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最初 證言〉 尹奉吉 義士 長孫女 “報勳處 局長이 ‘靑瓦臺 뜻’이라며 辭退慫慂”|新東亞

〈最初 證言〉 尹奉吉 義士 長孫女 “報勳處 局長이 ‘靑瓦臺 뜻’이라며 辭退慫慂”

尹柱卿 前 獨立記念館長 單獨 인터뷰

  • 배수강 記者

    bsk@donga.com

    入力 2019-02-19 13:58:27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日 히로시마 記念館에 줄지은 學生들…“우리는 어떤가요?”

    • ‘朝鮮에서 第一 나쁜 놈의 아들’ 소리 들은 아버지

    • 尹奉吉은 내 삶의 테두리, 아름다운 拘束이었다

    • “‘每年 100周年’ 마음으로 獨立運動 關心 가졌으면…”

    • “2017年 7月 報勳處 局長이 ‘靑瓦臺 뜻’이라며 辭退 慫慂”

    • 피우진 報勳處長 2017年 8月 國會 豫決委서 辭退 慫慂 事實 認定

    • 自由韓國黨 職權濫用 告發에도 피 處長, 報勳處 解明 拒否

    [지호영 기자]

    [지호영 記者]

    “光復 前까지 아버지는 ‘朝鮮에서 第一 나쁜 놈의 아들’이라는 敎師들의 非難과 ‘王따’를 홀로 堪當해야 했어요. 適應을 못해 여러 學校를 옮겨 다니다 보니 漸次 말數도 줄었고요.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길 願했어요. 저는 그 程度는 아니었어요. 제게 할아버지(尹奉吉 義士)는 삶의 테두리이자 아름다운 拘束 程度? 조금은 더 自由奔放할 수 있었던 내 삶의 緩急을 調節해주는 存在였죠.”

    1月 23日 午後 서울 良才洞 매헌尹奉吉義士記念館에서 만난 尹柱卿 前 獨立記念館長(매헌 尹奉吉 월진회 理事)은 獨立運動家 後孫으로서 갖는 삶의 무게와 올바른 歷史敎育의 重要性을 淡淡하게 풀어냈다. 尹柱卿 前 館長은 2014年 9月 22日 獨立記念館長으로 就任해 3年 任期를 2個月 넘긴 2017年 12月 17日까지 在任했다.

    올해는 3·1運動과 上海臨時政府 樹立(4月 11日) 100周年(以下 ‘100周年’)李 되는 해. 政府와 各 地方自治團體들은 推進委員會를 만들어 다채로운 祝祭와 行事를 準備하고 있다. 그러나 ‘暗黑의 時期’에 祖國의 獨立을 위해 소리 없이 피를 흘린 獨立運動家 後孫이 맞는 ‘100周年’은 一般人의 그것과는 溫度差가 있다. 다음은 그와의 一問一答.


    “獨立記念館이 ‘나들이 名所’ 됐으면…”

    2015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구 루쉰공원에서 열린 ‘제83주년 윤봉길의사 의거 기념식 및 매헌기념관 재개관식’에서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이 윤봉길 의사 흉상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 제공·국가보훈처]

    2015年 4月 29日 中國 상하이 훙커우區 루쉰公園에서 열린 ‘第83周年 尹奉吉義士 義擧 記念式 및 매헌記念館 再開館式’에서 尹柱卿 獨立記念館長이 尹奉吉 義士 胸像에 獻花하고 있다. [寫眞 提供·國家報勳處]

    - 올해는 獨立運動家 後孫들에게도 意味가 크겠다.

    “‘100周年’이어서 크게 記念하는 것도 좋지만, ‘每年 100周年’이라는 마음으로 獨立運動의 意味를 되새겼으면 좋겠다. 國民的인 關心과 政府의 支援은 자랑스러운 우리 獨立運動史를 發掘하고 기리는 礎石이다. 獨立運動 史跡地를 保存하고 國際學術會議를 여는 等 다양한 活動이 活潑하게 이뤄졌으면 좋겠다.”



    - 獨立記念館長으로서 獨立運動을 알리는 데도 많은 努力을 했는데.

