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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에게 朴正熙 大統領은 平生의 恩人이었건만…|동아일보

김재규에게 朴正熙 大統領은 平生의 恩人이었건만…

  • 東亞日報
  • 入力 2013年 9月 10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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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記者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時代’] <108>時計(時計)

61년 5·16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호남비료 사장이었던 김재규 준장(오른쪽). 동아일보DB
61年 5·16 直後 朴正熙 最高會議 議長과 湖南肥料 社長이었던 김재규 准將(오른쪽). 東亞日報DB
김재규 裁判은 速戰速決로 進行됐다. 12月 4日 첫 公判 後 18日 結審 公判까지 14日 동안 8名의 被告人에 9次例 公判이 進行됐다. 거기다 決心 後 이틀 만인 12月 20日 死刑이 宣告됐다.

辯護를 맡았던 강신옥 辯護士는 “歷史的인 裁判이 歷史上 類例없는 拙速이었다”며 “抗訴理由書 作成을 위해 原審記錄과 搜査記錄을 複寫해 줄 것을 要求했으나 鉛筆로 베끼는 것만 許容 받았다. 記錄을 대충 읽어볼 수밖에 없는 狀態에서 抗訴理由書를 作成했다”(96년 ‘신동아’ 10月號)고 했다. 김재규의 死刑 執行은 全國에 非常戒嚴이 내려진(5월 17日) 直後인 80年 5月 24日 이뤄졌다. 當時 그의 救命運動에는 金壽煥 樞機卿을 비롯해 尹潽善 前 大統領, 咸錫憲 翁 等 在野 人士들이 大擧 參與했다.

‘脚本에 따른 政治裁判’이라는 批判도 있었지만 김재규는 裁判 過程을 통해 犯行 背景에 對해 充分히 說明할 수 있는 機會를 얻었다. 그는 始終一貫 10·26을 “民主回復을 위한 國民革命”이라고 規定하고 스스로를 ‘革命家’라 主張했지만 大統領을 弑害한 後 나라의 판을 어떻게 다시 짜보겠다는 準備된 計劃도, 對策도 없었다는 것이 裁判過程에서 確認되었다. 김재규는 抗訴理由書에서 “維新憲法에 問題가 많다는 것을 오래前부터 생각했다. 72年 내가 3軍團長 時節, 群團을 訪問했던 朴 大統領을 年金시켜 놓고 下野시킬 생각도 했었다. 79年 4月에도 殺害 計劃을 세웠었다”고 했다.

그런데 2005年 3月號 월간조선은 10·26 直前에 김재규가 朴 大統領의 生日(11月 14日)에 맞춰 最高級 名品時計를 프랑스에 注文했던 祕話를 紹介하면서 이 같은 證言에 疑問을 던진다.

記事에 紹介된 證言者는 10·26이 일어났을 當時 駐제네바 代表部에 勤務하던 N 書記官으로 그는 79年 8月 下旬 中央情報部 祕書室 金某 行政祕書官으로부터 “世界的인 名品時計 制作業體인 파텍 필립사에 依賴해 ‘根軸 誕辰 1979’라는 文句를 새긴 懷中時計를 한 달 內에 만들라. 김재규 部長의 각별한 關心事項이니 蹉跌 없이 處理하라”는 電文을 받는다고 한다.

“忌日에 맞추어 製作하기 어렵다”는 現地人들을 겨우 說得한 N 書記官이 10月 中旬에 받아든 송장(貨物을 받는 사람에게 보내는 明細書)에는 無慮 1萬9000달러(藥 2000萬 원)가 찍혀 있었다. N 書記官이 이 송장을 發送한 時間은 現地 時間으로 10月 26日 午前, 韓國 時間으로는 10月 26日 午後였으니 이미 궁정동 晩餐이 잡힌 時間이었다. 월간조선은 ‘主人을 잃어버린 問題의 時計는 後날 保安司를 통해 큰 영애(令愛)에게 傳達됐다. (記事가 揭載될) 當時 한나라당 代表였던 박근혜 代表에게 “時計 寫眞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흉물스러운 物件이라 잘 保管하지 않았고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答辯을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N 書記官 말이 맞다면 生前에 市價 10萬 원짜리 세이코 時計를 차고 다닐 程度로 素朴했던 朴 大統領이 果然 김재규가 準備한 값비싼 名品時計를 받았을지도 疑問이지만 어떻든 김재규는 끝까지 大統領의 歡心을 사려 했던 것 같다. 이런 사람이 大統領을 弑害해 놓고 ‘民主革命’ 云云하는 것은 月刊朝鮮의 指摘대로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朴 大統領은 김재규에게 恩人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陸士 2期 同期生이긴 했지만 김재규는 所謂 時節 免官까지 當한 일이 있어 進級이 늦었다. 朴 大統領은 아홉 살 어린 그를 故鄕(慶北 선산) 後輩로 각별하게 챙겼다. 5·16이 成功하자 “이 나라 經濟를 살리려면 農村부터 살려야 한다”며 湖南肥料工場 建設 任務를 주면서 그를 社長에 임명했다. 以後 軍의 要職인 6師團長(首都圈 外郭 警備를 맡던 唯一한 豫備師團)과 保安司令官에 임명했고 中央情報部 次長, 建設部 長官을 거쳐 中央情報部長에 拔擢했다.

