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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燒酒, 冷靜과 熱情 사이|新東亞

‘혼밥判事’의 한끼

커피와 燒酒, 冷靜과 熱情 사이

아폴론의 커피와 디오니소스의 燒酒

  • 정재민 前 判事, 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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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19-10-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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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裁判은 傷處로 始作해서 傷處로 끝난다. 當事者들 傷處에 비할 순 없지만 判事도 傷處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飮食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鬱寂함의 조각이 커피 속 角雪糖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慰勞를 받는다. 그러면서 “判事는 判決로 말한다”고 해서 法廷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便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정재민 前 判事, 作家
    나는 只今 커피專門店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에 對한 글을 쓰고 있다. 돼지갈비, 곰湯, 칼국수에 對한 글을 쓸 때는 돼지갈비를 뜯으며, 곰湯 국물로 가글을 하면서, 칼국수 麵발을 ‘半指의 帝王’에 나오는 간달프의 흰 鬚髥처럼 입에 문 채로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番에는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에 對한 글을 쓰고 있으니 얼마나 잘 써질까’라고 期待했지만 亦是 誤判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두세 時間씩 앉아 있었던 커피숍만 네 군데다. 이番 다섯 番째 커피숍에서는 부디 完成할 수 있기를 期待해본다. 窓밖에는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하고 부슬부슬 비까지 내린다. 글쓰기 좋은 날이다(물론 글 안 쓰기에도 좋은 날이다).
     
    나에게 커피는 글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가장 자주 하는 일이 글을 읽거나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習慣的으로 커피를 홀짝거린다. 글이 써질 때보다 써지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으므로 量이 많은 커피를 시킨다. 假令 ‘벤티’ 사이즈. 그걸 다 마시고도 자리를 떠날 때 보면 노트북에 몇 文章 못 건진다. 미끼만 잔뜩 쓰고 허전한 漁網을 들고 가는 낚시꾼 處地가 되고 마는 일이 不知其數다. 

    글이 안 써지면 窓밖으로 햇볕이 차고 기울어지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면 ‘잊고 있던 所重한 記憶이나 感情이 참새처럼 불쑥 날아들지 않을까’ 하고 期待하지만 그런 일은 요즘 世上에 참새를 보는 일만큼 드물다.

    잘 내린 커피 같은 글

    내가 萬若 天賦的인 才能을 타고난 作家였다면 커피를 어떻게 마셨을지 생각해본 적도 있다. 벤티 代身 에스프레소 한 盞을 들고 窓가에 앉는다.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고 餘裕롭게 窓밖 거리를 바라본다. 물 半, 고기 半 貯水池에 낚싯대를 집어넣은 것처럼 금세 글감 입질이 온다. 그동안 누구도 생각지 못한 싱싱하고 斬新한 素材가 온몸을 퍼드덕, 퍼드덕거리며 끌어올려진다. 나는 씨익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노트북을 켜고 타이핑하기 始作한다. 손가락이 눈에 보이지 않을 程度로 빠르지만 머릿속에서 展開되는 이야기 速度를 到底히 따라가지 못해 후들거린다. 그러나 손가락의 痛症이나 疲勞感을 느낄 수 없다. 글 內容에 나 自身도 흠뻑 몰입돼 있기 때문에. 채 半 時間도 안 지난 것 같은데 原稿紙 30枚 分量의 原稿가 完成된다. 悠悠히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신다. 아직 溫氣가 가시지 않은 狀態다. 마치 曹操가 준 술이 채 식기 前에 敵將의 목을 베어 온 관운장이 마저 마시던 술처럼. 

    그러나 現實로 돌아오면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고 노트북의 텅 빈 畵面 위에는 커서가 홀로 깜빡이기 始作한 지 오래다. 깜빡 깜빡 깜빡. 自動車를 몰고 가다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켜놓은 非常 깜빡이 같다. 빵빵빵!!! 등 뒤에서 글 마감이라는 警笛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것 같다. 傑作을 쓰려는 野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 水準 以上의 글을 쓰려고 욕심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글쓰기가 어려운지. 歌手 박진영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强調한 “空器 半, 소리 半”을 “문장 半, 마음 半”으로 實踐하고 싶을 뿐.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슬램덩크의 슛 가르침대로 “文章은 거들 뿐”을 實踐하고 싶을 뿐. 

    勿論 쓸 수만 있다면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가을날 거리를 지나치는 한 자락 바람 같은 글. 뒤늦게 바람이 自身을 훑고 지나갔음을 알고 슬쩍 뒤를 힐끔거리게 되는 글. 잘 내린 커피 한 盞 같은 글. 라테처럼 부드럽고, 에스프레소처럼 凝縮되고, 카푸치노처럼 스타一理視한 글. (아메리카노처럼 맹물이 잔뜩 들어간 글 말고) 이처럼 좋은 글이 무엇인지에 對해 쓰는 것은 쉽다. 自己가 좋은 사람이 되기는 어려워도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는 쉬운 것처럼.



