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0원 속 退溪 李滉만 폭삭 늙어버린 까닭|新東亞

1000원 속 退溪 李滉만 폭삭 늙어버린 까닭

[名作의 祕密]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大學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3-04-11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紙幣 人物 그림, 時代 莫論하고 論難

    • 李滉 빼고는 威嚴 있는 貨幣 속 人物들

    • 貨幣 속 人物像 두고 政治·宗敎·理念 葛藤

    • 3番이나 다시 만든 1萬 원券

    • 金九 肖像 10萬 원券과 大東輿地圖

    [Gettyimage]

    [Gettyimage]

    우리나라 貨幣에는 大部分 歷史 爲人의 肖像이 그려져 있다. 그 人物과 關聯된 文化財도 함께 그려 넣는다. 5萬 원券에는 申師任堂 初喪이, 1萬 원券에는 世宗大王의 肖像이, 5000원券에는 栗谷 李珥의 肖像이, 1000원券엔 退溪 李滉의 肖像이, 100원 鑄貨엔 李舜臣 初喪이 登場한다.

    그런데 人物 肖像畫를 놓고 심심치 않게 論難이 인다. 얼굴 모습을 問題 삼기도 하고, 關聯 文化財가 適切한지에 對한 論難도 생긴다. 人物을 두고 贊反 意見이 갈리기도 한다.

    5萬 원券 申師任堂 肖像畫 品格 論難

    最近 100원 鑄貨에 登場하는 李舜臣의 肖像畫를 둘러싸고 著作權 侵害 訴訟이 進行 中인 事實이 알려졌다. 이 李舜臣 肖像은 韓國畫家 장우성(1912~2005)李 1975年에 그린 것으로, 1983年부터 100원짜리 鑄貨에 使用됐다. 그런데 後孫들이 “韓國銀行이 同意 없이 그림을 使用했다”며 訴訟을 提起한 것이다. 韓國銀行은 1975年 當時 이미 製作費를 支給했다고 反駁하고 있다. 한便으로는 興味롭고 한便으로는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 最高額券인 5萬 원券의 申師任堂 肖像을 두고는 이런 일이 있었다. 5萬 원券은 2009年 6月 처음 發行됐고, 申師任堂 肖像은 韓國畫家인 이종상 前 서울大 敎授가 그렸다. 發行에 앞서 5萬 원券 디자인이 公開됐는데 2009年 3月 서지문 當時 고려대 英文科 敎授가 한 日刊紙에 申師任堂 肖像을 問題 삼는 칼럼을 揭載했다. 그 칼럼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5만 원권에 그려진 신사임당 초상을 두고 품격 논란이 불거졌다. [동아DB]

    5萬 원券에 그려진 申師任堂 肖像을 두고 品格 論難이 불거졌다. [東亞DB]

    “最近에 公開된 새 5萬 원券에 쓰일 申師任堂의 肖像畫를 보고 매우 衝擊을 받았다. 人品과 雅量과 才能과 德性이 저절로 배어 나오는, 理想化된 모든 韓國 女性의 모습이 全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였다. 나의 느낌으로는 그 肖像畫는 이렇다 할 個性이나 魅力이 없는, 텔레비전 史劇에 ‘洞네아낙’이나 酒幕집 酒母 役으로 나오면 알맞을 女性의 얼굴이다. (…) 또 한 사람의 爲人이 格下되어 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徐 敎授는 이 글에서 이종상 畫伯의 申師任堂 肖像畫를 형편없는 作品으로 評價했다. 申師任堂의 品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當時 徐 敎授에게는 머릿속에 그려왔던 申師任堂의 이미지가 있었던 模樣이다. 人品 있고 德性 있고 雅量 있는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종상 畫伯이 그려낸 모습이 自身이 생각했던 이미지와 달라 批判했을 것이다.

    이러한 批判은 사람들을 難堪하게 한다. 이종상 畫伯의 申師任堂 肖像이 어떤 點에서 人品이 없고 德性이 없으며 雅量이 없는지 알 수가 없다. 洞네 아낙이나 酒母는 品格이 없고 雅量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洞네 아낙이나 酒母들은 매우 섭섭하지 않을까. 大體 어떤 얼굴이 人品 있고 德性 있는 얼굴인지, 어떤 얼굴이 品格 없는 酒母의 얼굴인지 客觀的 基準이 있어야 할 텐데 이 基準을 잡기는 不可能하다. 徐 敎授의 見解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見解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 貨幣를 보면 모두 朝鮮時代 人物의 肖像이 登場한다. 李舜臣, 李珥, 李滉, 世宗大王, 申師任堂. 이 가운데 申師任堂과 이이는 帽子(母子) 사이다. 우리나라 現行 貨幣에 登場하는 人物이 5名인데 그 가운데 2名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라는 건 아무리 偉大한 人物들이라고 해도 多少 衡平에 맞지 않는 것 같다.