朴 大統領이 김재규를 매우 아꼈다는 證言은 많다. 김계원 祕書室長의 말(回顧錄)이다.

‘1965年 4月 大統領이 第1軍司令部 視察次 原州에 오셨다. 서울 上京 길에 “김재규 師團이 여기서 멀지 않지? 오늘 저녁은 再규 師團에 가서 한盞 하지” 하셨다. …저녁을 마치고 서울로 向하는데 大統領이 이렇게 말했다. “再규, 저 놈 참 괜찮아. 저 親舊 내가 將軍이라는 稱號로 불러줘야 되는데 버릇이 되어서 말이야. 꼭 故鄕집 집안 막냇同生 놈 같으니 말이야. 참 착한 者요.”’

生前에 朴 大統領을 向한 김재규의 忠誠度 대단했다. 김재규가 1年間 大邱 대륜중學校 敎師를 할 때 스승과 弟子로 만나 胸襟을 터놓는 가까운 關係를 이어왔다는 이만섭 前 國會議長은 “金 部長은 大統領으로부터 電話가 왔을 때 벌떡 일어나 차려 姿勢로 電話를 받았을 程度였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가 73年 豫編해 9代 유정회 國會議員을 지내다 情報部 次長으로 發令이 났는데 내가 “軍團長까지 지낸 國會議員이 어떻게 情報部 次長으로 가느냐”고 하자 “閣下 命令이라면 어디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當時 中央情報部長은 신직수였는데 申 部長은 김재규가 5師團 參謀長으로 있을 때 法務將校(少領)로 데리고 있었던 部下였다. 하지만 모든 自尊心을 죽이고 部下였던 申 部長을 相關으로 깍듯이 모셨다.’

한便 김재규는 70年代 末 어지러운 政局 속에서 狀況 分析만 했지 代案을 提示하지 못해 大統領의 信任을 잃었다는 말도 있다. 後날 裁判廷에서 김계원은 그의 性格을 묻는 檢察官의 質問에 “豬突的이었다. 推進力과 迫力이 있었지만 뒷整理를 제대로 못해 매듭을 짓지 못하는 缺點이 있었다. 하지만 義俠心과 自尊心이 强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최서영 前 코리아헤럴드內外經濟新聞 社長은 寬勳저널(2012年 9月) 寄稿에서 KBS 報道局長 時節인 75年 9月 새마을指導者硏修院에서 當時 建設部 長官이던 김재규와 一週日 동안 한房을 썼던 特異한 因緣을 紹介해 눈길을 끈다.

‘새마을運動이 한창이던 때여서 指導級 人士들이 번갈아 새마을硏修院에 入校해 合宿敎育을 받았다…그때 김재규와 많은 對話를 나눴다. 내가 느낀 것으로는 그는 秩序를 尊重하는 典型的인 軍人, 그것도 죽음의 美學을 讚揚하는 日本 사무라이를 憧憬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日本特派員을 했다는 事實을 알고는 세지마 留鳥(瀨島龍三·前 이토추 綜合商社 會長·第2次 世界大戰 當時 日本 滿洲軍으로 參戰했던 朴正熙 前 大統領의 直屬上官이었다)에 對해 이것저것 質問해 온 것이 생각난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재규는 어릴 때부터 日本의 怒氣 마레스케(乃木希典) 大將을 尊敬해 왔다고 한다. 명치時代 軍人인 怒氣 大將은 러일戰爭 때 뤼순(旅順)을 陷落시킨 將軍인데 명치天皇이 죽자 아내와 함께 巡査(殉死)한 日本 最後의 사무라이였다.’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朴正熙 #김재규 #死刑 #時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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