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1980年代를 ‘詩의 時代’라 부른다. 當時에는 詩人의 자유로운 想像力을 迫害하는 ‘80年代的’ 政治 現實을 諷刺하며 民衆의 苦痛을 절절히 노래하는 民衆詩와 勞動詩가 크게 流行했다.
‘光州’도 그들이 노래하는 한 코드였다. 오죽하면 詩人이라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光州여, 無等山아 하고 외치며 無等山의 흙을 한 삽씩 퍼가는 통에 無等山이 사라졌다고 노래한 詩人이 있었을까? 이렇게 그들은 民族的 現實과 歷史性에 注目했다.
그러나 1960年代的 現實만 해도 同族相殘의 깊은 傷處로 말미암아 民族의 現實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大部分의 詩人은 藝術至上主義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申東曄은 大學의 硏究室이나 茶집 속으로 도사려 들어가 端子(單字)美學이나 漁具 羅列法에 하염없이 神經을 쓰고 있는 그들을 徹底하게 批判했다. 政治는 政治家에게, 文明 批判은 批評家에게, 思想은 哲學 敎授에게, 大衆과의 繪畫는 散文 專門家에게 맡기고 自己들은 徹底히 言語 細工만을 專業으로 삼아 外來 思潮에 휩쓸려 제精神을 못 차리는 非主體性을 痛烈하게 攻駁했다.
그러면서 그는 聖書나 佛經이나 五千言(五千言·老子 道德經) 같은 人類 遺産 가운데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水準의 切切한 詩篇, 卽 ‘전경인(全耕人)’ 精神이 投影된 巨大한 詩篇들을 쓰고자 했다. 그에게 詩란 바로 ‘生命의 發現’이었다. 詩란 ‘우리 認識의 全部이며 世界 認識의 統一的 表現이며 生命의 浸透며 生命의 破壞며 生命의 組織’이기도 했다.
그의 詩에서 우리는 歷史와 現實을 直視하는 洞察力과 民衆에 對한 한없는 愛情을 읽을 수 있다. 特히 民族史의 시원(始原)에서부터 東學革命, 3·1運動, 4·19革命을 貫通하면서 ‘憐憫이 아는 民衆의 苦痛, 憤怒가 보는 社會의 混亂과 불의, 그리고 하늘의 以上’(김우창)을 切切하게 노래한 長詩 ‘金剛’에서는 歷史에 對한 肯定的이며 希望的인 그의 强烈한 信念을 읽을 수 있다.
그가 詩에서 돌아가고자 하는 世界는 땅에 누워 있는 씨앗의 마음이었다. 그 世界는 ‘모오든 쇠붙이’는 사라지고 오로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아 있는 世界여야 했다. 곧 分斷이 解消되어 人間의 可能性을 限없이 열어 가는 統一된 祖國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詩에서 口號的인 냄새는 맡을 수 없다. 同時代의 또 다른 卓越한 詩人 金洙暎이 “强靭한 參與意識이 깔려 있고, 詩的 經濟를 할 줄 아는 技術이 숨어 있고, 世界的 發言을 할 줄 아는 知性이 숨쉬고 있고, 죽음의 音樂이 울리고 있다”고 評價할 程度로 그는 1950年代 모더니즘의 洗禮를 받지 않은 唯一한 詩人이면서 普遍的 人間 精神을 水準 높은 境地로 노래할 수 있는 매우 드문 詩人이었다.
그의 詩는 한 卷의 全集으로 整理되었는데 한때 이 冊은 禁書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하지만 大衆은 그의 詩를 남몰래 읽으며 詩精神의 脈을 이어 갔다. 1980年代의 詩人들은 共通的으로 그의 詩精神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그 精神은 只今까지도 큰 江이 되어 우리 가슴속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韓起鎬 出版評論家 出版마케팅硏究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