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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人間을 破壞했을까|동아신춘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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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人間을 破壞했을까

by   민경민

  • 作品專門
  • 端平
  • 審査評
  • 當選所感
  • 소리가 人間을 破壞했을까 : 映畫 <바빌론>의 觀點에서



    始作부터 코끼리의 排泄物을 쏟아내는 映畫 <바빌론>(2023)은 그 衝擊的인 오프닝 시퀀스의 亂雜한 亂交파티와 映畫 中盤部 '敎養 떠는' 事業家들의 宴會 사이의 間隙만큼, 코끼리의 肛門과는 全혀 어울리지 않는 시드니 팔머의 트럼펫을 자주 비춰준다. 映畫에 登場하는 트럼펫의 깊고 어두운 金管이 人間의 理性을 創造하는 굴이라면, 코끼리의 肛門은 根源的인 欲望을 나타낸다. 欲望과 理性이 밀고 당기기를 하는 북새통 中에 쉴 새 없이 두드려대는 打樂器와 管樂器의 行進曲이 어울리지 않는 두 이미지를 바느질하며 統一性을 附與하듯, 데이미언 셔젤 監督이 特히 注目하는 部分도 바로 ‘소리’의 存在다.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바빌론>은 할리우드의 歷史를 담고 있는 메타 무비다. 뤼미에르 兄弟가 시네마토그래프를 처음 劇場에 놓은 지 고작 30年이 지난 1920年代 즈음, 本格的인 無聲映畫 時代가 始作되면서 映畫는 하나의 實驗을 벗어나 産業으로 그 可能性이 擴張될 수 있음이 發見된다. 이제 걸음마를 뗀 映畫 産業은 주먹九九式으로 進行되는 게 日常茶飯事라, 劇 中에서 描寫된 것처럼 처음 할리우드에 발을 디딘 映畫人들은 그야말로 野生의 産業 現場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걸핏하면 망가지는 필름 카메라와 照明이라곤 粗惡한 아크 等과 한낮의 太陽뿐인 狀況에서, 專門的인 分業이 돼 있지도 않다. 닥치는 대로 멱살 잡아 움켜쥐면 그놈이 곧 責任者가 되는 시스템은 無主空山이나 다름없는 映畫 市場의 無限한 可能性을 先占하려고 햄버거를 찍어내듯 미친 듯이 쇼트를 生産해내기 일쑤였다. 이런 亂場판 속에서 필름에 소리를 입힐 技術도 없었기 때문에 當時 映畫 撮影에서 重要한 건 當然히 俳優의 煙氣뿐이었다. 말로 說明하지 않기에 演劇처럼 誇張된 演技를 하면서도 말로 說明할 수 없는 얼굴의 微妙한 微細表情을 表現해내야만 映畫가 可能하던 時節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 時節 할리우드는 人間을 消耗品처럼 쓰면서도 人間 그 自體가 가장 重要했다. 그러나 곧이어 닥쳐온 有聲映畫의 時期에서 넬리와 잭을 조금씩 映畫界의 邊두리로 밀어낸 '소리'의 誕生은 映畫를 漸漸 더 理性의 領域으로 몰아가면서 그 안에서 일하던 人間的인 그 모든 것들을 도태시키기 始作한다.

    映畫 <바빌론>에서 소리는 온갖 快樂을 좇는 人物들 못지않게 重要한 要素로, 于先 시드니 팔머의 트럼펫이 象徵하는 ‘音樂’들은 처음에는 映畫판 파티에서 興이나 돋우는 程度로 쓰였지만 有聲映畫 時代가 到來함에 따라 그 自身이 主人公이 되는 地境에 이른다. 粗惡한 音響 技術 德分에 雜音 하나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넬리의 스튜디오 撮影 신은 소리에 지배당한 俳優들이 제 力量을 制限받는 모습을, 從來엔 防音 스튜디오의 熱氣를 이기지 못한 채 窒息死한 撮影 監督의 모습을 통해 '소리가 人間을 破壞'하는 모습을 演出해 낸다. 엉망진창이었던 撮影場이 漸次 秩序가 잡힌 스튜디오로 옮겨가듯이, 소리 亦是 秩序를 가진 瞬間 敎養이 되고, 소리의 또 다른 形態인 '말'에도 規則이 附與되면 禮儀나 規範 같은 一種의 틀이 된다. 얼굴로 모든 걸 말하던 舊時代의 넬리는 소리가 重要해진 世上에서 漸漸 자리를 잃으며 後날 매니의 配慮로 '敎養 넘치는' 社交모임에 나가 發音을 矯正받거나 禮儀 바른 隻을 강요받지만, 재밌지도 않은데 禮儀上 하는 弄談, 相對를 無視하기 위한 敎養, 점잖은 척 엉덩이에 손을 뻗는 紳士 같은 꼴사나운 꼴을 보고선 마침내 嘔逆질을 참지 못하고 온 바닥에 嘔吐를 쏟는다.

