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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續 밝혀지는 津寬寺 太極旗의 祕密|新東亞

特輯 | 3·1萬歲運動 100周年의 含意

續續 밝혀지는 津寬寺 太極旗의 祕密

90年 만에 드러난 佛敎界 抗日運動

  • 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19-02-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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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깊은 山中 작은 殿閣에 감춰져 있던 獨立運動의 痕跡

    • 日章旗 위에 푸른色 덧漆해 만든 100年 前 太極旗

    • 모진 拷問 속에서도 獨立 意志 꺾지 않은 僧侶 백초월

    • 신상완, 박수남 等 더 記憶할 抗日支社들

    진관사 주지 계호스님이 항일 역사가 담긴 태극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박해윤 기자]

    津寬寺 주지 戒護스님이 抗日 歷史가 담긴 太極旗를 펼쳐 보이고 있다. [박해윤 記者]

    太極旗 왼쪽 上段에 불에 탄 痕跡이 보였다. 군데군데 損傷된 部分도 있었다. 빛바랜 廣木천에선 歲月이 느껴졌다. 그러나 靑紅 太極 紋樣과 4卦에서 如前히 힘찬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서울 恩平區 津寬寺 太極旗를 본 첫印象이다.

    이 太極旗는 2009年 5月 27日 아침, 津寬寺 七星閣 解體·復元 工事 途中 發見됐다. 壁을 뜯던 人夫가 佛壇과 기둥 사이에서 韓紙로 겹겹이 싼 작은 褓퉁이를 發見했다. 풀어보니 낡은 太極旗와 3·1運動 關聯 文件이 들어 있었다. 大體 누가, 언제, 왜 이것들을 寺刹 안에 숨긴 것인지 當時 많은 이가 關心을 가졌다. 지난 10年 사이 무엇이 밝혀졌을까. 3·1運動 100周年을 맞아 이 얘기를 듣고자 津寬寺를 찾았다. 津寬寺 주지 戒護스님은 “이 太極旗에 담긴 事緣을 理解하고 穩全히 保全하는 게 우리의 任務라고 생각해 지난 10年間 最善을 다했다”며 입을 열었다.


    粥온 줄 알앗던 우리 太極旗

    태극기 안에 싸여 있던 일제강점기 신문 자료 발굴 모습. [진관사 제공]

    太極旗 안에 싸여 있던 日帝强占期 新聞 資料 發掘 모습. [津寬寺 提供]

    먼저 太極旗가 처음 世上에 알려진 날 이야기부터 나눴다. 津寬寺 總務 法海스님은 只今도 10年 前 그날을 鮮明히 記憶했다.

    “따뜻한 봄날이었어요. 아침 9時쯤 여기 마루에 앉아 있는데 人夫들이 ‘스님, 七星閣에서 뭐가 나왔어요’ 하며 요만한 뭉치를 갖다주더군요. 七星閣은 1907年 建築돼 當時 많이 낡은 狀態였습니다. 6·25 때 爆擊을 맞은 影響으로 若干 기울어 있기도 했고요. 工事를 始作하며 現場 분들께 ‘歷史的으로 重要한 建物이니까 作業 途中 銅錢 하나가 나와도 꼭 알려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싶어 操心스레 종이를 벗기자 千步自己 같은 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로 언뜻 太極 文樣이 보였다. 法海스님은 그 瞬間 왠지 모르게 가슴이 북받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바로 戒護스님에게 連絡해 여러 스님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시 천천히 꾸러미를 풀어가자 物件의 實體가 모습을 드러냈다.



    ‘太極 文樣 千步自己’처럼 보인 것은 펼치고 보니 불에 타고 군데군데 해진 痕跡이 남아 있는, 가로 89cm 세로 70cm 크기 太極旗였다. 그 안에는 예스러운 종이 印刷物 10餘 部가 고이 접힌 채 들어 있었다. 그中 하나가 ‘獨立新聞’인 걸 確認한 瞬間 스님들 사이에는 작은 歎聲이 일었다. 發行日이 1919年 11月 27日인 新聞 1面에 ‘太極旗’라는 題目의 詩(詩)가 실려 있었다.