    “國民 募金으로 1987年 開館한 獨立記念館은 그동안 歲月이 쌓여 구석구석 아름다운 곳이 많다. 丹楓나무길은 丹楓이 터널을 이룰 程度다. ‘100周年’인 올해에는 많은 國民이 訪問해 그런 自然을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 館長이 됐을 때 많은 분이 ‘獨立記念館은 嚴肅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强해 쉽게 갈 수 없게 되더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家族들이 나들이 왔다가 展示館도 보고, 쉬었다 가는 ‘나들이 名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이들은 父母와 함께 쉬다가 展示館에 들어가 보고 ‘아, 이런 歷史도 있었네’ 하고 便하게 獨立運動 歷史를 배울 수 있는 空間이 되길 願했다.”

    - ‘나들이 名所’를 爲한 戰略은….

    “여러 가지 있었는데, 陸軍(2016年 5月)에 이어 國防部(2017年 4月)와 ‘나라사랑 精神 涵養을 위한 相互協約(MOU)’을 맺어 國軍將兵들이 獨立記念館을 訪問하도록 한 게 記憶에 남는다. 將兵들이 休暇 때 獨立記念館이 마련한 敎育 프로그램에 參與하면 休暇를 하루 더 주는 協約이었는데, 獨立運動 歷史를 통해 國家와 民族精神에 對해 생각해보는 時間을 가졌으면 했다. 將兵들이 아빠가 되었을 때 記念館의 아름다운 自然을 떠올리며 子女들과 再訪問할 수 있으면 하는 期待도 있었다. 獨立記念館의 設立 目的도 民族文化의 正體性을 確立하고 民族精神을 煽揚해 올바른 國家觀을 定立하는 데 이바지하는 거다. 設立目的을 이루기 위한 프로그램이 가장 必要한 곳이 軍隊라고 생각했다.”

    - 많은 國民이 記念館을 다녀가는 게 重要하겠다.

    “그렇다. 國防部와의 MOU 結果는 期待 以上이었고, 將兵들이 父母님, 親舊와 함께 記念館을 찾고 있다. 獨立記念館이 忠南 天安에 있으니 忠淸 地域에 放送되는 다양한 放送에 出演해 記念館의 아름다운 自然景觀과 特別展示, 體驗行事를 紹介하는 데 躊躇하지 않았다. 내가 放送에 많이 出演할 수 있었던 것은 尹奉吉 醫師의 孫女라는 點과 첫 女性 獨立記念館長이란 點이 視聽者에게 好奇心을 刺戟해서인 것 같다. 나는 이런 條件을 充分히 活用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過去 (原子爆彈 投下 場所인) 日本 히로시마 平和記念館과 나가사키 原爆資料館에 갔을 때 줄지어 들어가는 日本 學生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日本의 歷史 歪曲을 탓하기 前에 우리는 우리 歷史에 對해 얼마나 關心을 가지고 있는지 한 番쯤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올해 獨立運動史에서 意味가 큰 ‘100周年’인 만큼 많은 國民이 獨立記念館 等 우리의 獨立運動 史跡地를 訪問해주셨으면 좋겠다. 우리 獨立運動家들의 活躍相, 特히 우리의 獨立運動家들이 朝鮮의 獨立만을 위해 犧牲한 게 아니라 아시아와 世界 平和를 위해 努力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自由와 平和를 追求한 獨立運動家들

    - 그래서 館長 在職 時 常設展示館 交替 作業을 했나.

    “大略 10周年을 週期로 記念館 7個 常設展示館의 展示 交替 作業을 한다. 여러 展示館 中 가운데 位置한 4展示館을 ‘平和·共感’을 主題로 한 ‘平和누리館’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獨立運動은 우리의 獨立만 追求한 것처럼 비쳤지만, 實際 할아버지(尹 意思)를 包含해 安重根 義士, 金九 先生, 韓龍雲 先生 等 우리 獨立運動家들은 朝鮮의 獨立에서 나아가 人類의 普遍的 價値인 自由와 平和를 追求했다. 이런 點을 反映해 記念館에서 人類 平和를 思索할 수 있도록 展示館 交替 作業을 한 거다. 開館式에 參席한 분은 ‘獨立記念館은 歷史的 事實 傳達을 넘어서 獨立運動의 意味와 價値를 提示하는 役割을 해야 하는데 平和누리觀이 바로 그런 役割을 하게 됐다’고 말씀하시더라. 只今도 잊히지 않는다.”

    - ‘100周年’을 맞아 ‘韓國獨立運動 人名事典’ 編纂 事業도 進行했는데.

