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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바비의 時間 : 되찾는 ‘女-性’들의 時間|동아新春文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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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바비의 時間 : 되찾는 ‘女-性’들의 時間

by   黃碌碌

  • 作品專門
  • 審査評
  • 當選所感
  • 1. 凝視, 따뜻한 或은 서늘한



    殘骸가 쌓인 歷史 바깥의 破局을 凝視하면서, 바로 그곳에서 죽은 者를 불러일으키고 또 散散이 부서진 것을 모아 다시 結合하려는 새로운 天使(1)가 있다. 文學에 ‘歷史’를 記入하는 일은 公式 記憶으로서 公告한 리얼리즘의 자리에 侵入하여 그 時間을 切斷하고, 그 곳에서 낯선 리얼리즘을 創案하는 일이다. 文學은 破局의 現場에서 이미 쓰인 歷史에 어떤 물음을 던지면서 過去의 부서진 時間과 새롭게 대면하는 일이다. 旣存의 歷史가 排除하고 漏落시킨 打者들의 ‘事件의 時間’을 다른 言語로 記入하여 낯선 時間을 生成하는 일이다. 巨大한 歷史가 承認하고 記錄한 젠더의 바깥, 漏落된, 殘餘로서의 與(餘)-性(性)과 떠도는 女性(女性)李 거기에 있다. 우리는 그 殘骸의 現場에서 歷史를 부수어 수많은 이름을 만들어내는 ‘보나’와 부수어져 떠도는 女性의 이름, ‘바비’를 만나게 된다.

    한정현의 『少女 演藝人 이보나』와 박민정의 『바비의 雰圍氣』(2)는 技術 進步의 燦爛한 時代에 ‘歷史’가 忘却한 殘餘-存在들에 對한 舊怨 或은 凝視의 文學的 摸索이다. 두 作家는 歷史의 텍스트에는 存在하지 않는 與-城들을 ‘只今 時間’의 小說 空間으로 불러내어 그 흩어진 殘骸들을 추스르고 꿰매어 새로운 쓰기를 試圖하고 있다. 한정현은 “日帝 强占期부터 始作해 解放, 分斷, 軍部 獨裁, 民主化 運動,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는 韓國 近現代史를 背景으로 잊히거나 漏落된 이들의 系譜를 다시 쓰”고 있다.(3) 그리하여 그들이 “堪耐해야 했던 侮蔑과 暴力의 歷史를 照明함과 同時에 嫌惡와 差別로 얼룩진 世界를 담아내고 있”다는 評價(4)는 한정현이 歷史-小說을 통해서 成就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適切하게 說明해 주고 있다. 至難한 歷史 속에서 잊힌 이름들을 最大限 촘촘하게 呼名하고자 하는 作家의 切實한 欲望은 歷史的 事件과 虛構의 人物들이 만나 ‘裏面의 歷史’ 속에서 汎濫한다. 한便, 朴民政의 『바비의 雰圍氣』는 “한 人物의 삶이 形成된 歷史的 條件 乃至 政治·經濟的 狀況들을 意識的으로 喚起하면서 小說의 世界를 擴張”(5)한다. 時代的 性格에 對한 情報들이 “어떤 證言의 現場 같은 雰圍氣”를 풍기면서 어두운 곳에 放置되었던 殘餘의 時間은 다시 삶의 表面 위로 솟아오른다. 한정현이 過去를 거슬러 올라가는 方式으로 歷史의 깊이를 들추어낸다면, 朴民政은 ‘只今 時間’ 막 쓰여지고 있는 歷史의 表面을 凝視하고 있다. 凝視한다는 것, 그것은 묻는다는 것이다.(6) 反復되는 暴力과 嫌惡의 世界를 凝視하는 靈魂은 어떤 應答을 훔쳐내고자 한다. 그 물음들은 쓰인 歷史를 問題의 場으로 만들면서 公告한 言語를 흔들기 始作한다. 그러므로 朴民政의 凝視는 廢墟를 向한 受動的 傍觀(7)李 아니라 잃어버린 與-性의 時間을 되찾고자 하는 어둠을 向한 視線이며. 버려지고 汚染된 이름을 되찾기 위한 肯定의 旅程이다.


    “있었는지 없었는지, 오로지 리얼의 問題만을 생각하면 나아감이란 없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든다, 그것이 모던 걸들이니까요.” (「科學하는 마음」, 201)



    새로운 媒體에는 새로운 言語가 必要하다, 그것이 이 특수한 媒體 環境에서 生存하는 方式, 우리에게 要請되는 새로운 文解力이다. (「바비의 雰圍氣」, 91)



    한정현과 박민정이 遂行하는 文學에서의 ‘歷史’ 記入方式은 서로 다른 言語, 다른 態度를 要求한다. 따뜻하거나 或은 서늘하거나, 두 作家는 各各 自身들의 文學 言語로 歷史를 바라보고있다. 한정현이 歷史를 文學에 記入하는 方式, 그것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란 보이지 않은 存在, 들리지 않는 목소리, 불리지 않는 이름을 되살려내는 일이다. 한便, 朴民政의 人物은 神聖한 論文에 트위터 等 인터넷 SNS에서 떠도는 말, 汚染된 말들을 記入하려 한다. 새로운 歷史의 徵候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言語”, “새로운 文解力”李 必要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더 以上 實踐理性의 主體로서 言語의 主人이 될 수 없”(94)기 때문에 歷史에 記入할 새로운 言語가 必要하다는 것이다.

