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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壽根·李仲燮·金煥基 作品 속 女人의 香氣|新東亞

朴壽根·李仲燮·金煥基 作品 속 女人의 香氣

[名作의 祕密] 香내 그윽하며 山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學部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3-09-0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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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완서를 小說家로 만든 朴壽根

    • 李仲燮의 永遠한 그리움 마사코

    • 金煥基 成功 뒤엔 김향안 있다

    왼쪽부터 박수근·이중섭·김환기. [뉴시스, 국립현대미술관, 뉴스1]

    왼쪽부터 朴壽根·李仲燮·金煥基. [뉴시스, 國立現代美術館, 뉴스1]

    世界에서 가장 人氣 있는 美術 作品을 꼽으라면 斷然 ‘모나리자’(루브르博物館 所藏)다. 가장 人氣 있는 畫家를 꼽으라면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일 것이다. 가장 人氣 있는 流派로는 印象派를 擧論하는 사람이 많을 테다.

    가장 人氣 있는 韓國 畫家와 作品은 어떨까. 最高 人氣作 하나를 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가장 人氣 있는 畫家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건 어느 程度 可能할 것 같다. 아마도 朴壽根, 李仲燮이 雌雄을 겨루지 않을까. 그런데 最近 새로운 强者가 나타났다. 金煥基다.

    朴壽根(1914~1965), 李仲燮(1916~1956), 金煥基(1913~1974). 이들은 비슷한 點이 많다. 1910年代 初中盤에 태어났고 美術에 一生을 걸었다. 이들 모두 創意的이고 魅力的인 美術 世界를 構築해 韓國 近現代美術에서 人氣 있는 畫家가 됐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作品은 비싼 값에 팔린다. 勿論 差異點도 적지 않다. 그 共通點과 差異點은 그들의 美術(朴壽根의 韓國籍 素朴함, 李仲燮의 激情的 그리움, 金煥基의 點의 哲學的 思惟)과 어떤 影響을 주고받았을까.

    ‘羅牧’에 靈感 준 그림

    朴壽根은 1914年 江原 楊口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집안 事情 때문에 初等學校를 마치고 中學校에 進學하지 못했다. 혼자서 돈을 벌어가며 프랑스 畫家 장 프랑수아 밀레를 롤 모델 삼아 獨學으로 美術을 工夫했다. 밀레 亦是 가난한 農夫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만종’ ‘이삭 줍는 女人들’을 그린 有名 畫家가 됐다.

    光復 直後 朴壽根은 江原 金星(只今의 北韓 江原道 金化郡)의 中學校에서 美術敎師로 일했다. 그러던 中 1950年 6·25戰爭이 勃發하자 朴壽根은 家族과 함께 南쪽으로 脫出을 試圖했다. 그러나 失敗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金星으로 돌아갔고, 朴壽根 홀로 脫出해야 했다. 以後 群山 等에서 埠頭 勞動을 하며 家族과 再會를 渴望했다. 1952年 드디어 아내가 두 子女와 함께 脫出에 成功했고, 朴壽根은 서울 창신동에서 家族과 劇的으로 다시 만났다. 窮乏한 時節이었지만, 마음의 安定을 찾은 朴壽根은 그림을 熱心히 그렸다.



    朴壽根은 知人의 紹介로 1953年 美軍部隊 PX(只今의 서울 中區 신세계백화점 本店 建物)에서 1年 동안 美軍의 肖像畫를 그렸다. 그 무렵 PX에서 店員으로 勤務한 사람 中 박완서가 있었다. 그림에 死力을 다한 朴壽根은 健康 惡化로 1965年 5月 世上을 떠났다. 그해 10月 朴壽根 遺作展이 열렸다.