    “三角山(三角山)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太極旗)를/네가 보앗나냐 粥온 줄 알앗던/우리 太極旗(太極旗)를 오늘 다시 보앗네/自由(자유)의 바람에 太極旗(太極旗) 날니네/二千萬 同胞(二千萬同胞)야 萬歲(萬歲)를 불러라/다시 산 太極旗(太極旗)를 爲(危)해 萬歲萬歲(萬歲萬歲)/다시 산 大韓國(對韓國).”

    當時 狀況을 이야기하던 法海스님이 갑자기 詩 句節을 줄줄 暗誦했다. 數없이 읽다 보니 저절로 외우게 됐다고 했다. 只今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뛰게 만든다는 이 詩는, 10年 前 그날 아침에도 스님들 心臟을 剛하게 두드렸다. 예사롭지 않은 資料임을 直感한 戒護스님은 卽時 문명대 동국대 名譽敎授에게 連絡했다. 서울市 文化財委員長 等을 지낸 文 敎授는 ‘三角山 津寬寺의 歷史와 文化’ 等을 펴낸 因緣으로 스님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곧바로 달려온 文 敎授가 應急 資料保存 措置를 한 뒤 各界 專門家의 硏究·分析이 始作됐다.

    太極旗 褓따리 속에는 상하이 臨時政府 機關紙 ‘獨立新聞’ 外에도 丹齋 申采浩 先生이 상하이에서 펴낸 新聞 ‘신대한(新大韓)’, 國內에서 發行된 地下新聞 ‘朝鮮獨立新聞’, 이름만 傳해질 뿐 實物은 存在하지 않았던 佛敎界 獨立新聞 ‘自由신종보’ 等 貴한 史料가 가득 들어 있었다. 民族을 배반한 親日派를 峻嚴하게 꾸짖는 警告文도 있었다. 新聞 및 文件 發行 時期는 모두 3·1運動 以後부터 그해 겨울 사이로 確認됐다. 그러나 마치 印刷機에서 갓 찍어낸 듯 보일 程度로 保管 狀態가 좋았다.

    戒護스님은 “日帝 彈壓이 거세던 時節이라 當時 生産된 獨立運動 關聯 資料가 많이 傳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山中 査察 작은 殿閣에서 90年 前 印刷物이 쏟아져 나와 많은 분이 놀라워했다”고 밝혔다. 또 “津寬寺는 6·25 때 大雄殿을 비롯한 建物 大部分이 불에 탔다. 七星閣 等 殿閣 3個만 火魔를 避했는데, 어떻게 이 資料가 七星閣 안에 保管돼 現世에 傳達됐는지 神祕하고 感謝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밝혔다.

    學者들 또한 興奮했다. 김주현 경북대 國文科 敎授는 論文 ‘申采浩의 신대한 發行과 獨立運動’에서 “그前까지 ‘신대한’은 日本外務省 史料館에 1, 17, 18號가 保管돼 있는 게 全部였다”며 “津寬寺에서 2, 3號가 나온 것은 奇跡的인 일”이라고 밝혔다. 法海스님은 “當時 김주용 獨立記念館 硏究委員이 ‘신대한’을 보고 그 앞에서 큰절을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고 했다. 金 硏究委員은 “이 新聞만 갖고도 論文 數十 篇을 쓸 수 있을 만큼 價値 있는 資料”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값진 遺物을 감싸고 있던 太極旗 또한 특별했다. 戒護스님은 “이 太極旗에서 가장 印象的인 點은 日章旗 赤色 部分에 靑色을 덧漆해 太極 文樣을 만들었다는 點”이라며 “獨立 意志를 더욱 굳게 세우려고 굳이 日章旗를 가져다 太極旗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뜻과 氣槪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하다”고 했다.