    “친일인명사전은 있는데 獨立運動家 人名事典이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 그래서 2015年 4月 獨立記念館 傘下 韓國獨立運動史硏究所에 編纂委員會를 出帆시켜 1萬6000餘 名에 達하는 獨立運動家의 生涯를 一目瞭然하게 整理하려 했다. 2024年 最終 마무리되는데, 올해 特別板이 나온다고 들었다. 人名事典은 學界에 蓄積된 硏究 成果 위에 獨立運動家의 成長 背景과 史上, 業績 等 生涯를 綜合 整理한 冊이다. 따라서 獨立運動家의 삶을 통해 獨立精神과 世界平和의 所重함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이러한 硏究 成果物들을 世界 碩學들과 共有하며 우리의 意見과 視角이 國際社會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더 努力해야 한다. 파리 7大學 等 유럽의 大學에 韓國獨立運動史를 正規 講座로 開設하려고 한 것도 그 延長線上이었다. 아시아를 넘어 美洲와 유럽에서 우리 獨立運動史에 對한 客觀的 硏究가 이어지면 日本人들의 생각도 조금씩 바뀔 거다. 退任하면서도 硏究員들에게 ‘나는 退任하지만 남는 여러분은 꼭 우리 獨立運動史가 世界史 속에서 마땅한 位相을 찾게 해주기 바란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간 無名의 獨立運動家들에게 報答하게 해달라’고 付託했다. 이런 當付에는 나의 個人的인 經驗도 作用했다.”

    - 어떤 經驗인가.

    “尹奉吉 義士 家族이라고 해서 禮遇를 받으며 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日帝强占期는 勿論이거니와 生前에 할머니(尹 醫師의 夫人 故 배용순 女史· 1907~1988)가 할아버지 記念行事에 參席하면 ‘(尹 醫師는) 사람들을 죽인 사람인데 뭘 그리 대단한 行事를 하느냐’는 가슴 아픈 소리를 種種 들었다. ‘日本式 敎育’을 받은 사람들이 한 말이겠지만, 獨立運動家 遺家族과 後孫들은 올바른 歷史敎育이 왜 重要한지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다. 當時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記念하는 行事場에서 禮遇를 받기는커녕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한 境遇도 많았다. 그래서 獨立運動 歷史를 發掘하고 學術會議를 통해 우리 歷史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 歷史가 바로 설 수 있다.”

    - 外國人들은 日本의 歪曲된 歷史觀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 그런 視角을 가진 外國人들로부터 우리 後孫들은 ‘韓日 兩國이 모두 自己 나라를 위한 愛國 活動을 한 거 아니냐’는 質問을 받을 수도 있다. 그때는 ‘日本의 侵略戰爭과 그에 맞서 그것을 멈출 것을 끊임없이 要求하고 이웃國家들이 함께 自由와 平和의 길로 나가자고 손을 내민 게 우리의 獨立運動이었다’고. ‘어느 길이 人類를 위한 길인가’라고 堂堂하게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義士 김지섭을 도운 日本人

    1946년 7월 6일 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윤봉길 의사 국민장.

    1946年 7月 6日 서울 孝昌公園에서 열린 尹奉吉 義士 國民葬.

    인터뷰 以後 記者는 尹 前 館長과 3·1運動 100周年이 갖는 意味와 尹 義士의 依據에 對해 여러 次例 意見을 나눴다. 그는 e메일을 통해 다음과 같은 事例를 알려왔다.

    “2016年 9月 26日 日本 도쿄 在日韓人歷史資料館 企劃展示室에서 ‘日本에서의 韓國獨立運動과 日本人’을 主題로 한 特別展示會를 開催했다. 1924年 1月 5日 日本 宮城 이중교 爆彈義擧를 斷行한 김지섭 義士 關聯 資料가 展示됐는데, 當時 그의 辯論을 맡은 人權辯護士 후세 다쓰지(布施辰治)가 金 醫師 동생 김희섭에게 보낸 便紙도 처음 公開됐다. 便紙는 日帝가 形式 節次를 밟지 않고 拘留期間을 延長한 것에 抗議해 金 醫師가 獄中 斷食鬪爭을 하는 모습을 傳하고 있다. 이처럼 獨立運動을 도운 日本人도 있었다는 事實을 發掘해 韓日 간 歷史 認識 間隙도 메우고, 獨立運動家들이 追求한 正義 實現은 人類 共通 精神이라는 點을 强調하고 싶었다. 多幸히 反應이 좋아 20日 延長 展示했다.”