    威嚴 없이 핼쑥한 1000원 속 李滉 肖像

    貨幣 속 登場人物 5名의 共通點이 있다. 現在의 우리가 그 實際 얼굴을 알 수 없다는 事實. 그들의 實物 肖像畫나 寫眞이 傳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貨幣에 登場하는 얼굴은 모두 想像으로 그린 것이다. 想像의 産物이다 보니 論難이 日數밖에 없다.

    5萬 원券 申師任堂 肖像은 2009年 이종상 畫伯이, 1萬 원券 世宗大王 肖像은 1975年 김기창 畫伯이, 5000원券 李珥 肖像은 1975年 이종상 畫伯이, 1000원券 李滉 肖像은 1974年 李惟台 畫伯이, 100원 주화 李舜臣 肖像은 1975年 장우성 畫伯이 그렸다.

    貨幣는 수많은 사람이 每日每日 使用하는 所重한 存在다. 大韓民國 貨幣는 大韓民國의 象徵이다. 貨幣에 登場하는 人物은 歷史 속 偉大한 人物이어야 하고, 그 人物의 肖像도 威嚴과 權威를 담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通念이고 慣例다.

    그런데 위인 5人은 우리가 實際 얼굴을 알 수가 없다. 實物이 確認된 人物이라면 그 實物에 맞게 그리면 될 텐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結局 畫家가 想像力을 動員해 該當 人物의 肖像畫를 그려야 한다. 畫家는 對象 人物의 業績과 稟性 等을 硏究해야 한다. 그 人物의 身體 特徵 等에 關한 記錄이 남아 있다면 그것도 參考해야 한다. 畫家 自身이 생각하는 對象 人物의 特徵과 魅力, 對中(國民)李 생각하는 特徵과 魅力, 歷史的 位相 等도 考慮해야 한다.

    1000원권 구권과 신권에 그려진 퇴계 이황의 초상. [동아DB]

    1000원券 舊券과 神權에 그려진 退溪 李滉의 肖像. [東亞DB]

    이런 過程을 거쳐 誕生한 貨幣 속 人物 肖像은 大體로 威嚴이 있고 넉넉하다. 李舜臣, 李珥, 世宗大王, 申師任堂의 얼굴이 그러하다. 李舜臣, 李珥, 世宗大王, 申師任堂 얼굴은 分明 서로 다르지만 雰圍氣가 비슷하다. 그런데 1000원券은 다르다. 여기 登場하는 李滉의 얼굴은 雰圍氣가 全혀 다르다. 얼굴은 蒼白하고 핼쑥하다. 어떤 기운(힘)을 느낄 수가 없다. 甚至於 病色이 있어 보일 程度다.

    얼굴 形態도 形態이지만 視線(視線)에서도 그렇다. 李舜臣, 李珥, 世宗大王, 申師任堂 4人의 視線은 모두 正面 또는 若干 위쪽을 向하고 있다. 그 視線은 比較的 堂堂하다. 그러나 李滉의 視線은 살짝 아래쪽을 向하고 있다. 지쳐 보이는 視線이라고 할까. 우리가 생각해온 威嚴과 謹嚴은 찾아볼 수 없다. 朝鮮時代 最高 性理學者 李滉의 얼굴이, 벼슬을 마다하고 安東에서 學問에 精進했던 李滉의 얼굴이 이렇게 핼쑥하고 지쳐 있는 모습이란 말인가. 1000원 卷에서 만나는 李滉의 모습은 우리의 通念과 期待에서 完全히 벗어나 있다.

    李滉의 모델은 다름 아닌 李惟台?

    1000원권 이황 초상을 그린 이유태 화백. [동아DB]

    1000원券 李滉 肖像을 그린 李惟台 畫伯. [東亞DB]

    이 肖像畫를 그린 사람은 韓國畫家 李惟台(1916~1999)다. 李惟泰는 1940年代 彩色 人物畫를 즐겨 그렸다. 特히 새로운 觀點과 新鮮한 構圖로 近代期 女性들의 日常을 세련되고 섬세하게 表現한 彩色畫家 두드러진다. 가장 익숙한 그의 代表作은 ‘和音’(1944) ‘探究’(1944)를 들 수 있다. 모두 國立現代美術館 所藏品으로, 近代美術史 展示에 단골로 紹介되는 作品들이다. ‘和音’은 西歐式 室內空間에 앉아 있는 韓服 입은 女性의 모습을 담았고, ‘探究’는 大學病院 實驗室에서 일하는 가운 입은 女性을 담았다. 20世紀 全般 近代期 女性들의 變化하는 日常을 보여주는 흥미롭고 魅力的인 作品이다.