    한정현의 ‘이보나’는 ‘歷史의 天使’로서 時代를 貫通하고, 空間을 橫斷하여 救援해낸 이름 잃은 與-性들에게 바치는 ‘樂觀’ 메시지를 電送하고 있다. 다른 한便에서 박민정은 ‘바비’가 디지털 媒體에 무엇으로 貯藏되고 어떻게 展示되는지, 그 暴力의 現場을 어떻게 凝視해야 하는지에 對한 複雜한 視線을 打栓해 온다. 廢墟의 殘骸 속에서 救助해낸 數 많은 破片들을 꿰매고, 덧대어 바느질하고 있는 天使와, 그 天使들의 어깨너머에 惡魔의 렌즈가 도사리고 있다는 이 現實을 作家들은 더以上 外面할 수는 없다.

    抑壓받고 지워진 存在를 다시 불러내고 救助해내는 한정현의 가장 緊要한 道具는 ‘이름’과 ‘觀光’이다. 與-性 存在의 肯定과 未來에 對한 樂觀은 이 두 單語를 經由하면서 具體化 된다. 공교롭게도 ‘이름’과 ‘觀光’은 朴民政의 小說에서도 重要한 자리에 있다. 巨大한 歷史의 바깥에 存在하는 少數者에 對한 두 作家의 態度와 展望을 注視하면서, 文學 속에서 發明된 새로운 ‘歷史’가 現實에서 어떻게 作動하고 있는지, 어떻게 作動되기를 바라는지를 眺望해 보고자 한다. 이를 通해서 따뜻한 樂觀과 서늘한 凝視의 間隙은 우리로 하여금 ‘只今 時間’, 무너지고 있는 破局的 現實에 對한 어떤 물음과 배움을 읽어내게 할 것이다.



    2. 이름, 없거나 너무 많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漆黑의 어둠, 歷史 裏面의 時間 속에서, 누군가 무엇인가의 ‘있음’이 感知된다. 그 어둠 속에는 自身을 드러낼 수 없는 어떤 목소리들이 우글거림으로 存在한다. ‘當身은 누구입니까?’ 어둠을 向해 물음을 던지지만, ‘누구’라고 對答할 수 없는 이의 낮은 숨소리만이 되돌아올 뿐 어둠은 더욱 짙어진다. 그 짙은 어둠 속에는 鬼神, 퀴어, 基地村 女性, 混血 等 少數者, ‘女-性’들이 있다. 그들은 한정현 小說에서 제 이름 없이 그대로 ‘빛’으로 存在한다.



    어두워져야 볼 수 있는 건 뭐가 있지?

    鬼神?

    그것도 있다. 스파이, 間諜.

    하지만 스파이는 낮에도 움직이잖아.

    그런가?

    그렇다면,

    빛.

    (「少女 演藝人 이보나」, 45)



    한정현의 『少女 演藝人 이보나』는 ‘이름’에 對한 小說이다. 그것은 巨大한 歷史 속에서 “帝國의 것도, 南朝鮮이나 北朝鮮의 것도 아닌”(47) 떠도는 목소리를 文學의 言語로 呼名해 주는 일이다. 作家의 이러한 意圖는 敍事에 的確하게 作動하고 있다. 作家의 切實한 要求로서의 이름에 對한 穿鑿은 作品 곳곳에 配置되어 樂觀의 根據로 積極的 意味를 附與받는다.(8) 때로 突然하고 强迫的인 方式으로 敍事에 介入하기도(9) 하지만, 이름에 對한 作家의 이러한 執拗한 要求는 時代 社會的 脈絡에서 充分히 理解可能하다. 이름을 가져보지 못한 女性들은 正體性 表象과 自己 認識의 道具로 이름을 欲望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한정현 小說에서 汎濫하는 이름 짓기에는 목소리를 잃은 者들의 存在感을 확인시키는 歷史的 자리매김의 意味를 넘어서, 文學的으로 더 먼 地點까지 나아간다. 短篇 「少女 演藝人 이보나」는 韓國의 近現代史를 촘촘하게 貫通하면서 記錄된 歷史의 裏面에서 與-城들의 存在를 이름으로 連累시키고 있는 것은 明白하다. 이 小說에서 명명하기, 呼名하기로서의 이름은 ‘이다’를 통한 存在의 規定과 그 存在의 ‘있음’을 證明해내는 것을 훌쩍 넘어서, 境界를 허무는 퀴어韓 地點까지 나아간다. 그리하여 이 小說에서 이름은 指定된 젠더의 표식을 넘어 N個의 이름과 N個의 性(性)으로 넘쳐흐른다.



    養成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뒤섞여 있다. 어느 人間에게서나 한 城에서 다른 性으로의 轉換이 일어나고, 男性이나 女性의 모습을 維持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 衣裳밖에 없으며, 誠意 밑바닥에는 위에 있는 것의 正反對가 存在한다. 이런 事情으로 인해 일어나는 複雜하고 혼란스러운 問題는 누구나 經驗해 왔다. (...) 그女의 內面에 男子와 女子가 뒤섞여 있고, 한 性이 優勢하다가 다음 瞬間엔 다른 性이 强力해지기 때문이었다.(10)



