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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리다르노시치 25周年] <中>야루젤스키 將軍과 國家理性|東亞日報 </中>

[솔리다르노시치 25周年] <中>야루젤스키 將軍과 國家理性

  • 入力 2005年 11月 15日 03時 08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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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최고 실력자에 오른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당 서기장은 1981년 12월 계엄령을 선포했다. 자유노조연대의 파업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폴란드 사태에 개입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사전 차단하려는 포석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당시 경찰과 대치한 자유노조연대. 동아일보 자료 사진
폴란드의 最高 實力者에 오른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黨 書記長은 1981年 12月 戒嚴令을 宣布했다. 自由勞組連帶의 罷業으로 나라가 混亂에 빠졌다는 것이 理由였지만 폴란드 事態에 介入하려는 蘇聯의 意圖를 事前 遮斷하려는 布石이었다는 解釋도 있다. 當時 警察과 對峙한 自由勞組連帶. 동아일보 資料 寫眞
《폴란드 改革이 成功한 또 다른 背景에는 罷業 勞動者와 協商에 應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將軍의 比較的 溫乾한 政府와 現實을 直視한 合理的 對應이 있었다는 것도 밝혀둬야 될 것 같다. 罷業은 物價高와 低賃金에 對한 勞動者들의 不滿과 政府의 經濟政策 實情에 對한 不信이 直接的 原因이었다. 惡化一路를 걷는 生必品 供給 狀況에서 1980年 여름 다시 肉類 價格이 引上되자 不滿은 絶頂에 達하면서 그단스크를 爲始한 여러 都市에선 罷業이 꼬리를 물었다.》

이때 從前과 다른 새로운 樣相은 個別 工場, 企業을 넘어 모든 事業場이 連帶(連帶)하는 ‘統合罷業委員會’가 結成된 것이다. 그 委員會의 리더가 그단스크의 레닌 造船所 電氣工 레흐 바웬사. 한便 많은 個別 勞組가 ‘連帶’韓 統合委員會엔 처음으로 勞動者와 知識人의 ‘連帶’도 이루어졌다.

이해 8月 罷業 勞動者들은 바웬사가 이끄는 委員會를 政府의 協商 파트너로 認定하라는 要求를 貫徹시켰다. 그것은 黨의 承認과 祕密警察의 監視下에서만 組織이 許容되던 東유럽에서는 前代未聞의 일이다. 政府 代表와 勞組 代表는 黨으로부터 獨立한 自由 勞組를 認定한다는 그단스크 協定에 署名하게 된다. 當時 폴란드의 政府, 軍部 그리고 黨을 掌握한 實力者가 야루젤스키 將軍이었다. 그가 왜 이런 엄청난 讓步를 했을까. 그는 어떤 人物인가.

1980年代 初 폴란드에 戒嚴令을 宣布하면서 늘 軍服, 軍帽에 검은 色眼鏡을 쓰고 TV에 登場한 그의 모습은 決코 好感이 가는 印象이 아니었다.

야루젤스키 前 폴란드 大統領(왼쪽)을 바르샤바에 있는 그의 事務室에서 만나 大膽한 後 記念 撮影한 최정호 客員待機者. 1980年 바웬사가 이끄는 솔리다르노시치를 認定하는 ‘그단스크 協定’에 署名한 야루젤스키 將軍은 以後 大統領이 됐다.

그러나 그 色眼鏡에는 來歷이 있다. 農場을 管理하던 貴族 아들로 태어난 그는 16歲 때 第2次 世界大戰이 勃發하자 많은 폴란드人과 함께 시베리아로 强制 移住됐다. 그곳에서 父親을 잃은 그는 1943年 蘇聯軍 指揮下의 폴란드軍에 支援한다. 폴란드 兵士의 裝備는 劣惡해 겨울 戰鬪에 必須的인 스노글라스도 支給되지 않았다. 이때 야루젤스키 新兵은 눈벌판에 反射된 太陽빛에 網膜이 傷害 그때부터 恒常 선글라스를 쓰게 됐다.

戰爭이 끝난 後 폴란드 參謀學校를 優等生으로 卒業한 그는 33歲에 별을 달고 國防次官, 合參議長, 黨 中央委員, 國防長官으로 出世街道를 달린다.

