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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獨] 朴, 彈劾 宣告 直後 “일만 하다 날 돌아볼 時間 없었다”|신동아

[單獨] 朴, 彈劾 宣告 直後 “일만 하다 날 돌아볼 時間 없었다”

‘마지막 祕書官’ 천영식 ‘大統領 박근혜 最後 140日’ | 5部 ‘悔恨’ (마지막回)

  • 천영식 前 大統領祕書室 弘報企劃祕書官·계명대 招聘敎授

    youngsikchun@gmail.com

    入力 2019-09-19 13: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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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龜尾와 沃川에 臨時 居處 알아보기도

    • 彈劾 宣告 TV로 지켜본 後 하루 終日 짐만 싸

    •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요” “未安합니다”

    • 彈劾 後 靑瓦臺에 이틀 더 머문 眞짜 理由

    • 最初의 獨身 女性 大統領의 官邸 生活

    • 午前 5時 起牀해 라디오로 外國語 工夫

    • 몸에 밴 節約 精神이 빚은 해프닝들

    • “왜 대낮에 街路燈불이 들어와 있나요”

    • “나도 다른 예쁜 옷 입고 싶을 때가…”

    • “胡떡이 먹고 싶다” 細菌이 많아 結局 못 먹어

    2017年 3月 10日. 李貞味 憲法裁判所 裁判官은 “大統領 박근혜를 罷免한다”고 宣告했다. 憲裁가 憲政 史上 처음 大統領을 彈劾하는 瞬間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現實로 다가온 것이다. 憲裁는 節次的 正當性에 對한 수많은 問題 提起를 無視하고 宣告를 强行했다. 

    사람을 寢臺에 눕혀 키가 寢臺보다 크면 다리를 자르고, 키가 寢臺보다 작으면 寢臺 길이에 맞춰 다리를 늘여 죽였다는 그리스 神話의 ‘프로크루스테스의 寢臺’처럼 李貞味 裁判官 退任日에 맞추어 宣告 日程을 짜 맞췄다. 그 過程에서 고영태의 錄取錄 等 새로운 證據들은 全혀 認定되지 않았다. 

    그날 大統領은 官邸에서 홀로 憲裁 宣告 場面을 TV로 지켜보고 있었다. 彈劾 引用이 宣告된 뒤 大統領은 曺大煥 大統領祕書室 民政首席에게 確認電話를 걸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 大統領은 官邸에서 같이 지내던 行政官을 불렀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요.” 

    歷史上 처음 이뤄진 憲裁의 大統領 罷免. 大統領도 憲裁도 그다음 手順은 아무것도 豫告하지 않았다. 



    펑펑 울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當場 靑瓦臺 떠날 準備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參謀들과 離別 意識을 해야 하는 건지. 그 어떤 것도 準備된 것은 없었다. 

    그저 前人未踏의 길을 홀로 가야 했다. 大統領은 눈물을 最大限 참았다.

    彈劾 宣告 後 하루 終日 짐을 싸고…

    ‘커터 칼 피습사건’ 치료 후 2006년 5월 29일 병원에서 퇴원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곧바로 대전으로 내려가 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커터 칼 被襲事件’ 治療 後 2006年 5月 29日 病院에서 退院한 朴槿惠 當時 한나라당 代表가 곧바로 大田으로 내려가 支援 遊說를 하고 있다. [東亞日報]

    大統領은 極端的으로 不幸한 現實을 여러 番 經驗했다. 어머니가 死亡했을 때 프랑스 留學을 中斷하고 눈물을 참으며 歸國길에 올랐다. 처음 消息을 들었을 때 눈물을 참았으나 歸國 飛行機 안에서는 내내 울었다고 過去 그의 自敍傳에서 밝힌 바 있다. 남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했지만, 속은 限없이 힘들었다. 아버지가 凶彈에 쓰러졌을 때도 이 消息을 傳하던 아버지의 參謀에게 눈물 代身 “前方은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속이 穩全했을 理 없다. 나는 언젠가 大統領에게 “當時 20代의 젊은 나이에 그게 可能한 일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大統領은 “實際 그런 생각이 났다”고 對答했다. 나라 걱정이 먼저 나더라는 것이다. 堪耐하기 어려운 危機를 여러 番 겪은 大統領은 이제 彈劾이라는 不幸까지 겪게 됐다. 崎嶇한 運命이다. 

    大統領은 極端的 瞬間에 대단히 强靭한 사람이다. 過去 커터 칼 테러(2006年 5月 20日 午後 當時 박근혜 한나라당 代表가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吳世勳 서울市長 候補 支援遊說에 參加하던 途中 怪漢에게 커터 칼로 얼굴을 被襲당한 事件)를 當했을 때에도 손으로 傷處를 감싸며 泰然하게 對處했다. 政治的 生命을 잃은 이날도 大統領은 모든 苦痛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默默히 移徙짐을 싸기 始作했다. 

    大統領은 박스에 一一이 物件을 分類해서 담았다. 憲裁 宣告 當日은 거의 하루 終日 그렇게 짐만 쌌다. 

    “일만 하다가 나를 돌아볼 時間이 없었어요.” 

    移徙짐을 싸던 中 冊이나 資料를 다시 훓어보면서 大統領은 獨白처럼 지나간 歲月을 떠올렸다.