    박수근의 나목 연작 중 하나인 ‘나무와 두 여인’. [동아DB]

    朴壽根의 羅牧 聯作 中 하나인 ‘나무와 두 女人’. [東亞DB]

    平凡한 家庭主婦이던 박완서는 偶然히 新聞記事를 통해 朴壽根의 遺作展 消息을 接했다. 박완서는 가난하고 힘겹던 6·25戰爭 時節, 職場 同僚이던 朴壽根을 떠올렸다. 遺作展은 서울 소공동 中央公報官에서 열렸다. 박완서는 그 展示를 보러 갔다. 朴壽根 特有의 앙상한 나무 그림을 다시 만났다. 박완서는 그 나무를 보고 ‘말라 죽어가는 古木(枯木)李 아니라 곧 싹이 올라올 羅牧(裸木)’이라고 생각했다. 絶望이 아니라 希望이었다. 朴壽根의 나무 그림은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박완서의 創作慾을 刺戟했다. 박완서는 朴壽根과 나무 그림을 모티프 삼아 長篇小說을 썼다. 그것이 1970年 ‘여성동아’ 長篇小說 公募 當選作 ‘羅牧’이다. 그때 박완서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朴壽根의 그림과 박완서의 ‘羅牧’은 닮은꼴이다. 꾸밈없이 반듯하고 정갈하다고 할까. 박완서가 小說家가 된 것은 朴壽根 德分이었고, 朴壽根은 박완서 德分에 더 有名해졌다. 흥미롭고 魅力的인 因緣이 아닐 수 없다.

    家族을 그리며 名作 쏟아내다

    李仲燮은 1916年 平南 平原의 富裕한 家庭에서 태어났다. 1936年 日本으로 留學을 떠나 제국미술학교(只今의 무사시노美術大學) 西洋畫科를 다녔다. 1年 뒤 自由奔放한 雰圍氣의 도쿄文化學院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日本人 後輩 野먀모토 마사코(山本方子·1920~2022)를 만났다.

    이들은 1945年 只今의 北韓 地域인 講院 元山에서 結婚式을 올렸다. 李仲燮은 마사코에게 이덕남(李德南)이라는 韓國 이름을 붙여주었다. 南쪽에서 온 德이 많은 女性이라는 뜻이다. 結婚 5年 뒤 6·25戰爭이 勃發하자 家族과 함께 越南했다. 釜山을 거쳐 1951年 濟州 西歸浦로 들어갔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西歸浦의 單칸房에서, 가난했지만 家族과 함께 幸福하게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의 가족들. 왼쪽부터 장남 태현, 차남 태성, 부인 마사코. [동아DB]

    李仲燮의 家族들. 왼쪽부터 長男 태현, 次男 태성, 否認 마사코. [東亞DB]

    問題는 가난이었다. 釜山으로 다시 나온 李仲燮은 1952年 生活苦 打開策의 一環으로 夫人과 두 아들을 日本으로 보내야 했다. 李仲燮은 統營, 大邱 等地를 轉轉하면서 어렵게 그림을 그렸다. 日本의 家族을 만나러 갈 希望으로 안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팔아 旅費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1953年 겨우 며칠 동안만 日本에 다녀왔을 뿐이었다. 至毒한 그리움 속에서 그림은 그려냈지만 가난과 病을 이겨내진 못했다. 結局 1956年 悲劇的으로 삶을 마감했다.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無緣故者로 生을 마친 것이다. 李仲燮은 서울 중랑구 忘憂歷史文化公園(옛 망우리共同墓地)에 묻혀 있다. 夫人 이덕남은 2022年 日本에서 生을 마쳤다.

    朴壽根은 1952年 서울에서 家族을 다시 만났다. 그러나 같은 해 李仲燮은 日本으로 家族을 떠나보내야 했다. 朴壽根과 李仲燮에게 1952年은 克明하게 엇갈리는 運命의 時間이었다.

    뉴욕에 묻히다

    金煥基는 1913年 全南 新安 安佐島의 富者집에서 태어나 10代 때 日本으로 留學을 떠났다. 留學 中이던 1932年, 金煥基는 故鄕으로 暫時 돌아와 婚禮를 치렀다. 아버지의 强要에 따른 結婚이었다. 다시 日本으로 건너간 그는 日本大學 藝術科를 다니면서 美術 創作에 邁進했다. 아버지 他界 後 金煥基는 夫人과 헤어졌다. 以後 엘리트 新女性 김향안(1916~2004)을 만나 1944年 再婚했다. 김향안의 本名은 변동림이었다.

