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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하나를 통째 그릇으로”… 朝鮮 도공, 日道字文化를 빚다|동아일보

“山 하나를 통째 그릇으로”… 朝鮮 도공, 日道字文化를 빚다

  • 東亞日報
  • 入力 2015年 10月 13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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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交 50年, 交流 2000年/韓日, 새로운 이웃을 向해] <31>賭租(陶祖) 李參平

아리타 석장 신사에 있는 이삼평 조각상. 후손들의 얼굴 모습에서 공통점을 따 이삼평의 생전 모습을 자기로 만든 것이다(위 사진).
 이삼평의 영혼을 모신 도산 신사 위쪽 ‘도조의 언덕’에 자리 잡은 ‘도조 이삼평 비’(아래 사진). 1917년 아리타 주민들이 
이삼평을 비롯해 조선 도공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세운 것이다. 아리타=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사가 현 제공
아리타 석張 紳士에 있는 李參平 彫刻像. 後孫들의 얼굴 모습에서 共通點을 따 李參平의 生前 모습을 自己로 만든 것이다(위 寫眞). 李參平의 靈魂을 모신 倒産 神社 위쪽 ‘도조의 언덕’에 자리 잡은 ‘賭租 李參平 비’(아래 寫眞). 1917年 아리타 住民들이 李參平을 비롯해 朝鮮 陶工들에 對한 感謝의 마음을 담아 세운 것이다. 아리타=유덕영 記者 firedy@donga.com·社가 現 提供
歷史的으로 文化나 經濟力에서 日本을 凌駕했던 韓國이 決定的으로 日本에 뒤지는 契機가 된 事件이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이라는 點에서 理論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朝鮮이 자랑하던 陶瓷器 技術이 日本으로 流出되면서 經濟力이 逆轉됐다. 日本人들이 壬辰倭亂을 ‘道字 戰爭(燒物戰爭·야키모노 센소)’이라고 부르는 理由이기도 하다.

戰爭에 參與했던 日本 城主들은 金屬共 木工 第地空 纖維·織物공 等 다양한 朝鮮 技術者들을 拉致해 갔지만 그中 가장 血眼이 되어 데려간 것이 道公(陶工)들이었다.

銃칼의 威脅 속에, 온갖 受侮와 不安 속에서 바다를 건넌 朝鮮 陶工들이 처음으로 上陸한 곳은 日本 규슈 사가 縣의 港口 都市 가라쓰(唐津)였다. 가라쓰 一帶에는 朝鮮 陶工들이 세운 陶瓷器 가마가 只今도 無數히 남아있다. 이 一帶에서 만들어진 陶瓷器들은 가라쓰 港口를 통해 日本 各地로 퍼져나가 ‘가라쓰 모노’라고 불렸다.

日本 陶藝의 세 가지 흐름을 말할 때 가라쓰, 아리타(有田), 사쓰마(薩摩) 陶藝를 꼽는데 모두 朝鮮 陶工들에 依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中 日本 陶瓷産業의 出發이며 陶瓷의 神으로 推仰받는 李參平(李參平·?∼1655)李 만든 아리타 이야기부터 始作하기로 한다.

○ 陶瓷의 神 李參平

수년 동안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으러 다니던 이삼평이 발견한 이즈미 고령토 광산. 400여 년 동안 채굴이 이뤄져 산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아리타=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數年 동안 陶瓷器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으러 다니던 李參平이 發見한 이즈미 高嶺土 鑛山. 400餘 年 동안 採掘이 이뤄져 山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아리타=유덕영 記者 firedy@donga.com
사가 縣 西쪽의 작은 마을인 아리타 一帶는 400餘 年 前인 1594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朝鮮 出兵 때 晉州城을 攻擊했던 日本 將帥 나베緦麻 나오시게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朝鮮 侵略에 參與했다가 退却하면서 150餘 名의 朝鮮 陶工을 拉致해 끌고 간다. 이 中에 錦江 出身 李參平이 끼어 있었다.

