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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浦特酒는 다시 태어날까?|신동아

金浦特酒는 다시 태어날까?

傳說로 남은 ‘특별한 술’

  • 허시명| 술 評論家 sultour@naver.com |

    入力 2010-09-01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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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帝의 供出로 좋은 쌀이 바닥난 時節. 싸라기로 만든, 뜨물처럼 멀건 탁배기度 貴하던 그 時節에 찹쌀로 빚은 金浦藥酒는 그냥 술이 아니었다. 그래서 ‘特酒’라는 특별한 이름을 달았다. 以後 激動과 試鍊의 歲月 속에 衰落의 길을 걸은 金浦特酒를 家業으로 다시 살려내려는 努力이 試圖되고 있다.
    김포특주는 다시 태어날까?

    金浦濁酒 釀造場 앞에 선 권종옥氏와 권이준氏 富者(큰 寫眞). 1972年 金浦濁酒合同 釀造場을 設立했을 때의 契約文件.

    막걸리學校를 찾아온 사람들 中에는 釀造場을 直接 經營하거나 或은 집안에서 釀造場을 經營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慶南 河東 화개에서 釀造業을 하는 이근왕氏도 그런 境遇다. 나는 그분께 “每日같이 술을 빚으시는 분이 뭐 배울 게 있다고 그 먼 곳에서 막걸리學校를 찾아오셨습니까?”라고 물은 일이 있다. 그분 對答이 이랬다.

    “어디 가서 막걸리 얘기를 들을 데도 없고, 함께 얘기할 데도 없어서 왔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은 普通 막걸리를 마시며 人生事나 일 이야기를 하지 막걸리 自體에 對해서 얘기하지는 않는다. 막걸리 만드는 사람들도 막걸리 製造 祕法이 흘러나갈까봐서인지 막걸리 얘기를 되도록 아낀다. 그러다보니 막걸리라는 술 自體에 對해 論하고 까부는 자리란 事實 만나기 어렵다.

    이근왕氏가 궁금했던 것은 막걸리 自體이기도 했지만, 막걸리에 關心을 갖는 사람들의 面面이었을 것이다. 生産者와 消費者가 便하게 親舊가 되어, 막걸리가 왜 좋은데? 뭐가 不足한데?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막걸리가 될까? 하고 말을 섞을 수 있는 자리로 그는 막걸리學校의 門을 두드린 것 같다.

    “代를 이을 수 있다면 하십시오”



    釀造業者나 釀造場 家族들은 이와 비슷한 理由로 막걸리學校를 꽤 찾아온다. 막걸리學校는 5期에 이르기까지 모두 200名이 修了했는데, 그中 釀造場에 關聯된 사람이 15名쯤 된다. 釀造場 孫子도 있고, 豫備 며느리도 있었다.

    그中 重大한 出發點에 선 人物이 있다. 김포금쌀 釀造場을 運營하는 권이준氏다. 그이는 3期 受講生으로 막걸리學校를 들어오던 當時 막걸리 釀造場을 짓는 中이라고 했다. 그 規模를 몰라 “釀造場 짓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갑니까?” 물었더니 10億이 조금 넘는단다. 10億 넘는 돈을 들여 막걸리 工場을 짓고 있는 분이 受講料가 40萬원이 안 되는 막걸리學校 講座를 찾아와 뭘 들으려 할까, 좀 걸맞지 않은 것도 같았다.

    처음 막걸리學校를 열던 내 마음은 좀 재미나고 흥겹게, 文化의 한 가지로서 우리의 술 이야기를 나눠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찾아오는 사람들 中에는 권이준氏처럼 人生의 重要한 出發點이나 轉換點에 선 분이 많았다. 講義를 하는 내 處地에서는 조심스럽고 어깨가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學校 受講生뿐 아니라 더러 釀造場을 하겠다고 내게 諮問하러 오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 내가 하는 첫 番째 말은 이것이다.

    김포특주는 다시 태어날까?

    김포금쌀 막걸리는 쌀을 主原料로 해서 술빛이 희디희다.