    이미 우리가 읽어냈듯이 한정현의 小說에서 呼名과 命名은 存在의 있음을 證明하는 重要한 要素이다. 그러나 그것은 젠더의 規定을 承認받기 위한 裝置는 絶對 아니다. 울프의 ‘올랜도’처럼 한정현의 人物들은 이름도 姓(性)도 하나가 아니다. 衣裳을 바꿔 입음으로써, 새 이름을 얻음으로써 그들은 더 自由롭게 젠더의 境界를 넘나든다. 이름은 人物들의 젠더를 確定하고 規定하는 裝置가 決코 아니다. 1代 만신 유순옥으로부터 巫女의 옷을 代물림한 집안의 唯一한 男性 ‘喜’는 만신, 臺巫女이다. ‘喜’는 ‘朱熹’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巫女로서 빨치산에 依해 산 채로 묻힌다. 朱熹와 함께 빨갱이 嫌疑로 連行된 濟州 海女 ‘李 氏’는 ‘넷째’로 불리다 朱熹에 依해 ‘이보나’가 된다. 朱熹는 희를 따르던 어린 巫女들에게 ‘안나, 에레나, 쏘냐’와 같은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에게 ‘사람이 된 氣分’을 膳賜한다. 日本에서 朝鮮으로 送還되던 넷째 李 氏와 朱熹는 바다 위에서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無事히 脫出한다. 이름 代身 옷이 指定하는 姓(性)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바꿔 입은 옷과 새로 얻은 이름은 비로소 사람이 된 氣分을 갖게 한다.



    “노래는 다 듣고 가지, 소리는 境界가 없잖아.” 고개 숙인 내 앞에 찰랑이던 드레스, 어느새 내 앞에 諸人이 와 있었다. (...) 가만히 내 팔을 잡던 諸人이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運動靴 앞코를 드레스 자락으로 닦으며 물었다. “우리 갈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제 새 신발을 신었으니까.”
    (「少女 演藝人 이보나」, 77)



    男裝女子와 女裝男子, 다시 姓은 뒤섞인다. 이 뒤섞인 存在들이 머무르고자 한 空間은 ‘바다의 中間’과, ‘警戒 지을 수 없는 소리의 흐름’ 사이이다. 朱熹에게 맡겨진 조카 아이 ‘재성’은 스스로 ‘諸人’이라 부르며 金髮의 女裝을 한 채로 示威 現場에서 死亡한다. ‘喜’, ‘朱熹’, ‘諸人’ 等 젠더를 特定할 수 없는 이름들과, 諸人과 재성, 輕俊과 驚訝, 안나와 혜린(「우리의 所願은 科學 少年」) 等 없거나 或은 너무 많은 이름들은 歷史가 記錄하지 않는 場所에서 ‘女-性’으로 만난다. 卽, 그들은 女子-男子 ‘사이’, 表面-이면 ‘사이’, 그 ‘바다의 中間’ 어딘가에서 存在하고 있었던 것이다. 基地村 女性, 性 勞動者, 慰安婦 말고 그냥 ‘캔디’로 불려지기를 所願하는 이선자와 뉴욕의 女工 로地圖, 韓國의 영자도, 眞짜 이름을 모르는 生物學的 제인(「生物學的 제인」)도 모두 그곳, 사이 空間에 存在하고 있다. 驚訝라고 불리는 輕俊과, 안나로 불리는 혜련은 그 이름이 다시 바뀌더라도 이미 뒤섞인 存在는 以前으로 되돌릴 수 없다. 作家 한정현은 ‘이름’을 통해서 수많은 女-性을 불러내어, “나와 너를 사랑이나 理念으로 나누는 것”李 아니라, 堅固한 젠더 規定을 허물어버리는 “境界가 없는” (76) ‘사이-存在’, 퀴어韓 그들의 이름을 記入한다.

    박민정의 小說 『바비의 雰圍氣』 亦是 事態는 ‘이름’에 있다. “Slut 43%”(45), “K-Bot. jpg”(77), “레이 미즈나, 마쓰모토 리나, 아사다 오이시 等 알 수 없는 造語”(96), 印度코끼리-12, 印度코끼리?M14 그리고 바비 等. 暗號와 같은 單語들은 暴力的으로 命名된 된 채 인터넷 世界를 떠돌고 있는 女性의 이름들이다. 박민정은 이 ‘디지털 네이밍’에 얽혀 있는 複雜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서늘하게 凝視하고 있다.

    마르디 그라 Mardi Gras, 懺悔의 火曜日. 뉴올리언스의 펍에서 朱熹(「세실, 朱熹」)는 親舊가 아닌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날 朱熹는 “싸구려 자개 구슬을 잔뜩 엮은 목걸이”를 걸고 카메라 플래시 속에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Show your tits!” “네 벗은 가슴을 보여달라고!” “그 瞬間이 動映像에 剝製되어 있었다.”(44) ‘끔찍한 記憶’의 瞬間, 朱熹는 그때의 自身을 깊이 詛呪했다. 朱熹의 寫眞은 ‘Slut 43%’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 展示되어 있다. 어떻게 잊어야 할지, 어떻게 잊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朱熹는 스스로를 詛呪할 뿐이다. 自身의 意志로는 削除할 수 없는 디지털 世界에 剝製된 얼굴, 貯藏된 侮蔑은 現實과 디지털의 世界를 넘나들면서 떠돌고 있다. 이 女性들의 世界는 이미 파리의 屍體 公示所 ‘모르그 디오라마’(11)이다. 오늘의 디지털 미디어는 ‘빨래처럼 널린 屍體를 구경하는 스펙터클’과 다르지 않다. 디지털에 剝製된 自身의 치욕스러운 모습을 確認하게 되는 女性들의 經驗은 現實의 極端을 想定한 것은 아니다. 몰카 犯罪나 不法 動映像 流通에 關한 事件은 거의 日常처럼 到處에서 確認할 수 있다. 只今도 陰畫된 렌즈는 젊은 女性들을 照準하고 있다. 19世紀 末 ‘모르그 디오라마’는 現在까지 絶讚 上映 中이며, 수많은 ‘朱熹’들과 身元 未詳의 少女들은 剝製된 채 展示되고 있다.