나베緦麻는 李參平에게 처음에는 가라쓰 近方에서 陶瓷器를 만들도록 했다. 하지만 李參平은 洽足한 結果를 내지 못했다. 道字를 구울 수 있는 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道字 만드는 일을 뒤로하고 數年間 흙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마침내 1616年 아리타 東部 이즈미(泉) 山에서 高嶺土(白土)가 大量으로 묻힌 鑛山을 發見하고 道公 18名을 데리고 아리타로 移住한다. 이어 시라카와(白川)에 大型 가마를 짓고 白瓷를 만들어내는 데 成功한다. 日本의 歷史를 바꾼 陶瓷産業이 始作되는 瞬間이었다.

○ 李參平 彫刻像

4月 찾아간 아리타는 人口 2萬餘 名의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朝鮮人 李參平’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를 擧論하지 않고서는 마을을 說明할 수가 없다”며 “마을의 오늘이 있게 만든 분”이라고 異口同聲으로 말했다.

1830年부터 陶瓷器를 만들어온 日本 內 有名 陶瓷器業體 ‘新가마’의 가지하라 시게히로(梶原茂弘) 代表는 記者에게 “李參平 先生 德分에 只今 우리가 이곳에서 陶瓷器를 만들고 있다”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朝鮮 陶工들에게 感謝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日本人들 中엔 韓國으로부터 文化的 影響을 받았다는 것을 웬만해선 잘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陶瓷器 分野에서만큼은 韓國 影響을 받았다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즈미 鑛山은 李參平에 依해 처음 發見된 以後 400年間 採掘이 이뤄지면서 日本 陶瓷産業을 이끌어온 場所답게 風光부터 달랐다. 周邊은 온통 높은 山인데, 鑛山만 바위를 드러낸 채 움푹 파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타 마을 사람들은 “山 하나를 모두 그릇으로 만들었다”고 말할 程度였다.

于先 李參平 彫刻像이 있는 석張(石場) 神社부터 들렀다. 鑛山 바로 곁 나무 덱으로 整備되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紳士가 나왔다. ‘石匠’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紳士는 鑛山이 發見된 後 陶工과 石工들이 세운 것이다. 가파른 돌階段 위로 작지만 端雅한 建物이 한눈에 들어오는 매우 閑寂한 紳士였다. 돌階段을 올라서니 본존 왼쪽 작은 建物에 彫刻像이 모셔져 있었다.

말쑥한 韓服 차림을 하고 便安하게 앉아있는 末年의 모습을 白瓷(白磁)로 구워 만든 것이었다. 丈人이라기보다 선비처럼 知的인 表情에서는 人生을 達觀한 餘裕까지 느껴졌다. 긴 鬚髥이나 앞으로 모아 쥔 손 等 디테일이 매우 뛰어난 彫刻像이었다. 同行한 야마구치 무쓰美(山口睦) 아리타觀光協會 專務理事는 “요즘 같으면 寫眞이라도 보고 만들었을 텐데 그때는 그런 게 없던 時節이라 作家가 子孫들 얼굴을 細心히 觀察해서 想像力을 加味해 만들었다”고 했다.

○ 李參平 비


李參平은 죽은 後 新(神)으로 모셔졌다. 죽고 나서 3年째 되던 해인 1658年 세워진 ‘島山(陶山·度盞) 神社’가 바로 그의 靈魂을 모신 곳이다. 紳士는 350餘 年의 年輪이 그대로 느껴지는 古色蒼然한 곳이었다.

곳곳에 自己로 가득한 點도 ‘陶瓷의 神’을 모신 곳다웠다. 入口부터 巨大한(높이 3.65m, 幅 3.9m) 自己 도리이(鳥居·紳士의 境界를 標示하는 門)가 觀覽客을 맞는데 1888年 세워진 것으로 類型 文化財로 登錄됐다고 한다. 紳士에 놓여 私心(邪心) 있는 者들을 監視하는 魁首인 고마이누(朴犬)나 大型 물 缸아리, 本殿의 欄干 等도 모두 自己로 만든 것이었다.

神社에서 만난 미야타 다네神(宮田胤臣) 弓師(宮司·神社를 지키는 우두머리 神觀)는 “아리타의 陶瓷器 産業을 일으켜 日本을 아시아 經濟 强國으로 만든 李參平의 業績을 기리고, 繁榮을 위해 努力하자는 趣旨로 紳士가 設立됐다”고 했다.

