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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門은 있되, 牌거리는 없다|신동아

名門은 있되, 牌거리는 없다

外國의 學閥文化

  • 紅暈 < 연세대="" 교수(경제학·학벌없는사회="" 대표)=""> hoonhong@base.yonsei.ac.kr

    入力 2004-11-08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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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學 序列이 軍(群)으로 이루어진 美國, 모든 大學이 平準化된 獨逸, 名門大學 卒業生들에게 嚴格한 社會的 責任을 要求하는 프랑스, 大學入試의 多樣性을 追求하는 日本…. 先進國의 大學政策은, 數十年째 大學을 한줄로 세우고 있는 韓國이 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모델일 것이다.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敎育의 水準과 質은 社會 構成員에게 權力과 經濟力을 差等的으로 附與하는 것이 事實이다. 하지만 韓國에서 나타나는 徹底한 大學 序列과 이에 根據한 學閥의 形成, 그리고 學閥에 依한 身分決定 等은 先進國에서 그 類例를 찾을 수 없다. 具體的으로 다음과 같은 點에서 우리의 現實은 특수하다.

    첫째, 韓國의 學閥은 各 構成員에게 너무나도 큰 賞罰의 差異를 낳는다. 學閥은 權力 돈 名譽, 그리고 婚姻 等에서 選擇의 範圍를 決定함으로써 身分의 差異를 낳는다. 이에 비해 外國의 大學敎育은 權力과 돈에 서 若干의 差等을 가져올 뿐이며, 韓國社會처럼 個人의 身分을 決定하거나 個人의 自矜心을 剝奪하는 水準으로까지 그 影響力이 커지지 않는다. 더구나 韓國에서는 卒業張 自體가 重要한데 비해 外國에서는 專攻과 關聯된 知識과 技術이 意味를 갖는다.

    둘째, 韓國에서는 20代 初에 決定된 差異를 나중에 뒤집는 것이 거의 不可能하다. 入試를 거쳐 特定 大學의 構成員이 되고, 이를 통해 一生 동안 享有할 수 있는 特權이 決定되면, 이것이 社會에서 個人의 能力이나 實績을 壓倒해 버린다. 反面 先進國 大學生들은 大學 在學中이나 社會에 進出한 뒤에도 自己가 努力한 結果에 따라 大學入學 當時의 評價를 逆轉시킬 수 있다. 外國에서의 大學 入學은 우리와 같이 熾烈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은 一生을 두고 거쳐야 할 여러 次例의 競爭 中 하나에 不過하다.

    셋째, 韓國의 學閥은 集團의 次元에서 作動한다. 地緣이나 血緣과 마찬가지로 學緣이나 學閥은 牌거리를 이루어 公的인 領域에서 서로 밀어주고 밀어내는 方式으로 作用한다. 外國의 境遇 學歷이 個人 次元에서 權力이나 돈의 分配에 어느 程度 影響을 끼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學閥로 이어져서 公的인 問題를 解決하는 重要한 手段으로 作用하지는 않는다. 學閥에 關한 韓國과 先進國의 差異를 좀더 具體的으로 살펴보자.

    美國 大學에는 우리처럼 촘촘한 序列이 없다. 다만 上位圈 中位圈 下位圈 等 몇 個의 덩어리로 나뉘어 이들 사이에 느슨한 序列이 存在할 뿐이다. 假令 하버드나 예일과 같은 아이비리그 大學들은 人文社會科學 分野에서 上位圈이다. 各 大學은 大學軍 內에서 或은 大學軍끼리 熾烈하게 競爭하며 이 過程에 大學의 專攻別 順位가 隨時로 뒤바뀐다. 美國 新聞이나 雜誌에 發表되는 順位는 바로 이런 競爭을 反映하는 것이다.