    커피의 世界와 燒酒의 世界

    어린 時節, 아버지의 親舊 분들 모임에 따라갈 때가 있었다. 아버지 親舊 분들은 茶房에 電話해서 커피를 시켰다. 스쿠터를 타고 온 女性 從業員이 褓자기를 펼치면 그곳이 茶房이 됐다. 아버지께선 “커피는 어른들만 마시는 거”라면서 나에게는 내 얼굴처럼 희멀건 馬車나 율무茶를 시켜주셨다. 告訴하고도 달았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울 때 몰래 마셔본 커피는 맛이 썼다. 몰래 마셔본 燒酒처럼. 커피와 燒酒의 쓴맛을 區別하지 못하던 때였다. 다만 疑訝했다. 어른들은 왜 쓴 것을 좋아할까. 내가 중얼거리자 아버지 親舊 분이 말했다. 그것이 人生의 맛이라고. 人生은 더 쓰다고. 

    스무 살이 넘으니 내 親舊들도 커피를 마셨다. 낮에는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燒酒를 마셨다. 燒酒를 마시는 것보다 커피를 마실 때 더 成人이 된 氣分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카페인 같은 物質이 내 몸에 들어가서 人爲的으로 精神을 覺醒시키는 것이 찝찝했다. 왠지 내 靈魂의 안房을 남에게 내주는 것 같았다(그러면서도 술 마시는 것에는 왜 拒否感이 없었을까. 靈魂이 家出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면서). 

    判事가 돼서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 理由는 以前과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덧붙일 조그마한 理由 한 가지는, 커피를 마셔서 覺醒이 되면 마음속 社會 通念에 對한 均衡 感覺의 저울 바늘이 平素보다 더 冷靜하고 嚴格한 쪽으로 움직일 것 같아서였다. 合理的으로 說明되지 않는 部分이다. 지나치게 正確하고, 똑똑하고, 嚴正하고, 完璧하고, 아귀가 딱딱 맞는 것에 對해서 拒否感과 不安感이 있다(물론 그럴 能力도 없다). 數學 問題는 딱딱 떨어져야 正答 같은데, 世上이나 人間 問題는 그러면 이미 正答이 아니라는 先入見이 박혀 있는 것 같다. 現實에서 罪를 저지르는 사람은 映畫 속 主人公처럼 緻密하고 冷靜하고 計劃的이고 完璧한 境遇가 많지 않다. 술에 醉해 罪를 저지른 사람을 맨 精神도 아니고 커피를 마셔 平素보다 覺醒된 狀態에서 冷靜하게 判斷하는 것이 事理에도, 禮儀에도 안 맞는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신 사람이 보는 世界와 燒酒를 마신 사람이 보는 世界는 다르다. ‘커피의 世界’는 理性과 秩序가 支配하고, ‘燒酒의 世界’는 感性과 卽興이 支配한다. 法廷에서 만나는 犯罪는, 特히 暴力 犯罪는 大部分 犯罪者가 술에 醉한 狀態에서 發生한다. 커피專門店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고래고래 辱說을 하고, 커피에 醉해 사람을 때리거나 칼로 찌르고, 커피를 마시고 警察署를 찾아가 벌거벗고 行悖를 부린 被告人을 본 적 없다. 


    그렇다고 燒酒의 世界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 大部分은 事實 罪를 저지르고 있지 않다. 그들은 喜怒哀樂을 積極的으로 表出하고, 相對에게 사랑과 友情을 率直하게 告白하고, 가슴에 난 傷處를 달래고, 삶을 즐긴다. 

    ‘배우신 분’들은 니체를 引用해 아폴론的 世界와 디오니소스的 世界의 區別을 말한다. 아폴론은 理性的이고 아름답고 智慧가 充滿한 反面, 디오니소스는 熱情的이고 卽興的이고 彷徨하는 술의 神이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모두 제우스의 子息이지만 아폴론의 어머니는 神(神)인 反面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는 人間이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늘 彷徨하고, 좀 더 人間的이다. 

    나는 判事로서 法服을 입고 있을 때는 (제아무리 커피를 안 마신다 해도) 커피의 世界, 아폴론의 世界, 지나치게 의로운 世界 속에 있다. 내가 쓰는 判決文은 世上의 秩序와 일의 原則과 사람의 道理를 말하고 (나도 못하면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被告人을 狙擊한다. 反面 作家로서 글을 쓸 때에는(커피를 마시기는 해도) 燒酒의 世界, 디오니소스의 世界, 의로움의 强迫이 없는 世界 속에 머문다. 여기서 쓰는 글은 不完全한 世界 속에서 비틀거리는, 欠缺 많고 未成熟한 나 自身을 그린다. 