    欲望의 世界에서 태어난 한 俳優가 理性의 世界 속에서 沒落하는 過程은, 特히 잭 콘래드를 통해서 더 생생하게 觀客들에게 傳達된다. 映畫를 찍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狂氣 어린 撮影場에서 假짜 小品이 櫛比한 스튜디오로 옮겨가 團體로 우스꽝스러운 비옷을 입고 엉덩이를 씰룩대야 하는 映畫를 찍거나 或은 남들이 다 拒絶한 三流 映畫에 억지로 캐스팅되는 狀況에서, 그에게 決定打를 날린 건 그의 스타일대로 '사랑해'라는 大使를 濫發하며 마무리 지은 映畫를 보고 觀客들이 웃는 場面이었다.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해야 하는 '소리의 時代'에서 그의 本能的이고 直說的인 話法과 延期는 더以上 觀客들에게 感興을 주지 못하고 甚至於 輕蔑의 大賞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果然 그것이 人間에게 옳은 世界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欲望을 耽溺하던 時代가 絶滅하고 남은 것은 뭘까. 할리우드에는 이제 서로의 殊常한 意中을 몇 番이나 돌려보면서 艱辛히 把握하는 僞善의 世界와 淫慾과 뒤틀린 欲望이 똬리를 튼 제임스 맥케이의 下水溝가 LA 邊두리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뿐이다.

    데이미언 셔젤 監督의 <바빌론>을 보면서 우리는 소리가 人間을 破壞하는 모습과 그 過程을 들여다보게 되지만 實은 소리의 人間 破壞는 <바빌론>에만 局限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소리는 더욱 다양한 方法으로 人間을 破壞하고 있으며, 그 映畫的 表現은 單純한 스피커의 울림을 넘어선, 複雜한 메커니즘마저 가지고 있다.



    소리가 人間을 破壞하는 方法 1 : 映畫的 裝置에 依해서



    本格的으로 ‘人間을 破壞하는 소리’를 追跡하기 前에, 우리는 映畫 속에서의 몇 가지 事例를 살펴볼 必要가 있겠다. 먼저 映畫의 音樂과 音響은 內在(內在)와 외재(外在)라는 槪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映畫의 人物들이나 劇 中 事物에 依해 發生되는 소리가 劇 안에서도 共有되어 내러티브의 一環이 되고 觀客도 聽取하게 된다면 그것은 內在 音樂으로서 다이제틱(Diegetic) 音樂이라고 한다. 反面에, 映畫의 OST나 效果音같이 觀客들에게는 들리지만 劇 中 人物들이나 劇의 空間 속에서는 再生되지 않는 假想의 音樂은 외재 音樂으로서 논-다이제틱(Non-diegetic) 音樂이 된다. 映畫가 다양한 場所의 偏執的 作用으로 몽타주를 이루듯이 音樂들은 內在와 외재의 層位를 오가면서 編輯되며, 映畫 몽타주가 行하지 못하는 숏과 숏을 이어주는 接着劑 役割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映畫에서의 소리는 觀客과 人物들에게 差別的으로 附與되는 그 屬性으로 인해 더러 서스펜스의 性質을 띤다.

    假令 스티븐 스필버그 監督의 <죠스>(1975)를 생각해보자. 튜바의 굵직한 소리가 反復되는 존 윌리암스의 메인 타이틀 曲이 背景에 깔리는데도 스크린의 人物들은 섬찟한 三角形의 상어 지느러미를 등지고 평화롭게 水泳을 하거나 카약을 탄다. 이때 背景音은 明白히 觀客들에게만 들릴 뿐이고 내러티브에 全혀 介入하지 않는다. 그러나 劇 中 人物들과 觀客에게 주어진 情報의 差異처럼 背景音 또한 劇 中 人物과 觀客에게 差別的으로 聽取 되면서 서스펜스의 한 軸을 이루게 된다.

    로만 폴란스키 監督의 <피아니스트>(2003)에서 隱身處에 숨은 스필만이 鍵盤에 손을 대지 않고 피아노를 치는 場面은 어떨까. 쇼팽의 ‘Andante Spianato And Grand Polonaise Brillante Op.22’가 스필만의 손가락을 따라 울려 퍼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觀客의 귀에만 들릴 뿐이며 스필만에게는 想像으로, 劇 中에서는 無音으로 認識된다. 音樂의 震源이 내러티브 안에 있음에도 不拘하고 聽取의 對象은 外在해있을 때 이를 ‘메타-다이제틱(Meta-diegetic)’ 音樂이라고 하며, <피아니스트>의 境遇에는 서스펜스의 機能도 遂行한다. 스필만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가 隱身處가 發覺된 戰績이 있고, 나치의 警察署 앞에서 어떤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할 텐데도 소리를 낼 수 있는 危險한 불장난을 하고 있는 셈이므로.

    映畫 속 人物에게 ‘죽음의 소리’를 몰고 오는 境遇라던가, 或은 내러티브의 因果律에 따라 ‘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狀況’에 놓인 境遇라던가, 두 境遇 모두 소리가 直間接的으로 人物의 危險과 關聯돼 音樂이 演奏되고 있었다면, 소리가 人物에게 直接的인 危害는 되지 않지만 人物의 破壞를 暗示하는 境遇도 있다.