    美國 大學들은 募金을 통해 敎授의 水準과 施設을 向上시켜, 더욱 優秀한 敎育을 提供하는 方式으로 競爭한다. 그리고 좋은 敎育을 받은 學生들이 職場에서 뛰어난 實績을 거둠으로써 最終的으로 그 大學에 對한 評價가 올라간다. 좁게 보면 훌륭한 敎授를 얼마나 幼稚하느냐가 特定 學校에 對한 評價를 決定하며, 넓게 보면 敎育이 社會의 要求에 어느 程度 副應하느냐에 따라 大學의 順位가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大學 卒業生들은 卒業狀이 아니라 大學에서 익힌 知識을 가지고 社會現場에서 훌륭한 實績을 올림으로써 더 많은 權力과 富를 獲得한다. 美國 高等學生들에게 좋은 大學에 간다는 것은 좋은 敎育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좋은 敎育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卒業狀이 빛나는 것이다. 韓國의 名門大 卒業狀이 相對的으로 높은 入試成跡을 反映한다는 點에서 큰 差異가 아닐 수 없다.

    韓國 學生들이 高等學校 때까지 熱心히 工夫하다가 大學에서는 適當히 學點을 따는 데 비해 先進國 大學生들은 上級學校로 올라갈수록 더 熱心히 工夫한다. 그것은 先進國에서는 大學 卒業狀이 絶對的 基準으로 作用하지 않기 때문이다. 美國社會에서 卒業狀이 重要하지 않다는 것은 辯護士나 會計士 試驗이 韓國에 비해 쉽다는 事實에서도 알 수 있다. 美國에서 辯護士나 會計士는 어려운 資格試驗에 合格함으로써 名聲을 얻는 게 아니라, 市場競爭을 통해 實績을 올림으로써 評價받는다.

    美國에서는 特定 大學이 모든 專攻에서 일정한 序列을 維持하는 境遇를 찾아볼 수 없다. 어떤 大學이 經濟學에서 優位라면, 다른 大學은 政治學에서 앞서간다. 어떤 大學이 人文社會 部門에 重點을 둔다면, 다른 大學은 工學에 置重한다. 적어도 人文社會科學의 境遇 大學마다 나름대로의 學派 或은 學風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大學들이 이것을 자랑스런 傳統으로 여긴다. 經濟學을 例로 들자면 東部의 私立大學들은 政府介入을 어느 程度 許容하는 立場이고, 中部의 시카고大學 等은 徹底한 自由放任主義를 固守하고 있다.

    美國의 大學順位가 專攻別로 다르고 各 大學이 나름대로 傳統을 維持하는 것은 特定 綜合大學에 對한 評價가 ‘下向式으로’ 附與되는 것이 아니라, 敎授 專攻 單科大學에 對한 評價가 쌓여서 ‘上向式으로’ 形成된다는 것을 뜻한다.

    美國留學을 準備하는 韓國 學生들은 美國에 大學序列이 없다는 것을 알고 苦悶하는 境遇가 적지 않다. 아마도 올림픽에서 메달의 數字로 順位 매기기를 좋아하는 點에서 드러나듯이, 韓國人들은 日常生活에서 徹底한 序列에 잘 길들여져 있다.

    美國 大學들은 新入生을 뽑을 때 획일화된 入試點數에 依存하지 않는다. 美國도 우리나라의 修能成跡과 비슷한 SAT 點數를 基本으로 하지만, 여기에 絶對的으로 매달리지 않고, 適性이나 中·高等學校 課外活動 等을 勘案해 學生의 潛在力을 綜合的으로 判斷한다. 美國 高等學生들에게 要求되는 것은 퀴즈大會 스타일의 癌機用 知識이 아니라, 健全하게 思考할 수 있는 能力과 專攻學習에 必要한 基礎知識이다.

    美國의 大學서열은 느슨하지만 競爭은 熾烈하다. 또한 序列은 新入生 評價에 依存하지 않으며, 評價 自體도 SAT에 戀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美國 高校生들에게 入試成跡이란 明確하게 存在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韓國처럼 切迫한 것도 아니다.