    判事는 커피의 世界에 있다 보니 곧잘 燒酒의 世界를 忘却한다. 지나치게 覺醒된 論理는 사람을 必要 以上으로 殘忍하게 베고 만다. 人間의 論理는 言語에 基盤을 두고, 言語는 단조롭고 斷片的이므로, 論理的이라고 해서 꼭 眞實과 正義를 擔保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人間은 커피의 世界와 燒酒의 世界를 오간다. 한 人間을 判斷할 때는 두 世界를 모두 考慮해야 한다. 헬라人들度 델포이 神殿에서 年中 折半은 아폴론을, 나머지 折半은 디오니소스를 모셨다.

    헤이그의 톰

    7世紀頃 에티오피아의 카파(Kaffa) 地方에 칼디라는 염소 치는 少年이 살았다. 어느 날 염소들이 유난히 興奮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밤에 잠을 자지 않았다. 仔細히 보니 염소들이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 잎사귀를 따 먹고 있었다. 칼디가 直接 먹어보니 果然 精神이 맑아지고 힘이 났다. 이웃 이슬람 寺院에서 修鍊하며 慢性 疲勞를 느끼던 僧侶들도 이를 즐기게 됐다. 이것이 커피의 起源이다. 

    내가 每日 커피를 마시기 始作한 것은 5年 前 네덜란드에 있는 유엔 國際刑事裁判所에서 일할 때다. 마치 앞 이야기의 僧侶들처럼 고된 業務에 慢性的 疲困을 느끼던 外國人 同僚들은 하루에도 너덧 番씩 沙鉢 같은 컵에 커피를 마셨다. 거기 끼려다 보니 나도 커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國際裁判所 앞에 스타벅스가 생겼다. 거기 처음 간 날 金髮의 白人 男性 店員이 내 이름을 물었다. 疑訝해하면서도 이름을 말했다. “재민 情” 그랬더니 綴字까지 물어본다. “J. A. E. M. I…” 이렇게 알파벳 하나씩 말하려니 時間이 오래 걸렸다. 내 發音이 神通찮아서 그런지 店員이 몇 番을 더 물어봐 時間이 더 걸렸다. 힘들었지만 或是 그가 開業 記念으로 抽籤해서 膳物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誠意 있게 綴字를 알려줬다. 그런데 店員은 내 이름을 종이컵에 적고 있었다. 커피가 나오면 그 이름을 불러서 주려는 것이다. 다음 날 다시 그 커피숍에 갔는데 똑같은 狀況이 反復됐다. 抽籤해서 膳物 주는 게 아니란 걸 알고 나니 슬슬 짜증이 났다. 

    이런 말을 했더니 同僚들이 굳이 本名 댈 必要 없이 ‘톰’과 ‘諸人’ 같이 아무 이름이나 대면 된다고 했다. 아하! 다음 날 커피專門店에 갔을 때 내 이름을 묻는 店員에게 말했다. “I’m Tom” 그러자 店員은 單番에 ‘Tom’을 컵에 적었다. 綴字를 묻지도 않았다. 커피가 나오자 그가 ‘톰’을 불렀고 내가 다가가 盞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完璧히 ‘톰’이었다. 詩人 김춘수 先生의 時 ‘꽃’에 나오는 대목을 빌리자면,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나는 그에게로 가서/ Tom이 되었다.” 

    그렇게 一週日 程度 지나니 이제는 내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店員이 “굿모닝, 톰”이라고 할 程度가 됐다. 나는 그렇게 한 달 程度 ‘톰’으로서의 人生을 살았다. 톰 크루즈 兄님과 이름이 같았다. 이제 ‘名’實 共히 글로벌 時代 國際社會의 一員, 眞正한 유엔 勤務者가 된 것 같았다. 텔레비전에서 美國이 쏘아 올린 ‘제미니’ 宇宙船을 보고 語感이 좋다고 내 이름을 지었다는 아버지가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다시 同僚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톰’과 ‘諸人’은 쉬운 이름의 例示로 든 것이고(우리로 치면 ‘撤收’나 ‘영희’ 같이) 요즘 時代에는 舊式 이름이라면서 깔깔거리고 웃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럼 요즘 젊고 잘생기고 돈도 좀 있는 親舊들이 많이 쓰는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누군가가 ‘마틴’이라 했다. 다음 날 커피숍에 갔을 때 “굿모닝 톰”이라 人事하는 店員에게 正色하고 말했다. “事實을 말하자면, 저는 톰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事實, 저도 當身이 톰이 아닌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내가 말했다. “I’m Martin.” 그가 正色하고 말했다. “Excuse me?(뭣이라?)”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前職 判事이자 現 行政府 公務員. ‘사는 듯 사는 삶’에 關心 많은 作家. 쓴 冊으로는 에세이 ‘只今부터 裁判을 始作하겠습니다’, 小說 ‘보헤미안랩소디’(第10回 世界文學賞 大賞作) 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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