    그 渦中에 朴民政은 暴力的인 命名의 피/加害者의 이름을 모두 現實에서 이웃하게 둔다. 現實은 加害와 被害가 奇妙하게 얽혀 있으며, 加害者의 이름만을 오롯이 도려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唯美와 幼年 時節을 함께 成長한 四寸 오빠는 自身이 저지른 끔찍한 犯罪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알린다.(「바비의 雰圍氣」) 로봇 硏究者가 된 오빠는 짝사랑하던 女子의 ‘成形한 얼굴’을 닮은 로봇을 製作하고, 怪物 ‘바비’라고 명명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



    너도 記憶하니. 그女도 結局 成形한 얼굴이었지. 그 事實을 알고도 그女를 잊지 못했지만, 그女의 얼굴을 닮은 로봇을 만들었단다. 우리 硏究室 助敎 기영이 이름을 따서 K-Bot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그러나 나는 그女를 바비라고 부르지. 내가 사랑했던 女子의 얼굴이 프랑켄슈타인의 怪物과도 같은 얼굴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穩全히 認定하지.

    (「바비의 雰圍氣」, 113)



    男性은 그런 式으로 自身이 欽慕하던 女性을 “손에 쥐”(77)었다고 생각하며, 그 意氣揚揚함에는 어떤 罪意識도 없다. 加害者 男性(四寸오빠)의 不幸한 成長 敍事가 犯罪와 나란히 展開되면서 被害의 深刻性을 오히려 相殺시키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유미는 “女子들을 따라다니는 시커먼 男子들을 볼 때마다 오빠 생각을 했고, 그들을 輕蔑하는 마음과 同時에 憐憫하는 마음이 들어 困難”(97)해 하는 心理를 감추지 않는다. 表面에 드러난 暴力的인 事態가 그렇게 單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새로운 言語, 生存 方式으로서 새로운 文解力’(89)의 必要性에 對한 論文을 作成하는 동안에도 유미는 男子의 시커먼 視線을 堪當해야 한다. 이 亦是 얽혀 있는 現實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自身의 動映像 ‘Slut 43%’를 發見한 오늘 같은 날이야말로 懺悔의 火曜日이란 말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朱熹는 무엇을, 누가 懺悔해야 하는지 모르는 現實에 難堪해 한다. 怨恨과 憤怒의 方向이 어디를 向해야 할지 모르면서 함께 旅行한 親舊 J에게로 向하기도 하지만, 結局 懺悔는 自身을 겨냥하고 있다. 무엇을 憎惡해야 하는지, 어떤 瞬間을 後悔해야 하는지에 對한 被害 女性들의 混亂과 誤謬가 그대로 露出되고 있다.



    付託드립니다. 제 얼굴이 찍힌 映像을 지워주세요. 저는 平凡한 市民입니다. slut이 아닙니다. (「세실, 朱熹」 61)



    그 世界 內에서 女性을 向한 暴力의 存在는 너무도 堅固하다. 한番 汚染되어 버린 이름은, 暴力的으로 命名되어 嫌惡를 실어 나르는 視線 속에 갇혀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意味에서 박민정이 그려낸 世界는 ‘페허’이다. “그 世界에서는 더 나은 未來를 志向하는 어떤 普遍的 企劃도 기능하지 못”(12)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朴民政에게는 廢墟가 된 世界에 켜켜이 쌓인 暴力의 地層들을 有心히 들여다보는 ‘視線’이 있다. 그 世界에서는 共感과 連帶를 말하기 以前에 暴力의 ‘現場 檢證’李 先行되어야 한다. 그女들은 ‘팟’, 찍히는 그 瞬間 ‘靈魂의 죽음’을 選擇할 수밖에 없었다. 그女들은 廢墟의 世界에서 지워도 지워도 되살아나는 디지털에 展示된 이름들 代身에 그 瞬間 스스로 ‘忘却’과 ‘죽음’을 選擇한 것이다. 그 수많은 被害者, 그들 靈魂의 죽음은 暴力의 現場에서 다시 記憶의 領域으로 불려나와 廢墟의 한 地層을 만든다. 박민정에게서 文學은 그런 것이다. 文學은 如前히 不便한 ‘視線’으로 現實의 廢墟를 凝視하고 그 地層의 낱낱을 記錄해야 한다고 要求한다.



    3. 觀光하는, 모던 걸 그리고 ‘Slut 43%’



    한정현의 「科學 하는 마음」은 副題 ‘觀光하는 모던 걸에 對하여’에서 斟酌할 수 있듯이 존 어리의 ‘觀光者의 視線’, 아즈마 히로키의 ‘觀光’에 對한 命名, 레비트와 쉬러의 ‘超國籍 移住者’ 等의 槪念을 經由하고 있다.(13) 한정현은 이 小說에서 ‘觀光하는 女性’이라는 새로운 存在 樣式을 보여주고 있다. 觀光客이란 權力的인 ‘視線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束縛되어 있기도 하고, 權力의 最下位에 있으면서도 最上位’(14)에 있는 二重的인 存在임에 着眼하여 抑壓받는 少數者들을 觀光客의 存在로 이끈다. 더 나아가 例外的 存在인 觀光客을 能動的 네트워크의 形成者로서 새로운 共感과 連帶 可能性의 存在로 位置 짓고 있다. 在日 朝鮮人, 데이트 暴力의 被害 女性 等 少數者의 問題에 對한 새로운 代案的 視線으로 觀光客이 採擇된다.