    “代를 이어갈 수 있으면 하십시오.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목 좋은 곳에서 다른 장사를 하시면 될 겁니다. 釀造業은 歲月의 힘을 견뎌내야 터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이준氏에게는 굳이 이 말을 할 必要가 없었다. 그는 이미 나름대로 파란 많은 歲月의 힘을 견뎌온 술都家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權氏는 8年 前 아버지에게서 金浦濁酒合同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4年 前 그 釀造場을 廢業하면서 막걸리 釀造業을 中斷했다. 廢業 當時 金浦濁酒合同은 每달 100萬원씩 赤字를 보는 形便이었다. 5名의 株主가 每달 20萬원씩을 보태야 釀造場이 運營될 수 있었다. 權氏는 赤字를 볼 거라면 自身에게 2年 동안 經營權을 맡겨달라고 다른 株主들에게 要請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結局 釀造場은 賣却 決定이 났고 持分을 나눠 갖는 方式으로 解體되고 말았다.

    그날 以後로 權氏는 어떻게 하면 다시 막걸리 釀造場을 할까 苦心을 거듭했다. 그러던 次에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釀造場을 다시 始作하려던 그의 覺悟가 實行에 옮겨지게 됐다. 그는 막걸리 釀造를 다시 始作하면서 좀 더 差別化된 막걸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하여 브랜드化한 김포금쌀을 가지고 막걸리를 빚基로 하고, 술都家 이름도 ‘김포금쌀濁酒’라고 짓게 됐다.

    權氏가 다시 술을 빚게 된 것은 막걸리 바람 德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家業인 막걸리 釀造業을 잇겠다는 執念 때문이다. 그의 집안이 견뎌온 힘은 무엇일까. 金浦濁酒合同을 運營했던 權氏의 父親 권종옥(83)氏를 만났다. 권종옥氏를 통해 只今은 所聞으로만 남은 金浦特酒의 옛 名聲에 對해 들을 수 있었다.

    싸라기 술도 貴하던 時節의 찹쌀 술

    金浦는 慶北 先山과 더불어 일찍이 藥酒로 名聲을 얻었던 洞네다. 그런데 金浦에서는 藥酒를 더 特化시켜 特酒라고도 불렀다. 日帝强占期에 누가 꼽았는지 確認하기 어렵지만, 八道 明紬로 金浦特酒, 安東 제비원燒酒, 寒山 消穀酒, 釜山酸性 藥酒, 慶州法主, 馬山과 木浦의 正宗, 開城燒酒, 海州 方文酒, 東萊 동동酒가 꼽혔다. 이 中 金浦特酒가 곧 金浦藥酒다.

    권종옥氏의 父親인 권성규氏가 釀造業을 始作한 것은 光復이 되던 1945年이다. 권성규氏는 當時 金浦의 金星釀造場에서 事務 일을 보다가 釀造場을 引受하게 됐다. 金星釀造場은 1925年에 設立됐는데, 元來 主人은 김춘원氏로 권성규氏의 妻男이다. 권성규氏는 釀造場을 引受하면서 釀造場 이름을 하성釀造場으로 바꾸고 本格的으로 釀造業을 始作하게 됐다.

    권종옥氏는 19歲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釀造場 일을 했다. 그는 1947年 누룩에 쓸 밀을 購買하러 開城 場에 갔던 적이 있다. 只今은 軍事分界線이 지나가 金浦 나루들을 利用할 수 없게 됐지만, 그 時節 그가 살던 金浦郡 하성면 一帶에는 漢江 河口의 이름난 浦口가 있었고 主로 배를 타고 麻布를 오갔다. 臨津江과 만나는 애기봉 아래쪽 김포시 하성면 신리 마근포에서는 배를 타고 開豐郡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는 일꾼들과 함께 밀 50가마를 배에 싣고 와서 그해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었다.

    하성釀造場에서 만든 술은 탁배기人 막걸리, 合奏, 金浦特酒 等이었다. 1957年에는 서울 麻布의 朝陽釀造場을 引受해 보리와 밀로 燒酒도 만들어봤고, 그 뒤에는 酒酊을 사다가 稀釋式 燒酒도 만들어봤다. 이 中 金浦特酒는 찹쌀로 빚은 高級 藥酒였다.

