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薯童謠의 거짓말? 善花公主가 彌勒寺 세우지 않았다|신동아

薯童謠의 거짓말? 善花公主가 彌勒寺 세우지 않았다

[名作의 祕密] 두 塔 中 하나만 살아남아, 傷處도 韻致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學大學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2-11-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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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歲月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石塔

    • 2009年 解體 調査 中 舍利奉安器 發見

    • 舍宅積德 딸이 彌勒寺 建立

    복원을 거친 미륵사지 석탑의 남은 부분을 기반으로 원래 탑의 모양을 예상해 그린 겨낭도. [문화재청]

    復元을 거친 彌勒寺址 石塔의 남은 部分을 基盤으로 元來 塔의 模樣을 豫想해 그린 겨낭度. [文化財廳]

    1910년 일제가 촬영한 미륵사지석탑의 서쪽 부분. [문화재청]

    1910年 日帝가 撮影한 미륵사지石塔의 西쪽 部分. [文化財廳]

    1910年 朝鮮總督府는 全北 益山 彌勒寺 터를 調査했다. 백제 査察 彌勒寺는 사라져 그곳은 빈터였고 石塔 하나와 幢竿支柱(幢竿支柱)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찍은 寫眞이 있다. 위태로움과 悽然함이 가득한 石塔 寫眞. 石塔의 西쪽 面을 찍은 것이다. 이 塔은 元來 9層이었을 것으로 推定되는데, 寫眞 속 石塔은 꼭대기 세 個 層이 完全히 무너져 버린 狀態다. 남아 있는 部分도 4個 面 가운데 3個 麵의 相當 部分이 무너지고 한쪽 모서리 部分만 남았다.

    6層의 境遇는 4個 面 가운데 1個 面에만 돌 몇 個가 남아 있을 뿐이다. 남은 돌은 잘 버틸 수 있을지 危殆롭機만 하다. 全體的으로 보면, 塔이라기보다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것 같다. 무너진 石材들은 周邊으로 밀려나 있다. 朝鮮總督府 調査團은 當時 報告書에 “朝鮮의 石塔 가운데 가장 壯大하며 形態 亦是 至極히 아름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艱辛히 存在하는 6層의 塔身이 危殆로워 實로 危險한 狀況”이라고 적은 後 ‘保存이 가장 時急한 文化財’로 分類했다.

    5年 後인 1915年 日帝는 ‘彌勒寺塔 保存 工事’를 進行했다. 무너지고 흘러내린 石材를 整理하고 脆弱 部位를 補强했으며 무너진 傾斜面에 시멘트 콘크리트를 덧씌웠다. 彌勒寺址 石塔이 더는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應急措置를 取한 것이다. 그 後 2001年까지 國寶 彌勒寺址 石塔은 콘크리트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랫동안 보아온 國寶 미륵사지 西(西)石塔이다. 6層까지의 높이는 14.2m. 그렇다면 이 塔은 언제 어떻게 무너져 내린 것일까. 只今은 어떤 狀態인가.

    木塔 樣式 石塔의 悲哀

    益山 彌勒寺址 石塔은 現存하는 우리나라 傳統 石塔 가운데 가장 오래됐고, 가장 크다. 百濟 武王 때인 7世紀 初에 세운 巨大한 塔이다. 現在 國寶로 指定돼 있고, 2001~2019年까지 18年間 콘트리트를 除去하고 塔을 解體한 뒤 다양한 修理를 거쳐 解體 直前의 모습으로 復元해 놓았다.

    益山 彌勒寺址 石塔은 建築物 模樣의 木塔에서 石塔으로 바뀌어가는 韓國 石塔의 發展 過程을 잘 보여준다. 塔身(몸體)을 보면 文科 기둥이 있고, 기둥 위를 가로지르는 돌이 놓여 있다. 塔이 아니라 建築物 같은 模樣이다. 돌을 利用해 나무집을 짓는 것처럼 塔을 만든 것이다.