    三成洞 私邸의 보일러 工事

    大統領은 한광옥 靑瓦臺 祕書室長과 首席들을 午後 2時에 官邸로 불렀다. 

    “여러분께 未安합니다. 靑瓦臺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大統領은 오히려 參謀들을 慰勞했다. 一部 參謀는 눈물을 흘렸고, 雰圍氣는 錯雜했다. 

    大統領은 그날 서울 三成洞 私邸로 나가지 못했다. 三成洞 私邸는 보일러 修理가 끝나지 않아 얼음처럼 차가운 狀態였다. 아직도 겨울이 끝나지 않은 차가운 날씨에 70을 바라보는 大統領이 起居할 狀態가 아니었다. 參謀들은 차마 彈劾 引用을 豫想해 보일러 工事를 미리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보일러 工事가 늦어졌다. 

    그래도 或是 彈劾이 될 수 있다는 點 때문에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미리 工事를 始作했는데도 彈劾 宣告 當日에는 맞출 수 없었다. 大統領 遂行팀 몇 名이 彈劾 宣告日 3日 前 大統領에게 조심스럽게 建議했다.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或是 몰라서 三成洞에 보일러 工事를 始作했으면 합니다.” 

    大統領은 두말없이 보일러 工事를 始作하라고 했다. 보일러 工事를 한다는 報告를 통해 적어도 大統領이 탄핵될 수 있다는 最後의 마음 準備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巷間에는 大統領이 彈劾 宣告 當日까지 ‘彈劾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大統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가까운 參謀들도 잘 알지 못한다. 

    大統領은 當時엔 靑瓦臺 參謀 外에도 수많은 個人 人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辯護士들도 그 人脈 中 하나일 것이고, 政治人들도 있을 것이다. 特히 여러 性向의 辯護人들이 大統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參謀들의 만남이나 建議는 相當히 制限的이었다. 參謀들은 大統領이 彈劾당할 境遇와 彈劾당하지 않을 境遇에 對한 各各의 對備를 할 수밖에 없었다. 辯護人들조차 豫想이 엇갈렸다. 

    大統領이 마지막에 太極旗集會에 愛情이 많이 간 것은 그만큼 切迫한 狀況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大統領은 參謀들과 相議하지 않고 太極旗集會 參席者들에게 고마움의 便紙를 쓰기도 했다. 

    勿論 大統領은 彈劾이 되지 않을 거라는 希望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彈劾이 棄却 或은 却下될 것이라는 情報가 大統領에게 많이 傳達됐던 것 또한 事實이다. 더구나 大統領을 直接 만나서 ‘곧 탄핵될 테니 準備하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大體로 希望 섞인 展望을 내놓는 境遇가 많았을 것이라 斟酌할 수 있다. 

    그럼에도 大統領이 어느 便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大統領은 超人的 節制力을 갖고 있다. 危機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中心을 잡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周邊에서 大統領의 判斷 및 感情을 두고 誤解할 수 있다고 본다.

    權力을 잃은 前職 大統領

    2017년 3월 12일 청와대를 떠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에 도착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마중을 나온 친박 의원 등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2017年 3月 12日 靑瓦臺를 떠나 서울 江南區 三成洞 私邸에 到着한 박근혜 前 大統領이 마중을 나온 親朴 議員 等 支持者들과 人事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그렇게 私邸 工事를 進行했지만 彈劾 宣告日人 3月 10日까지 工事가 끝나지 않았다. 三成洞 自宅은 過去에도 비가 샐 程度로 낡은 狀態였다. 그동안 집을 비워뒀으니 더더욱 형편없었다. 

    彈劾 宣告 後 一部 言論은 大統領에게 ‘왜 빨리 靑瓦臺를 비우지 않느냐’고 몰아붙였다. 靑瓦臺 官邸에 當場 누가 入住하는 것도 아닌데, 言論은 權力을 잃은 前職 大統領에게 一抹의 同情도 許容하지 않았다. 當時 韓國 社會는 메마를 대로 메말랐다. 

    於此彼 週末이 끼어 있는 데다, 普通 家庭에서도 移徙를 하려면 移徙짐 싸는 時間이 必要한 法이다. 移徙 準備로 며칠 程度 머무는 것은 크게 問題 될 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憲裁 彈劾일이 金曜日이어서 週末 동안 準備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彈劾 宣告 다음 날인 3月 11日 大統領을 만나 月曜日(3月 13日)쯤 靑瓦臺를 떠나면 될 것 같다고 狀況을 說明했다. 너무 서둘러서 떠나려 하실 必要가 없다고 덧붙였다. 勿論 지키지 못한 말이었다. 大統領은 오히려 淡淡했다. 

    “整理되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大統領은 參謀에게도 더는 짐을 주지 않으려 했고, 苟且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超人的인 忍耐와 節制로 靑瓦臺에서의 마지막 瞬間을 넘기고 있었다. 大統領을 만나고 나오자 엉뚱하게 그날 저녁 靑瓦臺를 떠날 것이라는 所聞이 쫙 깔렸다. 方今까지 그런 얘기가 없었는데 異常하다고 느꼈다. 確認 結果 그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月曜日까지 버티기 힘들 수 있다는 展望이 많았다. 