    「科學 하는 마음」에서 戀人인 河馬拘置 社츠케의 學術 發表에 參席하기 위해 도쿄에 一週日間 訪問한 驚訝는 ‘觀光客의 特權’으로 暫時 긴자에 머무른다. 10年 前 만난 사츠케는 韓國行 旅券이 없는 在日 朝鮮人 3歲이다. 그들은 ‘우리, 未來, 사랑, 結婚과 國籍’에 對해 말하지 않는다. 日本에 在日 朝鮮人으로서 浮遊하는 存在, 異物感 같은 存在로 살아온 사츠케는 ‘觀光客’으로 보이는 것에 對해 不便한 心氣를 表現한다. 그의 不便함은 거의 不安에 가깝다. 사츠케는 도쿄 麥酒를 固執하고, 驚訝는 삿포로와 오키나와 麥酒를 選擇하는 場面은 日本 속 永遠한 觀光客의 地位인 在日 朝鮮人 社츠케와 ‘眞짜 觀光’을 즐기고 싶은 韓國人 驚訝의 바람이 부딪치는 現實을 直視하게 만든다. 日本에서 태어나 日本語를 쓰면서 日本을 벗어나 본 적이 없지만, 單 한 番도 日本 國民이었던 적이 없는, 사츠케는 眞짜 ‘觀光客’李 되지 못한다.



    “누가 보면 우리 觀光客인 줄 알겠어.”

    나는 社츠케를 빤히 바라봤다.

    “나 觀光客 맞는데.”

    언제부터인가 사츠케는 韓國語로 이야기를 하다가도 가게나 거리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면 日本語로 말을 했다. (...) 여긴 내게 旅行地日 뿐이었다. (「科學 하는 마음」, 194)



    驚訝는 社츠케의 發表場에서 데이트 暴力의 被害로 日本으로 떠나온 한週의 發表를 듣는다. 觀光을 온 驚訝와 暴力을 避해서 日本에 온 한週의 對話는 印象的이다.



    “驚訝 氏는 曺國이, 아니, 當身은 所屬이 있나요?”

    “저는 아무래도 觀光客 같은데요”

    “觀光하는 모던 걸인가요?” (「科學하는 마음」, 203)



    驚訝와 한週는 觀光하는 모던 걸로 存在한다. 意志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한週는 데이트 暴力의 被害者로서 日本에 왔지만, 이제 ‘觀光하는 모던 걸’로서 어떤 旅程도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다. 在日 韓國人으로 日本에서 浮遊하던 存在인 社츠케의 누나는 뉴욕으로 떠났다. ‘지워지거나 가려지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合法的인 觀光客’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日本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女性에게는 曺國은 없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宣言은 한週와 社즈케의 누나, 그리고 驚訝 等 女性들의 觀光客 宣言으로 이어지고 있다. 觀光客은 ‘歷史로부터 第一 먼저 脫却된’ 存在, ‘女性, 在日 朝鮮人, 勞動者, 性小數者, 兒童’ 들에게 삶의 方式으로서, 存在 樣式으로서 提案되고 있다. ‘固定된 位置가 아닌 能動的 네트워크의 形成者로서의 位置’, ‘弱한 連結’을 可能하게 하여 ‘共感과 連帶’를 이끌어내는 存在로서의 觀光客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15) 경아는 科學 技術로서의 飛行機가 아니라 ‘科學 하는 마음’ 그 自體로서 飛行機를 愛情한다. ‘表面이 아닌 裏面’, 科學에서 ‘마음’을 읽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16) “다시 올 거지, 도쿄?”(204) 社츠케의 물음에 驚訝는 答한다. “너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이제 오키나와로 갈게.”(205) 驚訝는 도쿄의 例外 存在인 社츠케를 오키나와의 觀光客으로 이끌어낸다. 觀光하는 마음은 感染되고 사츠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마음’에 傍點을 찍겠다는 한정현 作家의 말처럼 歷史 속에서 領土를 保障받지 못하는 女性들의 明朗한 觀光客 宣言은 自由와 意志, 連帶와 共感의 ‘마음’으로 읽힌다. 歷史 裏面에 存在하는 者들의 ‘觀光’은 脫歷史的人, 脫領土的人 方式으로 未來를 向하고 있는 것은 分明하다.