    木造建物을 짓는 方式으로 塔을 세우려면 기둥도 여럿 세우고 그 사이에 돌門까지 設置하고 게다가 大들보와 같은 돌도 올려놓아야 한다. 塔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흔히 보아온 石塔보다 훨씬 많은 不在가 들어가야 한다.

    塔을 構成하는 돌의 數가 많으면 많을수록 塔은 危險하다. 자칫 돌 하나만 뒤틀리더라도 連鎖反應으로 塔 全體가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다. 이와 달리 돌의 數가 적으면 적을수록 塔은 훨씬 더 安全한 狀態를 維持한다. 이처럼 彌勒寺址 石塔은 木造 建築物 模樣의 木塔 形式을 繼承하다 보니 엄청난 量의 部材를 써야 했고, 늘 崩壞 危險에 露出돼야 했다.

    憂慮는 現實이 됐다. 彌勒寺에는 元來 가운데에 木塔 하나가 있고 그 左右로 石塔 두 個가 있었다. 木塔은 朝鮮時代 以前에 무너졌거나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推定된다. 桐(東)石塔도 朝鮮時代에 崩壞돼 사라졌다. 彌勒寺 自體도 이때 없어졌을 것이다. 18世紀 以前의 어느 瞬間, 이 巨大한 石塔의 어느 部位에선가 돌이 어긋나고 빠지고 깨지면서 石塔은 中心을 잃었을 것이다. 塔은 瞬息間에 무너지기 始作했고 무거운 石材들은 周邊 땅바닥으로 밀려나 흩어졌다.

    時間이 흐르면서 이곳 사람들은 그 石材 가운에 一部를 여기저기로 옮겨 다른 用途로 使用했을 것이다. 1910年 朝鮮總督府 寫眞을 보면 周邊은 모두 논밭이다. 彌勒寺가 오래前 斃死(廢寺)가 됐으니 그건 어쩌면 當然한 일이었다.

    콘크리트 保守의 빛과 그림자

    1915년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 콘크리트로 땜질해 붕괴를 막았다. [문화재청]

    1915年 彌勒寺址 石塔의 모습. 콘크리트로 땜질해 崩壞를 막았다. [文化財廳]

    1915年 日帝는 彌勒寺塔 補修工事에 시멘트 콘크리트를 使用했다. 콘크리트는 當時로서는 最新 土木建築 材料였다. 特히 무언가를 단단하게 하고 固定하는 데는 매우 效果的이었다. 그래서 彌勒寺址 石塔의 무너진 面에 콘크리트를 덧댄 것이다. 그 무렵 朝鮮總督府는 石窟庵 報酬에도 콘크리트를 使用했다. 1913~1915年 朝鮮總督府는 一部가 무너진 채 放置되어 있는 石窟庵을 補修했다. 그러면서 本尊佛이 있는 주실(主室)의 天障 外部를 콘크리트로 덮어씌웠다. 石窟庵을 콘크리트 돔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우리도 콘크리트를 使用했다. 日本人이 不法 流出했다 返還한 敬天寺 10層 石塔(國寶)을 1959年 保守 復元할 때 콘크리트를 一部 使用했다. 1964年 石窟庵을 補修할 때에도 콘크리트를 썼다. 日帝가 씌워놓은 콘크리트 外部에 또 한 겹의 콘크리트 層을 만들어 씌운 것이다. 石窟庵은 이렇게 해서 現代式 콘크리트로 完全히 密封되었다. 그로 인해 內部와 外部의 溫度差가 커지고 內部에 이슬이 맺히는 現象이 發生했다.

    結露(結露)現象을 막기 위해 에어콘을 設置하기도 했고 及其也는 一般 觀覽客이 石窟庵 內部(前室(前室)과 주실)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琉璃門을 設置하는 地境에 이르고 말았다. 現代의 土木工學 方法을 利用해 石造 文化財를 補修하고자 했던 20世紀 初中半의 時代的 限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世紀 後半에 접어들면서 文化財界는 補修工事에 使用한 콘크리트의 副作用을 하나둘 目睹했다. 省察도 이어졌다. 이제는 石造 文化財에 使用한 콘크리트를 除去하는 것이 大勢로 자리 잡았다. 親環境 文化財 保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彌勒寺址 石塔은 1915年 以後 무너진 狀態에서 安定을 維持했다. 콘크리트로 여러 石材를 固定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로 덕지덕지 뒤덮인 모습은 보는 이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지만, 그래도 完全 崩壞를 막았다는 點에서 慰安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70餘 年. 그것이 우리가 보아온 國寶 彌勒寺址 石塔의 모습이다.

