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제타 홀의 朝鮮사랑|新東亞

로제타 홀의 朝鮮사랑

醫療宣敎師

  • 김홍권 < 한국종교사회윤리연구소="" 소장="">

    入力 2004-11-08 17:07: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1890年부터 44年間 이 땅의 女性·어린이·障礙人을 위해 獻身한 로제타 셔우드 홀. 男便 윌리엄 제임스 홀은 患者 治療中 34歲의 나이로 殉職했고, 아들 셔우드 홀은 韓國 結核患者의 大夫가 됐다. 試鍊과 偏見을 뚫고 朝鮮 醫療와 障礙人 敎育의 기틀을 다진 한 壁안 女性의 感動的인 삶.
    1991年 筆者는, 日帝 强占期 우리나라 最初로 結核病院 및 療養所를 세우고 크리스마스 失 事業을 施行한 外國人의 遺骸 里長食餌 있다는 新聞記事를 읽고 楊花津 外國人 宣敎師 墓域을 찾았다. 故人의 이름은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 醫療 宣敎師로 ‘結核患者의 아버지’라 불렸던 그는 朝鮮에서 태어난 最初의 西洋人이며, 母國인 캐나다에서 숨을 거두면서도 ‘사랑하는 땅 韓國’에 묻히기를 念願했던 이다.

    이장식에 參與한 것을 契機로 그의 自敍傳 ‘닥터 홀의 朝鮮 回想’을 接하게 됐다. 그의 父母 代로부터 始作되는 醫療 宣敎師 4名의 奉仕로 點綴된 삶에 큰 感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特히 基督敎에 對한 彈壓, 男便과 딸을 連이어 여읜 人間的 苦痛 속에서도 半世紀 가까운 歲月 동안 낯선 땅의 不遇한 이들을 위해 獻身한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卽 셔우드 홀의 어머니에 對해 깊은 關心을 갖게 됐다. 醫師로서의 安樂한 삶을 抛棄한 채 43年間 異國 땅에서 穩全한 奉仕의 삶을 살다가 68歲 老人이 되어서야 母國으로 돌아갔던 로제타 또한 家族과 함께 漢江 기슭 야트막한 언덕 楊花津에 묻혀 있다.

    이곳에 묻혀 있는 홀 집안 사람들은 모두 5名에 이른다. 朝鮮에 派遣된 宣敎師 中 最初로 殉職한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Willam Jam es Hall), 그의 아내인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Sher wood Hall)과 며느리 닥터 메리안 홀(Marian Hall), 마지막으로 셔우드 홀의 女同生인 에디스 마거리트 홀(Edith Margar et Hall) 等이다. 어린 時節 死亡한 에디스를 뺀 나머지 4名이 이 땅에서 奉仕한 期間을 합치면 無慮 73年이 된다.

    로제타는 英國·프랑스의 最高勳章은 勿論 노벨 平和賞까지 받은 슈바이처 博士보다 22年 먼저 奉仕活動을 始作했다. 그러나 思想家이자 神學者, 音樂家였던 슈바이처 博士에 비해 醫師의 길에만 專念했고, 게다가 女性이라는 理由로 業績에 合當한 評價를 받지 못한 側面이 있다. 特히 大韓民國 政府로부터는 어떠한 公式的 認定을 받지 못했다. 1993年 敎育部가 主管한 ‘韓國特殊敎育 100周年記念事業’ 當時, 敎育部와 該當 學會에서 朝鮮 最初의 近代的 盲啞敎育을 實施하고 點字開發에 寄與한 功勞로 그女에게 勳章을 追敍하려 했으나 몇몇 人士들의 反對에 부딪혀 霧散된 일이 있다. 그女가 美國人이었기 때문이다. 또 ‘韓美修好 100周年 記念式’에서도 아들인 셔우드 홀 博士는 勳章을 받았으나 그女에게는 어떤 敬意도 표해지지 않았다.

    1993年, 某 日刊紙에서 “로제타 홀의 業績을 우리가 너무 疏忽히 하고 있다”는 內容의 칼럼을 읽게 되면서 그女에 對한 關心은 더욱 커졌다. 筆者 亦是 그女의 사랑에 빚진 國民의 한 사람으로서 뭔가 報答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래서 始作한 것이 電氣 執筆이었다.



    그러나 筆者의 無能과 資料蒐集의 어려움 等으로 인해 作業은 此日彼日 미뤄졌다. 多幸히 2000年 10月, 高麗大 醫大 內 로제타 홀 클럽과 大寒女子醫師會 等의 招請으로 來韓한 그女의 孫子 윌리엄 제임스 홀과 孫女 필리스 홀 킹 女史를 만나게 됨으로써 作業은 急進展을 보게 됐다.



    “女性 醫療는 女性의 힘으로!”


    美國 改新敎가 朝鮮에서 宣敎活動을 始作한 것은 1885年이었다. 當時 改新敎는 이미 朝鮮을 除外한 東洋 各國에서 오랜 宣敎 經驗을 쌓고 있었다. 美國 젊은이들, 特히 醫學徒들 사이에서는 印度나 中國에 對한 宣敎熱氣가 最高潮에 達했다. 하지만 1801年 辛酉迫害로 많은 信者가 목숨을 잃고 黃嗣永이 로마敎皇廳에 軍隊派遣을 要請했다 殉敎하는 等 가톨릭 宣敎가 戰略的 失敗를 經驗한 뒤, 西方에서는 朝鮮 宣敎에 큰 關心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1883年, 通商外交使節團으로 美國을 旅行中이던 明成皇后의 조카 민영익(閔泳翊) 等이 牧師 존 F. 佳友處를 만나 朝鮮의 變化에 對해 알린 것을 契機로 美國 宣敎機關들은 다시금 朝鮮 宣敎에 關心을 갖기 始作했다. 特히 海外 宣敎에 積極的이던 監理敎團은 朝鮮에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턴 等을 派遣했다. 敎團은 朝鮮의 慣習, 宗敎 性向, 警戒心과 迫害 等을 勘案해 敎育·醫療를 통한 宣敎를 初期 戰略으로 採擇했다. 特히 집밖에 나서기 쉽지 않은 女性들을 위한 女性醫療宣敎師의 必要性이 크게 擡頭됐다.