    박민정의 『바비의 雰圍氣』에도 觀光하는 存在들이 있다. 觀光客으로서 그들의 存在 樣式은 한정현의 ‘모던 걸’들과 사뭇 다르다. 落款하는 마음으로 떠난 觀光이 어떤 얼룩과 傷處의 記錄으로 남는지에 對한 디지털的 記憶이 박민정의 『바비의 雰圍氣』에는 있다. 短篇 「세실, 朱熹」에서 人物들은 各各 다른 方式으로 서울과 뉴올리언즈를 觀光한다. 朱熹는 서울에 觀光 온 外國人이 第一 選好하는 뷰티숍 ‘쥬쥬하우스’에서 日本人 職員 細實果 함께 勤務한다. 外國人 職員 中에서 韓國말을 가장 잘하는 日本人 세실은 ‘고작’ K팝 스타 瑜鹵允浩 때문에 外國人 勞動者의 삶을 ‘選擇’했다. 세실은 저 나름의 意志와 欲望에 따라 어디든 갈 수 있는 ‘觀光客’이다. 그리고 美國을 觀光하고 온 朱熹와 朱熹의 親舊 J가 있다. J는 어디로 旅行을 가든 現地人과 對話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며 처음 만난 사람과 서슴없이 親口할 수 있는 人物이다. 그女는 런던 旅行에서는 ‘「인터내셔널가」’를 合唱하는가 하면 뉴올리언즈에서는 비즈 목걸이를 열 個나 받았다고 자랑한다. 社交的이며 自己 主體的이고 偏見 없는 J야말로 앞서 말한 한정현의 ‘觀光하는 모던 걸’의 典型일 수도 있다. 그런 J의 裏面, 모던 걸의 裏面, 朱熹는 그들 觀光客의 어두운 痕跡으로 거기에 있었다. 細實果 J의 觀光에는 歷史와 社會의 다양한 脈絡들이 얽혀 있다. 觀光客의 特權이자 자유로움의 理由가 될 수 있는 現實과 歷史에 對한 無知와 無關心은 때로 嫌惡와 暴力의 加害者와 被害者로 觀光地의 여기저기서 出沒한다. 化粧品 마케팅을 하면서 戰犯企業과 動物實驗 等 倫理 問題에 한 番도 苦悶해 본 적 없는 朱熹처럼 現實의 뒤얽힌 脈絡에서는 누구나 被害者이자, 2次 3次 加害者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問題로 얽혀든다. 히메有利 學徒隊 出身 外曾祖母가 自身의 自矜心인 戰犯 國家 出身의 세실은 光化門 한복판에서 慰安婦 戰爭 被害를 呼訴하는 示威隊와 마주친다. 야스쿠니 紳士와 少女像은 現實의 表面에서 不時에 부딪친다. ‘歷史’는 그런 式으로 現實에 出沒한다.

    科學 技術은 尖端의 尖端을 更新하고 있지만, 果然 ‘科學 하는 마음’의 更新은 어떤 方向을 向하고 있는가. 바비의 世界에서 女性들의 居處는 이미 ‘N番 房’이며, 그女들을 바라보는 視線은 到處에 도사리고 있는 ‘몰카’이다. 디지털 暴力의 方法은 버전을 높여간다. 情報의 바다는 이미 嫌惡의 바다, 侮蔑이 넘실거리는 地獄과 다르지 않다. “무람없이 外國人과 어울려보고 싶었고, 그들의 文化를 自然스럽게 體驗해 보고 싶은”(74) 觀光의 熱望이 朱熹에게는 새로운 이름, 포르노 映像 속 ‘Slut 43%’로 끝이 난다.



    4. 되찾는 與-性(餘-性)들의 時間



    한정현과 박민정이 새롭게 記入하는 ‘歷史’는 公式的으로 呼名되지 않은 存在들이 일으킨 革命의 記錄이다.(17) 그들이 잃어버린 歷史는 匿名의 眞理를 지닌 時間이며, 보나와 바비의 이름으로 되찾은 時間이다. 文學은 그렇게 固有의 時間과 空間을 創案한다. 傳承되고 公式化된 歷史가 漏落한 ‘事件의 얼굴’들은 文學의 言語로 건져 올려져 우리들의 時間과 마주치고 우리를 다시 思惟하게 한다. 한정현과 박민정은 裏面의 歷史와 記憶이 뿜어내는 낯선 記號를 感知하고, 飜譯하는 것이 文學이 歷史를 經由하는 方式임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女-性’들, 卽 女性, 퀴어, 少數者의 이름과 목소리를 통해서 생생하게 증언되고 記錄된다. 事件은 ‘歷史的 事實’의 記錄으로 始作하여 ‘女-性’들의 微視的 삶으로 進入한다. 그리하여 그 殘餘의 時間, 殘餘의 性(性)은 小說 밖으로 汎濫하여 現在의 嫌惡와 暴力의 現場에서 또다른 女性들과 마주친다. 한정현은 忘却된 歷史 속에서 ‘이보나’를 救助해내고, 박민정의 ‘바비’는 怪物 로봇으로 剝製된 채 우리에게 提出된다.

    한정현의 『少女 演藝人 이보나』에서 巨大한 歷史는 人物들의 삶과 죽음에 積極的으로 連累되어 있음에도 不拘하고 歷史는 그들을 記憶하지 않는다. 小說은 그런 그들을 불러내고 記錄한다. 불려나온 與-城들은 ‘태어난 그곳, 中間, 바다의 中間’에서 ‘觀光’하면서 ‘樂觀’으로 새로운 出發을 宣言한다. 한정현은 ‘公主’도 ‘魔女’도 아닌 ‘사람’으로 되찾은 ‘女-性’의 時間을 이야기한다.



    옛날이야기 해 줄까.

    좋아, 或是 公主랑 魔女랑 王子가 나오는 이야기야? 王子님이 公主님 救해 주는?

    아니, 公主도 없고 魔女도 없는 이야기야. 王子는 더 없는 이야기.

    그럼 누가 나와?

    女子 얼굴 半, 男子 얼굴 半인 사람.

    응?