    美國의 序列은 모든 大學들을 빠짐없이 줄 세우는 方式이 아니며, 그것이 隨時로 뒤바뀔 수 있다는 點에서 韓國과 다르다. 韓國의 大學序列, 特히 上位圈 大學의 序列은 지난 數十 年間 거의 變한 적이 없다. 韓國에서는 各 大學의 社會的 名聲, 敎授들에 對한 評價, 卒業生들의 社會進出 等이 모두 大學入學 當時 新入生들의 成跡에 따라 決定된다.

    美國에서는 有名敎授가 無名大學으로 자리를 옮길 境遇 無名大學이 有名해진다면, 韓國에서는 有名敎授가 無名大學으로 옮기면 有名敎授의 이름이 사라질 뿐이다. 이것은 美國에서 敎授나 學生이 學校를 옮겨다니는 일이 자연스러운데 비해 韓國에서는 異例的이라는 事實과 直結되어 있다. 또한 韓國에서는 어떤 有名大學이 아무런 傳統이 없었던 專攻을 新設하는 境遇, 그 專攻은 大學의 名望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그래서 그때까지 權威를 누려온 다른 中位圈 大學을 挫折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韓國 社會에서 낮은 順位에서 벗어나기 위한 敎授나 學生들의 努力은 열매를 맺기가 어려운 것이다.

    美國의 境遇 大學入學은 一生을 통해 거쳐야 할 여러 競爭 中 하나에 不過하다. 이에 비해 韓國의 入試競爭은 以後의 모든 競爭을 排除하고 安定된 特權을 얻기 위한 單 한 番의 必死的인 싸움이다. 따라서 競爭을 金科玉條로 여기는 사람들도 視野를 조금 넓힌다면 이 땅의 學閥問題를 決코 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韓國에서는 上位圈 大學이 모든 專攻에서 同一한 序列을 지키고 있다. 哲學에서 1위이면, 工學이나 音樂 美術에서도 1位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固着化된 序列은 學生들의 入學點數로 決定된다. 아마도 美國 大學生들이 우리처럼 修能成跡에 따라 劃一化된 等級이나 等數를 강요받는다면 이를 斷乎하게 拒否할 것이다. 더구나 한番 定해진 順位가 社會에 進出한 後 權力과 돈 그리고 身分上의 差異를 가져온다면 氣가 막혀 할 것이다.

    이것은 韓國에서 下位圈 大學 學生들이 編入試驗을 통해 大學을 옮기는 境遇 大部分 同一 專攻을 選擇한다는 事實에서도 確認된다. 假令 下位圈 大學에서 이미 經營學을 專攻한 學生이 上位圈 大學의 經營學科로 編入하는 境遇가 많다. 이른바 ‘學歷洗濯’이다. 이런 學生들은 上位圈 大學의 學生이 4年 동안에 끝내는 過程을 6年에 걸쳐 履修하는 것이다. 美國 大學에서는 이런 일을 想像할 수 없다. 이것은 一流大學에서 秤量 平均 2.0을 받은 學生이 下位圈 大學에서 4.0을 받은 學生보다 높게 評價되는 現實과 無關하지 않다.

    結局 美國과 比較할 때 韓國의 競爭은 制限되어 있고 歪曲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敎授들의 學問的 競爭, 學生들의 在學中 努力을 모두 修能點數로 代替하고 있으며, 이렇게 決定된 大學序列이 勞動市場에서의 競爭마저 삼켜버린 畸形的인 모습이 우리의 現實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大學入試가 마치 眞正한 意味의 競爭인 것처럼 錯覺하고 있다.

    獨逸 大學들은 平準化되어 있어 우리와 對照的이며, 序列이 느슨한 美國과도 差異가 있다. 獨逸 高校生들은 內申成跡과 아비투어(Abitur) 成績으로 大學進學 資格을 얻는다. 아비투어는 주어진 指紋을 나름대로 解釋해 論述 形態의 글을 쓰는 卒業試驗으로 科目當 3~4時間이 걸린다. 大學이 平準化되어 있으므로 一旦 進學 資格을 얻은 學生들은 大學이나 專攻을 選擇할 때 競爭할 必要가 없다.