    데이미언 셔젤 監督의 <위플래쉬>(2014)에서 OST ‘Caravan’의 導入部 빠른 템포로 演奏되는 드럼 심벌 演奏는 主人公 앤드류의 破壞를 慫慂하는 시그널이라고 할 수 있다. 플레쳐 敎授에게 실컷 辱을 얻어먹은 뒤 홀로 드럼 演奏에 邁進하다 손가락이 찢어져 피를 흘리는 場面에서도 ‘Caravan’의 導入附加 變奏되어 흘러나오는데, 이때 演奏 音樂은 내러티브에 介入하지 않는 外部의 背景音으로 흘러나옴과 同時에 앤드류가 드럼 스틱을 쥘 때는 劇 內部의 사운드로 劇 中에 빨려 들어가기도 하는, ‘엠비-다이제틱(Ambi-diegetic)’ 音樂으로서 플롯을 貫通하며 人物을 몰아세우기도 하고 디제시스로 編入되어 人物과 相互作用하는 내러티브 音樂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피 튀기는 앤드류의 드럼 練習을 본 觀客들은 視覺 이미지와 聽覺 情報의 化學的 融合에 따라 이제 빠른 드럼 심벌 소리만 들려도 앤드류에게 危險 乃至는 念慮를 느낀다. 그리고 앤드류는 觀客들의 憂慮대로 自身의 드럼 파트에 沒入한 나머지 플레쳐 敎授와 함께하는 公演 當日 날 交通事故를 當해 피투성이가 되고서도 舞臺에 오르는 紀行을 보여준다. 勿論 이때 앤드류가 연주하는 曲 亦是 재빠른 드럼 심벌 소리와 굵고 重厚한 콘트라베이스가 어우러진 全州의 ‘Caravan’이다.

    이처럼 映畫에서 소리는 人物의 破壞를 暗示하는 役割을 하며, 때로는 그것 自體가 目的으로 作用-特히 音樂 映畫에서-하면서 破壞를 慫慂하는 契機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危險한 振動’은 나아가 아예 그 自體가 威脅이 되는 境遇도 있다.



    소리가 人間을 破壞하는 方法 2 : 내러티브에 依해서



    映畫 이미지가 主가 되고 音響이 附隨的으로 人物의 危險을 거들거나 案內하는 게 多少 싱겁게 느껴진다면 좀 더 映畫에 깊숙이 關與하는 소리도 發見할 수 있다. 소리가 直接 人間을 破壞하는 境遇에 對해서는 俳優이자 監督인 존 크래신스키의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 시리즈가 代表的이라고 할 수 있겠다. 一般的인 映畫에서 소리가 가지는 威脅이란 平凡한 서스펜스 물에 局限했을 때 숨어있는 사람이 내는 急作스러운 高喊이나 잘못 밟은 物件의 시끄러운 소리 程度겠으나,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는 어떤 手段으로도 除去할 수 없는 매우 危險한 外界生命體의 超能力 水準의 聽覺이 問題가 된다. 이 境遇에는 一般的인 映畫에서 平凡한 騷音으로 다뤄질 만한 程度의 소리도 充分히 作中人物들에게 危險으로 다가오게 되는데, 이 作品에서 人物들은 작은 소리 때문에 外界 生命體에게 끔찍하게 殺害되거나 難關에 부닥치는 等 소리의 强度 높은 威脅에 直接 露出된다.

    部分的이기는 하지만, 빈센조 나탈리 監督의 <큐브>(1999)에서도 正體를 알 수 없는 正六面體의 殺人 空間에 갇힌 主人公들 또한 소리를 내면 트랩이 作動하는 房을 지나면서 ‘소리’의 直接的인 攻擊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主人公들은 自閉 스펙트럼 障礙를 앓고 있는 人物과 함께하며,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高喊이나 悲鳴을 統制하지 못하는 字廢人의 突發 行動 때문에 ‘소리의 房’에서 葛藤을 겪는데, 트랩을 지나지 못하고 破壞되는 人間은 描寫되지 않지만, 不和의 씨앗이 增幅돼 人物들이 서로에게 더 敵愾心을 갖게 된다.

    이처럼 내러티브의 要素로써 소리 自體가 原因이 되어 映畫 속 人物이 死亡 或은 負傷을 입는 境遇는 소리가 人間을 破壞하는 가장 積極的인 形態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直接 攻擊받는 것은 아니지만 <바빌론>에서 防音 부스의 高熱, 低酸素 狀況을 이기지 못하고 死亡한 音響 監督의 모습도 소리라는 媒介 對象이 내러티브에 介入해 그 죽음에 相當한 關與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한 篇, 앞서 映畫的 裝置에 依한 暗示와 類似하게 ‘人間을 破壞하는 소리’로 直接 關與하지는 않지만, 人間을 破壞로 내모는 現場을 聽覺的으로 浮刻하는 方法도 있다. <라라랜드>(2016)에서 主人公들이 無名 時節에 겪게 되는 설움들은 幻想的인 OST의 뮤지컬 神과는 달리 至極히 現實的인 騷音들로 덧漆된다. 이를테면 오프닝 시퀀스에서 高速道路에서 團體로 群舞를 추던 사람들이 一齊히 車輛으로 돌아간 뒤 세바스찬이 힘차게 눌러대는 警笛 소리, 세바스찬이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Mia & Sebastian's Theme’를 피아노로 연주한 뒤에 곧장 社長에게 듣게 되는 “넌 解雇야”라는 臺詞가 꼭 그러하다. 뮤지컬 神에서 논-다이제틱 音樂으로 畏敬에 位置한 音樂은 觀客을 主人公들과 함께 幻想으로 限껏 밀어 넣다가 뮤지컬 神이 終了되는 瞬間, 現實的인 騷音과 함께 主人公을 삶의 구질구질한 面으로 案內하면서 悲劇을 더욱더 增强한다. 이는 죽음이나 深刻한 負傷 같은 極端的인 破壞에 이르지는 않지만 劇 中의 人物들이 가질 未來에 對한 靑寫眞이나 希望을 꺾어버리는 演出을 加함으로써 騷音으로 轉換된 소리가 人物에게 否定的인 影響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소리가 人間을 破壞하는 方法 3 : 理性的 産物에 依해서