    日章旗 위에 太極 덧그린 氣槪

    2009년 5월 서울 은평구 진관사 칠성각에서 발견된 ‘신대한’ 지면. ‘독립운동의 제1일’이라는 제목 아래 3·1운동 당시 사진이 게재돼 있다. 원본이 아닌 영인본이다. [동아DB]

    2009年 5月 서울 恩平區 津寬寺 七星閣에서 發見된 ‘신대한’ 지면. ‘獨立運動의 第1日’이라는 題目 아래 3·1運動 當時 寫眞이 揭載돼 있다. 原本이 아닌 影印本이다. [東亞DB]

    專門家들은 이 太極旗가 3·1運動을 전후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判斷한다. 한철호 東國大 歷史敎育科 敎授는 3·1運動 現場에서 使用됐을 可能性도 있다고 봤다. 韓 敎授가 쓴 ‘津寬寺 太極旗의 形態와 그 歷史的 意義’라는 題目의 論文 一部다.

    “太極旗의 건(乾) 部分이 불에 타 있고 다른 部分도 구멍이 생길 程度로 損傷됐다. 또 日章旗에 靑色을 덧漆해서 만들었다. 이에 비춰볼 때 國內에서 製作돼 3·1運動 當時 現場에서 使用되다가 損傷됐을 可能性이 매우 크다.”

    津寬寺 太極旗의 4卦 位置는 現在 太極旗와 多少 다르다. 건(乾)과 곤(坤)은 같은 자리에 있지만, 리(離)와 감(坎)은 서로 바뀌었다. 韓 敎授는 이것이 日帝强占期 大韓民國臨時政府 國務委員會가 制定한 國紀 樣式에 따른 4卦 位置라고 說明했다. 이에 비춰보면 津寬寺 太極旗가 臨時政府 或은 그 關聯 團體 等에서 製作, 使用하던 것으로, 獨立新聞 等과 함께 國內에 傳해졌을 可能性도 排除할 수 없다. 韓 敎授는 “津寬寺 太極旗의 製作 目的 等에 對해서는 좀 더 硏究가 必要하다. 그러나 1919年 무렵 만들어진 太極旗 中 現存하는 것이 몇 點 안 되는 點을 考慮하면, 이 太極旗는 그 自體만으로 歷史的 價値가 매우 크다”고 强調했다.

    그렇다면 大體 누가 當時엔 求하기도 힘들었을 ‘危險 文件’을 한데 모으고, 抗日의 念願을 담은 太極旗에 꽁꽁 싸매 津寬寺 七星閣에 감춘 걸까. 寺刹에서 發見된 資料 價値가 높은 것으로 評價될수록, 이 祕密을 풀기 위한 스님들의 苦悶도 깊어졌다. 法海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日帝强占期에 상하이에서 發行된 獨立新聞, 신대한 等을 求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그것도 여러 사람 손에 손을 거쳐 傳達된 손때 묻은 新聞이 아니라 막 印刷機에서 뽑아낸 듯 정갈한 첫 新聞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獨立運動家 中에서도 매우 影響力 있는 사람이었을 可能性이 높죠.”