    한便, 韓美·韓英 通商條約 等이 締結되면서 門戶가 열리기 始作했지만 朝鮮에서 宗敎의 自由는 如前히 留保的이었다. 1900年에는 調整이 地方官吏들에게 宣敎師 處刑을 指示하는 等 宣敎活動은 如前히 危險하고 豫測 不可能한 狀況에 處해 있었다. 그러나 鎖國政策에 邁進한 大院君의 夫人 閔氏(閔氏)가 ‘메리’라는 洗禮名을 가진 天主敎 信者였다는 事實에서도 알 수 있듯, 當時 이미 朝鮮에는 4萬餘 名의 天主敎 信者와 2萬餘 名의 改新敎 信者가 있었고 그 數 또한 漸次 늘어나는 趨勢였다.

    19世紀 末에서 20世紀 初, 朝鮮의 醫療 福祉 狀況은 絶望的인 水準이었다. 그러한 狀況에서 로제타는 44年間 女性專用病院 2個, 女子醫學講習所 2個, 小兒科病院 2個, 看護學校 2個, 結核病院 1個(아들 셔우드와 함께)를 세우고, 盲啞學校와 聾啞學校 各 1個, 高等學校 1個(男便 윌리엄과 함께), 初等學校 1個를 建立하는 等의 놀라운 業績을 남겼다. 한글 點字 開發, 美國 留學 女醫師 및 萌芽 特殊敎師 排出, 盲人 英文科 卒業生 排出, 第1回 東洋 盲學校 會議 開催 等도 그가 이룬 成果다.

    로제타는 처음 朝鮮에 올 때부터 “女性을 위한 醫療事業을 女性의 힘으로!(Medical work for woman by wo man!)”라는 口號로 事業을 펼쳤다. 이러한 視角은 女性의 社會的 地位 向上에도 큰 影響을 끼쳤다. 로제타가 財政的 어려움과 日帝의 監視와 牽制에도 不拘하고 女子醫學講習所를 繼續한 것은 그만큼 女性의 地位 向上에 많은 關心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女의 마지막 宿願 事業 또한 朝鮮 最初의 女子醫科大學(高麗大 醫大의 前身)을 設立하는 것이었다. 私財를 털어가며 獻身했으나 大學 設立 直前인 1933年, 68歲의 나이로 停年을 맞게 되자 같은 해 10月2日 故鄕인 美國으로 돌아갔다.

    1927年 5月21日子 동아일보에는 講習會와 朝鮮醫學專門學校 期成會 組織 事業에 對한 長文의 記事가 실려 있다.

    “薔薇는 어떠한 이름을 거기에 붙이더라도 그 香氣는 언제든지 장미인 것과 마찬가지로 于先(于先) 講習(講習)이라는 이름으로라도 朝鮮女子들에게 醫學上(醫學賞) 技術(技術)과 學術(學術)을 가르치겠다는 目的으로 그 같이 講習會를 開催하는 것이라는데… 近 70平生을 朝鮮과 朝鮮同胞를 위하여 心血을 다해서 犧牲的(犧牲的) 勞力(努力)을 아끼지 아니한 許乙(虛을) 夫人이 이番 事業에도 오로지 精誠(精誠)을 다하고 있음으로 財團設立度 仝夫人(同夫人)의 손에 이루어질 것은 疑心 없는 일이더라.…”

    로제타 홀은 英國系인 로즈벨트 렌瑟러와 抛에베 셔우드의 3姊妹 中 長女로 뉴욕 리버티에서 태어났다. 로제타는 체스트넛 릿지 地域學校와 리버티 普通學校(Liverty Normal Institute)를 거쳐 1883年 오즈웨고(Oswego) 學校를 卒業했다. 그뒤 벧엘 近處 學校에서 敎鞭을 잡다 체스트넛 릿지 地域學校로 돌아와 初等學校와 高等學校 敎師로 일했다.

    1886年, 로제타는 印度 宣敎에 對한 한 外部 講師의 講演을 듣고 큰 感銘을 받아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女子醫科大學에 들어갔다.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의 看護病院과 小兒科病院에서 6個月間 인턴過程을 거친 그女에게 監理敎 女傳道 機關(Deaconess’s Home)은 맨해튼 貧民地域 診療所에서 일할 것을 勸誘했고, 로제타는 그 提案을 欣快히 받아들였다.

    로제타는 事實 病弱한 少女였다. 어린 時節 脊椎에 異常이 있어 몇 次例 手術을 받았고, 20代가 될 때까지도 完治되지 않은 狀態였다. 醫科大學에 다닐 때는 목에 결핵성 腫瘍이 생겨 亦是 手術을 해야 했다. 그래서 로제타는 自身이 醫師로서의 資格이 없는 게 아닌가 苦悶에 빠지곤 했다.

    그런 로제타가 어떻게 險難하기 이를 데 없는 醫療宣敎師의 길을 選擇하게 됐을까. 이에 對해서는 多少 길지만 1927年 11月 코리아미션필드지에 寄稿한 글 ‘現場에 對한 나의 疏明’을 參考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 가장 어렸을 때의 回想들 中 하나는 어머니가 내게 엘리자 에그뉴에 對한 이야기를 해주신 記憶이다. 詩的으로는 ‘千 名이나 되는 딸들의 어머니’라고 불렸는데, 그女는 어느 外國 現場도 마다하지 않은 最初의 獨身 女性 宣敎師였다. 그女는 1839年 外國에 나가기 前 뉴욕州 리버티를 訪問해 祖父 길더스리브의 집에 손님으로 있으면서 當時 10歲에 不過했던 내 어머니에게 깊은 印象을 남겼다. 길만 열렸더라면 나는 어머니 스스로가 宣敎師가 되고 싶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머니가 해주신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나에게 宣敎師가 되고픈 衝動을 일게 한 最初의 것이었다. 또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美國 인디언에 對한 冊을 두어 卷 읽었는데 그 冊들은 인디언이 無知하다는 事實을 알려줌으로써 내게 깊은 印象을 주었고 언젠가 그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所願을 품게 했다.

    나는 리버티 普通學校 및 오즈웨고 學校에서 敎師로 訓鍊받았다. 어렸을 적 품었던 宣敎에 對한 비전은 시들기 始作했고 公立學校 敎師라는 經歷이 魅力的으로 느껴지던 때였다. 그 즈음 나는 어느 日曜日 아침, 리버티에 있는 故鄕 敎會에서 케너드 챈들스 夫人이 印度 旅行에 對해 演說하는 것을 들었다. 이 演說은 印度女性에게 福音 傳道者와 醫師가 매우 切實히 必要하다는 事實을 이야기해주는 것이었고, 나의 가슴은 卽刻 應答했다.