    獨逸의 經濟와 社會體制가 그렇듯이 敎育制度도 效率性보다는 相對的으로 平等을 强調한다. 그러나 美國 大學과 마찬가지로 獨逸 大學들도 大學別로 어떤 專攻이 剛하다든지, 어떤 學派나 學風을 가지고 있다든지 하는 特性을 維持한다. 假令 마인츠大學은 칸트(I. Kant) 哲學 硏究에 重點을 두며, 브레멘大學은 經濟學에서 더 폭넓은 視角을 堅持하고 있다. 獨逸에서는 出身 大學보다 어떤 敎授 밑에서 工夫했냐가 重要하다. 美國처럼 敎授-專攻-單科大學으로의 上向的인 評價가 그대로 適用되는 것이다.

    獨逸에는 大學 序列이 없으므로 特定 大學을 卒業했다고 해서 特權을 附與받지 않는다. 하지만 美國처럼 個別 敎授의 硏究와 學生의 知識習得 程度에 對한 評價는 徹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獨逸에서도 卒業狀은 重要하지 않으며, 學問的 目的 以外의 派閥은 形成되지 않는다. 다만 特定 大學 卒業生들 사이의 因緣은 敦篤한 便인데, 그것도 學窓時節을 함께 보냈다는 私的인 關係로 끝난다.

    獨逸에서 哲學을 工夫한 K博士는 “大學이 平準化되어 있기 때문에 獨逸 學生들은 自身의 學問的 關心에 따라 이 大學 저 大學을 옮겨다니면서 知識을 얻는다. 그러므로 學問的 競爭은 綜合大學이 아니라 個人의 次元에서 意味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런 風土이기 때문에 獨逸이 자랑하는 하버마스(J. Habermas) 같은 大學者가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獨逸 事例에서 綜合大學 次元의 競爭이 없어도, 敎授나 學生끼리 얼마든지 競爭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卽 大學이 平準化되면 敎授나 學生의 實力이 떨어질 거라는 一部 韓國 知識人들의 목소리는 杞憂인 셈이다.

    프랑스에는 大學水準의 敎育機關이 一般大學과 高等專門大學(그랑제콜, Grands e´coles)으로 二元化되어 있다. 大學에 들어가려면 大學進學 資格試驗인 ‘바칼로레아(baccalaure´at)’에 通過해야 한다. 이 試驗은 우리의 修能試驗과 달리 注入式 敎育으로는 到底히 堪當할 수 없을 만큼 水準이 높다. 그렇지만 高校 卒業者 中 優秀한 學生들은 一般大學으로 進學하지 않고 豫備學校에서 準備한 다음 高等專門大學에 入學한다.

    그랑제콜은 高等師範學校, 高等行政學校, 高等土木學校 等으로 構成되어 敎育·行政·土木 等 社會 各 部門에서 指導者로 成長할 엘리트를 養成한다. 다만 敎授가 되기 위해서는 그랑제콜 出身이라도 一般大學을 거쳐야 한다. 一般大學과 그랑제콜 出身 사이에는 거의 競爭이 存在하지 않으며, 主로 各 部類 內에서 競爭한다.

    結局 프랑스 大學體制에는 2部類의 單純한 序列이 存在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韓國 大學처럼 詳細한 序列은 아니지만, 序列이 存在하는 것만큼은 분명한 事實이다. 또한 그런 序列이 韓國에서처럼 20代에 決定되며, 그 以後에 크게 變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序列이 프랑스 社會에서 各 構成員들의 自矜心을 損傷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그랑제콜 出身 엘리트들이 單純히 特權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同時에 엄청난 社會的 義務를 짊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프랑스 엘리트를 움직이는 것이다. 實際로 프랑스에서 佛文學을 工夫한 H敎授는 “그랑제콜 出身이 하나의 커다란 集團을 이루어 權力과 돈을 나누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랑제콜에서는 社會 各 分野에 必要한 엘리트를 敎育하기 때문에 이들이 同質性을 갖기도 힘들다. 例를 들어 高等師範學校와 高等行政學校가 뭉쳐 集團의 利益을 追求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大學 序列은 韓國의 ‘學閥’과 質的으로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個人的 次元에서 提起되는 ‘學歷’ 問題로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自身의 能力과 努力에 依存해 社會的 地位에 合當한 權利와 義務를 附與받는다. 프랑스 境遇에 비추어 國民의 稅金으로 維持되는 우리의 國立大學校 卒業生들이 어떤 姿勢로 살아야 할 것인지도 한番쯤 따져봐야 할 것이다.