    그러나 問題가 생기기 始作했다. 塔에 발라놓은 시멘트에도 금이 가고 군데군데 부서지는 現象이 發生했다. 龜裂 部位에 빗물이 새어들고 塔 自體의 耐久性도 弱해졌다. 시멘트 石灰가 花崗巖 不在에 좋지 않은 影響을 미치는 것도 確認됐다. 物理的 環境이 惡化하는 狀況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우리 社會의 認識이 바뀌었다. 콘크리트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狀態로 우리의 國寶 彌勒寺址 石塔을 繼續 내버려 둘 것인지에 對한 反省과 省察이었다.

    미륵사지石塔 解體 論難

    1990年代 들어 彌勒寺址 石塔, 그러니까 콘크리트 石塔을 解體·補修해야 한다는 意見이 提起됐다. 그렇지만 선뜻 解體를 決定하지 못했다. 危險한 狀態에서 解體에 들어갈 境遇 石塔이 더 破損될 可能性이 있다는 憂慮가 나왔다. 石材를 毁損하지 않고 콘크리트를 除去한다는 것 또한 普通 일이 아니었다. 단단한 콘크리트를 떼어내려면 衝擊을 加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면 1300餘 年 歲月 속에서 매우 弱해진 石材가 毁損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苦悶에 苦悶이 이어졌다. 決定은 쉽지 않았다. 文化財廳과 國立文化財硏究員은 數年 동안의 論議와 構造安全 診斷을 實施했고, 結局 1998年 解體·補修하기로 結論을 냈다.

    드디어 2001年 10月 末 解體를 始作했다. 저렇게 巨大한 시멘트 덩어리가 붙어 있는 石塔을 解體한다는 것은 初有의 일이었다. 豫想대로 解體 作業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解體 過程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덕지덕지 달라 붙어 있는 콘크리트를 떼어내는 일이었다. 자칫 塔의 部材를 毁損할 수 있기에 機械를 使用할 수 없었다. 老鍊한 石工과 技術者들의 手作業에 依存하는 것이 唯一한 方法이었다. 콘크리트의 두께와 讓渡 豫想을 뛰어넘는 水準이었다. 當初 콘크리트 두께를 30∼40㎝로 豫想했지만 實際로는 最大 4m에 達했으며 그 讓渡 185t이었다. 不在 또한 豫想을 뛰어넘어 3000餘 個가 나왔다. 그렇다 보니 石塔을 解體하는 데만 10年이 걸렸다.

    組立과 復元의 難題

    2019년 복원이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 [문화재청]

    2019年 復元이 完了된 彌勒寺址 石塔. [文化財廳]

    解體도 어려웠지만 解體 以後에 石材를 組立해 復元하는 것도 普通 高難度의 일이 아니었다. 國立文化財硏究員은 解體가 한창 進行 中이던 2005年부터 復元을 놓고 論議를 始作했다. 于先 石材의 强度를 確認해 解體한 部材를 어느 程度까지 다시 使用할 수 있는지 判斷해야 했다. 또 9層까지 復元할 것인지, 아니면 解體 直前의 모습대로 6層까지 復元할 것인지도 論議 對象이었다.

    9層 復元案은 眞情性이 떨어진다는 指摘을 받아 일찌감치 除外됐고, 6層 復元안으로 論議가 좁혀졌다. 6層 全體 復元案은 解體 直前 남아 있던 部分뿐만 아니라 무너져 사라진 部分까지 새로운 不在로 모두 쌓아 올려 6層을 만드는 方案. 6層까지 4個 面을 모두 復元하는 것이어서 解體 直前의 모습에서 많이 달라진다.