    實際 그날부터 왜 빨리 靑瓦臺를 나가지 않느냐는 輿論의 壓迫이 거세졌다. 나에게도 當場 大統領을 靑瓦臺에서 떠나게 하라는 政治權과 知人들의 電話가 이어졌다. 輿論이 좋지 않다는 理由였다. 靑瓦臺와 담牆 밖의 溫度差는 그렇게 컸다. 때마침 최경환 議員이 그때쯤 나에게 電話해 “언제쯤 나오시게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三成洞 私邸로 가실 境遇 議員들이 最小限의 道理를 위해 삼성동을 訪問해야 하는데, 언제쯤이 될지 몰라 非常 待機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月曜日쯤 떠나실 것을 勸誘했지만 雰圍氣가 좋지 않아 日曜日 靑瓦臺를 떠날 可能性이 높은 것 같다”고 傳한 記憶이 있다. 

    實際 大統領은 月曜日까지 버티지 못하고 日曜日 저녁 靑瓦臺를 떠났다. 狀況은 그만큼 좋지 않았다. 

    大統領이 彈劾됐으면 바로 떠나는 게 옳다고 본다. 하지만 參謀 立場에서 보일러 修理도 되지 않은 冷房으로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國民의 51%가 支持해 뽑은 前職 大統領에 對해 우리 國民도 最小限의 寬容은 必要하다고 如前히 생각한다. 最小限 떠나는 사람의 뒤통수를 치지 않는 게 그래도 우리의 傳統이라고 믿어왔다. 

    事實 삼성동으로 떠날지에 對한 苦悶은 일찍부터 있었다. 憲裁의 彈劾 宣告日과 相關없이 2017年 새해가 밝으면서 大統領의 退任 後 居處 準備를 놓고 물밑 움직임이 展開됐다. 元來 苦悶은 正常的 退任을 前提로 始作됐다. 正常的으로 退任하더라도 退任 1年 前인 2017年 2月에는 居住地가 定해져야 한다. 警護棟 工事 等 警護上의 理由가 있다. 그래서 새해부터 遂行팀과 警護室을 中心으로 私邸 物色에 나섰다.

    “退任 後 삼성동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警護室은 三成洞 復歸를 念頭에 두고 인테리어 工事를 一旦 始作했다. 하지만 아무리 彈劾이 아닌 正常的 退任을 念頭에 둔 인테리어 工事라고 하더라도, 外部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公社는 最大限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進行되고 있었다. 그러던 中 2月 初 大統領이 決心을 세웠다. 

    “退任 後에 삼성동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三成洞 私邸의 內部 工事가 全面 中斷됐다. 三成洞 私邸는 너무 낡았다. 비가 오면 빗물이 줄줄 새는 집이다. 그것만으로 移徙해야 할 理由는 차고 넘쳤다.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해서 들어가려고 했으나, 工事費가 너무 많이 들었다. 大統領이 貸出을 받아서 工事해야 할 판이었다. 또 워낙 大規模 工事여서 工事가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萬若 彈劾된다면, 그때까지 工事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不透明했다. 

    大統領은 며칠 생각해보다가 삼성동에 가지 않을 테니 새로운 居處를 알아보라고 했다. 그게 2月 初다. 大統領이 삼성동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 속뜻에 對해선 여러 가지 解釋이 나왔다. 오래 살았던 三成洞 私邸에 對한 愛着이 클 것 같았는데, 너무나 선뜻 다른 곳으로 移住를 決定했기 때문이다. 大統領은 그렇게 삼성동과 訣別을 準備하고 있었다. 

    遂行팀 一部가 부지런히 새로운 住宅을 찾아다녔다. 빈집이어야 하고, 警護하기에도 좋아야 하기에 서울 市內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서울 近郊에서는 京畿道 河南과 洋酒 等이 候補지였으나, 最終的으로 2月 末쯤 內谷洞 住宅으로 決定됐다. 大統領은 內谷洞 住宅을 寫眞으로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 內谷洞 住宅은 遂行팀이 不動産을 찾아다니다가 偶然히 求한 집이다. 

    內谷洞 住宅 購入에 最終 사인을 하기 前에 三成洞 私邸를 파는 게 먼저였다.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會長이 購入했지만, 當初 동생 박지만 會長이 購入意思를 비쳤다. 大統領이 3月 12日 三成洞 私邸로 들어간 뒤 박지만을 만났을 때다. 그렇지만 結局 私邸는 동생에게 가지 않았고, 不動産을 통해 洪 會長에게 넘겨졌다. 내곡동 집으로 移徙는 4月이 넘어서 이뤄졌다. 정작 主人인 大統領은 英語의 몸이 되어 새집에 들어갈 수 없는 狀態였다.

    官邸 實務者들의 마음苦生

    앞서 1月의 狀況은 더욱 暗澹했다. 參謀들은 最惡의 狀況에 對備해야 했다. 그렇지만 現實的으로는 憲裁에서 大統領 彈劾이 引用되는 狀況을 前提로 向後 對策을 樹立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不敬罪’였기 때문이다. 