    그 사람은 佛敎界 事情에도 밝았을 게 분명했다. 깊은 山中에 있는 津寬寺는 日帝强占期 一般人이 쉽게 찾기 어려운 場所였다. 七星閣은 그 안에서도 人跡이 드문 곳에 있는 작은 殿閣이다. 바로 그 場所를 擇해 佛壇과 기둥 사이 壁을 뜯어내고 資料를 숨긴 이는 津寬寺를 훤히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法海스님은 “査察 塡刻에는 元來 塗褙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津寬寺 안에서도 七星閣 壁에만 塗褙가 돼 있었다. 太極旗가 나온 뒤 그 事實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누군가 七星閣 壁을 뜯어 太極旗를 保管한 뒤 그 痕跡을 감추고자 塗褙紙를 붙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런 措置까지 할 수 있으려면 津寬寺 안에서도 影響力 있는 스님일 確率이 높았다. 問題는 日帝强占期 津寬寺 僧侶 가운데 獨立運動家로 널리 알려진 人物이 없었다는 點이다. 戒護스님은 “津寬寺는 1011年 創建된 由緖 깊은 절이다. 歷史的으로 많은 內容이 整理돼 있지만 當時까지 抗日運動 關聯 事項은 傳해진 게 없었다”고 밝혔다.

    戒護스님이 이 疑問을 풀고자 도움을 請한 사람은 佛敎界 抗日運動社 專門家인 김광식 東國大 敎授였다. 金 敎授는 3·1運動 當時 民族代表 33人으로 參與한 韓龍雲 스님, 白龍城 스님 等에 對해 硏究해온 關聯 分野 權威者였다. 그는 津寬寺 連絡을 받고 곧장 超越스님(1878~1944)을 言及했다. “韓龍雲·백용성 스님이 3·1運動 餘波로 西大門刑務所에 拘禁된 以後 超越스님이 佛敎界 獨立運動을 陣頭指揮했다. 그분이 1920~1930年代 津寬寺에 머물렀으니, 萬若 누군가 津寬寺에 獨立運動 關聯 資料를 숨겼다면, 그 主人公은 超越스님일 것”이라고 알렸다.


    歷史에 묻힌 이름, 超越스님

    알고 보니 超月스님은 日帝强占期 獨立運動 嫌疑로 數次例 獄苦를 치른 抗日支社였다. 1891年 智異山 靈源寺로 出嫁했고, 3·1運動 直後 上京해 津寬寺 等을 根據地로 抗日運動을 펼친 記錄이 있었다. 獨立軍을 위한 軍資金 募集에 앞장서다 淸州矯導所에서 1944年 殉國했다. 金 敎授가 이 內容 等에 對해 關聯 史料를 追跡, 硏究하고 있었으나 그 內容이 佛敎界 內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狀態였다.

    스님들은 超越스님의 行跡과 津寬寺 太極旗 사이의 關聯性을 알아내고자 金 敎授와 함께 나서기로 했다. 2009年 8月의 일이다. 超越스님이 世上을 떠나고 60餘 年이 흐른 뒤였지만, 生前의 그를 記憶하는 이가 아직 남아 있었다. 法海스님은 “幼年期를 津寬寺에서 보낸 老스님이 계셨다. 金棒스님이라고, 1919年 태어나 어린 時節 津寬寺로 出嫁한 분이다. 그분께 連絡드리니 바로 ‘超越스님을 잘 안다’며 반가워하셨다. 津寬寺에서 獨立運動 關聯 資料가 發見됐다는 말씀을 듣고도 ‘超越스님이 숨氣新 게 틀림없다’고 하시더라”고 傳했다.

    戒護스님, 法海스님은 곧장 金 敎授 等과 함께 金棒스님이 몸담고 있던 京畿 南楊州市 범륜사를 찾았다. 津寬寺에서 나온 太極旗 寫眞을 額子에 담아 들고 갔다. 太極旗를 보자마자 金棒스님은 북받치는 感情을 추스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세 番 절을 올렸다고 한다.