    소리의 配置에 따른 效果도 좋고, 소리가 처음부터 내러티브의 要素로써 破壞의 條件이 되는 것도 좋지만, 소리가 人間을 破壞하기 쉬운 가장 흔한 形態는 亦是 直接 傳達되는 것이다. 잘못된 情報의 傳達과 같은 理性的 思考의 錯誤, 或은 攪亂은 人間을 쉽게 那落으로 보내버린다. 그리고 當然하겠지만 理性的 思考가 담긴 소리란 우리 人間이 말로 자아내는 言語가 大部分이며, <이미테이션 게임>(2014)이나 <미드웨이>(2019)와 같이 暗號를 다루는 映畫에서 暗號化된 情報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 大部分 사람의 입으로 傳해진다.

    言語가 人間을 直接 破壞하는 代表的인 手段이라고 한다면, 그 先頭에는 應當 辱說 또는 人身攻擊과 같은 原初的인 言語가 있을 것이다. 映畫가 遂行하는 重要한 機能 中 하나인 ‘全知的 時點의 共有’로 우리는 映畫가 表現하는 內密한 領域을 恒時 들여다본다. 또한, 映畫의 가장 기초적인 내러티브 傳達 手段이자 聽覺 要素인 ‘大使’는 社會的으로 容納되지 않거나 言及되어선 안 될 問題들도 어떤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채 觀客에게 쏟아내곤 하는데, 特히 <위플래쉬>에서 플레쳐 敎授가 學生들에게 쏟아내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그 거친 辱說들은 비슷한 狀況을 共有하지 않는 觀客들조차도 不便함을 느끼게 할 程度다. 劇 中 플레쳐 敎授의 辱說은 人物을 自殺로 몰아붙이기도 하며, 主人公 앤드류의 審理를 짓이기는 決定的인 役割도 한다. 原初的이고 單純하지만, 度가 지나친 辱說은 分明히 人間을 破壞하는 소리임은 틀림없다.

    스탠리 큐브릭 監督의 <풀 메탈 자켓>(1987)을 들여다봐도 身柄을 訓育하며 마주치는 海兵마다 ‘구더기’라고 辱하는 하트만 商事를 發見할 수 있다. 플레쳐 敎授가 울고 갈 實力으로 個人 身上까지 赤裸裸하게 非難한 까닭에 하트만 上士는 結局 不適應者인 로렌스 二兵에게 銃을 맞게 된다. 勿論 로렌스 二兵 自身도 돌아올 수 없는 線을 넘어버린 것을 認知하고 스스로 生을 마감하게 되는데, 하트만 上司의 죽음, 그리고 하트만 上司의 人間 以下 取扱에 結局 殺人과 自殺을 擇한 로렌스 二兵 그 自身의 狀況도 모두 言語暴力이라는 소리가 人間을 破壞한 직접的인 事例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人間의 音聲이 直接 人間 破壞에 關與하는 腸은, 個人과 個人의 侮辱에서도 分明 큰 힘을 發揮하지만, 個人을 넘어 社會的 手段이 加味될 때 더 波及力을 지닌다. 映畫 <피아니스트>에서 獨逸이 폴란드를 侵攻한다는 消息이 퍼지는 草飯部 스필만의 家族은 戰爭의 危機에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英國의 宣傳布告 放送을 듣고 크게 安心하며 저녁 盛饌까지 즐기지만, 그다음 숏은 占領當한 폴란드의 大路를 나치 軍隊가 行進하고 스필灣과 그의 家族들이 憂鬱한 表情으로 그 모습을 目擊하는 場面으로 이어진다. 이 映畫에서 描寫된 것처럼 소리가 傳達하려는 意圖와 現實이 相反될 때 人間은 또 한 番 破壞된다.

    우민호 監督의 映畫 <內部者들>(2015)에서 안상구가 未來自動車의 祕資金 파일 暴露에 失敗하고 곧이어 풀려난 이강희가 “깡牌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左之右之되는 現實을 매우 개탄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하는 場面에서는 眞實이 發言者의 社會的 位置와 發話의 方法에 따라 顚倒되는 現場이 드러난다. 言語는 그것이 아무리 明白한 眞實을 담고 있다고 해도 言語를 活用하는 者의 活用法, 社會에 뿌리 깊이 박힌 先入見이나 常識 等에 가로막혀 無用한 地境에 이를 때가 있다. 眞實과 거짓을 다투는 章에서 소리는 聽取者에게 直接 傳達되지 않더라도 ‘말(Speech) 受容體’인 社會的 協議로 聽取者를 間接 破壞할 수도 있다.