    萬一 챈들스 夫人이 印度에서의 敎育事業과 敎師의 必要性에 對해 演說했었다면 나는 그렇게 奉仕하겠다고 提案했을 것이며, 내가 朝鮮에 갔던 것보다 몇 年 더 일찍 敎師로 海外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只今 나는 챈들스 夫人이 그때 一般 敎育奉仕(文盲退治) 쪽을 나에게 强調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醫師가 되어 朝鮮에서 奉仕하도록 豫定하신 하나님의 加護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福音 傳道 事業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東印度 女性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醫師가 되어 그들을 돕는 것이라고 決定 내렸다.

    나는 自然科學을 좋아했으며 또한 誤스웨故意 自然科學 擔當 敎師인 女醫師 罵詈 리 博士를 尊敬했다. 어머니는 나를 激勵해주셨고 나는 우리 牧師님인 J. W. A. 도지와 함께 라틴語를 工夫하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女性醫科大學에 入學할 準備를 했다. 1889年 3月에 나는 마침내 그 學校를 卒業할 수 있었다.

    나는 몇 가지 身體的 障礙를 갖고 있으며, 그런 障礙는 많은 사람들과 親舊들을 落膽시킬 만한 것이었다. 牧師님조차도 내가 外國 現場에 가는 것을 말렸다. …뉴욕시에서 몇 달 동안 醫療 宣敎事業을 하는 동안 나는 醫師로서 몇 가지 魅力的인 提案을 받았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女性들을 위해 마운트 홀요크(Mt. Holyoke) 神學校를 設立한 마리 라이온스(Mary Lyons)의 演說을 듣고 깊은 感銘을 받게 되었다. 그 要旨는 이러했다.

    “萬一 當身이 人類를 위해 奉仕하고자 한다면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곳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십시오.”

    以後 그 이야기는 좀더 쉽거나 좀더 돈이 되는 일에 對한 誘惑이 생길 때마다 나를 確固하게 支撐해주는 힘이 되었다.

    當然히 나는 印度에 갈 것으로 期待하며 (醫學工夫를) 始作했으나 필라델피아에서 工夫하는 동안, 그리고 以後 뉴욕시에 있는 동안 中國人들을 위한 日曜 學校에서 가르치며 中國과 中國 女性의 無知에 關心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女性海外宣敎會(WFMS)에 中國을 나의 希望地域으로 申請했으나 그들은 나중에 人道보다 더 切實한 도움이 必要한 朝鮮의 北쪽 現場을 派遣地로 決定하였다.”

    로제타가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을 만난 것은 1889年 11月, 뉴욕市 街頭診療所에서였다.

    어느 날 看護員 젠켄스가 닥터 홀의 診察室로 들어서면서 새 消息을 傳했다.

    “닥터 홀, 새 醫師가 오셨어요. 닥터 로제타 셔우드라고, 先生님을 도울 분이에요.”

    펜실베이니아 女子醫科大學을 卒業하고 스테이트 善意 小兒科病院에서 인턴過程을 마친 로제타는 윌리엄이 責任者로 있던 뉴욕市 메디슨街 宣敎診療所의 義務 福祉士로 發令 받았다. 윌리엄은 로제타에게 한눈에 반했지만 내色을 않고 嚴格한 先輩로서 모든 書類를 차근히 읽은 뒤 威嚴 있는 表情으로 인터뷰를 繼續했다. 몇 해가 지난 後 그의 아내가 된 로제타에게 윌리엄은 “첫날 인터뷰 때 自己를 꽤 높여서 善戰하느라 熱心이었다”는 말을 하며 그女를 놀리곤 하였다.

    윌리엄 제임스 홀은 1860年 1月 캐나다 온타리오州 글렌 뷰엘의 農家에서 5男妹 中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이 없던 그는 17歲 때 工夫를 中斷하고 木工 見習生이 되었다. 그러나 2年이 채 안돼 肺가 나빠져, 故鄕으로 돌아와 죽음을 기다리는 身世가 되고 말았다. 健康은 奇跡的으로 回復되었고 이때 그는 “다시 주어진 人生을 값지게 살겠다”는 決心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죽을 病에 걸리지 않았다면 木手로 一生을 마쳤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1883年 敎師資格證을 取得한 윌리엄은 敎師로 일하며 生命保險會社 세일즈맨까지 겸해 돈을 모았다. 그리고 2年 後, 온타리오州 킹스턴에 있는 퀸즈大學校 醫科大學에 入學해 大學의 YMCA 支部를 組織하고 奉仕活動을 始作했다. 그는 在學中 國際 醫療宣敎會 이사인 조지 도우넛 博士를 만나 人生의 轉換點을 찾게 된다. 윌리엄은 그를 통해 뉴욕의 國際醫療宣敎會에 醫療宣敎師 養成을 위한 訓鍊制度가 있다는 情報를 얻는다. 윌리엄은 그 길로 뉴욕의 벨레뷰病院 醫科大學으로 가서 3, 4學年을 마치고 1889年 卒業과 함께 醫師 資格證을 받았다. 첫 職場이 바로 메디슨街 宣敎診療所였고, 그곳에서 로제타를 만난 것이다.

    윌리엄은 私財를 털어가며 醫療와 宣敎에 獻身하고 있었다. 10代 靑少年 時節부터 해온 어린이 主日學校 일에도 熱心이었다. 로제타는 닥터 홀을 깊이 尊敬하게 됐다. 宣敎師로서의 삶을 위해 結婚은 豫定에 없는 計劃이었지만 그해 크리스마스를 始作으로 繼續된 홀의 請婚을 받아들여 1892年 結婚에 이르게 되었다.

    로제타와 만날 當時 윌리엄은 中國 派遣을 앞둔 豫備 宣敎師였다. 約婚 後 로제타는 豫備 男便과 같은 任命을 받기 위해 뉴욕 監理敎 女性 海外宣敎協會에 登錄을 했다. 이들은 監理敎 宣敎 附議 方針에 따라 印度나 中國으로 나누어질 수도 있는 狀況이었지만, 바라던 대로 1年이란 時間差를 두고 朝鮮에서 劇的인 邂逅를 하게 되었다.

    먼저 派遣된 이는 로제타였다. 1890年 10月14日 로제타는 朝鮮에 派遣된 最初의 女醫師 메타 하워드(Meta How ard)의 後任으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1個月 後 로제타는 監理敎에서 運營하던 朝鮮 最初의 女性病院 보구旅館의 責任者로 任命됐다. 로제타는 1893年 8月23日 平壤에 갈 때까지 그곳에 勤務하며 病院을 크게 發展시켰다. 1897年에도 6個月間 病院을 맡아 運營했다. 後에 이곳은 東大門 婦人病院으로 發展했고, 只今은 이화여대 附屬病院이 되었다.