솔리다르노시치(勞組 連帶)와 對決하게 된 1981年엔 總理가 되고 같은 해 黨 第1書記로 選出되면서 名實相符한 폴란드의 第1實力者가 된다. 1989年 民主化의 過渡期에 大統領에까지 選出된 뒤 下野한 그를 이番에 바르샤바의 事務室로 찾아가 2時間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왜 自由勞組를 받아들였느냐고? 길은 둘뿐이었다. 武力鎭壓이냐, 協商이냐. 나는 協商을 擇했다. 그러나 솔리다르노시치를 單純히 勞動組合이라는 次元에서만 承認했을 뿐, 이 組織이 將次 ‘政治的인 파워’로 級變身할 것은 豫想하지 못했다. 솔리다르노시치를 承認하지 않는다면 强制 鎭壓의 길만 남는데 그건 願하지 않았다. 東유럽 帝國의 過去(假令 1956年의 헝가리의 境遇)와 比較될 만한 點이다. 폴란드에서는 流血事態 없이 平和的으로 改革을 推進해서 오늘의 狀況으로 ‘소프트랜딩’할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나 혼자의 決斷이 아니고 閣僚들의 合意된 意見에 根據한 것이다. 모두 다 現實論的人 立場에서 분명한 立場 表明을 해 주었다.

―그런데도 왜 戒嚴令(1981年 12月 13日∼1983年 7月 22日)을 宣布했느냐고? 戒嚴令 宣布로 이어지는 1年 半 동안은 나에겐 100年처럼 길게 느껴진 焦燥한 時間이었음을 告白한다. 勿論 統制 不能의 1000萬 名이 組織된 勞組連帶가 罷業에 罷業을 繼續하는 동안 國家經濟는 破綻地境이었다는 事實도 言及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무게를 갖는 背景으로 폴란드 事態가 다른 東유럽 帝國으로 번질 것을 念慮하는 蘇聯이 브레주네프 독트린을 내세워 武力 介入할 蓋然性이 있었다는 걸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나는 그것만은 막아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戒嚴令을 宣布한 것이다. 그때 나도 몰랐던, 最近 밝혀진 事實로는 當時 蘇聯은 實際로 10萬 名의 軍 兵力을 폴란드 國境에 移動 配置하고 있었다.

戒嚴令 宣布는 야루젤스키 將軍과 關聯해 폴란드 現代史에서 가장 論難거리가 되고 있는 대목으로 이에 關한 論爭은 아직도 繼續되고 있다. 여기에 關한 그의 여러 가지 區區한 說明으로 1時間 豫定의 對談은 2時間으로 늘었으며 蘇聯 軍 配置에 關한 極祕 圖面의 寫本까지 내게 보여 주었다. 더 仔細한 內容은 곧 出版될 그의 著書 ‘逆流(Pod Prad)’에 詳述해 놓았다던가.

要컨대 戒嚴令 宣布가 黨과 政府의 旣得權 守護를 위한 方策이었느냐, 外勢의 武力 介入으로부터 폴란드를 守護하기 위한 ‘國家理性’의 決斷이었느냐 하는 問題다.

이에 對해선 意見이 갈린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權座에 있을 때나 下野한 뒤나 禁慾的인 私生活과 높은 敎養人으로 알려진 야루젤스키 個人의 稟性을 問題 삼지는 않고 있다. 그의 房은 값싼 이케아式 冊床 冊欌 소파 세트로 돼 있어 도무지 前職 大統領 事務室 같지 않았다. 勞組 指導者 바웬사의 事務室보다 훨씬 儉素한 事務室은 차라리 敎授 硏究室 같았다.

먼발치에서 일찍부터 그를 ‘解體의 英雄’이라 일컫던 評論家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1980年代 中盤에 그를 만나 본 빌리 브란트 前 西獨 總理도 “야루젤스키는 손가락 끝까지 愛國者”라 적고 있다. 그와 오래 얘기해 본 헬무트 슈미트 前 西獨 總理도 “야루젤스키는 첫째 폴란드人이고 둘째는 軍人이며 셋째가 共産黨員이다”고 回顧하고 있다.

그의 過去를 追窮하는 裁判은 只今도 進行 中이다. 歷史에 어떤 人物로, 어떻게 記錄되길 바라느냐는 마지막 質問엔 “모든 것을 客觀的으로 밝혀 공정하게 記錄되기 바랄 뿐”이라고 對答했다.

최정호 客員 大記者 바르샤바(폴란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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