    結局, 至極히 低俗하고 原初的인 것, 事實이지만 聽者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거나 行動의 誤判을 惹起하는 것, 社會的 合意에 依해서 聽者를 直間接的으로 誤導하고 階層의 壁을 세우는 것 等은 모두 人間의 말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며, 이들은 어떤 方向이라도 效果的으로 人間을 부순다. 이런 觀點에서 데이美言 셔젤 監督 또한 소리 中에서 特히 人間이 내뱉는 말이 가장 危險하고 生命力이 끈질기다는 것을 <바빌론>을 통해 强調하기도 한다.

    커리어가 거의 끝장난 잭 콘래드가 批評家 엘리노어를 찾아가 自身을 非難한 칼럼에 對해 따지고 드는 場面에서 엘리노어는 그女를 바퀴벌레라 辱하는 잭 콘래드에게 나지막이 일러둔다. 집이 불타면 人間은 모두 죽고 結局 살아남는 것은 바퀴벌레라고. 불이 나면 깊고 어두운 窟속을 찾아 永遠히 살아남을 바퀴벌레의 執拗함을 일깨우던 그女는 俳優도 批評家도, 잭 콘래드와 나눈 對話조차도 繼續해서 反復될 것이라고 한다. 時代가 바뀌어도 繼續해서 音標를 뽑아내는 시드니 팔머의 트럼펫 속 깊은 金冠의 어둠과 엘리노어의 목젖 뒤로 넘어가는 어두운 窟속의 말은 理性의 늪에서 繼續해서 反復된다. 한 사람의 價値를 아득히 넘어서는 人間의 理性이란 存在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理性의 言語가 破壞할 無數한 人間들을 消耗하기 위해서 말이다.



    ‘欲望의 소리’는 있다 : 映畫 속 人物들이 소리와 對敵하는 理由



    소리가 人間을 破壞할 方法은 無窮無盡하다. 視覺 이미지 못지않게 聽覺 效果 또한 重要하게 다루는 映畫가 人間을 破壞할 소리를 創出하는 方法도 各樣各色이다. 그러나 데이美言 셔젤 監督의 卓越한 音樂 技巧와는 別個로 그의 映畫에 登場하는 人物들은 애써서 소리로 破壞하지 않았어도 於此彼 소리에 破壞될 運命처럼 描寫된다.

    먼저 <위플래쉬>의 主人公 앤드류가 셰이퍼 音樂 學校에 進學한 건 最高의 드러머가 되겠다는 ‘便安한 말 한마디’였지만, 플레쳐 敎授가 그에게 傳授해 준 ‘찰리 파커의 길’은 핏물이 狼藉한 드럼 스틱과 潔癖症에 가까운 完璧主義가 結合된 매우 고된 길이었다. 分明 앤드류는 처음엔 플레쳐 敎授의 加虐的인 이끌림에 끌려가는 處地였으나 劇이 進行될수록 그 自身이 오히려 完璧主義에 執着하는 모습을 보인다.

    <라라랜드>의 主人公 세바스찬과 미아 亦是 마찬가지다. 세바스찬은 프로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努力하고, 미아는 俳優로서 成功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結局 두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目標를 위해서는 서로의 사랑을 지켜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랑을 끝까지 지킬 수도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各自의 理想鄕을 위해 달리者는 無言의 合意를 이룬다.

    卽 앤드류는 드럼 소리에, 세바스찬은 피아노 소리에, 그리고 미아는 俳優의 臺詞라는 소리에 自身의 모든 걸 걸거나 兩者擇一의 問題에서 한 가지 問題를 果敢히 抛棄해버린다. 이때 그들을 破壞로 내몬 건 소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소리를 追求하고자 하는 그들 自意로 이루어진 決定들이었다. 데이미언 셔젤 監督의 作品 中에서 自意가 아님에도 소리의 發展에 따라 枯死 되어가는 人物들은 <바빌론>의 主人公들뿐이다. 無聲映畫의 時代에 태어나 有聲映畫의 時代에 適應하지 못하는 大俳優들이 自然스럽게 沒落하는 가운데, 特히 잭 콘래드가 엘리노어와 말다툼을 하는 그 場面에서 ‘時代’라고 하는, 無限히 增殖하는 소리의 물결이 언제든지 人間을 破壞하고 그걸 다시 反復할 수 있다고 하는 部分은 데이미언 셔젤 監督의 作品을 時代順으로 놓고 보면 더 그럴싸하게 보인다. 애써서 辱을 듣거나 甘言利說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도, 映畫 속 소리의 威脅的인 칼날이 몰아치지 않아도, 人間은 結局 理性을 위해 自己를 破滅로 몰아가는 存在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데이美言 셔젤 監督이 窮極的으로 남기는 質問은 소리가 人間을 破壞하는 現場을 中繼하는 것이라기보다, ‘왜 소리에 破壞되면서까지 그렇게 하느냐’에 있다. 피를 흘리고 아름다운 人生마저 내다 버린 채 追求한 結果物이 果然 그럴 만한 價値가 있는가. 그런데 妙하게도 데이미언 셔젤 監督의 作品 末尾에 登場하는 그 피투성이 ‘소리의 結果物’들은 왠지 感動을 자아낸다. 어째서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監督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에서 主人公 메기는 나이 서른한 살에 拳鬪를 배우겠다고 體育館 館長 프랭키에게 온다. 當然히 프로 복서를 키우는 老鍊한 코치인 프랭키의 눈에 메기의 꿈은 허황돼 보인다. 當場 始作해도 練習에 4年, 서른 中盤이 되어 프로 舞臺에 서는 것이 可當키나 할까. 그러나 館長의 無關心에도 一 年이나 꿋꿋이 버틴 메기는 어느 날 如前히 冷淡하게 구는 프랭키에게 말한다. 拳鬪를 하는 게 너무 좋다고. 엉망진창인 人生에서 그 自身에게 拳鬪마저 빼버린다면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메기는 理想的인 소리를 하지만 프랭키는 메기에게 그만 精神 차리라는 現實的인 소리를 한다. 프랭키의 助言이 實로 옳은 듯도 보이고, 메기는 손대지 말아야 할 危險한 꿈을 꾸는 것도 같다. 그러나, 누구도 가질 수 없는 自己만의 欲望을 欲望한다면, 그 欲望이 簡單한 欲求가 아니라 理性의 領域에 놓여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理性의 産物일까, 欲望의 産物일까. 소리가 支配하는 잃어버린 欲望의 世界에서 이 問題를 判別하는 것은 생각보다 重要하다.