    로제타는 宣敎師 生活 初期의 일들에 對해 다음과 같이 言及하고 있다.

    “첫날 診療所에서 4名의 患者를 보았습니다. 다음날은 9名이었고, 以後 석 달 동안 통틀어 549名을 진료하였습니다. 診療 記錄에 있는 診斷 名을 보니 皮膚病, 眼疾, 귓病 等 50가지 以上의 다양한 疾病이었습니다. 現在까지 入院患者는 9名입니다. 往診은 21番을 했습니다(로제타는 그後 3年間 1萬4千餘 名의 患者를 治療하게 된다. 新婚 時節이었으나 男便 윌리엄이 監理敎 監督 指示로 平壤에 派遣되는 바람에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外科 患者中 한 名은 수탉 한 마리와 암탉 3마리를 보내주었습니다! 16歲인 그 젊은 女性患者는 數年前 畫像으로 세 손가락이 붙어 손바닥 쪽으로 굽어 자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女를 病院에 입원시킨 뒤 痲醉를 하고 손가락을 分離해 各各 繃帶로 감았습니다. 그리고 똑바로 펴서 副木을 대주었습니다.

    나는 切開한 皮膚로 最大限 移植하려 努力했지만 아직 皮膚가 없는 部位가 남아 있었고 말이 잘 안 통했기 때문에 皮膚移植의 必要性을 患者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몇 조각의 皮膚 移植 篇을 내 몸에서 떼어냈습니다. 다음으로는 患者로부터도 몇 조각을 떼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女는 內容을 理解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患部를 드레싱하면서 通譯을 맡은 로드웨이터(Rothweiter) 羊이 事態를 제대로 납득시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날까지 傷處는 거의 다 아물었고 다음날 나는 그女를 집에 보냈습니다.

    며칠 뒤에는 한 男子가 前날 내가 難産을 도와주었던 夫人에게 줄 藥을 타러 왔습니다. 나는 차라리 내가 가서 患者를 보는 것이 낫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비가 왔기 때문에 그 男子는 내가 비를 뚫고 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貴愁’가 그에게, 내가 韓國 女子에게 皮膚까지 떼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病院에서 일하던 봉선 어머니도 나처럼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려면 聖經을 좀더 읽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내가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結局 그것이 그들에게 큰 人生의 敎訓이 되었던 듯했습니다.

    또 病院에 있던 한 朝鮮人 補助員이 成功的인 白內障 手術 件에 對해 言及하면서 “그 醫師가 盲人에게 눈 하나를 주었다. 그러고 보면 모든 職業 中에서 醫師가 第一”이라고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는 이 韓國 男子같이 非專門的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宣敎 現場에서 醫師라는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됨을 보았습니다. 靈魂 깊숙한 곳으로부터 이런 式으로 이웃의 삶을 도울 수 있는 特權을 주신 하나님께 感謝드립니다.”

    한便 로제타는 梨花學堂에서 心理學科 藥學을 가르쳤고, 病院 助手들에게 人體醫學을 가르치기 위해 사람의 骨格을 敎習資料로 쓸 構想도 했다. 無心결에 어린 鳥獸들에게, 지난봄 南山 城 밖에서 주운 사람 骸骨을 가지고 가르치겠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宣敎師들은 깜짝 놀라 注意를 주었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에 外國人들이 朝鮮 아이들을 잡아먹고 藥으로 쓴다는 流言蜚語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遺骨을 公公然히 敎室로 가지고 가 사람들을 놀래키기보다는 學生들을 房으로 불러 個別的으로 보여주며 가르치는 길을 擇했다. 1891年 10月 27日의 일이었다.

    같은 해 12月15日, 존즈 牧師가 電報를 갖고 病院으로 왔다.

    “기뻐하십시오, 새 醫師先生님이 오십니다.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이 釜山에 到着했답니다.”

    로제타로서는 너무도 苦待하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女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게 된 感激을 抑制할 수가 없었다.

    1892年 6月27日 두 사람의 結婚式이 擧行됐다. 앞으로의 勞苦를 미리 補償이라도 하듯 朝廷에서는 軍樂隊를 보내 祝賀해주었다. 또 神父는 美國 國籍이고 新郞은 캐나다人이었기 때문에 美國公使館과 캐나다 公使館을 번갈아가며 두 番의 結婚式을 올렸다. 이 모두 長安의 話題가 되기에 充分한 것이었다.

    結婚 前後 윌리엄은 여러 次例 平壤 等 北部地域 宣敎地 開拓을 위한 旅行에 나섰다. 自然히 함께 있을 수 있는 時間이 적었다. 8月에는 新婚夫婦의 事情을 勘案하지 않은 監理敎 監督의 發令에 따라 男便 윌리엄이 平壤宣敎基地 開拓者로 任命돼 平壤으로 떠났다.

    2年 가까운 時間이 지난 1894年 5月4日에야 로제타度 平壤으로 갈 수 있었다. 亦是 監督의 命令에 따라서였다. 그女의 품 안에는 태어난 지 6個月 된 아들, 셔우드 홀이 안겨 있었다. 로제타는 當時 日記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을 引導하시는 主님, 主님의 일을 하는 것도, 人生 길도, 반드시 平坦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覺悟하게 해주시고, 기쁜 일에나 슬픈 일에나 恒常 感謝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해주시고, 오직 週께만 依支하고 主님만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이들은 平壤에서 살 집을 求하기 위해 募金을 했다. 가장 먼저 反應을 보인 것은 宣敎師 子女들이었다. 닥터 홀이 어린이들에게 宣敎用 집이 必要하다는 說明을 하자 한 어린이가 나섰다.

    “그런 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집을 주세요’라고 祈禱하겠어요.”

    윌리엄은 後에 그때 일을 이렇게 回想했다.

    “나는 어린이들의 祈禱를 決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直接 請願을 드렸다. 곧 應答이 왔다. 祈禱會가 끝나자 버티 올링거가 반짝이는 銀貨 1달러를 갖고 내 房에 왔다. “닥터 홀 여기 1달러를 平壤 집 사는데 보태 주세요. 더 드리고 싶지만 제가 가진 돈은 이것뿐입니다.” 다음에는 그의 누이同生인 아홉 살 꼬마 少女 윌라가 10센트를, 뒤이어 오거스터 스크랜턴이 50센트를 가지고 왔다. 이때 하나님의 子女들인 이 꼬마들이 가져온 돈은 不過 1달러 60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빵 5個와 2마리 生鮮으로 5000名의 群衆을 먹이신 하나님은 이 아이들의 膳物을 8個月 後 1479달러 99센트로 불려주셨다.”

