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코펜하겐(덴마크), 레녹스(美國), 로열 덜튼, 웨지우드(英國), 헤런드(헝가리), 크리스토플(프랑스)…. ‘陶瓷器 세트’하면 떠오르는 이른바 ‘名品’ 브랜드는 大部分 外國 製品이다. 몇 年 前 만해도 富者집 婚需品으로 韓國의 名品들이 人氣를 얻었으나 요즘은 西洋 브랜드가 韓國 市場을 相當히 蠶食한 狀態. 高麗靑瓷와 朝鮮白瓷 等 名品브랜드를 갖고 있는 韓國이 ‘生活 自己’ 分野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現實이다.
外國 名品을 相對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韓國 陶瓷器 産業界에 반가운 消息이 들려왔다. 靑華白瓷로 有名한 ‘박영숙 요(朴英淑 窯)’의 作家 박영숙氏(55)가 美國 뉴욕 매디슨街에 10日 60餘坪 規模의 展示室과 賣場을 開館해 世界의 名品들과 겨루게 된 것.
朴氏의 매디슨街 展示室 開設은 單純히 ‘美國 進出’의 意味가 아니다. 뉴욕 맨해튼 매디슨街는 世界의 名品브랜드가 모여드는 거리. 여간해서는 賣場이 나오지도 않지만 賣場을 열기 위해서는 거리의 ‘水準’을 생각하는 隣近 商人組合의 까다로운 審査와 同意를 거쳐야 한다. 朴氏가 그곳 事情을 잘 아는 知人의 도움까지 얻어 展示室을 여는 데 6個月이 걸렸다.
“그나마 제 陶瓷器가 國際的으로 어느 程度 알려졌던 것이 도움이 됐어요. 1999年 英國 엘리자베스 女王이 訪韓했을 때 제 賣場에 들렀던 것도 實은 女王의 四寸이 以前부터 저희 茶盞 세트를 使用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의 말대로 ‘박영숙 요’는 별다른 弘報가 없이 國內 富裕層을 통해 外國에 알음알음으로 紹介돼왔다. 陶瓷器 製作, 販賣事業을 하던 男便에게 陶瓷器 만드는 法을 배운 朴氏는 1979年 自身의 브랜드를 냈다. 以後 10年의 施行錯誤를 거쳐 89年 비로소 朝鮮時代 官窯(官窯·王室 陶瓷器)의 白瓷 빛깔을 再現했다는 評價를 받으며 國內外에 알려지기 始作했다.
“大衆的인 生活 自己는 누구나 만들 수 있잖아요. 저는 世界의 王室, 貴族이 쓰는 最高級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어요. 뉴욕 展示館의 成功 與否를 떠나 꿈이 折半쯤은 이루어진 셈이죠.”
朴氏는 10年間 賃貸 契約한 뉴욕 展示館의 運營費로 年間 150萬달러(約 18億원)가 든다고 했다. 그는 “充分히 그만한 運營費를 堪當할 自信이 있다”고 말했다. 어디서 나온 自信感일까.
“제 브랜드를 販賣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韓國의 아름다움을 파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옛 陶瓷器의 멋을 제대로만 再現한다면 西洋 製品에 밀릴 理由가 없죠.” 주성원記者 s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