    光復이 될 무렵에 金浦의 釀造場에선 막걸리는 州로 싸라기 쌀로 빚었다. 막걸리라는 表現보다도 탁배기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日帝 末期에 日本人들이 쌀을 供出해가는 바람에 좋은 쌀로는 탁배기를 빚을 수 없었다. 그때는 小作農이 많았고, 小作人이 收穫量의 30%를, 地主가 70%를 가져가던 時節이었다. 그러니 쌀이 貴했고 쌀로 빚는 술도 貴했다. 그런데 비록 “뜨물같이 멀겋고 밍밍한” 맛이지만 싸라기로 빚은 탁배기를 사람들은 “좋다며 먹었다”고 권종옥氏는 回顧한다. 싸라기로 빚은 탁배기마저 맛있게 먹던 時節 찹쌀로 빚은 金浦特酒는 普通 술이 아니었다. 可히 特酒라는 이름을 달 만했다.

    탁배기는 멀겋고 濁하고 걸쭉했다. 체로 거르기 때문에 술지게미도 別로 나오지 않았다. 알코올 度數는 6度 程度 됐다. 反面 藥酒는 자루에 담아서 豆腐 짜듯이 짜는데 度數 11度로 술빛이 아주 맑고 지게미度 많이 남았다. 藥酒 지게미는 釀造場 이웃 사람들에게 그냥 나눠줬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이 지게미를 가져다가 끓여서 먹었다.

    권종옥氏는 한때 合奏(合酒)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合奏는 20世紀 初盤에 京城地方의 上流層에서 마시던 술로 막걸리와 藥酒의 中間 形態 술이다. 1935年에 作成된 ‘朝鮮酒造士’는 이것이 막걸리보다 희고 신맛이 덜하고 단맛과 매운맛이 强하다고 評價한다. 權氏가 合奏를 만들던 方式도 藥酒처럼 자루에 넣고 거르는 式이었는데, 물을 좀 더 타고 걸러 度數가 藥酒보다는 낮고 탁배기보다는 높았다. 술빛度 탁배기보다 더 맑게 짰다. 公式的으로 合奏라는 商標를 달진 않았지만 合奏라는 이름으로 流通됐다.

    戰爭과 競爭에 시들어간 名聲

    권종옥氏가 사는 김포시 하성면은 漢江과 臨津江이 만나는 地點으로, 파주시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와 開豐郡 정곳리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이 地點에서 長魚가 많이 잡혔다. 한겨울에 가마니에 소똥을 집어넣어 强에 빠뜨려놓았다가 끌어올려보면, 가마니에 長魚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서 長魚를 잡다가 물에 빠져 죽는 事故도 많았다. 日帝强占期에는 日本 사람들이 이 長魚를 무척 좋아해 많이 찾았다. 光復 뒤에도 이 長魚를 맛보러 서울 사람들이 麻布에서 배를 타고 하성면을 많이 찾아왔다. 長魚를 맛보러 오는 사람들이 술을 찾아 하성釀造場의 술도 이때 많이 나갔다고 한다.

    光復 뒤 權氏 집안은 하성면의 전류리 浦口에서 麻布까지 오가는 배를 直接 運營하기도 했다. 建國환과 한양환이라는 이름의 鐵線 2隻으로, 이 배로 麻布까지 술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하지만 6·25戰爭 때 鐵船이 爆擊을 맞고 말았다. 休戰線이 생기면서는 金浦 전류리 浦口는 間或 間諜이 出沒했다는 消息, 間諜으로 誤認받아 죽었다는 住民들 얘기만 떠도는 곳이 됐다.