    막상 닥터 홀 家族이 宣敎部에서 購入한 平壤 집에 移徙 오자, 平壤의 官吏들은 都市가 外國人들에게 넘어가기 始作했다며 몇몇 住民을 刺戟하였다. 結局 이들이 자리를 잡기도 前에 朝鮮人 基督敎 일꾼들이 逮捕되고 로제타가 묵은 집에는 돌이 날아드는 일이 벌어졌다.

    집을 판 사람과 닥터 홀을 도왔던 基督敎人 金昌植(뒤에 朝鮮 監理敎 招待牧師가 됨) 兄弟 等이 官衙에 잡혀갔으며, 이들이 甚한 매를 맞고 죽임을 當할 수도 있다는 消息에 닥터 홀은 官家와 서울 監理敎本部에 救助要請을 하기 위해 氣盡脈盡할 程度로 뛰어다녔다. 當時는 外國人의 土地所有가 許容되지 않을 때였다.

    한便, 로제타 帽子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西洋 女子와 그 아들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아이의 눈이 파란 것을 보고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女性들은 自己들끼리 10名씩 組를 짜 繼續 들락거렸고 늦은 밤까지 門 窓戶紙에 구멍을 내면서 들여다보았다.

    “金昌植이가 매를 덜 맞게 하고 싶지 않소? 金昌植이가 맞을 매를 減해줄 테니 葉錢 10萬兩을 내놓으시오.”

    이렇게 뒷돈을 要求하는 管理도 있었다.

    5月11日, 平壤監營에서 電報를 받았다는 傳喝이 왔다. 그러나 그 內容은 오히려 홀 內外의 心境을 어둡게 했다.

    “보시오, 西洋 兩班. 漢城에서 奇別만 오면 살 판이 열리는 줄 알았겠지만, 漢城의 公館長들이 上監을 謁見했어도 우리 上監媽媽께서는 平壤은 예수를 傳播할 곳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는 게요. 그리고 홀 醫師는 나쁜 사람이니 그와 함께 모든 基督敎 信者들을 오늘 다 斬刑에 處하라고 監司에게 御命을 내리셨소!”

    이는 그들이 홀 夫婦를 威脅하려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結局 홀博士 집에 물을 대주던 사람들마저 발길을 끊었다. 그럴 境遇 笞刑에 處한다는 公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닥터 홀은 돈을 주고서라도 金昌植을 求하고 싶었다. 그러나 金昌植은 죽을망정 그런 돈을 낼 수는 없다고 윌리엄을 말렸다.

    拷問을 當하고 돌에 맞은 平壤 基督敎人들은 죽음 直前, 서울에 있는 英國公使(公使)가 平壤感謝에게 보낸 電報로 인해 겨우 풀려났다. 목숨을 걸고 도왔던 金昌植에 對해 닥터 홀은 “그리스도를 위한 매우 큰 殉敎者인 그의 발 밑에 무릎 꿇고 싶다”는 말을 했다.

    事態가 鎭靜되면서 로제타는 하루 18~19名의 患者를 돌봤다. 또 患亂中에서도 視覺障礙人에 對한 敎育을 始作했다. 그러나 1894年 6月6日, 現地의 危險과 戰爭發生에 對한 憂慮로 로제타는 平壤에 온 지 한 달餘 만에 서울로 撤收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8月 1日, 드디어 淸日戰爭이 일어났다. 얼마 後 平壤은 靑·日 兩軍의 決戰地가 되었다. 닥터 홀은 平壤에 두고 온 信者들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月1日, 宣敎師들은 平壤을 向해 길을 떠났다. 닥터 홀과 長老敎의 모페트 牧師가 함께 갔다. 決戰 後 3週가 지났지만 避難 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썩어 가는 屍體들로 因해 空氣는 몹시 더럽혀져 있었다.

    身邊 危險을 憂慮한 監理敎 서울本部의 빗발치는 歸還 要請에도 不拘하고 닥터 홀은 醫師로서 부상당한 軍人들을 到底히 外面할 수 없다며 平壤에 繼續 머물렀다. 負傷者 治療에 渾身의 힘을 다하던 그는, 結局 激務와 發疹티푸스 感染으로 殞命하고 말았다. 1894年 11月24日, 結婚 2年5個月 만에 34歲로 幽明을 달리하고 만 것이다.

    로제타는 當時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가 죽기 前 마지막으로 내게 말하려 한 것은, 그가 平壤으로 간 것을 後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실 것’이라는 말도 했다. 나는 내 房으로 가 어린 셔우드를 품에 안고 아이와 나 自身에 對한 하나님의 言約을 懇求했다.”

    닥터 홀과 함께 負傷兵 治療現場에 있었던 모페트 牧師는 또 이렇게 적고있다.

    “負傷者의 國籍을 가리지 않고 어느 患者를 對하든지 그것이 첫 經驗인 것처럼 謙遜하고 조심스러웠으며 또 언제나 最後의 患者를 다루는 것처럼 精誠을 다했다.”

    윌리엄은 宣敎 旅行을 할 때에도 自己 몸보다 작은 조랑말을 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말과 함께 恒常 걸어다녔다고 한다. 한番은 外道하는 男便을 ‘고쳐준다’는 外國人에게 巨額을 뜯긴 女性이 찾아와 “當身도 外國人이니 代身 갚으라”는 억지를 쓴 적이 있었다. 같이 일하던 朝鮮 信者들은 모두 말렸지만 닥터 홀은 “같은 外國人으로서 責任을 면할 수 없다”며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그 女性에게 주었다고 한다.

    男便의 죽음으로 큰 衝擊을 받은 로제타는 1894年 12月 리버티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로제타는 危險한 平壤에서도 목숨을 걸고 自身을 도왔던 忠實한 餘助手 朴에스더와 同行했다. 에스더가 그토록 所望하던 醫學工夫를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朴에스더의 男便 박유산度 함께 했다.

    朴에스더의 本名은 김점동이다. 14歲 때부터 梨花學堂에 다녔고 英語를 잘해 로제타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通譯士였다. 로제타는 朴에스더 夫婦의 仲媒를 서는 等 信仰心 깊은 朝鮮 處女에게 큰 愛情을 쏟아부었다.

    朴에스더는 朝鮮 女性으로서는 처음으로 美國에서 西洋醫學을 工夫했다. 1900年 볼티모어 女子醫科大學 卒業 後 朝鮮에 돌아와 光慧餘원에서 로제타와 함께 한 달에 300餘 名의 患者를 진료했다. 視覺 障礙兒들에게 點字 樂譜를 익히게 하고 오르간을 가르치는 等 獻身的인 努力을 기울였다. 그러나 1910年, 醫師가 된 지 10年 만에 美國에서 自身을 뒷바라지하다 殞命한 男便처럼 肺結核에 걸려 夭折하고 말았다.