    李滉 肖像은 李惟台가 1974年 1000원券 貨幣 圖案用으로 그린 것이다. 自身의 想像力과 考證을 土臺로 그렸을 텐데, 李滉의 얼굴은 生氣가 不足하고 지쳐 보인다. ‘和音’ ‘探究’처럼 新鮮하고 挑戰的인 그림을 그린 李惟台였다. 하지만 李滉 肖像에서는 그런 面貌를 찾아볼 수가 없다. ‘和音’ ‘探究’를 그릴 때는 그의 나이가 30代 말이었지만 李滉 肖像을 그릴 때는 60代 말이었기 때문일까.

    1000원券 李滉 肖像의 미스터리와 關聯해 흥미로운 事實이 있다. 李滉의 얼굴이 李惟台의 末年의 모습(옆모습 寫眞)과 相當히 恰似하다는 點이다. 이 대목에서 “畫家들이 不特定 얼굴을 그릴 때 自身의 얼굴을 담아내는 傾向이 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냐”고 反問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客觀的인 根據를 提示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事例를 種種 發見하게 된다. 不特定 人物化를 그렸을 때 畫家의 얼굴을 聯想시키는 境遇다. 甚至於 어떤 畫家가 그린 伴侶動物이 그 畫家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特定 對象의 肖像을 그릴 때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1000원券 李滉의 얼굴이 李惟台의 얼굴이라고 斷言하는 이들도 있다. 事實 李滉 肖像畫를 보면, 李惟台 末年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여러 可能性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李惟台가 李滉의 모습을 探究해 判斷한 結果物이 只今 1000원券의 얼굴일 可能性. 그것이 偶然히 自身의 얼굴 모습과 닮았을 수 있다. 둘째, 李惟台가 意圖的으로 自身의 얼굴을 李滉의 얼굴로 表現했을 可能性. 그러나 李惟台가 이와 關聯해 記錄을 남기지 않았기에 무엇이라고 斷言할 수는 없다.

    軍部 政權이 願하는 文人 모습 投影했을지도

    1000원券 李滉의 얼굴을 두고 朴正熙 政權의 文人 이미지를 表現한 것으로 보는 見解도 있다. 최재목 영남대 敎授는 “강인, 剛健, 嚴肅, 嚴格 或은 溫和 等과는 좀 距離가 있어 보이며, 病色이 짙고 疲困해 보이고 文弱, 謙遜 等의 槪念과 통하는 듯하다”고 指摘한 바 있다(최재목, ‘退溪上의 變貌’, 2011). 여기서 ‘文弱’이라는 單語가 눈길을 끈다. 文弱은 ‘글에만 熱中하여 精神的으로나 身體的으로 懦弱한 狀態’를 뜻한다. 崔 敎授의 說明을 좀 더 들어보자.

    “아마도 이 標準 影幀이 만들어진 1970年代 朴正熙 政權期에는 武人으로서 李舜臣, 文人으로서 李退溪처럼, 一旦 文武의 區分이 뚜렷이 反映되어 있었다. 文人은 文人 나름의 아이덴티티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武的 要素와 距離를 두는 데서 出發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日帝强占期나 解放 直後의 肖像畫를 통해서 보았던 氣魄, 雄壯함, 剛健함은 모두 軍人-無人 쪽으로 吸收돼 버렸고, 그런 狀態에서 要請·企劃된 退溪의 이미지는 오히려 武나 權力, 政治的 派黨과 關聯이 없는 (그런 境地를 넘어선) ‘國民的 老人·어른=國老’로서, 더욱이 ‘無言=沈默’으로서만 그 자리를 지켜야 할 분이 아니었을까. 아마 그는 이 當時 그런 位相에 맞는 柚子·선비로서 共感하였음에 틀림없다.”

    李惟台가 이 肖像을 그린 1974年은 朴正熙 政權이 忠武公 李舜臣을 民族의 英雄으로 드높일 때다. 崔 敎授의 見解에 따르면, 當時 政權은 氣魄, 剛健, 威嚴은 李舜臣(無)의 이미지로 넘기고 代身 李滉(門)은 어른(老人), 沈默의 이미지로 表現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李滉의 얼굴이 저렇게 壅塞하고 지친 모습이라는 것이다. 興味로운 解釋이다. 政治的·이념적으로 보면 이러한 解釋이 適切한 것 같다. 이런 解釋이 可能하려면 李惟台가 朴正熙 政權이나 韓國銀行으로부터 그런 注文을 받았다는 事實을 立證해야 한다. 그런데 現在로선 確認할 길이 없다. 1000원券 貨幣의 李滉 肖像은 이렇게 우리의 好奇心을 刺戟하며 다양한 論難을 불러일으킨다.