    “金棒스님 記憶 속에 ‘抗日運動家 백초월’에 對한 記憶이 鮮明히 남아 있었던 거죠. 그분이 拷問後遺症으로 苦生하시던 것, 日帝 監視를 避하려고 미친 사람처럼 行動하던 것, 그러면서도 獨立에 對한 意志를 북돋우는 말씀을 하시던 것 等에 對해 이야기해주셨어요. 하루는 超越스님과 함께 津寬寺 境內를 걷는데 超越스님이 大雄殿 뒤 北韓産(三角山) 鷹峯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대요. ‘三角山이 朝鮮이면 倭놈은 달걀이야. 달걀로 三角山을 아무리 쳐도 三角山은 끄떡없지’라고요. 그 懇切한 마음으로 숨겨두신 太極旗를 우리가 이제야 찾았다며, 金棒스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津寬寺 스님들은 이런 證言을 採錄하며 超越스님의 行跡을 整理하기 始作했다. 金 敎授가 蓄積해온 資料를 바탕으로 超越스님의 抗日精神을 世上에 알리려는 努力도 竝行했다. 많은 사람이 알지 못했을 뿐, 日帝强占期 祕密搜査記錄 等 飼料 곳곳에 超越스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金 敎授가 찾아낸 1919年 12月 5日子 一齊 文書 ‘獨立運動資金募集者 檢擧의 건’ 內容은 이렇다.

    “백초월은 僧侶로 있는 몸임에도 恒常 不穩思想을 품고 國權回復을 夢想하여 慇懃히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던 中 今年 봄 所要勃發한 以來 (中略) 今年 4月 京城에 들어와 市內 各處에 숨어 있으면서 于先 不穩文書를 刊行하여 人心을 攪亂시킬 計劃으로 韓國民團本部라는 團體를 京城 中央學林 內에 設置하여 스스로 民團 部長이 되어 資金과 部員 募集에 奔走(後略).”

    超越스님이 3·1運動 直後부터 日帝가 監視하는 抗日運動家였음을 보여주는 資料다.


    天才스님의 抗日運動

    일제 형무소에 수감될 당시 백초월 스님. [진관사 제공]

    一齊 刑務所에 收監될 當時 백초월 스님. [津寬寺 提供]

    佛敎界 記錄에 따르면 超月스님은 不過 28歲 때인 1903年, 靈源寺 祖室(祖室·査察 最高 어른) 자리에 오를 만큼 일찍부터 頭角을 나타낸 僧侶였다. 1915年 佛敎界 高等敎育機關 中央學林(동국대 前身)李 門을 열자 招待 講師로 內定될 만큼 學識이 높았다. 그러나 1919年 3·1運動 以後 山門을 나와 抗日獨立 活動에 積極的으로 뛰어든다. 一齊 記錄에는 그가 “3·1運動이 勃發했는데도 佛敎界 獨立運動이 微弱한 事實을 慨歎했다”는 內容이 있다. 한용운·백용성 스님이 西大門刑務所에 逮捕돼 있는 狀態에서 學識과 德望을 두루 갖춘 超月스님은 곧 佛敎界 獨立運動의 核心 人物이 된 것으로 보인다. 特히 그는 軍資金 募金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每日申報’ 1919年 11月 5日子 記事 中 超越스님에 對한 內容이다.

    “本年 4月 中에 서울에 와서 市內 各地를 다니며 宿泊을 하고 革新公報라는 不穩文書를 發行하고 또 傷害 家政婦와 OOO獨立軍에 靑年을 보내 獨立運動을 한다 하고 義捐金이라고 多額의 金錢을 募集하고 (中略) 10月 22日 本情 警察署에서 잡아 取調中인데 同人(同人, 超越스님)은 運動費로 베개 속에 五百 원을 감추어 두었더라.”

    1920年 5月 5日 逮捕된 또 다른 抗日 僧侶 신상완에 對한 一齊 諜報 文件에도 超越스님 活動相이 記錄돼 있다.

    “신상완은 백초월로부터 1919年 7月頃 2000원을 받아 上海 臨時政府에 傳達했다. 그리고 同年 8月, 서울로 歸國하여서도 백초월에게 運動 資金 300원을 引受했다.”