    로제타가 리버티에 到着한 지 얼마 안 있어 셔우드의 동생 에디스 마거리트가 태어났다. 홀 女史는 日記에 이렇게 썼다.

    “귀여운 에디스가 自己 엄마가 태어난 집에서 처음으로 그女의 파란 눈을 떴다. 에디스 마거리트 아빠가 가장 좋아하던 이사야 43張에는 이런 句節이 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子孫을 東方에서부터 오게 하며 西方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셔우드는 極東인 韓國에서 태어난 反面 에디스는 15個月도 지나지 않아 1萬 마일이나 떨어진 뉴욕 리버티에서 出生했다는 事實이 異常하게 생각되었다.”

    로제타가 美國에 머무르던 1897年 2月1日, 平壤에 홀 記念 病院이 開園했다. 이 建物은 宣敎會로부터의 어떠한 經濟援助도 없이 그의 아내 로제타와 朝鮮의 親한 親舊들, 그리고 故國 親知들의 努力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 사이 로제타는 美國에 머물며 男便 닥터 홀의 電氣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 D.’를 完成했다. 아울러 朝鮮 醫療宣敎支援을 위한 募金講演에 나섰으며 平壤盲啞學校 點字敎育을 더욱 本格化하기 위해 뉴욕포인트式 한글點字 開發에 나섰다. 1897年 11月10日, 로제타는 朝鮮醫療宣敎에 對한 召命意識과 繼續 되는 朝鮮의 부름으로 인해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먼 旅行길에 오른다. 悲歎 속에서 朝鮮을 떠난 지 3年 만이었다.

    女性海外宣敎會는 그女가 朝鮮에 처음 赴任하던 當時 일했던 보구旅館에서 다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음해인 1898年, 그女는 平壤으로 갔다. 로제타는 男便의 遺言을 생각하며 홀 記念病院에서 熱心히 일했다. 每日 患者數가 늘어나는 가운데 盲啞들에게는 뉴욕에서 硏究해온 點字를 가르쳤다. 로제타의 얼굴은 기쁨과 所望으로 빛났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까지 愉快하게 만드는 生氣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들의 幸福은 오래가지 못했다. 1898年 5月, 家族 모두 細菌性 痢疾에 걸렸고 그로 인해 같은 달 23日, 세 살 난 딸 에디스가 死亡하고 만 것이다. 로제타는 日記에 또 이렇게 쓰고 있다.

    “또 하나의 큰 슬픔이 우리에게 왔다. 우리가 첫 番째 큰 슬픔을 當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셨던 貴重한 작은 慰勞者(에디스)가 우리가 미처 새 보금자리인 平壤에 定着하기도 前에 우리의 사랑하는 품에서 사라졌다.”

    에디스는 아버지인 윌리엄이 묻힌 楊花津으로 운구됐다. 로제타는 그 자리에 參席할 수 없었다. 葬禮를 집전한 아펜젤러 牧師는 홀 女史에게 便紙를 써 慰勞했다.

    “그女는 只今 아빠의 품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再臨 때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當身 家族의 折半은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습니다.”

    1898年 6月18日, 로제타는 슬픔 속에서도 平壤 最初의 女性病院人 光慧餘원을 開園했다. 病院이름은 男便이 살았을 때 自身들을 甚하게 逼迫했던 平壤監司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監査의 아내를 治療해준 因緣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2年이 지난 1920年, 홀 記念病院과 光慧餘원은 平壤聯合기독병원으로 합쳐졌다. 같은 해 8月에는 에디스를 記念한 우리나라 最初의 小兒科 病棟을 지었다. 이 建物은 平壤에 세워진 最初의 2層 建物이었으며 大同江물 代身 깨끗한 물을 供給하기 위한 커다란 물탱크가 設置되었다.

    또 여기서 5年間 일하며 修鍊을 받은 朝鮮 女醫師 그레이스 리 夫人이 日帝로부터 開業醫師 資格證을 얻는 일이 벌어졌다. 그女는 朝鮮 最初의 女性 開業醫가 되었다.

    로제타는 宣敎活動 내내 女性敎育에 큰 關心을 보였다. 1914年 로제타가 監理敎宣敎團에 보낸 報告書에는 5名의 女子醫學生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內容이 나온다. 救世軍病院 醫師들로 하여금 敎育을 맡게 한 뒤 1年 過程이 끝나면 試驗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또 總督府에서 세운 醫學校를 女性에게도 開放토록 提案하고 直接 警備를 準備하기도 했다. 女子醫學敎育을 위한 貸與奬學制度도 마련했다.

    病院의 藥劑師, 首看護師와 助産員, 助務士 等에게도 體系的인 敎育을 實施했다. 必要한 病院人力을 自體 養成한 것이다. 學年이나 職級에 따라 制服을 달리하는 等 學事管理度 嚴格했다.

    또한 市內에서 열리는 聖經講習會에 醫師나 敎育 過程을 마친 看護師를 配置해 衛生學 講義를 하도록 했다. 參席者들은 다시 이것을 自身들의 마을에 가서 가르쳤다. 女性들은 매우 熱情的으로 듣고 빠르게 익혔으며 배운 것을 當場 實行에 옮겼다.

    1900年 5月, 로제타는 에디스 死亡 2週期를 맞아 셔우드와 함께 中國의 體候라는 곳으로 가 暫時 쉬면서 새로 始作할 聾啞敎育資料를 準備했다. 어린 딸을 잃은 슬픔은 옅어지기는커녕 漸漸 더 참기 힘들어졌다. 日記에는 ‘萬若 主님이 사랑하는 딸을 데려가시지 않았더라면 예수를 더 잘 依支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비밀스런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이것은 宣敎師가 말하기에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가 두려워하는 平凡한 現實이란다. 어쩐지 엄마는 이 傷處를 意志力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단다. 神聖冒瀆 罪 같은 것! 불쌍하고 바보 같은 이 엄마! 主님은 엄마를 繼續 가엾어하시는구나. 主님의 聖靈이 엄마를 깨우치시고 沈滯된 狀態의 靈魂에서 빠져 나오도록 도와주실 거야. 當身께서 나를 꾸짖으시고 내가 꾸짖음을 黨하나이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황소처럼 主여, 나에게로 돌이키겠나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主여!”