島山 神社에 가면 꼭 들러야 할 場所가 있으니 바로 ‘도조의 언덕’이었다.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 비탈진 돌길을 걸어 올라가면 나온다. 이곳에는 오벨리스크(네모진 巨大한 돌기둥) 模樣의 ‘賭租 李參平 비’가 하늘을 向해 솟아 있다. 아리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明堂에 碑石을 세운 것이다.

碑石 뒤便으로 가보니 故人의 業績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미야타 弓師는 그中 ‘臺恩人(大恩人)’이라는 글字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읽어주었다. ‘李參平은 우리 아리타의 賭租임은 勿論 日本 窯業界의 代恩人이다. 現在 陶瓷器 關聯 産業에 從事하는 사람들은 그 恩惠를 받고 있다. 그 偉業을 기려 여기에 모신다.’

‘賭租 李參平 비’는 1917年 倒産 神社에 神位를 모실 때 함께 세운 것이라고 한다. 아리타 사람들은 그로부터 每年 4月 末에서 5月 初까지 5日間 陶瓷器 市場을 열고 5月 4日엔 賭租制(陶祖祭)도 지낸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렇게 至極精誠으로 李參平에 對한 고마움과 恩惠를 잊지 않고 있었다.

○ 14代 李參平


日本에 安着한 李參平의 日本 이름은 가네가에 山페이였다. 山페이는 三坪의 日本式 發音이다. 後날 가네가에 家門 族譜에서 山페이의 本來 城이 ‘里(李)’라는 게 밝혀져 메이지 11年(1878年)에 ‘리참坪’으로 改名된다.

李參平이 作故한 해(1655年)가 確認된 것은 아리타의 龍天使라는 절에 保管되어 있던 記錄에 ‘1655年 몰(沒)’이라고 적힌 것이 發見된 德分이었다. 1959年에는 李參平이 세운 덴구다니(天狗谷) 가마터에서 그의 이름이 적힌 墓石이 發見됐다. 비록 아랫部分이 半 토막 난 狀態였지만 故人의 痕跡을 證明해주는 매우 貴重한 發掘이었다. 墓石과 덴구다니 가마터는 모두 史跡으로 指定돼 있다.

只今 아리타에는 李參平의 14代孫이 살고 있었다. 記者는 宗家(宗家)라 할 수 있는 아리타 李參平 갤러리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한눈에 봐도 純粹한 日本人으로 보이지 않고 韓國人의 風貌가 느껴졌다. 1961年生인 그는 父親인 13代 李參平 가마에서 陶瓷器 製作 修鍊을 하던 2005年 初代 李參平의 이름을 14臺로 繼承하여 400年 傳統의 繼承者가 되었다.

그에 따르면 招待 李參平이 運營하던 가마는 4代에 들어서 脈이 끊겼다. 5代는 다른 가마에서 陶瓷器 技術을 指導했고, 6∼10代는 무슨 일을 했는지 記錄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11臺와 12代는 아리타의 다른 가마에서 技術을 가르쳤다. 李參平 가마를 되살린 것은 그의 父親인 13臺였다. 父親은 鐵道會社에서 退職한 뒤 1971年 李參平 이름을 딴 가마를 200年 만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現在 李參平 가마는 初代 때의 華麗한 名聲과는 距離가 멀다. 14代 李參平은 “中間에 門을 닫다 보니 日本 內에서도 아는 사람이 宏壯히 적은 가마”라면서 “하지만 周邊에서 ‘李參平 가마’가 잘되어야 한다고 應援을 많이 해 준다”고 紹介했다.

來年인 2016年은 初代 李參平이 이즈미 鑛山 흙으로 自己를 만든 지 꼭 400年이 되는 해이다. 14代 李參平은 現在 1代 할아버지의 作品을 再現하려 努力하고 있었다. 그는 “只今 사람들은 구마모토(熊本) 現 아마쿠社(天草) 흙이 좋다고 大部分 그 흙을 쓰고 있는데 나는 李參平의 後孫으로서 이즈미 山 흙이 如前히 좋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

아리타=유덕영 記者 firedy@donga.com
#朝鮮陶工 #日本 #道字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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