    변동림度 再婚이었다. 변동림은 1936年 詩人 李箱과 結婚했지만 以上의 갑작스러운 日本行과 죽음으로 혼자가 됐다. 以後 변동림은 金煥基와 사랑에 빠졌고 結婚 後엔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었다. 6·25戰爭이 끝나자 金煥基는 西洋美術의 本고장 프랑스를 꿈꾸기 始作했다. 아내 김향안은 그 꿈을 實現해주고자 했다. 프랑스語를 工夫하고 1955年 먼저 프랑스로 건너가 아틀리에를 마련하는 等 金煥基가 파리에서 美術 活動을 할 수 있는 土臺를 마련해 주었다. 이듬해 金煥基가 파리에 入城했다. 以後 3年間 파리에서 6番의 個人展과 多數의 그룹展에 參加했다. 이때를 ‘金煥基의 파리 時代’라 한다. 1963年 金煥基가 다시 뉴욕 藝術界에 挑戰. 金煥基의 뉴욕 時代 抽象化도 誕生할 수 있었다. 김향안은 이 過程에서 男便 金煥基를 積極的으로 도왔다.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 [동아DB]

    金煥基의 夫人 김향안. [東亞DB]

    金煥基는 1974年 뉴욕에서 生을 마쳤다. 以後 김향안은 換氣美術財團을 設立하고, 1992年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웠다. 金煥基의 美術科 金煥基의 現在 人氣는 夫人 김향안이 없었다면 不可能했을 것이다. 김향안은 2004年 뉴욕에서 生을 마치고 뉴욕의 金煥基 옆에 묻혔다.

    세 사람이 지닌 삶의 來歷과 因緣의 痕跡은 그들의 作品에 그대로 나타난다. 朴壽根의 그림은 素朴하고 정갈하다. 가난한 이웃에 對한 愛情과 憐憫이 잘 드러난다. 그러한 마음과 雰圍氣를 바위 같은 質感을 통해 表現했다. 거칠지만 便安한 저 花崗巖의 表面, 바위의 質感은 韓國의 庶民的 情緖를 極大化해 준다.

    因緣의 痕跡

    李仲燮의 그림은 到處에 그리움이 녹아 있다. 家族에 對한 李仲燮의 그리움은 種種 激情的이다. 至毒한 그리움이라고 할까. 그리움 때문인지, 特有의 붓 터치는 個性的이고 强烈하다.

    李仲燮이 즐겨 그린 황소를 두고 韓民族을 象徵한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 하지만 그 황소 그림마저 李仲燮의 그리운 內面을 表現한 것이다. 어딘가로 向하는 소, 家族이 탄 달구지를 끌고 가는 소. 모두 家族을 向한 그리움이다. 싸우는 소, 지쳐 있는 소도 그렇고, 황소의 슬픈 눈망울도 그리움에 지쳐가는 李仲燮의 自畫像이라고 할 수 있다.

    金煥基의 그림은 朴壽根, 李仲燮의 그림과 雰圍氣가 다르다. 金煥基 作品은 土俗的 色彩에서 벗어나 있다. 東洋과 西洋이 만나고 構想과 抽象이 만난다. 또한 人間 存在에 對한 哲學的 探究가 드러난다. 그 省察과 探究의 結果物이 바로 點의 抽象化다. 그에게 點은 人間이고 生命이며 별이고 宇宙다. 그렇기에 金煥基의 點은 哲學的이면서 省察的이다.

    朴壽根, 李仲燮, 金煥基의 그림은 모두 人間的이고 原初的이지만 具體的으로 發現하는 樣式은 서로 다르다. 朴壽根은 우리의 가난한 이웃으로 드러냈고, 李仲燮은 至毒한 그리움으로 表現했다. 金煥基는 그것을 哲學的 思惟와 點으로 具現했다. 그들의 삶의 來歷과 因緣의 痕跡이 서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朴壽根의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련하게 한다. 李仲燮의 그림은 무언가 우리 內面을 꿈틀거리게 한다. 金煥基의 그림은 무언가 哲學的으로 省察하게 한다. 事實 普通 사람들에겐 金煥基의 抽象畫보다 李仲燮이나 朴壽根의 그림이 좀 더 便安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李仲燮과 朴壽根의 作品이 더 大衆的인 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最近 들어 金煥基에 對한 認識이 많이 달라졌다. 金煥基 그림의 魅力을 새롭게 發見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點은 最近의 美術 競賣市場에서 克明하게 나타나고 있다.