    (「우리의 所願은 科學 少年」, 241)



    한정현의 ‘樂觀’이 多少 性急한 목소리로 宣言되고 있는 자리에서 朴民政은 낮은 목소리로 只今-여기를 向해 물음을 던진다. 『바비의 雰圍氣』는 디지털 暴力과 女性嫌惡가 反復 再生되는 現場이다. 수많은 ‘바비’들은 가늠할 수 없는 時空間에서 해시태그로 剝製된 채 ‘觀光당하고’ 있다.



    유미는 오빠가 보낸 寫眞을 열어봤다. 몸통이 없는 그女가, 오래前 오빠가 多急하게 지우던 寫眞 폴더 속 아름다운 그女가 아크릴 판에 세워져 있었다. 分明 그女를 닮았지만 그女일 理 없는, 그女의 얼굴을 侮辱하는 그女의 怪常한 얼굴이, 모리 마시히로의 不快한 골짜기를 云云하는 오빠의 말이 떠올라 유미는 괴로웠다. 그 瞬間에도 옆에 앉아 힐끔거리며 유미를 觀察하는 男子가 있었다.

    (「바비의 雰圍氣」, 114)



    박민정은 世界 곳곳에 配置된 嫌惡의 消費에 우리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를 執拗하게 보여준다. 嫌惡와 디지털 暴力의 時代에 ‘連帶와 共感’의 ‘마음’만이 廢墟 속에서 살아가야 할 理由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비의 雰圍氣』는 廢墟에 對한 執拗한 應試를 통해 無差別的으로 恣行되고 있는 嫌惡와 暴力을 證言하고 그것을 文學의 言語로 記錄한다. 수많은 ‘바비’들은 同時代 우리에게 어떤 물음과 事由를 强要한다. 우리의 歷史는, 事態의 眞相에 對해 제대로 應試한 적이 있는가. 差別과 嫌惡가 狼藉한 디지털 空間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聽取하고 있는가. 숱한 廢墟의 經驗 속에서 單 한 番이라도 眞實과 穩全하게 만난 적이 있는가. 바로 只今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世界 속에서 어떤 이름이 犧牲되고 있는가.

    ‘보나’가 되찾은 時間, 그 바깥의 時間에서 ‘바비’는 우리가 目擊한 暴力과 嫌惡의 殘酷한 現場에 對한 眞實의 言語를 强力하고 緊急하게 要請하고 있다.



    各州

    1)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天使」(Angelus Novus)를 벤야민은 페허의 殘骸를 凝視하는 歷史의 天使로 說明한다.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 選集 5』, 「歷史의 槪念에 對하여」, 최성만 옮김, 圖書出版 길, 339面 參照

    2) 이 글에서는 한정현의 小說集 『少女 演藝人 이보나』(민음사 2020)의 「少女 演藝人 이보나」, 「科學하는 마음」을 中心으로, 朴民政의 『바비의 雰圍氣』(문학과지성 2020)에서는 「모르그 디오라마」, 「세실, 朱熹」, 「바비의 雰圍氣」를 中心으로 살펴본다. 本文 引用은 쪽數로 表記한다.

    3) 人牙營, 「우리는 더 많은 사랑과 아름다움을」, 한정현, 『少女 演藝人 이보나』(민음사, 2020) 作品 解說 333面

    4) 한영인, 「페허의 反復, 裏面의 樂觀」, 『文學과 社會』 2020年 겨울號

    5) 송종원, 「怪物과 事實, 그리고 앎의 裝置로서의 小說」, 박민정, 『바비의 雰圍氣』 作品 解說 243面

    6) 질 들뢰즈, 『差異와 反復』,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186面

    7) 한영인은 朴民政의 『바비의 雰圍氣』에 나타난 ‘暴力과 不平等의 乏盡하고 具體的인 再現이 자연화된 構造를 띨 憂慮’가 있다는 것과 ‘더 나은 未來를 志向하는 어떠한 普遍的 企劃도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 問題的이라고 말한다. (한영인, 앞의 글, 359~370面)

    8) 「우리의 所願은 科學 少年」에서 이름도 없이 4원에 팔려간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를 낳고 죽어가면서 “이 아이에게 이름을 주세요, 이름을 불러 주세요.” (247) 라고 남긴다. 이 말은 안나에 依해 여러 番 上氣된다. 안나와 驚訝가 美國으로 떠날 때 驚訝가 낳은 아이를 守城이 맡으면서 다시 强調된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게.” “그리고 記憶할게, 그러니까 우리는, 樂觀瑕疵.” (275)

    9) 在日 朝鮮人 삶의 哀歡을 말하는 場面에서 登場하는 對話에서 ‘이름’은 多少 突然하게 出現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記憶에서 時間이 지날수록 鮮明해지는 건 自身의 이름이야. 아버지가 어머니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거든.”, “이름을 가졌군요, 멋있어요.” (「科學 하는 마음」 192-193)

    10)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이미애 옮김, 열린책들, 2020 195面

    11) 19世紀 末. 파리의 센江 가운데, 시테섬에 있었던 屍體 公示所, 모르그. 1880年代 後半 센江에서 건져진 身元 未詳의 아름다운 少女가 展示된다. 그 쇼케이스 너머에 屍體를 구경하러, 하루에 萬 名 以上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少女의 頭像은 後에 心肺蘇生術 마네킹이 된다. (「모르그 디오라마」, 23-24)

    12) 한영인, 앞의 글

    13) 「科學 하는 마음」은 小說 內容 自體가 論文의 머리말 形式을 取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小說의 事件으로 召喚하지 못(案)하는 多樣한 ‘知識’들이 脚註를 통해서 小說 內容을 補完하는 形式을 取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小說에 붙은 脚註는 作家 한정현의 것, 卽 敍事 바깥의 것이 아니라 敍述者-나(驚訝)의 것, 內部 敍事의 한 部分이다.