    英國에서는 傳統的으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가장 優秀하며 두 大學에 入學하기는 대단히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廣告文句에는 ‘入學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競爭을 거쳐야 하지만, 一旦 入學하고 나면 훌륭한 敎育에 感謝하게 될 것’이라고 나와 있다.

    어떤 面에서 英國 大學들이 韓國 大學들과 비슷한 序列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確然히 先頭에 있는 大學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이 두 大學에 이어 다음 順位가 줄줄이 定해져 있지 않다는 點에서 韓國보다는 느슨하다. 또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多數의 專攻에서 優秀하다지만 모든 專攻에서 1位를 달리는 것은 아니다. 假令 醫學에서는 에든버러大學이 두 大學보다 앞서 있다.

    더구나 社會進出 過程에서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合成語)’ 出身과 地方大學 出身 사이에 公式的으로 아무런 差等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오랜 期間 英國에 머물면서 經濟學을 工夫한 P敎授의 證言이다. 地方大學 卒業生의 入社願書를 처음부터 審査에서 빼버리는 一部 韓國 大企業의 行態와 比較되는 部分이다.

    또 한 가지 注目할 點은 두 大學 出身의 엘리트들이 學緣이나 學閥을 이루면서 集團으로 權力과 돈을 나누는 일이 거의 없다는 事實이다. 더구나 이들은 엘리트로서의 特權뿐만 아니라 義務를 가지고 있어서 韓國 一流大學 出身과 比較된다. 프랑스와 英國의 狀況에 비추어 우리는 上位圈 大學들을 여러 個로 쪼개는 方案을 愼重히 檢討해보면 어떨까 싶다.

    東洋圈의 日本은 韓國과 가장 비슷하다. 國立 도쿄대와 교토大, 히도츠바時代, 私立 게이오大와 와세다대 等 有名大學 卒業生들이 社會 各 部門에서 主導的인 役割을 하고 있는 것이 韓國과 닮은 點이다. 또한 韓國과 마찬가지로 入試成跡을 中心으로 學生들을 選拔한다. 하지만 몇 가지 重要한 差異點이 있다.

    于先 入試成跡을 强調하면서도 國立大와 私立大가 基準으로 삼는 試驗의 種類와 試驗科目이 다르다. 도쿄대 等 國立大는 本考査 成績뿐만 아니라 豫備考査에 該當되는 이른바 ‘센터’成跡을 考慮하는 데 비해, 私立大는 本考査만 치르고 ‘센터’를 考慮하지 않는다. 또한 本考査 科目도 大學마다 다르다. 이런 理由로 國立大 志望生과 私立大 志望生은 入試準備 過程부터 分離된다. 이것은 日本社會가 韓國처럼 모든 學生들을 하나의 잣대로 줄세우지 않으며 學生들間의 徹底한 序列을 追求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日本에도 韓國과 비슷한 大學序列이 存在하지만 上位圈 大學이 갖고 있는 優位가 韓國의 一流大學보다는 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在日僑胞로서 韓國에서 博士學位를 받은 P氏는 “言論에 對한 敎授들의 接近 可能性이나 言論을 통한 發言權이 所屬大學의 等級에 依해 決定되는 韓國社會의 特性을 日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보다 確然한 差異는 도쿄대가 서울대와 같은 獨占的 地位를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勿論 도쿄대가 最高지만, 교토大, 히도츠바時代, 게이오大 그리고 와세다대 等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어 上位圈 大學들 사이의 隔差가 韓國에서처럼 크지 않다는 것이다. 日本에서 오랫동안 經濟學을 工夫한 L博士는 “도쿄大에도 히도츠바時代 等 다른 大學 出身의 敎授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化學 等의 分野에서는 교토大가 繼續해서 노벨賞 受賞者를 排出하며 도쿄대를 앞서가고 있다.