    3大 블루칩

    서울옥션은 韓國의 代表的 美術 競賣 會社다. 서울옥션이 생긴 것은 1998年. 이 德分에 2000年代 들어 國內에서도 美術品·文化財 競賣라는 것이 조금씩 익숙해지기 始作했다. 2001年 4月, 謙齋 鄭敾의 1755年作 ‘老松領地度(老松靈芝圖)’가 서울옥션 競賣에서 7億 원에 落札됐다. 當時 國內 美術品 競賣 最高價 新記錄이었다. 이 消息은 世上을 놀라게 하면서 話題가 됐다.

    當時 美術 競賣市場은 古美術이 主導했다. 最高價 新記錄도 當然히 古美術 차지였다. 2004年 12月 靑瓷象嵌梅花대나무새무늬梅甁이 10億9000萬 원, 2006年 2月 白瓷鐵火구름龍무늬缸아리가 16億2000萬 원으로 競賣 最高價 新記錄을 세웠다.

    古美術이 美術 競賣市場을 主導하던 雰圍氣를 깬 것은 朴壽根의 作品이었다. ‘老松領地度’가 7億 원에 落札된 2001年 9月, 朴壽根의 ‘앉아 있는 女人’李 4億6000萬 원에 팔렸다. 朴壽根의 人氣를 보여주는 만만치 않은 價格이었다. 以後 朴壽根 作品의 競賣 落札價는 꾸준히 上昇했다. 2002年 3月엔 ‘草家’가 4億7500萬 원에 落札됐고, 같은 해 5月엔 ‘아이 업은 少女’가 5億500萬 원에 落札됐다. 2005年 11月엔 ‘나무와 사람들’李 7億1000萬 원, 2005年 12月엔 ‘市場의 女人’李 9億 원에 팔렸다.

    2007年 3月엔 ‘市場의 사람들’李 25億 원에 去來돼 當時 國內 美術品 競賣 最高價 新記錄을 作成했다. 그러곤 2007年 5月 ‘빨래터’가 45億2000萬 원에 落札되면서 두 달 만에 最高價 新記錄을 갈아치웠다. 이렇게 2000年代 前半期는 朴壽根 作品의 落札價가 急上昇하면서 美術市場을 主導한 時期였다.

    박수근 작품 중 최고가에 낙찰된 ‘빨래터’. [박수근미술관]

    朴壽根 作品 中 最高가에 落札된 ‘빨래터’. [朴壽根美術館]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 전시된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 [동아DB]

    서울 龍山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어느 蒐集家의 初代 - 故(故) 李健熙 會長 寄贈 1周年 記念展’에 展示된 李仲燮의 代表作 ‘황소’. [東亞DB]

    2000年代 後半부터는 李仲燮의 作品도 꾸준히 人氣를 누렸다. 2007年 3月 서울옥션 競賣에서 ‘統營 앞바다’가 9億 원에 落札됐고, 2008年 3月엔 ‘새와 아이들’李 15億 원에 팔렸다. 2010年 ‘황소’가 35億6000萬 원, 2018年엔 또 다른 ‘황소’가 47億 원에 去來됐다. 이와 함께 2018年 ‘싸우는 소’가 14億6000萬 원에 팔리기도 했다.

    金煥基 作品의 競賣 人氣는 좀 늦게 始動이 걸렸다. 金煥基의 그림이 美術市場에서 頭角을 나타낸 것은 2000年代 中盤 무렵부터였다. 2007年 3月 ‘15-ⅩⅡ-72 #305 NewYork’李 10億1000萬 원, ‘缸아리’가 12億5000萬 원에 落札됐다. 2007年 5月엔 ‘꽃과 缸아리’가 30億5000萬 원에 팔렸다.

    金煥基의 强勢는 2010年代 中盤 들어 더욱 두드러졌다. 2015年 ‘19-Ⅶ-71 #209’가 47億2000萬 원으로 國內 美術品 競賣 最高價 新記錄을 作成했고, 以後에도 繼續 新記錄을 갈아치웠다. 2016年 ‘無題’가 48億6000萬 원, 2016年 ‘無題 27-Ⅶ-72 #228’李 54億 원, 2016年 ‘12-Ⅴ-70 #172’가 63億3000萬 원, 2017年 ‘고요 5-Ⅳ-73 #310’李 65億5000萬 원에 落札됐다. 2018年 5月엔 서울옥션 홍콩 競賣에서 ‘3-Ⅱ-72 #220’李 85億 3000萬 원에 落札되면서 驚異的인 高空 行進을 이어갔다. 그러더니 及其也 2019年 1月 크리스티 홍콩 競賣에서 ‘宇宙 5-Ⅳ-71 #200’李 132億 원에 去來됐다. 國內外 競賣 통틀어 韓國 美術品 가운데 最高價 新記錄을 세운 것이다. 巨額에 去來된 作品은 大部分 金煥基가 뉴욕 時節(1969~1974)에 그린 點 抽象化다.