    專門家들은 超越스님이 이처럼 海外 獨立運動 勢力과 交流했다는 點에 비춰볼 때, 津寬寺에서 發見된 獨立新聞 신대한 等 3·1運動 關聯 資料는 그에게서 由來한 것일 蓋然性이 높다고 分析한다. 戒護스님은 “當時 津寬寺는 麻布에 布敎堂을 두고 있었다. 이곳은 麻布나루 가까이라 國內外 移動이 便하던 곳으로, 超越스님은 三角山 津寬寺와 麻浦 津寬寺 布敎堂을 오가며 獨立運動을 했다고 한다. 僧侶 身分을 活用해 法會 等으로 假裝한 軍資金 募金 行事를 열고, 靑年 佛子들을 臨時政府와 滿洲 獨立軍 等에 派遣한 記錄도 남아 있다”고 밝혔다.

    結局 超月스님은 1919年 12月 日帝에 逮捕돼 모진 拷問을 받는다. 以後 그의 行跡은 日本에서 發見된다. 3·1運動 1周年을 맞아 日本에서 萬歲示威를 組織하려다 도쿄에서 붙들려 1920年 3月 9日 國內 押送됐다는 記錄이다. 超月스님은 그로부터 채 두 달이 지나기 前, 또 한 番 獨立運動 嫌疑로 日帝에 檢擧된 것으로 밝혀졌다. 金 敎授는 “超越스님이 津寬寺에 太極旗와 獨立新聞 等을 감춘 것은 바로 이 무렵, 抗日 活動과 逮捕가 反復되던 緊迫한 狀況에서였을 것”이라고 豫想한다. 그가 쓴 글 ‘백초월, 그는 누구인가’의 關聯 대목이다.

    “津寬寺에서 發見된 多數의 資料는 백초월이 3·1運動 1周年 記念으로 日本에 가서 獨立運動을 展開하기 위해 國內를 떠나던 1920年 2月 末頃에 脾臟(秘藏)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초월이 日本에서 逮捕되어 國內로 押送된 1920年 3月 9日 直後나 再逮捕된 5月 6日 直後, 백초월이 日帝에 逮捕된 事實을 알게 된 津寬寺 僧侶가 緊迫한 瞬間에 숨겼을 可能性도 排除할 수는 없다.”

    짧은 期間 안에 反復된 逮捕와 拘禁은 超越스님의 몸과 마음에 深刻한 後遺症을 남겼다. 金 敎授는 “以後 한동안 超越스님에 對해 ‘半病身이 됐다’ ‘미치광이가 됐다’는 口傳이 있다”고 밝혔다. 이 時節 超越스님이 日帝 監視를 避하고자 일부러 미친 사람 行世를 했다는 意見도 있다. 그가 以後 佛敎界 姜栢(講伯)으로 名聲을 얻은 것을 봐도 그 內幕을 斟酌할 수 있다. 1935年 3月 ‘佛敎時報’에는 이런 記事가 실려 있다.

    “京畿道 高陽郡 연희면 奉元寺에서는 今春(今春)부터 講堂을 여러서 (中略) 백초월 禪師를 招聘하야 講師로 就任케 하얏다더라.”

    이 時節 奉元寺에서 超越스님 講義를 들었던 송암스님은 1999年 ‘現代佛敎’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回顧했다.

    “當時 佛敎 3代 講師의 한 분으로 훌륭한 분이었어요. (中略) 超越스님 머리에는 日本 警察에게 電氣찜질을 當해 생긴 큰 欠 자국이 있었어요. 拷問後遺症으로 늘 머리가 아파 두 손이 머리에 올라가 있고 여름에는 모기가 새카맣게 붙어도 그걸 느끼지 못해요. 그런데 工夫는 아주 잘 가르쳤고 머리가 非常하게 좋았어요. 스님에게 署長까지 배웠는데 내가 막히면 當身이 줄줄 외우며 說明해주셨지요.”