    14) 「科學 하는 마음」 179面 各州

    15) 「科學 하는 마음」 200面 各州 參照

    16) “「科學 하는 마음」은 現在 時點에서 東아시아의 科學과 技術의 兩面, 그러니까 國家의 發展을 위해 嫌惡를 서슴지 않았던 帝國과 韓國의 現代史에 對해 文化的으로 接近한 作品이다. 그러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랑에 關한 것이었으며, 科學,이라기보다는 ‘마음’에 傍點을 찍고 읽어주기를 當付한다.”(『소녀 演藝人 이보나』 「作家의 말」 329面)

    17) 자크 랑視에르, 『文學의 政治』, 유재룡 옮김, 人間사랑, 2009 113面
    황녹록

    黃碌碌

    1970年 釜山 出生

    인하대 韓國語文學과 碩士 在學

  • 신수정 명지대 文藝創作學科 敎授·김영찬 啓明大 國語國文學科 敎授

    全般的으로 上向 平準化된 應募作들의 水準과 無關하게 批評의 時代가 저물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때 具體的인 文學 作品 속으로 이끄는 마중물이자 우리 文學의 向方을 가늠하는 準據로 기능했던 文學評論은 이제 아카데미의 授業用 課題 페이퍼로 그 命脈을 艱辛히 維持하고 있는 듯하다. 批評 亦是 다른 文學 制度와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慣習的 訓鍊이 必要하지만, 그것만으로는 批評的 에스프리를 代身할 수 없다는 事實을 다시 한番 喚起할 必要가 있어 보인다,

    ‘‘살아서’, ‘있다’는 宣言-최지인론’이나 ‘RE: 지난(한) 이야기와 다시 만난 未來-최未來論’, 그리고 ‘無言의 敍事에 和答하는 方式-박선우론’이나 ‘텍스트의 ‘分裂’과 그 ‘忘我的(忘我的)’ 創造力-문보영의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書店’’ 等은 텍스트에 對한 精巧한 分析이 興味롭고 可讀性 있는 文章으로 自身의 論旨를 展開할 줄 아는 內功이 든든해 보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學究的인 槪念으로 一貫하거나 텍스트 內部에만 視線이 固定되어 있어 多少 답답한 解釋이 되어 버렸다는 點이 아쉬웠다.

    相對的으로 우리 文學의 現場을 하나의 키워드로 묶고 범주화하려는 努力을 기울이는 ‘보나와 바비의 時間-되찾는 ‘女-性’들의 時間’이 돋보였던 것은 이런 脈絡에서다. 한정현과 박민정의 小說 속에 나타나는 女性 캐릭터들을 통해 歷史가 忘却한 存在들의 이름을 想起하는 ‘보나와 바비…’는 最近 우리 文學의 關心事인 젠더 이슈를 積極的으로 反映하면서도 그 話頭를 두 텍스트의 內容과 形式에 對한 內密한 比較를 통해 論證해낸다는 點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比較의 過程이 두 텍스트의 解說에만 머무르지 않고 只今 이곳의 文學에 關한 하나의 洞察力을 提供하고 있다는 點이 이 作品을 受賞作으로 決定하는데 많은 寄與를 했다. 當選을 祝賀하며 더 많은 精進을 바란다.
  • 황녹록

    黃碌碌

    1970年 釜山 出生

    인하대 韓國語文學과 碩士 在學

    글을 쓴다는 것, 그 글을 내놓는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낯선 讀者를 대면할 準備를 하기까지. 글의 바깥에 설 勇氣를 내기까지 오래 망설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工夫와 글을 나누며, 서로의 텍스트가 되어준 親舊 先生님들 德에 쓰기와 내놓기가 덜 어려워졌습니다. 이제 막 제가 저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마침 이 廣場으로 불려 나오게 되었습니다. 呼名되던 그 밤, 환한 기쁨과 妙한 울림이 찾아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설렘일지도, 두려움일지도 모를 그 밤의 떨림을 오래 간직할 作定입니다.

    이제 막 廣場에 到着했습니다. 그리고 선 자리에서 다시 出發을 準備해야겠지요. 現實과 文學의 記號들을 凝視하고 思惟하며, 천천히 읽고 또박또박 쓰겠습니다. 마침내 저의 글이 삶과 文學의 섬세하고 敏感한 記號가 될 수 있도록, 읽고 쓰는 일에 誠意를 다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쓰고 있던 작은 사람을 發見해 주신 審査委員 先生님들의 보람이 될 수 있도록 誠實하게 讀解하고 積極的으로 써나가겠습니다. 感謝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부를 수 있어 多幸입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때늦은 弟子를 配慮와 激勵로 살펴주시는 김동식 敎授님, 感謝합니다.

    강동호 敎授님의 授業은 언제나 應援이자 勇氣이자 剛한 부추김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글이라고 스치듯 하신 말씀을 저는 내내 붙잡고 있습니다. 感謝합니다, 先生님.

    서로의 讀者가 되어준 大學院의 多情한 親舊들,

    늘 내 기쁨인 서준, 賢俊, 세하, 그리고 家族들, 든든한 은희, 은주.

    工夫와 삶을 나누어주신 그동안의 親舊 先生님들, 모두 近似한 배움의 時間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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