    여기서 우리는 로제타의 人間的 苦惱의 絶頂을 보게 된다. 中國에서 돌아오자 더 많은 슬픔이 그女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女가 떠나 있는 동안 그女의 어머니가 美國의 故鄕에서 世上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女의 日記에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다. 韓國語와 英語의 同音語(同音語)에 着眼한 유머러스한 表現이 그것이다. 外國 宣敎師로서는 ‘生鮮’과 ‘先生’이 늘 混同된다는 말도 하고 있다. 이런 句節도 나온다.

    “왜 宣敎師는 一前짜리 銅錢 한 잎처럼 보잘것없는 存在일까(Why is a miss ionary like a penny)? 왜냐하면 宣敎師는 보내심을 받은 者이기 때문이다(Becouse he is one sent(=cent).”

    로제타가 女性敎育 못지 않게 熱情을 바친 것이 盲啞와 聾啞에 對한 敎育이었다. 로제타는 1909年 5月 코리아미션필드지에 寄稿한 글에서 弄·盲兒 敎育을 해야 하는 理由를 이렇게 說明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이곳 地上에 계셨을 때에 우리에게 아픈 이들뿐만 아니라 눈먼 이들과 말 못하는 이들을 同情하고 도우라고 가르쳐주셨음을 記憶합시다. 그는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귀먹은 者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者가 말하도록 하셨습니다. 불쌍한 者를 위하여 福音을 傳道하라. 그리고 나를 거스르지 않는 모든 者에게 祝福 있으라.”

    로제타는 1894年 朝鮮 最初의 視覺障礙兒 學校인 平壤餘盲學校를 세웠다. 1897年에는 直接 考案한 뉴욕式 한글 點字를 가르쳤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盲人에게 行한 最初의 點字 敎育이었다. 이는 1926年 基督敎人 박두성이 勳盟정음 點字를 發明하는 데 큰 刺戟劑가 되었다. 1909年에는 우리나라 最初의 聾啞學校를 세웠다.

    로제타는 오봉래라는 學生에게 처음 點字를 가르쳤다. 그女는 後에 有能한 特殊敎育 敎師가 되었다. 또 닥터 홀은 김성실이라는 學生을 아껴 이화여전 英文科를 卒業하게 했다. 우리나라 最初의 盲人 英文科 卒業生이 된 그는 通譯士로서 늘 홀 女史와 함께 했다. 1993年 문교부에서 發刊한 特殊敎育白書에 따르면, 로제타는 여러 곳의 病院長이면서 1925年까지 無慮 26年間이나 盲啞學校와 聾啞學校의 校長職을 遂行했다.

    當時는 그나마 餘裕 있는 집안 出身 萌芽만이 按摩師나 무당 같은 職業을 가질 수 있었고, 大部分은 돼지 움幕처럼 더러운 房에 갇혀 虐待받다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채 죽어가던 時代였다. 甚至於 京畿道의 한 할머니는 孫女에게 毒藥을 먹이려다가 宣敎師들의 警告로 눈물의 懺悔를 하기도 했다.

    홀 女史는 이렇듯 不幸한 社會環境을 障礙者 스스로 克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努力을 기울였다. 點字로 聖經을 가르치고 盲學校 助手, 點字製作, 寫眞館 補助 等의 일에 從事할 수 있게 했다. 또 印刷術, 뜨개질, 재봉술, 手選法, 料理, 洗濯, 編物, 다리미질, 바구니 製作, 돗자리와 짚신 삼기 等 多樣한 技術을 가르치며 就業의 길을 열어 주었다. 平壤盲學校는 繼續 發展해 1915年頃에는 學生 數가 55名이 되었고 總督府 奬學金으로 東京 留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財政的 어려움이 커 홀女史가 隱退한 1935年부터 光復까지는 겨우 命脈만 維持하게 되었다.

    로제타는 朝鮮 萌芽·聾啞 敎育의 開拓者日 뿐 아니라 只今부터 100餘 年 前 이미 오늘날과 같은 障礙人 敎育 및 訓鍊에 나서고 就業制度 마련에 앞장선 開拓者라 할 수 있다.

    1914年 로제타는 平壤에서 ‘東洋 萌芽·盲人學校 學術發表會의’를 開催했다. 이 자리에는 朝鮮과 中國, 日本 代表가 參席했다. 大會는 盛況裏에 끝나 視覺 및 聽覺障礙人에 對한 關心을 促求하는 데 큰 役割을 했다.

    로제타의 외아들인 셔우드 홀은 커가면서 事業家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0臺이던 1907年 8月, 元山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1907年 基督敎 臺復興期의 主役이던 하디 宣敎師의 說敎에 感銘받아 醫療宣敎師가 되기로 決心한다. 그가 感銘 받았던 하디의 說敎 內容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아무리 높은 理想과 動機라도 그것을 實行에 옮기는 데 必要한 靈的 힘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不足하다. 記憶하라, 그 힘은 恒常 祈禱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 肉體의 힘도 날마다 飮食에 依해 維持되는 것처럼 우리의 靈的인 힘도 오로지 每日 每日의 祈禱를 통해서만 剛해질 수 있다. …우리의 決心 亦是, 우리가 우리 自身에게 榮光이 되기를 바라는 데서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熱望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닥터 셔우드 홀은 朝鮮에서 태어난 最初의 西洋人이며, 最初로 結核 專門病院과 結核療養所를 세운 人物이자,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실을 發行한 사람이다. 結核 退治 資金 마련을 위해 發行한 最初의 크리스마스 실에는 朝鮮의 象徵인 南大門이 그려져 있다. 애初 셔우드는 거북船을 圖案으로 삼으려 했으나 日帝에 依해 不發됐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다시 南大門을 그려 넣는 氣槪를 보여주었다.

    그의 自敍傳 ‘닥터 홀의 朝鮮 回想(原題 ‘아시아:韓國에서 聽診器와 함께)’은 보배라는 이름의 가엾은 海州(海州) 少女의 죽음으로부터 始作된다. 시집갈 날을 받아놓은 보배는 結核에 걸려 몸져눕고 만다. 當時 人口 4名 中 1名이 걸린 것으로 推定되는 結核은 朝鮮 사람들에게 天刑(天刑)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느 華奢한 봄날 보배는 곱게 차려입고 家族과 함께 黃海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逍風을 갔다. 기침과 침의 苦痛에서 解放된 보배는 활짝 핀 진달래꽃 사이를 누볐다. 그러나 飮食 準備를 끝낸 家族들이 그女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꽃 한아름을 품에 안은 채 쓰러져 숨져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셔우드 홀은 바로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보배가 쓰러진 진달래꽃무더기 자리에 朝鮮 最初의 結核病院을 세웠다.