    言論은 彈劾을 旣定事實化하고 있었다. 大統領을 가까이에서 모신 實務者들은 ‘이러다가 眞짜 大統領이 彈劾되면 어디로 가시나’ 하고 現實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저 大統領의 安危가 걱정이었다. 

    三成洞 私邸는 修理가 돼 있지 않았고, 새집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狀況이었다. 2月 初 理事를 決定하기 前, 退任 後 住居地에 對한 첫 苦悶은 1月 中旬쯤 具體化됐다. 이때 苦悶은 三成洞 私邸가 受理돼 있지 않으니 臨時로 居處할 空間을 찾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慶北 龜尾와 忠北 沃川이 臨時 居處로 擧論됐다. 實際 遂行팀은 龜尾와 沃川에 踏査를 다녀왔다. 大統領에게 말을 하지 않은 狀態였다. 龜尾는 아버지 故鄕이고, 沃川은 어머니의 故鄕이다. 大統領이 彈劾 以後 便安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곳으로 龜尾와 沃川을 候補地로 떠올린 것이다. 이것은 當時 參謀 몇 名이 大統領에게 말하지 않은 채 非公式的으로 알아본 일이다. 

    大統領에게 追後에 進行 過程을 말씀드렸더니, 地方으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龜尾와 沃川行은 없던 일이 됐다. 急한 마음에 遂行팀들이 大統領 생각과 상관없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그다음 選擇肢는 三成洞밖에 없었다. 이런 迂餘曲折 끝에 警護室은 三成洞 私邸에 對한 工事에 다시 速度를 냈다. 인테리어 業體와 契約하고 工事를 서둘렀다. 

    하지만 憲裁가 宣告日을 3月 初로 急하게 推進하면서 모든 게 꼬였다. 移徙를 간다고 決定했지만, 當場 그러기 어려웠다. 彈劾이 決定되는 最惡의 境遇 삼성동에 一旦 갔다가 다시 移徙를 가야 하는 狀況이었다. 暫時 起居하더라도 私邸 工事를 또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遂行팀은 宣告日 3日 前에 할 수 없이 大統領에게 다시 報告를 하고 彈劾에 對備해 三成洞 私邸 工事를 서둘렀다. 하지만 이마저 如意치 않았다. 靑瓦臺가 彈劾을 豫想하고 工事를 서두른다고 言論에 異常하게 報道될 것을 憂慮해 工事를 미루었다. 記者들은 이미 三成洞에 陣을 치고 있었다. 이게 結局 彈劾 後 靑瓦臺 官邸에서 바로 나오지 못하고, 이틀을 더 머물다 나오게 된 理由가 됐다.

    孤獨했던 官邸 生活 24時

    最初의 獨身 女性 大統領의 官邸 生活은 別로 公開된 게 없다. 최순실 事件으로 搜査 過程에서 官邸 生活이 偶然히 一部 公開됐을 뿐이다. 大統領의 官邸 生活은 말 그대로 孤獨하다. 

    官邸 關係者들에 따르면, 大統領은 午前 5時에서 5時30分 사이에 눈을 뜬다. 大統領은 氣象 後 바로 食事를 하는 便이다. 그리고 라디오를 틀어놓고 아침 時間을 보냈다. 主로 라디오를 통해 프랑스語와 中國語, 英語 等 外國語 工夫를 했다. 

    6時쯤 朝刊新聞이 올라오면, 祕書들이 寢室 入口 琉璃門 앞에 놓아두었다. 寢室 바로 옆 食堂에서 食事를 끝내고 들어가면서 新聞을 갖고 가신다. 新聞을 다 보면 門밖에 내놓는다. 新聞도 必要한 스크랩을 直接 하는 스타일이다. 主로 安保室에서 올라오는 書類 等 主要 書類가 있으면 그 時間帶에 읽었다. 

    通常 8時쯤 美容을 하는데, 美容이 있는 날은 行事가 있는 境遇다. 美容이 없으면 官邸에서 繼續 書類를 본다. 9時쯤부터 執務室 槪念의 書齋로 移動하는 境遇가 많았다. 沒入할 때는 書齋에서 2~3時間 繼續 머물러 있었다. 寢室에 딸린 冊床에서 書類를 보기도 했다. 週末에는 書藝를 하고 冊을 읽는다. 

    저녁食事는 6時에 하는데 食事 後에는 主로 혼자 지냈다. 잠은 늦게 請한다. 일러도 午後 11時 以後에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언젠가 官邸 窓門에 참새가 알을 6個 낳았다. 大統領은 神奇해서 附和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한 番씩 찾아가보았다. 警護官들에게는 “새들이 놀라니 자주 보지 말라”고 當付했다. 그 새는 2年 동안 窓門에 둥지를 틀고 두어 番 孵化했다. 

    大統領은 官邸 周邊 野生花를 좋아했다. 모든 野生花의 이름을 알았다. 官邸에서는 강아지를 키웠는데, 警護室에서 別생각 없이 外製 愛犬用品을 購買하다가 한番은 大統領이 國産 愛犬用品이 없느냐고 말해 再購買韓 적이 있다. 