    김환기가 1973년에 그린 전면 점화 ‘하늘과 땅 24-Ⅸ-73 #320’. [호암미술관]

    金煥基가 1973年에 그린 全面 點火 ‘하늘과 땅 24-Ⅸ-73 #320’. [호암미술관]

    僞作의 逆說

    朴壽根, 李仲燮, 金煥基는 假짜 作品이 많기로도 有名하다. 僞作이 많다는 것은 이들의 作品이 人氣가 있고 돈이 된다는 것을 傍證한다. 特히 李仲燮 僞作이 가장 많다. 2002年 한국화랑협회가 “20年 동안 依賴받은 作品 2500餘 點의 眞僞를 鑑定한 結果, 李仲燮의 그림 中 約 75%가, 朴壽根·金煥基·千鏡子의 그림 中 約 40%가 假짜였다”고 發表한 바 있다. 僞造犯들은 李仲燮 作品이 模倣하기에 가장 쉽다고 여기는 것 같다.

    2005年 朴壽根, 李仲燮 僞造 作品 事件이 터졌다. 當時 한 競賣에 나온 李仲燮의 作品 ‘물고기와 아이’에 對해 假짜라는 疑惑이 提起됐다. 特히 問題의 作品을 李仲燮의 아들이 所藏해 왔다는 點에서 世間의 耳目이 集中됐다. 李仲燮과 朴壽根의 作品을 大量으로 所藏한 金某 氏(當時 韓國古書硏究會 拷問)가 連累되면서 波紋은 더욱 擴散됐다.

    假짜라고 判斷한 韓國美術品感情協會와 朴壽根의 아들, 眞짜라고 主張한 李仲燮의 아들과 金某 氏가 及其也 서로 檢察에 告訴하는 地境에 이르렀다. 檢察의 搜査 結果 ‘물고기와 아이’는 假짜로 드러났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金某 氏가 갖고 있던 李仲燮·朴壽根 作品 2800餘 點이 모두 假짜로 밝혀졌다는 事實이었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僞作을 만들어 世上을 속이고 一攫千金을 노린다. 그 主要 對象이 朴壽根, 李仲燮, 金煥基다. 人氣 有名 畫家의 宿命이라고 할까. 오랫동안 近現代美術을 鑑定해 온 송향선 嘉藍畫廊 代表는 最近 ‘美術品 減點과 僞作’이라는 冊을 냈다. 朴壽根, 李仲燮, 金煥基 僞作의 感情 事例를 흥미롭게 紹介한 冊이다. 여기서 著者는 “僞作에는 香氣가 없다” “비슷한 것은 假짜다” “振作은 山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朴壽根, 李仲燮, 金煥基의 振作은 香氣 그윽하며 山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는 意味다.

    삶의 歷程

    朴壽根, 李仲燮, 金煥基 이 세 畫家의 展示는 예나 只今이나 자주 열린다. 2021~2022年에도 國立現代美術館은 ‘朴壽根: 봄을 기다리는 羅牧’과 ‘李健熙 컬렉션 特別展: 李仲燮’을 開催한 바 있다 모두 盛況이었다. 只今은 景氣 용인시의 호암미술관에서 特別展 ‘한 點 하늘 金煥基’ (9月 10日까지)가 열리고 있다. 展示의 콘텐츠도 좋고, 觀客의 反應도 뜨겁다. 急上昇한 金煥基의 人氣를 實感하고 그가 그린 作品의 魅力에 흠뻑 醉해 볼 機會다.

    東洋의 情緖가 담긴 點 抽象化를 完成한 金煥基, 바위의 質感으로 平凡한 韓國人의 情緖를 表現한 朴壽根, 特有의 힘찬 붓 터치를 통해 至毒한 그리움을 노래한 李仲燮. 이들은 어떻게 이런 世界를 創造할 수 있었을까. 알 듯 모를 듯하지만, 그들 삶의 歷程 自體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이게 바로 朴壽根, 李仲燮, 金煥基의 魅力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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