    人物 옆 그림까지 論難거리

    그렇다고 貨幣 디자인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디자인을 새로 定하거나 바꾸는 過程에서도 論難이 일기 때문이다. 1972年 처음으로 1萬원券을 만들 때였다. 韓國銀行은 苦心 끝에 우리나라 最高의 文化財인 石窟庵 本尊佛과 佛國寺 圖案을 넣기로 決定했다. 當時는 貨幣에 文化財 圖案을 넣는 것이 慣行이었다. 디자인을 마치고 詩刷品(試刷品)을 만들어 朴正熙 大統領의 署名을 받았다. 이어 發行 公告까지 마쳤다. 그런데 豫想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基督敎界에서 “佛敎 文化財인 石窟庵과 佛國寺를 1萬 원券에 表現하는 것은 特定 宗敎를 斗頓하는 일”이라고 反撥하고 나선 것. 反對가 그치지 않자 韓國銀行은 結局 發行을 抛棄했다.

    영국 토머스 델라루사(社)가 그린 퇴계 이황과 세종대왕. [이광표]

    英國 토머스 델라루사(社)가 그린 退溪 李滉과 世宗大王. [이광표]

    國內 最初의 1萬 원券 發行은 어이없이 霧散됐고, 이듬해인 1973年 世宗大王 初喪과 景福宮 勤政殿을 넣는 것으로 바꿔 새 1萬 원券을 만들었다. 그런데 또다시 일이 터졌다. 當時엔 國內의 貨幣 製作 技術이 不足해 英國의 專門業體인 토머스 델라루사(社)에 5000원券과 1萬 원券의 製作을 依賴했다. 英國 業體는 세종대왕과 李珥의 얼굴을 西歐的으로 表現하고 말았다. 英國人 視角으로 韓國人을 그리다 보니 英國人처럼 表現한 것이다.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反撥이 커지자 韓國銀行은 1975年 김기창 畫伯에게 世宗大王 肖像을 依賴해 1萬 원券을 다시 만들었고, 이종상 畫伯에게 李珥 肖像을 依賴해 5000원券을 다시 製作했다.

    2008年엔 이런 일도 있었다. 5萬 원券과 10萬 원券 發行을 準備하고 있을 때였다. 10萬 원券은 앞面에 白凡 金九의 初喪과 상하이 臨時政府 要人의 團體寫眞을, 뒷面에 大東輿地圖와 盤龜臺 巖刻畫를 圖案해 넣기로 했다. 그런데 當時 日本의 獨島 侵奪 野慾이 社會的 이슈로 浮上하면서 한바탕 ‘獨島 論難’이 일었다. 大東輿地圖에 獨島를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둘러싼 論難이었다. 當時 “10萬 원券 紙幣에 우리나라 地圖를 넣으면서 獨島가 빠진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大東輿地圖 原本에 獨島가 없더라도 10萬 원券엔 特別히 獨島를 넣어야 한다”는 主張이 提起됐다. 그래야만 世界 사람들이 우리 貨幣를 使用하면서 ‘獨島는 日本 땅이 아니라 韓國 땅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主張이었다.

    이에 對한 反論도 나왔다. “大東輿地圖에 없는 獨島를 追加한다는 것은 一種의 文化財 歪曲이다. 大東輿地圖에 獨島를 넣지 않는다고 해서 獨島가 日本 땅이 되는 것은 決코 아니다”라는 反論이었다. 만만치 않은 論難이었다. 韓國銀行으로선 어느 쪽을 選擇해야 할지 難堪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에 앞서 이미 金九가 10萬 원券에 適切한 人物인지를 놓고 論難을 經驗한 바 있었기에 韓國銀行은 10萬 원券 發行을 아예 無期限 延期해 버렸다. 貨幣 디자인은 이렇게 늘 敏感하다.

    1000원券 李滉의 肖像으로 돌아가 보자. ‘和音’과 ‘探究’의 畫家 李惟泰는 李滉의 얼굴을 왜 저리도 壅塞하게 그렸을까. 저 얼굴은 正말로 李惟台 自身의 얼굴일까. 참으로 궁금하다. 或是, 平生 學問에 邁進한 朝鮮時代 老學者의 얼굴이 저런 모습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모습이 더 眞率하고 人間的인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알 듯 모를 듯하다. 大體 저 얼굴의 實體는 무엇이란 말인가. 1000원짜리 紙幣를 자꾸만 들여다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