    6層 部分 復元案은 사라진 部分은 그냥 두고 남아 있는 部分을 中心으로 쌓아 올리는 方案. 元來 있던 部分과 콘크리트가 있던 部分까지만 復元하는 것이다. 콘크리트를 除去한 그 자리에 새로운 不在로 돌을 쌓아올려 解體 直前의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方案이다.

    論議가 進行되면서 6層 部分 復元안으로 意見이 모아졌다. 解體 直前의 모습에 最大限 가깝게 되살리는 方案이었다. 文化財 保守復元은 原形保存(解體 直前의 狀態)의 原則을 最優先으로 하기 때문에 6層 部分 復元安易 가장 適切하다고 判斷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難題가 登場했다. 1, 2層이 問題였다. 6層까지 겨우 남은 彌勒寺址 石塔은 남서면이 거의 모두 崩壞됐다. 1, 2層도 남서면의 玉璽席(지붕돌)과 塔身이 사라진 狀態였다. 解體 直前의 狀態로 復元하다면 1, 2層은 남서면에 屋蓋石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塔은 構造的으로 매우 不安定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2層까지는 4個面 屋蓋石까지 모두 復元하기로 했다. 1, 2層의 境遇는 塔의 아랫部分이라 모두 復元해야만 塔 全體의 維持가 可能하기 때문이다. 彌勒寺址 石塔의 生存을 위한 不可避한 選擇이었다. 3~6層은 解體 前의 모습으로 復元하되 塔의 安全을 위해 一部를 補完 復元하기로 했다.

    善花公主와 彌勒寺는 無關

    미륵사지 석탑 복원 공사 중 석탑 1층 기단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문화재청]

    彌勒寺址 石塔 復元 工事 中 石塔 1層 基壇部에서 出土된 사리장엄구. [文化財廳]

    彌勒寺址 石塔의 解體 調査 過程에서 興味롭고 놀라운 遺物이 發掘되기도 했다. 2009年 1月, 石塔 1層 基壇部 아래쪽 內部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一切가 發掘된 것이다. 金製 事理號(舍利壺), 禁制 舍利奉安器(舍利奉安記), 銀製 舍利器(舍利器), 舍利와 各種 裝飾物 等. 華麗하고 精巧한 事理號度 대단했지만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斷然 舍利奉安器였다. 金板으로 된 舍利奉安器에는 彌勒寺址 石塔을 세우게 된 來歷을 새겨놓았다.

    舍利奉安器 內容을 妖惡하면, ‘佐平 舍宅積德의 딸인 百濟 王后가 財物을 내놓아 彌勒寺 伽藍을 創建하고 639年(己亥年)에 塔을 세우고 事理를 奉安했다’는 것이다. 이는 놀라운 이야기다. 그동안 ‘三國遺事(三國遺事)’의 記錄 等에 따라 薯童王子였던 百濟 武王과 新羅 眞平王의 셋째 딸 善花公主가 사랑을 成就한 뒤 함께 益山에 彌勒寺를 創建했다고 믿어왔다. 國境과 身分을 超越한 사랑이었기에 더욱 感動的이었다.

    그러나 이 禁制 舍利奉安器의 發見으로 그동안의 믿음이 흔들리게 됐다. 彌勒寺를 創建한 百濟 王后는 善花公主가 아닌 佐平 舍宅積德의 딸이었던 것으로 確認됐기 때문이다. 佐平 社宅 氏(氏)는 百濟의 8個 不足 勢力 가운데서도 가장 强力한 勢力이었다. 이 舍利奉安器의 登場으로 武王이 善花公主와 結婚했다는 說話는 後代에 지어낸 架空의 스토리日 可能性까지 擡頭됐다.

    事實 백제 末期 時代 狀況으로 보아 敵國(敵國)인 新羅의 公主가 武王의 王后가 될 수 없다는 懷疑的인 視角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舍利奉安器 內容만으로 武王과 善花公主의 사랑 自體를 虛構로 斷定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當時 文化로 보면 武王의 婦人이 여러 名이었을 可能性이 높기 때문이다.