    映畫 <퍼스트 맨>(2018)의 後半部 닐 암스트롱이 달着陸線에서 내리는 場面은 데이미언 셔젤 監督의 映畫를 통틀어 唯一하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世上의 모든 騷音과 한 人間을 破壞로 내모는 소리로부터 隔離된 이 狀況에 이르기까지, 닐 암스트롱은 人類의 모든 知性이 集約된 새턴-5 로켓과 아폴로 11號에만 依存한 게 아니다. 그 自身이 달에 발을 딛겠다는 自己만의 欲望을 기꺼이 欲望했기에 可能한 일이었다. 試驗 途中 危險에 빠지고 同僚가 事故로 죽는 끔찍한 狀況을 지나오면서도, 家族의 反對와 딸의 죽음, 輿論의 不正 같은 시끄러운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말이다. 自身의 意志와 스스로 일군 欲望을 欲望하려는 마음만이 充滿할 때, 비로소 소리는 숨죽여 한 人間이 ‘고요의 바다’에 내딛는 발자국을 지켜보게 된다.

    그런 點에서 본다면 이성의 雜音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現實 속에서도 우리가 欲望을 잃지 않을 方法은 分明히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眞情으로 追求해야 할 欲望의 形態가 具體的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코끼리의 肛門이나 世俗的인 欲求에서 그 根源을 찾지 않아도, 트럼펫의 깊은 金冠 속에도 至極히 人間다운 欲望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世界가 속삭이는 理性이 아니라 自己가 暗誦하는 理性으로서의 欲望. 우리는 바로 그런 欲望을 耽溺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或是나 自己 欲望을 찾고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데이미언 셔젤 監督의 作品에 恒常 빠지지 않고 登場하는 피날레를 注目할 必要가 있겠다. 세바스찬과 미아, 앤드류와 매니까지 피투성이가 되도록 소리가 執拗하게 괴롭혔던 그의 모든 映畫에 나온 主人公들의 마지막 表情은, 그 삶이 어떤 旅程을 지나왔든지 間에 언제나 微笑지으며 끝난다는 것을 말이다.
    민경민

    민경민

    1989年 大邱 出生

    釜慶大 國語國文學科 卒業

  • “사람이 나쁜가, 아니면 狀況이 나쁜가”

    映畫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의 특별한 點이라고 한다면 平凡한 災難映畫가 보여주는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다는 點이다. 이 作品에는 '災難을 責任질 컨트롤 타워의 不在', 或은 '支配 權力과 平凡한 市民과의 死鬪', '災難이 벌어지는 渦中에도 疏外된 힘없는 庶民들' 같은 要素가 描寫되지 않는다. 團地 巨大한 遲刻 海溢을 스크린 가득 채우면서 '이 世上은 뭔가를 論議할 새도 없이 끝장났다'라고 斷乎하게 宣言해 버린 채 클리셰와 함께 災難을 說明할 硏究員들의 奮鬪까지 한꺼번에 埋沒海 버린다.

    完全히 破壞되다 못해 災難映畫의 古典 敍事까지 徹底하게 抹殺해 버린 이 映畫 속에 남은 것은 偶然히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 한 채와 그 周邊의 사람들뿐이다. 一般的인 흐름이라면 살아남은 선량한 市民들이 惡黨과 對峙하는 그림이 있어야 할 텐데, 이 世界觀 속에서는 그럴만한 惡黨마저도 모조리 地下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래서 이 映畫엔 葛藤 따위는 存在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런 德分인지 劇의 草飯部는 利他的인 사람들과 共生의 價値가 生命力을 지니지만 그것도 暫時, 時間이 갈수록 漸漸 그 生態系에 龜裂이 생기고 만다. 다시 말해, 大災殃으로 사라져 버린 줄로만 알았던 不正과 惡辣한 무엇인가가 그저 선량한 市民들이었던 이들의 內部에서부터 徐徐히 고개를 쳐들기 始作하는 것이다.