    金浦藥酒인 金浦特酒가 人氣를 끌면서, 金浦의 釀造場들이 다투어 藥酒를 만들어 서울로 내다 팔았다. 金浦藥酒 競爭이 熾烈해지자 價格을 낮추기 위해 質 낮은 藥酒도 나왔다. 그러던 1970年代 初盤엔가 金浦藥酒를 流通하는 中間業者가 藥酒의 量을 늘리기 위해 工業用 알코올을 섞으면서 술을 맛보다가 두 名이 함께 죽는 事件이 터졌다. 이 事件과 함께, 더 以上 쌀로 藥酒를 빚을 수 없는 곤혹스러운 狀況이 持續되면서 金浦藥酒의 人氣도 시들해졌다.

    김포특주는 다시 태어날까?

    農協마트 앞의 김포금쌀 試飮場에서 권이준氏가 술맛을 보고 있다.

    하성釀造場에서는 1957年에 麻布의 朝陽釀造場을 引受해 보리와 밀과 黑麴으로 蒸溜式 燒酒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두어 해 팔았지만 損害만 봤고, 酒酊을 사다가 稀釋式 燒酒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이것도 別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런 渦中에 외상술값이 걷히지 않아 釀造場이 不渡가 나는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든 아버지가 代表로 있는 釀造場이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지 않게 해야 했다. 권종옥氏는 妻男과 함께 共同出資 形式으로 아버지의 釀造場을 引受해 釀造場 事業을 이어가게 됐다.

    그 後 1972年에 政府 施策에 따라 김포시에 있던 다섯 個 釀造場, 卽 하성釀造場, 白鷺釀造場, 통진釀造場, 糧穀釀造場, 臺串釀造場이 金浦濁酒統合으로 統廢合됐다. 그 뒤로 1990年 初盤까지 막걸리 事業은 잘 運營됐으나 2000年代 들어 赤字 身世가 되면서 門을 닫게 됐다.

    1925年에 지어졌다던 80坪(264m2) 規模의 金星釀造場 木造建物은 6·25 때 불타버리고 없다. 人民軍들이 根據地가 된다고 여겨 釀造場을 包含한 周邊 建物들이 모두 불태워졌다. 그 뒤 새로 지어진 하성釀造場 建物도 都市計劃으로 只今은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1972年 김포시의 5個 釀造場이 합쳐져 세워진 金浦濁酒統合 釀造場은 새로 하성면 양택리에 자리 잡게 됐다. 그곳에 只今 김포금쌀濁操 釀造場이 새 建物을 짓고 들어서 있다.

    권이준氏는 할아버지 권성규氏와 아버지 권종옥氏가 하던 釀造場을 家業으로 다시 살리려는 努力의 하나로 김포금쌀濁酒 釀造場 이름 뒤에 (舊)金浦濁酒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권이준氏는 막걸리學校를 다니면서 두 가지에 對해서 좀 더 確固한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大企業 濁酒와 맞서려면 地域 名品쌀로 빚어야

    첫째는 막걸리의 差別性을 얻기 위해서 地域의 名品쌀로 막걸리를 빚어야 한다는 點이다. 서울濁酒나 大企業 濁酒 等과 競爭해서 살아남는 길은 差別化인데, 그것을 위해 地域 名品쌀로 빚는 것부터 始作하기로 했단다. 勿論 只今도 一般 쌀로 빚어 서울濁酒나 大企業 막걸리와 價格競爭을 벌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苦悶을 거듭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좋은 쌀로 빚은 名品 막걸리를 언젠가는 世上이 알아줄 것이라 믿고 있다.

    둘째는 工場의 2層에 막걸리 빚기 體驗場을 마련한 것이다. 建物 設計圖에는 없었지만, 막걸리學校를 다니면서 막걸리學校 學生들이 찾아와 試飮度 하고 實習도 하는 空間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部分을 補充했다고 한다.

    권이준氏는 合同으로 하던 釀造場을 廢業한 지 4年 만에 다시 金浦 땅에 막걸리 釀造場을 차려 술을 빚게 되면서, 아버지로부터 “술맛 좋다”는 稱讚을 들을 때 正말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다. 김포금쌀 막걸리가 安定된 流通構造를 確保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빚던 金浦特酒와 合奏도 되살려내고 싶다고 한다. 所聞으로만 남았던 金浦特酒를 맛볼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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