    “잊힌 抗日支社의 魂 記憶해야”

    超月스님은 한동안 이처럼 全國 各地 寺刹에서 講義를 이어가며 日帝 監視網을 避했다. 僧侶들을 中心으로 祕密結社 ‘一心會(一心會)’를 組織해 꾸준히 抗日 活動을 펼쳤지만, 檢擧되지 않았다. 그가 다시 逮捕된 건 1939年의 일이다. 金 敎授가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데이터베이스에 公開된 ‘一齊京城地方法院 編綴資料’ 中 1940年 5月 4日子 公文을 分析한 內容이다.

    “朝鮮獨立을 目的으로 한 일心巧 檢擧에 關한 건/ 백초월을 비롯한 일심회는 지나事變(中日戰爭) 勃發을 보면서 龍山驛에서 多數의 軍用列車가 準備되고 朝鮮人 特別志願兵이 出征할 것을 豫想, 朝鮮運送株式會社 龍山營業所 臨時 人夫로 就業 中인 박수남에게 密命을 내려 桐(同) 軍用列車 內에 白墨으로 ‘朝鮮獨立萬歲’ 等의 不穩落書를 쓰게 했다.”

    1939年 10月 超月스님은 박수남과 함께 日帝에 붙들렸다. 70名 以上이 檢擧된 大型 時局事件이었다. 愛國同志會가 1956年 刊行한 ‘韓國獨立社’에도 이 事件 內容이 記錄돼 있다.

    “禪僧(禪僧) 백초월은 3·1運動 後 臨時政府를 위하여 金品을 募集하다가 倭敵(倭敵)에 가진 拷問을 當하여 反光(半狂) 狀態의 廢人이 되어 京城 麻布의 어느 布敎堂에 있었다. 그 敎堂의 門間房을 빌어 있는 박수남이 (中略) 4272年 己卯(己卯, 1939年)에 奉天行 貨物車에 大韓獨立萬歲라는 落書를 하였던 것이 發覺되어 收金(囚禁)되었는데 그 愛國思想이 백초월에게서 監修(感受)되었다는 嫌疑로 拘禁되어 많은 惡刑을 받았다.”

    이로 因해 收監生活을 한 뒤 1943年 풀려난 超月스님은 臨時政府에 軍資金을 보내다 다시 逮捕, 이듬해 6月 淸州刑務所에서 눈을 감았다. 法海스님은 “超越스님의 行跡을 좇아 淸州矯導所에 간 일이 있다. 스님은 그곳 共同墓地에 埋葬됐다가 어딘가로 里長됐다고 하는데 只今은 그 痕跡을 찾을 수 없다. 빈터에 香을 피우고 절을 올리면서 ‘이제야 왔습니다’ 하고 人事를 드렸다. 津寬寺 太極旗가 發見되지 않았다면 嚴酷한 時節, 나라를 求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熾烈하게 살았던 스님을 永永 모르고 지냈겠구나 생각하니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고 傳했다.

    여러 硏究에도 超越스님 또는 다른 누군가가 津寬寺에 太極旗를 숨겼음을 보여주는 直接 證據는 發見되지 않았다. 當時 狀況에 비춰볼 때 앞으로도 永永 드러나지 않을 可能性이 크다. 그러나 津寬寺 太極旗 德分에 超越스님의 抗日運動이 뒤늦게 再照明됐고, 金 敎授는 2014年 超越스님에 對한 硏究를 集大成한 冊 ‘백초월’을 펴냈다. 超月스님은 그해 6月 殉國 70年 만에 ‘이달의 獨立運動家’로 選定됐다. 신상완, 박수남 等 그間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獨立運動家의 이름 또한 늦게나마 大衆에게 알려졌다. 戒護스님은 “그럼에도 如前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抗日知事가 더 많을 것”이라며 “津寬寺 太極旗가 90年의 歲月을 넘어 우리 곁에 온 건 그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太極旗에 담긴 精神을 記憶하며 後代에 傳할 수 있도록 애쓰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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