    1971年 스탠퍼드 大學의 社會心理學者 필립 짐바르도가 實驗한 '監獄 實驗'에서도 參加者들은 모두 平凡한 市民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設定한 空間에서 矯導官과 罪囚로 役割을 附與받고 갇히게 되자 그들은 正말로 自身이 附與받은 役割, 矯導官 役割을 맡은 사람들은 矯導官처럼 行動하기 始作했고, 罪囚 役割을 맡은 사람들은 正말로 罪囚와 같은 行動을 하기 始作했다. 人間의 多面性이 先天的으로 드러나는 것인가, 아니면 環境에 따라 後天的으로 드러나는 것인가에 對한 論難을 부추기는 이 實驗에서 論難의 與否와는 相關없이 明確하게 確認할 수 있는 것도 있다. 元來 實驗者들은 矯導官도, 罪囚도 아닌 平凡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말이다.

    그런 點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면 이 作品이 人物을 그리는 方式이 '模糊함'에 있다는 것도 보인다. 極限의 環境에서 人間의 面面을 다루는 災難映畫들은 人間의 善惡과 같은 明確한 特性을 特定 캐릭터에 附與함으로써 캐릭터가 서로 對決을 펼치는 그림을 그리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人間의 多面性을 캐릭터 하나하나마다 附與하지 않는다. 누구나 惡할 수도 있고, 누구나 善할 수도 있고, 또한 누구나 어리석을 수 있고 또한 누구나 총명할 수 있다. 但只 그 모든 人間性은 狀況이 바뀔 때마다 適切한 假面을 쓰고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皇宮 아파트의 住民들만 보더라도 그들은 처음에 外部 生存者들과 딱히 다를 것이 없는 平凡한 小市民의 모습으로 登場한다. 欣快히 집을 내어줄 만큼 利他的이지는 않지만 차마 사람들을 내치지는 못할 선량함을 가진 이들은 災難이 닥치기 前에는 부나 權力의 尺度에서 한참 邊두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大災難이 닥쳐온 뒤에 멀쩡한 皇宮 아파트만이 가장 價値 있는 空間이 되자 그들은 한瞬間에 가장 富裕한 集團에 所屬된 旣得權이 되는 經驗을 한다.

    平素 같았으면 小市民의 곁에서 함께 指彈했을 集團利己主義나 選民意識 같은 생각도 그들이 主導權을 잡을 位置에 서는 瞬間 그들 自身의 것이 된다. 사람들이 平凡한 日常을 營爲하다가도 機會만 주면 언제든 '看守'가 될 準備가 되어있다는 奉俊昊式 告發과 맞물려 아파트 住民들은 더以上 선량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파트 住民들이 行하는 非倫理的 行態에 疑問을 提起하고 목소리를 내는 少數 住民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妙한 異質感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느 瞬間 惡辣해진 아파트 住民들의 모습은 마치 自動車를 처음 運轉해 보는 사람처럼 語塞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一時的으로 優位에 섰다는 氣分에 感情的으로 쏟아지는 表情들을 풀어내지만 그걸 지키고 維持하는 데는 서툰 모습을 보인다. 例를 들어 旣得權 勢力이 自身의 權勢를 維持하려고 代理人을 내세우거나 責任을 猶豫하는데 恒常 緻密한 權謀術數를 動員하는 데 反해 皇宮 아파트의 住民들은 問題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感情이 傷하면 傷한 대로 自己鑑定과 貪慾만을 表出할 뿐이다.

    人類의 歷史와 櫃를 같이할 만큼 오랜 歲月 다듬어진 그 狡猾함을 하루아침에 移讓받은 사람들이 왼손, 오른손 다루듯 自由自在로 하는 게 語不成說 아니겠는가. 從來엔 住民들을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히고 惡行을 서슴지 않았던 영탁度 結局엔 自身이 過去에 저지른 過誤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權座에서 쫓겨나게 되고 住民들 亦是 自身들의 私利私慾을 챙기기 위해 行했던 行爲의 結果物이 家族의 죽음과 같은 일로 돌아오자 그 苦痛을 堪當하지 못하고 分裂되고 만다.

    끝장난 世界에서도 優劣은 생기기 마련이고 누군가는 優位를 차지한다. 問題는 그 支配의 權座, ‘가진 者’라는 旣得權의 位置가 胎生的으로 타고난 누군가에 依해서 定해지는 게 아니라, 人間이 生存이라는 目標를 가지는 瞬間 누구에게나 열리는 魅惑的인 빈자리가 된다는 點이다. 나아가 窮極的으로는 우리가 輕蔑하고 罪라고 여기는 人間 世界의 그 모든 狀況 또한 恒常 열려있다는 것이다. 只今은 그 자리를 누군가 차지하고 있지만, 生存이라는 人間의 傑出한 目標는 누구든 그 자리에 사람을 앉힌다. 그게 선량한 사람이었든 胎生的으로 惡한 사람이었든 間에.

    다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劇 中 한결같이 倫理的 態度를 固守하던 名畫의 脫出로부터 다음 한 가지를 暗示한다. 명화는 皇宮 아파트에서 脫出해 結局 다른 生存者 무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살아도 되냐'는 名畫의 말에 '살아있으면 사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建物 全體가 넘어져 壁이 바닥이 되고 天障이 壁이 되어 뒤집힌 빌라에 몸을 依託하게 된다.

