獨 砲手들의 負傷이 많다. SK 박경완, LG 김정민, 三星 진갑용, 롯데 강민호 等 各 팀 主戰 砲手들은 副賞으로 줄줄이 戰力에서 離脫했다. 砲手라는 포지션의 特性上 공에 맞는 일은 不知其數다. 홈으로 電力 疾走하는 走者와 衝突하는 일도 種種 생긴다. 이래저래 負傷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 그는 "얼마 前 우리 팀 捕手 許浚도 홈에서 走者와 衝突해 무릎 靭帶가 破裂됐다. 正말 남의 일 같지 않다"며 "負傷이 없는 나는 正말 運이 좋은 便"이라고 말했다.
不幸이 그를 避해갔지만 徹底한 自己 管理가 없었다면 이토록 롱런하기는 어려웠을 터. 金東秀는 "프로 選手는 두 가지 選擇을 할 수 있다. 野球에 集中하거나 熱心히 놀 수 있다. 둘 다 잘하는 選手는 없다. 난 前者를 擇한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人生의 中心을 野球에 맞춰 살아왔다는 얘기였다. 그는 술, 담배를 안 한다. 親舊들과의 만남도 自制한다. 잘 먹고, 잘 쉬고, 野球만 생각한다. 언뜻 單純해 보이는 日常이 오늘의 最長壽 捕手 金東秀를 만들었다.
그는 "重要한 건 自身에 對한 節制와 野球에 對한 熱情이다. 才能 있는 選手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으면 언젠가 機會는 온다"고 말했다.
●天堂과 地獄의 롤러코스터
金東秀의 野球 人生에도 試鍊은 있었다. 三星 時節이었던 2001年 韓國시리즈를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當時 主戰 砲手는 진갑용의 몫이었다. 그해 韓國시리즈에 出戰했지만 競技 내내 벤치의 눈치를 봤다. 몸이 움츠러들었고 自己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結果는 2勝 4敗로 準優勝.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砲手였나"하는 自愧感이 밀려들었다. 그는 이듬해 SK로 트레이드됐고 2002年 末 放出됐다.
傲氣가 생겼다. 30代 中盤의 나이. 불러주는 팀이 있다면 온 몸을 던지고 싶었다. 機會가 왔다. 현대가 그를 불렀다. 2003年 그는 말 그대로 펄펄 날았다. 그해 生涯 처음으로 3割 打率(0.308)을 쳤다. 自身을 내친 SK와 맞붙은 韓國시리즈. 主人公은 4勝 中 3勝을 거둔 投手 정민태였다. 하지만 뒤에는 7競技 내내 마스크를 쓴 金東秀가 있었다. 2004年에도 그가 리드한 현대는 다시 한 番 韓國시리즈 챔피언에 올랐다. 3年 사이 그가 맛본 地獄과 天國이었다.
●마음은 언제나 現役
20年이나 프로 選手를 하다보니 안 겪어본 일이 없다. 1990年 LG에 入團해 新人王이 됐다. 優勝 半指를 4個나 꼈다. 捕手 部門 골든글러브는 7番을 받았다. 1999시즌 後 自由契約選手(FA)가 돼 3年間 8億 원의 條件으로 三星으로 팀을 옮겼는데 野獸로서는 첫 FA 移籍이었다. 앞서 言及했듯 트레이드도 돼 봤고, 放出도 當했다. 올해부터는 플레잉 코치라는 職銜을 받았다.
金東秀는 "正말 餘恨 없이 野球를 했다. 野球 選手로서 맛볼 수 있는 단맛, 쓴맛을 모두 經驗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感謝한 게 팬들이다. 언제 유니폼을 벗게 될지 모르지만 유니폼을 입는 동안에는 팬들을 위해 熱心히 뛰고 싶다"고 했다.
●"野球는 砲手로부터 始作된다"
砲手는 自他가 認定하는 '3D' 포지션이다. 힘든 일에 비해 待遇 받기 쉽지 않고, 主戰 자리를 꿰次期度 어렵다. 잘 던지면 投手 德分이고 安打나 홈런을 맞으면 投手 리드를 잘못한 砲手를 탓한다. 때문에 아마추어 有望株 中에 砲手를 選好하는 選手는 거의 없다.
하지만 金東秀는 "砲手는 꼭 한 番 해볼 만한 魅力的인 자리"라고 말한다. 砲手는 投手들과 交感을 나누고 相對 打者들을 알아야 하며, 벤치와 疏通해야 한다. 競技場에서 모든 野獸들을 바라보면서 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것은 捕手밖에 없다는 것이다.
'砲手 禮讚'을 위해 그가 남긴 마지막 말 亦是 20年 經歷의 砲手다웠다. "投手가 공을 던져야 비로소 競技가 始作된다고 하잖아요. 아니에요. 捕手가 먼저 사인을 내야 投手가 공을 던질 수 있어요. 結局 野球는 砲手로부터 始作됩니다."
이헌재記者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