    大統領은 강아지를 안고 官邸 뜰을 왔다 갔다 하면서 거닐기도 했다. 마치 애기를 안 듯이 안았다. 官邸 祕書들은 大統領이 강아지를 가슴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애잔했다고 말했다. 大統領은 강아지 7마리의 이름을 區分할 수 있을 만큼 愛情을 갖고 있었다. 大統領에게 들어오는 膳物이 있으면 直接 그릇에 담아 警護員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菓子나 초콜릿 等은 恒常 작은 접시에 直接 담아 警護員들에게 주었다. 警護員에게 몇 時에 나간다고 하면 그 時間을 正確히 지킨다. 1, 2分이라도 늦을 거 같으면 뛰어나오는 境遇도 있었다. 過去 大統領의 事例를 보면 警護員이 한두 時間씩 待機하는 境遇가 非一非再했지만, 大統領은 警護員들에게 待機하지 말고 時間 맞춰 나오라고 말했다.

    使命感에 입은 韓服

    2013년 11월 6일 로저 기퍼드 영국 런던시장(왼쪽) 주최 길드홀 만찬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은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2013年 11月 6日 로저 기퍼드 英國 런던市長(왼쪽) 主催 길드홀 晩餐에 앞서 記念寫眞을 찍은 朴槿惠 大統領. [靑瓦臺寫眞記者團]

    大統領이 賂物罪로 拘束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大統領은 오히려 돈에 對해 槪念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다. 돈 管理도 밑에 있는 祕書들에게 맡겼다. 大統領의 賂物罪는 平素 節約 生活과 妙한 對比를 불러일으켰다. 

    曺大煥 民政首席은 그의 著書(남(進), 듬(處), 길(道))에서 大統領의 구두 3켤레 이야기를 꺼냈다. 在職 期間에 口頭 3켤레로 지냈다는 多少 誇張된 內容이지만, 實相에는 符合하는 이야기다. 大統領은 신발도 恒常 中低價 國産 브랜드를 利用했다. 신발의 價格은 10萬 원 안팎이다. 굽이 높은 神도 아니고 便安함을 爲主로 신발을 選擇했다. 大統領은 高價의 좋은 신발을 한番 신어본 적이 없다. 

    衣裳도 有名 디자이너나 高價 브랜드의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外國 巡訪 때 韓服을 즐겨 입지만 韓服이 좋아서가 아니라 韓服을 世界에 알려야 한다는 使命感 때문이었다. 한番은 參謀들에게 “나도 다른 예쁜 옷을 입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韓服이 必要하다면 그걸 입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차이나칼라의 平常服도 마찬가지다. 大統領이 여러 가지를 考慮해 本人 스타일의 옷을 만든 것이다. 그것도 直接 디자인해서 만들었다. 다른 高價의 옷을 사 입기 始作하면,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 사치스러운 삶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大統領의 이런 節約 精神은 元來 有名하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習慣이다. 한番은 高速道路를 지나가다가 街路燈에 불이 켜진 게 눈에 들어왔다. 大統領은 “왜 저기 대낮에 불이 들어와 있나요. 꺼야 되는 것 아닌가요. 한番 確認해보세요”라고 指示했다. 確認해보니 高速道路 管理 센서가 故障 난 것이었다. 곧바로 措置했다고 大統領에게 報告했다. 

    大統領은 메모紙도 노란色 再活用 메모紙만 使用한다. 當選人 身分 때 注文한 種이다. 兩面을 使用하고 裏面紙를 活用하며 ‘동아鉛筆’을 쓴다. 

    한番은 胡떡이 드시고 싶다고 해서 사다드렸다. 모든 飮食은 警護室 檢食觀이 미리 檢査하고 맛도 본다. 그런데 胡떡에 細菌이 너무 많아 大統領에게 傳達하지 못했다. 그렇게 먹고 싶어 했는데 結局 못 드신 것이다. 

    海外 巡訪 때도 大統領의 節約 精神은 發揮됐다. 大統領은 儀典 慣例上 主로 호텔의 스위트룸을 利用한다. 大統領이 가장 重視하는 건 電燈불을 끄는 일이다. 넓은 客室의 모든 電燈을 一一이 끈다. 어느 나라였던가. 인터폰으로 電話해 “스탠드 하나가 안 꺼진다. 좀 꺼달라”고 祕書에게 말했다. 寢室이 아닌 居室 等이어서 굳이 안 꺼도 되는 곳이다. 大統領은 祕書들에게 “房에서 나갈 때 다 끄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海外 巡訪 때 電燈 끄는 일이 周邊 祕書들의 宿題였다. 

    한番은 불을 끄고 나간다는 게 全體 소등을 하고 나왔다. 化粧室 가려는데 불이 안 켜진다고 인터폰이 울렸다. 電燈을 끄고 다니다 보니 어디선가 발을 찧기도 했다. 大統領은 巡訪을 가서도 午前 5時에 칼같이 일어난다. 國內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침食事를 그때 提供하는데, 主로 牛乳, 堅果類, 과일 等으로 아침食事를 했다.