    壁과 物件의 쓰임새가 完全히 뒤죽박죽인 世界. 名畫가 到達한 그 世界는, 穩全히 脊椎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皇宮아파트의 完璧함과는 距離가 멀지만 이미 空間 自體가 사람의 손길이 必要하다. 卽, 人間은 完成된 것을 찾아가는 存在가 아니라 망가지고 未完成된 世界 속을 完成으로 만들어나가는 存在인 것이다.

    이미 完成된 世界가 마련한 자리에서 人間이 어떤 式으로 뒤틀리는지를 우리는 歷史를 통해 目擊하지 않았는가. ‘只今의 不足함을 完成으로 만들어가는 矜持를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自由와 삶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結末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민경민

    민경민

    1989年 大邱 出生

    釜慶大 國語國文學科 卒業

  • 김시무 映畫評論家

    審査할 때 나름대로 方式이 있다. 應募된 原稿들을 꼼꼼하게 읽어본 後 베스트 5를 먼저 選定한 後, 再讀하면서 最終 한篇을 選定하는 것이다. 映畫賞 等에서 5倍數 候補作을 미리 選定하는 方式에 따른 것이다. 激勵의 意味도 있다. ‘캘리포니아 楊貴妃가 K-휴먼에게 傳하는 말’은 요즘 새롭게 話頭로 떠오른 포스트휴먼의 觀點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와 ‘空氣人形’을 分析하고 있어 時宜適切했다고 본다. ‘20世紀 少年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題目으로 스필버그 監督을 論한 평문度 흥미로웠다. ‘어머니에 겁먹은 少年’이라는 話頭로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分析한 글은 獨特한 解釋的 視角을 보여주고 있다. ‘邊죽과 딜레湯티즘’이라는 키워드로 크리스토퍼 놀란 監督은 解剖한 글도 專門性을 보여주고 있다.

    ‘소리가 人間을 破壞했을까’라는 挑發的 題目으로 데이美言 셔젤의 一連의 映畫들을 分析하고 있는 평문은 于先 무엇보다도 新鮮하고 재미있었다. 評者는 소리가 人間을 破壞하는 方法을 크게 3가지로 分類하고 있는데, 첫째는 映畫的 裝置에 依한 것이다. 예컨대 ‘위플래쉬’에서 엠비 다이제틱(Ambi-diegetic) 音樂으로 處理된 導入部 OST가 그렇다.

    둘째는 내러티브의 依한 것으로 ‘라라랜드’에서 主人公들의 無名 時節에 現實的인 騷音들로 덧漆된 背景音 處理는 OST의 幻想的인 뮤지컬과 좋은 對照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理性的 産物에 依한 것인데,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쟈켓’에서 暴力的 商社부터 ‘위플래쉬’의 플레쳐 敎授에 이르기까지 辱說을 입에 달고 사는 캐릭터들은 그 端的인 例들이다. 이처럼 評者는 色다른 話頭로 映畫를 보는 것을 넘어서 듣는 것으로 外延을 擴張하고 있다. 그래서 이 평문을 當選作으로 決定했다.
  • 민경민

    민경민

    1989年 大邱 出生

    釜慶大 國語國文學科 卒業

    2017年 무렵 동아일보 新春文藝에 처음 냈던 映畫 評論이 심사평에 言及된 뒤, 6年이라는 時間이 지났다. 햇數로는 6年이지만 應募 回數는 7次例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七顚八起의 當選 消息이었다. 無挑(武道)를 깨우치기 위해 圖章을 轉轉하던 이름 없는 修鍊生이 마침내 道服을 한 벌 얻어 입는다면, 마치 이 같은 氣分이 아닐까.

    勿論 나는 新春文藝가 完成을 告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알을 깨고 나온 그 어떤 새라도 고작 발랑거리는 붉은 핏덩이에 不過하니, 앞으로 깃털을 갖춰 멋진 비상도 하려면 알 속에서의 삶을 버리고 完全히 새로운 態度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데이미언 셔젤 監督에 關한 글을 쓰는 동안 나는 特히 ‘위플래쉬’라는 映畫를 셀 수 없이 돌려보았다.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드럼 스틱을 휘두르는 主人公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硏磨한 走法을 꼭 마무리 짓겠다는 剛한 意志가 느껴지지 않나. 비록 單 한 曲일지라도, 最後의 瞬間까지 絶對로 抛棄하지 않는 主人公의 마음처럼, 앞으로의 나의 글쓰기 亦是 그런 不屈의 意志를 踏襲하기 爲한 努力이 되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이 鈍才의 不足한 作品을 두고 苦心하느라 苦生하셨을 審査委員님, 新春文藝 運營에 東奔西走한 모든 分께 다시금 感謝 人事를 드린다. 또한, 긴 時間 동안 많은 應援과 아이디어를 불어넣어 준 나의 親舊들과 讀者님들에게 고마움을 傳하며, 마지막까지 物心兩面으로 應援해준 나의 어머니, 家族들에게도 感謝의 마음을 傳하고 싶다.
  • 作品專門
  • 端平
  • 審査評
  • 當選所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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