    舍利奉安器는 彌勒寺의 創建 目的과 石塔의 建立 年代를 正確히 밝혀주었다. 彌勒寺를 創建한 主人公은 武王과 善花公主가 아니라 武王과 社宅 씨의 딸이라는 事實은 이제 새로운 歷史가 됐다. 善花公主 立場에서 보면 참으로 抑鬱한 일이겠지만, 彌勒寺址 石塔 解體 作業의 豫想치 못한 成果였다.

    誤判의 結果物, 미륵사지 東塔

    彌勒寺 터에 가면 언제부턴가 서탑 맞은便에 뽀얀 9層 石塔이 들어서 있음을 알게 된다. 1993年 復元한 미륵사지 東塔이다. 彌勒寺에는 元來 木塔과 石塔 2期(東塔과 西塔)가 있었다. 木塔과 銅塔은 査察 建物과 함께 모두 사라졌는데 그 가운데 東塔을 復元한 것이다. 復元工事에는 石材 2700t, 延人員 4萬5000名, 工事費 29億 원이 들어갔다. 높이는 27.8m.

    그런데 이 塔을 두고 말이 많다. 正確한 考證도 없이 서둘러 復元했기 때문이다. 全體를 모두 뽀얀 花崗巖, 그것도 새로 加工한 20世紀 花崗巖으로 復元해 놓으니(동탑터 發掘 結果 出土된 옛 不在가 몇 個 包含되어 있기는 하지만) 歲月의 痕跡이 담겨 있을 理 萬無했다. 1300餘 年 前 백제의 고풍스러움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指摘이다. 아직까지도 “失敗한 復元”이라는 批判이 支配的이다. 事實 資料도 不足하고 考證과 硏究도 不足한 狀況에서 9層으로 復元한다는 것 自體가 잘못된 判斷이었다. 當時 미륵사지 東塔 復元 諮問委員會는 “相當 部分이 무너져 버린 西塔만으로는 彌勒寺址 石塔의 雄壯한 雰圍氣를 제대로 傳達할 수 없어 東塔을 復元했다”고 밝힌 바 있다. 不可避한 復元이었다고 强辯하지만, 잘못된 判斷이 아닐 수 없다. 彌勒寺터 現場에 가서 보면 東塔의 雰圍氣가 영 語塞하기만 하다. 그저 20世紀 現代 石造物에 不過하다는 생각, 그것도 別 멋없는 石造物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傷處 딛고 우리 앞에 선 彌勒寺址 石塔

    百濟 武王이 백제의 復興을 꿈꾸며 세웠던 巨大 寺刹 彌勒寺. 歲月이 흘러 痕跡은 모두 사라지고 只今은 터만 남았다. 그 廣闊한 터에 우뚝 서 있는 彌勒寺址 石塔. 1910年 寫眞 속에서 그 塔은 무척이나 위태로웠다. 1915年 以後 콘크리트에 휩싸인 石塔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1993年엔 東塔을 無謀하게 復元해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위태로웠던 미륵사지 西塔을 되살리기 위한 解體·保守·復元 工事가 2001年 始作돼 2019年 마무리됐다. 19年에 걸친 大歷史(大役事)였다. 解體·復元된 彌勒寺址 石塔은 그 外觀이 참 特異하다. 뽀얀 돌과 빛바랜 누런 돌이 섞여 있고 塔의 模樣이 엉거주춤하다. 塔을 構成하는 4個 面의 傾斜가 不規則하다. 어딘가는 빠져 있고 어딘가는 끊겨 있다. 그렇지만 穩全한 銅塔보다는 훨씬 더 韻致가 있다. 只今의 이런 모습이 오랜 歲月 동안 蓄積된 傷處의 痕跡들이기 때문이다.

    外觀의 傷處가 이렇게 많은 文化財도 드물 것이다. 비록 相當 部分이 부서지고 毁損됐지만, 그래서 模樣새가 참 奇異하지만, 우리 傳統 石塔 가운데 이렇게 愚直하고 壯快한 塔이 또 어디 있을까. 이렇게 傷處를 이겨낸 塔이 또 어디 있을까. 이제 그 傷處는 彌勒寺址 石塔의 眞正한 魅力이 됐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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