    靑瓦臺 職員들의 트라우마

    彈劾 時期 靑瓦臺에는 祕書室과 安保室을 합쳐 700餘 名의 職員이 勤務했다. 政務職이라고 할 수 있는 祕書室長, 安保室長, 首席祕書官 等 20名 안팎을 除外하면 나머지 祕書官級 以下 職員들은 大部分 職業 公務員이거나 黨에서 派遣된 黨僚, 國會 補佐官 出身, 拔擢된 民間人 等으로 채워졌다. 祕書官級 以下 職員들은 通商 首席의 指示 아래 一般 會社의 位階秩序와 마찬가지 組織의 一員으로서 맡은 바 業務를 遂行했다. 이들 中에는 洪楠基 經濟副總理 等 文在寅 政府에서 連續的으로 登用된 人物들도 一部 있다. 또 一部는 3年이 지난 只今까지도 변변한 職業을 잡지 못한 채 歲月을 보내고 있다. 

    靑瓦臺 職員이라고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大統領을 熱烈히 좋아하는 職員이 있는가 하면, 職業으로서 일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職員도 있다. 

    다만 何必 그 時期, 大韓民國 歷史에서 最初로 大統領 彈劾이 決定된 그 時期에 靑瓦臺에서 勤務한 職員들은 大部分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들이 特別히 잘못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自身들의 삶을 자랑할 수도 없는 處地에 빠졌다. 어깨가 짓눌린 듯한 삶의 苦痛은 一般人이 뭐라 말하기 힘든 特別한 經驗이다. 

    그들 大部分은 알지 못하는 최순실에 對해 어떤 辨明을 해야 하고, 解明을 해야 하는 位置에 있었을 것이다. 또 아무것도 모른 채 政府의 運命을 지켜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大統領이 조금이라도 덜 다치도록 最善을 다하고 싶었지만, 實際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데서 自愧感을 느끼는 職員들도 많았다. 

    적어도 2016年 12月 9日 國會에서 彈劾訴追를 當하기 直前까지 모든 職員이 한마음으로 大統領 安危를 걱정하고, 事件이 圓滿하게 마무리될 수 있기를 바랐다고 본다. 

    國會에서 彈劾訴追로 職務 停止가 된 以後부터 職員들은 가시덤불 속을 헤매는 느낌을 가졌다. 靑瓦臺의 相當數 職員은 憲裁 彈劾 決定이 引用될 것이란 不吉한 豫測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向後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걱정하는 젊은 職員이 많았다. 就職의 門은 이미 닫혔다. 

    特히 彈劾 時期 및 文在寅 政府 以後 朴槿惠 政府 關聯 事件으로 起訴된 人員이 120名을 넘어선다는 記事를 본 적이 있다. 實際로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調査받은 人員은 500名 線을 넘을 것으로 推定된다. 수많은 職員이 숨죽인 채 萎縮돼 한 時期를 살았다. 

    그럼에도 當時 靑瓦臺 勤務를 한 職員 누구도 大統領을 怨望했다는 記事를 본 적은 없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또 歲月의 무게를 견뎌가며 默默히 살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조그만 空間이라도 許諾된다면, 그들을 한番 慰勞하고 싶었다. 當身들은 大統領을 合理的으로 補佐하려고 努力했던, 그렇지만 多少 不運했던 이 時代의 고단한 靑春들이었다고. 바닥까지 經驗한 우리들 삶의 軌跡이 大韓民國의 새로운 未來 싹을 틔우는 데 남들보다는 묵직한 밀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敢히 얘기해주고 싶다.

    2016年 10月의 情勢

    2016년 10월 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2016年 10月 24日 國會 本會議場에서 2017年度 豫算案 施政演說을 하는 朴槿惠 大統領. [靑瓦臺寫眞記者團]

    只今도 2016年의 彈劾 推進이 왜 그리 빠른 速度로 進行됐는지 물어보는 분이 많다. 基本的으로 國會의 判斷이며, 國會는 光化門廣場의 雰圍氣를 두려워했다. 요즘 視角으로 보자면, 大統領 本人의 잘못은 밝혀지지 않은 채 오로지 최순실 잘못만으로 國會에서 彈劾訴追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曺國 法務部 長官의 境遇엔 함께 사는 家族인데도 適用되지 않은 ‘經濟共同體’ 論理가 피붙이도 아닌 최순실에 對해서는 適用되는 일이 벌어졌다. 

    事實 그에 앞서 2016年 10月의 國民 情緖는 朴槿惠 政府에 좋지 않았다. 朴槿惠 政府는 任期 4年次를 마무리해가던 그 時點에 各種 改革政策을 몰아치고 있었다. 마지막 젖 먹던 힘을 發揮하던 時期였고, 一部 國民은 改革에 抵抗하는 흐름을 形成했다. 改革에 對한 疲勞感이 造成돼갔다. 

    于先 2015年 公共改革으로 公務員年金改革이 이뤄지면서 公務員들의 抵抗이 있었다. 世宗市의 雰圍氣가 좋지 않다는 報告가 이어졌다. 勞動改革에 對한 反對 鬪爭 亦是 高調되고 있었다. 公共·金融勞組가 2016年 9月 末부터 成果年俸制 沮止를 위한 릴레이 罷業에 突入하면서 抵抗하고 있었다. 鐵道勞組와 地下鐵勞組 等도 罷業을 豫告하면서 雰圍氣를 極端으로 몰고 갔다. 