    이 回顧錄은 感動的인 ‘만세’ 場面으로 끝이 난다. 아내인 닥터 버텀리와 함께 15年間 이 땅의 結核 退治를 위해 獻身한 셔우드 홀은, 그 功勞로 朝鮮 總督과 日本 天皇으로부터 表彰을 받은 經歷이 있음에도, 結局 1940年 日帝에 依해 强制로 추방당하고 만다.

    釜山港을 떠나기 直前 셔우드 홀 家族은 눈물 속에 작은 意識을 치렀다. 셔우드는 家族들 앞에 수놓은 아름다운 太極旗 한 張을 꺼냈다. 海州를 떠날 때 朝鮮人 親舊가 준 것이었다. 一家族 5名은 나뭇가지에 그 太極旗를 걸어놓고 “朝鮮의 眞正한 國旗를 向해 萬歲를 외쳤다”. 그리고 虛킨스의 時 ‘鳶의 文(年의 門)’을 朗誦했다.

    “나는 年의 門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했네 / 빛을 주시오 / 그래야 내가 未知의 世界로 안전히 걸어 들어갈 수 있소 / 그는 對答했네 / 어둠에 들어가시오. 그리고 하나님 손을 잡으시오 / 그리 하는 것이 빛보다 나으며 뜻 있을 것이오”

    아래 글은 高麗大 醫大와 看護隊의 로제타 홀 클럽이 로제타 셔우드 홀 宣敎師가 韓國에 到着한 지 110周年 되는 해를 記念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孫女인 필리스 홀 킹 氏가 한 踏査의 一部分이다.

    “로제타 홀 宣敎師가 1928年 9月 4日 設立한 女子 講習所는 고려대학교 醫科大學 및 看護大學의 前身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天國에서 매우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제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우리 家族이 캐나다와 美國에서의 安息年을 마치고 印度의 宣敎地로 돌아가기 直前인 1948年 가을이었습니다. 저는 14歲였고 우리 家族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뉴욕州의 애디론닥 山에 位置한 새라樂 湖水까지 旅行을 했습니다. 할머니는 거기서 休暇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시리얼 넣은 빵을 만들어주셨고 만드는 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제 記憶으로 할머니는 키가 매우 작으셨고,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脊椎 彎曲症으로 인해 등이 굽어 있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包含해 모든 女子가 醫師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科學 科目은 제가 좋아하는 科目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록 저의 父母님과 저의 祖父母님 모두 醫師이셨지만 저는 醫師를 願하지 않았습니다.

    1951年 4月5日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消息을 들었을 때 저는 히말라야 山에 있는 學校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宣敎地였던 마다르(Madar) 結核 療養所에서 使役中이셨습니다. 여태껏 제가 보낸 便紙 中 가장 쓰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할머니를 너무도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보낸 慰勞의 便紙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正말로 우리 할머니를 ‘만난’ 것은 1970年이었습니다.

    當時 저는 아버지의 自敍傳인 ‘아시아 : 韓國에서 聽診器와 함께’의 原稿를 타이핑하고 編輯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는 수年値에 該當하는 할머니의 일기 몇 卷과 祈禱 달曆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는 韓國에서 使役中인 모든 宗派 宣敎師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달曆에 그 이름이 적혀 있는 날에는 그들을 위해 特別 祈禱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그 冊들을 日記 兼 祈禱冊으로 使用하셨습니다. 할머니가 一生 동안 忠實히 써내려간 記錄, 그렇게 다양한 興味와 關心을 가졌던 한 女性의 人生 記錄을 훑어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貴重한 寶物들을 發見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日記부터 始作하였습니다.

    그 中 한 卷에는 9歲 무렵 로제타가 그女의 故鄕사람들에게 한 짧은 說敎의 魅力的인 導入部도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前에 읽었던 할머니의 매우 印象的인 業績들보다 더욱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또한 그것은 14歲 少女의 未熟한 感情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이러한 記錄을 통해 저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할머니 自身과 지나간 世代, 지나간 歲月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에 對해 感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제타! 그 勇敢한 겉모습 밑에 감추어져 있었던 슬픔과 의로운 鬪爭은 障礙人 等 어려운 이웃의 삶을 改善하려는 使命感과 慰勞者 聖靈을 쉼없이 바라보는 가운데 사라져갔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외로웠으나 의로웠던 巡禮者, 로제타 셔우드 홀 醫療宣敎師의 半世紀를 照明해 보았다. 참으로 특별한 感動을 주는 人生의 파노라마가 아닐 수 없다. 홀 女史 夫婦와 아들 內外의 海外奉仕期間을 합치면 無慮 128年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偉大한 醫療奉仕 家族共同體의 中心에는 늘 로제타 홀 女史가 있었다.



    醫師·基督敎人의 龜鑑


    로제타는 늘 “女性에 依한 女性의 治療”를 强調했으며, “女子가 어머니가 되는 것과 醫師가 되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며 女性도 生命을 다루는 醫師가 되는 것이 當然하다는 主張을 폈다. 그女는 卓越한 女性運動家였으며 어린이와 障礙人, 疏外되고 虐待받는 이들의 天使였다. 그女의 特別한 業績은 信仰人으로서의 姿勢까지 威脅할 程度로 極甚한 人間的 苦痛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우리 基督敎인 醫師들 中에도 ‘韓國의 슈바이처’라 불릴 만한 훌륭한 이들이 여럿 있으나, 오늘날에는 代替로 補償的 醫療體系 속에서만 患者를 治療한다. 따라서 自己皮膚를 도려내 患者에게 移植해주며 참사랑을 實踐한 로제타 같은 積極的 醫師倫理는 要求하기 힘든 일이다. 그렇더라도 이 글이 消極的 醫師 倫理, 卽 不必要한 帝王切開 手術이나 不法 落胎手術, 醫療界 一角의 醫療費 虛僞·不當 請求 等을 줄이는 데 작은 刺戟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이제 우리 社會 指導宗敎로 代替된 基督敎는 量的 成長을 克服하고 初期 宣敎師들이 가졌던 勁健性과 奉仕의 實踐的 召命意識을 速히 回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點에서 100餘 名(1997年 現在)의 우리나라 醫療 宣敎師들이 世界 奧地에서 獻身的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只今이라도 로제타 셔우드 홀 女史의 功績에 對한 바른 評價와 함께 訓長이라도 追敍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아울러 ‘잊혀진 무덤’이 되어가고 있는 楊花津 언덕에 外國人 宣敎師 記念博物館을 세워 그들의 勞苦에 對한 자그마한 報恩이라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