    도쿄대 出身이 壓倒的으로 優勢한 部門은 政界와 關係에 局限되어 있고, 學界·法曹界·言論界·大企業 等에는 여러 上位圈 大學이 골고루 進出해 있다. 例를 들어 最近 發表된 日本 上場社 社長들의 出身大學 分布를 보면, 게이오大 302名, 도쿄大 293名, 와세다大 199名, 교토大 147名, 히도츠바時代 64名 等이다. P氏는 이런 差異에 對해 “도쿄대의 規模가 와세다大나 게이오大보다 작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脈絡에서 日本에는 ‘學閥(學閥)’이라기보다는 이보다 弱한 ‘學緣(學緣)’의 問題가 存在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日本 內에서도 學緣은 最近 浮刻되고 있는 企業 構造調整 等과 關聯해 深刻한 社會問題로 登場하고 있다.

    綜合하자면 先進國 大學들은 序列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거나, 序列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韓國보다 훨씬 느슨하다는 事實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韓國과 비슷한 序列을 가지고 있는 境遇에도 大學別로 學閥을 이루어 다른 集團을 排除하는 行態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先進國의 境遇 大學入試는 勿論이고 大學敎育 自體가 權力이나 돈을 分配하는 決定的 要因이 아니라는 것을 意味한다. 或은 그것이 相當히 重要한 要件이 되는 境遇에도 集團的 獨占이나 地位를 附與하는 境遇가 드물다는 것을 말해준다. 結局 韓國의 入試競爭은 보다 意味있는 다른 競爭들을 徹底히 排除한다는 點에서 眞正한 意味의 競爭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구나 先進國 大學의 序列은 學問이나 敎育의 多樣性을 前提로 깔고 있으며, 名門大學 卒業生들은 엘리트로서 무거운 責務를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反面 韓國의 一流大學들은 先進國 大學에 비해 學問이나 敎育水準에서 뒤떨어져 있으면서도, 內部에서는 徹底하게 順序를 매기는 우스꽝스런 行態를 보이고 있다.

    先進國 狀況은 우리에게 參考資料일 뿐이다. 先進國에서 問題가 되지 않는 事案도 韓國에서는 얼마든지 問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周知하다시피 우리의 公敎育은 이미 徹底하게 崩壞되었으며, 10代 靑少年들은 靑春을 잃어버린 채 入試競爭에 빠져들고 있다. 또한 學閥을 通한 社會 構成員들의 利益追求는 深刻한 不平等과 疏外를 낳고 있으며, 不淨腐敗에 對한 不感症을 더욱 增幅시키고 있다.

    흔히 地緣, 血緣 그리고 學緣이 韓國社會의 痼疾的인 病弊라고 말한다. 只今까지 地緣과 血緣의 非合理性은 적어도 論理的인 次元에서 明若觀火하게 드러났다. 이에 비해 學緣이나 學閥은 競爭의 節次와 敎育의 神聖함으로 僞裝되고, 談論을 掌握하고 있는 知識人들의 基盤을 形成함으로써, 現在까지 非合理性이 充分히 露出되지 않고 있다. 우리 社會의 學閥問題에는 緣故主義뿐만 아니라 學歷(學力)主義도 複雜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 學閥問題에 對해 深刻한 苦悶을 共有해야 할 時點에 이르렀다. 먼저 知識人들부터 自身의 學閥에 安住하거나 子息이 좋은 大學에 進學한 것에 安堵의 한숨을 내쉬기보다는 學閥을 深刻한 社會問題로 받아들이는 自覺이 必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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