    朴槿惠 政府는 그럼에도 2016年 改革 基調를 强化해갔다. 10月은 政府와 反對 勢力 間의 對立이 尖銳化하는 時點이었다. 民主勞總은 10月 1日 勞動者大會와 連繫해 사드(THAAD·高高度미사일防禦體系) 配置 反對 等의 이슈와 結合해 汎國民大會로 끌어갔고, 9月 25日 死亡한 ‘백남기 農民 死亡事件’도 觸媒劑 役割을 했다. 歲月號 關聯 團體들은 9月 30日 特別調査委員會 終了 時限에 맞춰 反政府 鬪爭을 擴散했고, 全敎組(전국교직원노동조합) 等은 歷史敎科書에 反對하는 鬪爭에 나서고 있었다. 歷史敎科書는 11月에 試案이 發表될 豫定이었다. 

    外交·安保 分野에서는 强力한 政策이 2016年에 쏟아졌다. 사드 配置가 7月에 決定됐지만 사드 配置에 따른 地域 住民의 反撥과 反對 示威로 9月 30日 사드 配置 第3敷地 發表가 있었고, 그 餘震이 10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國會에서도 민주당은 사드 配置를 갖고 朴槿惠 政府를 繼續 흔들고 있었다. 北韓이 9月 9日 政權 樹立 記念日에 맞춰 5次 核實驗을 敢行함으로써 國際社會의 追加 制裁 움직임이 可視化하고 있었고, 이에 따른 北韓의 追加 挑發 憂慮가 繼續되는 等 安保的으로도 不安定했다. 

    慰安婦 財團과 關聯한 後續 措置도 이어졌다. 日本은 8月 31日 10億 엔의 治癒金을 傳達했고, 9月부터 慰安婦 할머니들에게 個別的으로 分配했다. 一部 市民團體는 首領 拒否 等을 통해 反對 鬪爭을 벌여갔다. 


    2016년 11월 19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2016年 11月 19日 釜山 書面에서 열린 촛불集會에서 市民들이 朴槿惠 大統領 退陣을 要求하고 있다.

    2016年 10月은 各種 社會的 矛盾이 극대화되던 時點이었고, 示威가 日常化돼 있었다. 各種 示威에 최순실 事件을 갖다 대고 촛불만 붙여대면 촛불示威로 遁甲하는 狀況이었다. 이것이 結局 彈劾에 不利한 情勢를 造成했다. 

    言論들도 不便함을 呼訴했다. 代表的인 게 이른바 ‘金英蘭法’으로 불리는 請託禁止法이다. 2016年 9月 28日 施行과 함께 言論界는 敏感하게 反應했다. 記者들이 金英蘭法 對象이 된 것은 言論社를 根本的으로 不便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다 企業들이 運營하던 記者 海外 硏修 프로그램도 흔들리고 있었다. 論難을 憂慮한 企業들이 프로그램 廢止 움직임을 보였다. 

    言論 廣告 營業에도 打擊이 豫告됐다. 協贊 方式으로 金品을 수수하는 行爲가 金英蘭法 違反일 수 있었다. 言論은 잇달아 政府에 民願을 提起해 請託禁止法의 緩和를 注文하고 있었다. 한국신문협회는 2016年 10月 25日 ‘請託禁止法 關聯 韓國新聞協會의 意見’을 公式的으로 政府에 傳達했다. 新聞協會는 “新聞社의 營業 活動까지 規制하는 것은 法을 過度하게 擴大 類推 解釋한 結果”라며 新聞社의 後援 協贊 制限 및 公共機關, 企業과의 共同企劃記事 制限, 言論人 硏修 禁止 等에 對한 規制를 廢止해줄 것을 要請했다. 

    當時 言論이 미르·K스포츠財團에 對한 疑惑記事를 量産하고 있던 時點인 것을 勘案하면, 朴槿惠 政府는 言論과 二重의 戰線에 맞닥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請託禁止法은 國會에서 民主黨 主導로 發議됐지만, 朴槿惠 政府도 贊成하는 立場이었다. 이런 게 言論을 二重三重으로 不便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江南 左派=僞善과 腐敗’라는 反戰

    김도읍 자유한국당 의원이 9월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뉴시스]

    金度邑 自由韓國黨 議員이 9月 6日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열린 曺國 法務部 長官 候補者 人事聽聞會에서 質疑를 하고 있다. [뉴시스]

    朴槿惠 大統領에 對한 글을 連載하는 5個月 동안 政局이 크게 變했다. 처음 始作한 지난 5月만 해도 政局은 如前히 文在寅 政府 마음대로 하던 時期였다. 積弊淸算이 끝나지도 않았고 歲月號 關聯이나 警察廳 情報局의 政治 介入 疑惑 等이 새롭게 搜査되거나 裁判에 넘겨지는 等 公安 政局이 繼續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連載를 왜 이리 빨리 하느냐고 나에게 忠告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文在寅 政府가 시퍼렇게 칼날을 세우고 있는데, 朴槿惠 政府 이야기를 하면 나도 다치고 周邊 사람들도 다칠 수 있다는 憂慮였다. 

    그런데 5個月이 지난 只今은 雰圍氣의 急反轉이 일어났다. ‘曺國 事態’를 통해 文在寅 政府는 道德性과 正當性에 커다란 구멍을 드러냈다. 촛불로 세워졌다는 文在寅 政府의 道德性이 確認된 것이다. 曺國 事態를 둘러싼 온갖 패러디는 文在寅 政府의 이미지뿐 아니라 朴槿惠 政府의 評判에도 影響을 미치는 일이었다. 

