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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가 수-黨과 벌인 90年 戰爭이 自己네 國內戰爭이라는 中國의 詭辯|東亞日報

高句麗가 수-黨과 벌인 90年 戰爭이 自己네 國內戰爭이라는 中國의 詭辯

  • 東亞日報
  • 入力 2014年 2月 18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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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 敎授의 高句麗 이야기] <6>

고구려가 해양을 공략하던 당시 중심지 역할을 한 비사성이다. 황해와 발해 지역을 동시에 관측할 수 있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高句麗가 海洋을 攻掠하던 當時 中心地 役割을 한 비사성이다. 黃海와 渤海 地域을 同時에 觀測할 수 있다. 윤석하 寫眞作家 提供

윤명철 교수
윤명철 敎授
589年 隋나라는 400年 동안 分裂됐던 中國을 統一한다. 政治權力과 軍事力을 中央으로 集中했고 中華主義를 發動해 東아시아 宗主權을 確立했다. 反面 北方에서는 突厥이 草原을 統一했다. 勢力均衡과 安定의 時代가 무너지고 秩序再編을 위한 國際 戰爭이 不可避한 狀況이 되었다.

高句麗는 武器를 開發하고 軍事力을 强化했다. 말갈과 함께 거란을 끌어들였고, 敵對國인 突厥과도 提携를 摸索했다. 왜(日本)와는 曇徵 같은 僧侶들과 使臣들을 派遣해 對外關係 改善을 摸索하고 있었다. 隋나라에 友好的이었던 百濟와 新羅와는 戰爭 中이었다. 高句麗의 溫達將軍은 新羅를 攻擊하다 戰死했다.

598年 隋나라와의 70年 戰爭의 序幕이 올랐다. 高句麗는 靺鞨을 動員해 海陸 兩面으로 先制攻擊에 들어갔다. 隋나라가 30萬 大軍을 派遣했지만 陸軍은 夭逝에서 敗하고 水軍(水軍)은 黃海 北部에서 潰滅됐다. 3個月 戰鬪에서 죽은 隋나라 軍士가 10名 中 8, 9名꼴이었으니 斷然 高句麗의 壓勝이었다.

隋나라 煬帝는 大規模 全面戰을 準備했다. 臺灣과 북베트남을 征服하고 廣東 性을 據點으로 東南아시아를 貿易權에 包含시켰고 北京 外郭에서 浙江省의 航走에 이르는 大運河를 建設했다. 이는 끊어졌던 物流網과 市場을 一元化하고 戰爭物資를 圓滑하게 運搬하기 위해서였다.

612年, 113萬3800名이라는 隋나라 大軍이 다시 쳐들어온다. 數千 隻의 배가 出廷했으며 800名을 태운 傳함도 動員되었다. 數 煬帝는 高句麗의 遼東省(現 療養視)을 集中 攻擊했다. 黨거(바퀴 달린 移動用 수레) 운제(높은 사다리)를 動員해 땅窟을 파기도 했다. 이때 벌어진 高句麗와 隋나라와의 戰爭은 世界 戰爭 史上 單一 戰爭으로는 最大 規模라 할 수 있다. 高句麗는 이 戰爭에서 요동성을 지킴으로써 防禦에 成功한다. 民官 合一에 依한 團合의 힘이었다.

隋나라의 平壤城 攻擊도 水泡로 돌아간다. 高句麗 作戰에 말려든 隋나라 軍隊는 破竹之勢로 進擊하다 平壤城 60里 밖에서 高巾舞 將軍의 攻擊을 받고 一時에 무너져 버린다. 敗北感에 사로잡히고 軍糧米와 武器가 不足해진 隋나라 軍隊는 退却하기에 汲汲했다.

이때 登場한 英雄이 바로 高句麗의 乙支文德 將軍이다. 그는 미리 살수(압록강설과 淸川江설, 大洋下설이 있다)에 軍隊를 埋伏해 두었다가 大大的인 攻擊을 敢行했다. 그의 戰略으로 隋나라 兵士 30萬 名 가운데 살아 돌아간 兵士는 겨우 2700餘 名에 不過했다. 隋나라는 高句麗에 敗北한 것이 決定的 要因이 되어 建國 30年 만에 亡한다.

隋나라를 繼承한 나라가 바로 唐나라다. 唐 太宗은 中國 歷史上 最高 君主로 評價받는 政治가. 唐 太宗은 지난 隋나라 때의 敗北를 雪辱하기 위해서라도 高句麗와의 戰爭이 不可避하다고 생각했다.

性急한 數 煬帝와는 달리 黨 太宗은 段階的으로 經濟 外交 軍事를 活用하는 戰略을 폈다. 東南아시아와 南方交易을 活性化해 經濟力을 强化했으며 北方의 强國인 突厥을 東西로 分割시켰고 弱化된 東突厥과도 싸움을 벌여(630년) 勝利했다. 이어 西南쪽의 强國인 吐蕃(티베트)을 侵略(638)했고, 交易路를 確保하기 위해 실크로드의 고창국(신강성의 투루판)을 攻擊해서 멸망시켰다(640년). 또 百濟와 新羅를 高句麗의 對抗勢力으로 키워 分裂政策을 取했다.

唐나라는 隋나라보다 剛했다. 唐나라에 怯을 먹은 高句麗 一部 支配層은 隋나라와의 戰爭에서 얻은 捕虜를 돌려보내고, 國家機密에 該當하는 封域度(一種의 高句麗 地圖)를 달라는 黨 太宗의 要請을 받아들여 넘겨주는 宥和策을 편다. 이 過程에서 高句麗를 바로잡은 이가 바로 연개소문이다. 그는 642年 叛亂으로 政權을 잡은 뒤 唐나라에 屈服하려는 內部의 ‘敵’들을 除去하고 戰爭을 準備했다.

마침내 高句麗의 實質的 支配者가 된 연개소문과 唐 太宗은 20年이 넘는 期間 동안 밀고 밀리는 ‘高句麗-黨’ 戰爭을 벌인다. 이 過程에서 高句麗는 東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種族을 모두 참여시켜 勝利하지만 665年 淵蓋蘇文이 죽으면서 內紛으로 亡한다.

中國은 “高句麗는 中國 歷史이고 中國의 地方政權이기 때문에 高句麗와 수·糖이 벌인 戰爭은 (中國의) 國內 戰爭”이라고 主張한다. 이게 바로 東北工程의 主張이다.

그러나 高句麗가 벌인 戰爭은 겉으로는 高句麗와 隋나라 唐나라가 盟主였지만 거란, 말갈, 吐谷渾, 突厥 백제 新羅 왜까지 얽혀 東아시아의 宗主權과 交易의 主導權을 잡기 위한 運命을 건 國際戰이었으며 여기서 堂堂히 勝利한 우리 歷史이다.

歷史를 돌아보면 統一된 中國은 일정한 패턴을 갖고 帝國을 完成해갔다. 1980年代 初부터 南方 經濟特區政策, 몽골公正, 西南公正(티베트 地域) 西北公正(腎臟 地域), 그리고 東北工程에 이르고 있다. 或是 中國은 21世紀인 只今에도 臺當(大唐)帝國의 復活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

다음은 高句麗와 三國統一 戰爭 이야기입니다.

윤명철 敎授
#高句麗 #隋나라 #70年 戰爭 #을지문덕 將軍 #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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