    假令 딸의 入試 問題가 터지니 ‘정유라보다 甚하다’는 輿論이 形成되는 等 曺國 事態와 최순실 事態가 比較되는 狀況에까지 이른 것이다. ‘檀君 以來 最大 非理’라는 최순실 事態보다, 오히려 ‘檀君 以來 最大 爲先行脚’이라는 曺國 事態가 가져다주는 衝擊이 훨씬 크게 膾炙됐다. ‘保守 旣得權=腐敗’라는 陳腐한 圖式보다는 ‘江南 左派=僞善과 腐敗’라는 反轉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特히 文在寅 政府의 失政이 이어질수록 彈劾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생각한다. 曺國 事態를 對하는 文在寅 政府의 一方的인 陣營 論理는 朴槿惠 大統領 彈劾에도 適用됐을 것이며, 많은 사람이 그 같은 一方的 輿論몰이에 影響을 입었을 것이란 合理的 疑心은 充分히 可能하다. 적어도 彈劾이 一方的인 攻擊에 依해 너무 性急하게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생겨난 것은 맞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歷史’를 봐달라는 呼訴

    8월 28일 서울대에서 열린 ‘조국 반대’ 촛불집회. [조영철 기자]

    8月 28日 서울대에서 열린 ‘曺國 反對’ 촛불集會. [조영철 記者]

    네 番째 新東亞 連載와 함께 朴槿惠 大統領의 세월호 事故 當日과 關聯한 未公開 發言이 알려졌을 때부터 이 같은 兆朕은 있었다. 8月 中旬 公開된 “이게 나라냐”고 말한 朴槿惠 大統領의 發言錄은 數萬 名의 댓글과 反應으로 이어졌다. 朴槿惠 時代의 歷史가 如前히 只今의 歷史이기도 하다는 것을 證明하는 契機였다. 또 大衆이 歷史的 眞實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點을 確認한 瞬間이었다. 

    이제는 나에게 이 連載를 왜 이리 빨리 했느냐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왜 이리 늦게 當時의 眞實을 밝혔느냐는 怨望 아닌 怨望을 많이 듣고 있다. 

    曺國 事態는 이 같은 雰圍氣에 기름을 붓고 있다. 大衆은 이제 文在寅 政府라고 해서 특별한 地位를 附與하지 않는다. 朴槿惠 政府에도 功過(功過)가 있듯이 文在寅 政府에도 功過가 있다. 文在寅 政府는 不幸히 이제 공보다 課가 두드러져 보이는 時期로 進入하고 있다. 

    勿論 그렇다고 해서 朴槿惠 政府의 이미지가 바로 上昇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最小限 ‘있는 그대로의 歷史’를 봐달라는 나의 呼訴는 充分한 값어치를 갖게 됐다고 생각한다. 大衆은 있는 그대로의 歷史를 볼 程度의 平靜心을 回復해가는 中이라고 본다. 

    이 글의 讀者는 다양한 反應을 나에게 傳達해주고 있다. 그 中에서 “박근혜 大統領이 參謀들과 그렇게 많은 對話를 나누었다는 事實은 朴 大統領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이었다”는 反應이 많았다. 나는 朴槿惠 大統領이 九重宮闕에서 혼자 생각하고 決定하는 閉鎖的 指導者가 아니라 苦惱하고 苦悶하며 決斷하는 正常的인 指導者임을 밝히고 싶었다. 더구나 彈劾을 當할 程度로 無能하거나 腐敗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一部 表現은 讀者의 期待에 맞지 않았을 수 있다고 본다. 나는 朴槿惠 政府의 參與者로서 最大限 反省하는 마음을 담아서 글을 써왔다. 國民의 마음을 골고루 살피는 데 不足했고, 國民을 실망시킨 點에 對해서는 反省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點에서 朴槿惠 大統領의 無罪를 외치며 3年間 거리에서 鬪爭한 분들의 期待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었던 側面을 理解해주시길 바란다. 아울러 이 글이 眞實과 敎訓이라는 두 가지 目的을 두고 쓰였음을 다시 한番 밝히고 싶다.

    過去를 통해 敎訓을 끌어내지 못하면 歷史 工夫는 完全히 잘못한 것이다. 文在寅 政府는 적어도 過去에서 그 어떤 敎訓도 얻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敎訓은커녕 歷史 自體를 비웃는 傲慢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自愧感을 느끼게 하고 있다. 5月 첫 連載를 始作할 때부터 朴槿惠 大統領의 말 한마디, 行動 하나를 궁금해하면서 긴 글을 읽어준 讀者에게 거듭 感謝드린다.

    천영식
    ● 1965年 慶北 靑松 出生
    ● 大邱 영신고, 서울대 西洋史學科
    ● 한양대 言論情報大學院 碩士
    ● 前 문화일보 政治部 部長 待遇, 워싱턴特派員
    ● 前 弘報企劃祕書官(朴槿惠 政府)
    ● 現 KBS理事, 啓明大 招聘敎授
    ● 著書 ‘孤獨의 리더십’(2013)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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