    1932년 4월 26일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선서식 모습. [사진 제공·국가기록원]

    1932年 4月 26日 尹奉吉 醫師의 韓人애국단 宣誓式 모습. [寫眞 提供·國家記錄院]

    잘 알려졌듯이, 매헌 尹奉吉(1908~1932) 醫師는 1930年 中國 다롄(大連)을 거쳐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獨立運動 根據地를 摸索하면서, 洗濯所 職員으로 일하며 모은 돈을 故鄕에 送金하기도 했다. 1931年 8月 臨時政府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活動 舞臺를 옮긴 뒤 金九 先生을 찾아가 獨立運動에 身命을 바칠 覺悟를 알렸다. 이듬해 1月 日本이 시라카와(白川義則) 隊長을 司令官으로 ‘上海事變’을 일으켜 中國을 侵略하자 尹 醫師는 野菜商으로 假裝해서 日本軍 情報를 探知했다. 結局 4月 26日 韓人愛國團에 入團하고, 3日 뒤 상하이 훙커우(紅口) 公園에서 열린 ‘천장절(日王 生日 祝賀宴) 및 戰勝 記念式場’에 물甁 爆彈을 던져 日本軍 大將 시라카와 等 軍 首腦部를 殲滅했다. 大韓民國臨時政府가 創設한 特攻隊 ‘韓人애국단’ 團員으로 遂行한 尹 醫師의 特功 作戰이자 依據(義擧)는 侵略의 旗발을 높이 든 一齊(日帝)의 肝膽을 서늘케 했다. 當時 國民黨 政府 장제스(蔣介石)는 “100萬 中國軍과 4億 國民이 하지 못한 일을 朝鮮의 靑年이 해냈다”며 極讚하고, 韓國光復軍 創設 等 臨政을 積極 支援하게 된다. 장제스는 1943年 11月 카이로 會談에 聯合國 首長들을 說得해 韓國의 獨立을 保障한다는 特別條項을 넣어 光復의 端初를 마련했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보자.

    ‘할아버지 尹奉吉’이 주는 意味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뒤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연행되고 있다(왼쪽).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동아DB]

    1932年 4月 29日 尹奉吉 義士(앞줄 왼쪽에서 세 番째)가 中國 상하이 훙커우公園에서 爆彈을 던진 뒤 日本 憲兵에게 붙잡혀 連行되고 있다(왼쪽). 이를 報道한 東亞日報 號外. [東亞DB]

    - 獨立運動家 後孫의 삶은 어떤지 궁금하다.

    “어릴 적 할아버지 祭祀를 지낼 때마다 어른들 얘기를 들으며 ‘우리 할아버지가 좀 특별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어른들도 恒常 ‘尹 義士 孫女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初等 低學年 때까지 ‘醫師(義士)’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洞네 골목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醫師인데 病 고치는 醫師(醫師)는 아니래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얘길 들은 洞네 아주머니가 ‘너 말 한마디, 몸가짐 하나가 할아버지에게 자랑이 될 수도, 부끄러움이 될 수도 있다’며 따끔하게 말씀하셨고, ‘내 말이 할아버지를 부끄럽게 했다’는 생각에 큰 衝擊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絶對 떨어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學窓 時節에도 나만 다른 基準을 適用받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尹奉吉 義士 孫女가 그러면 안 돼’라는…. 그래서 뒤에 숨고 싶은 적도 많았다.”

    - 할아버지 存在가 負擔이었나.

    “아버지(允從·1929~1985)는 자유롭게 사시길 願했고, 할아버지(尹 醫師) 때문에 짐짓 진중하게 行動하는 건 僞善이라고 생각하셨다. 나는 그 程度는 아니고, 世人들 입에 ‘尹 醫師의 孫女가 저 模樣이냐’는 소리를 안 들으려 注意하며 살았던 거 같다. 할아버지라는 存在는 조금은 더 自由奔放할 수 있었던 내 삶을 調節해주는 存在였다. 삶의 테두리이자 아름다운 拘束이었지 멍에는 아니었다.”

    - 이화여대 化學科를 入學한 건 할아버지처럼 爆彈 製造를 위한 硏究에….


    “그건 아니다(웃음). 우리 7男妹(그는 1男6女 中 長女다)는 모두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어머니는 恒常 팔베개를 해주며 퀴리 夫人에 對해 얘기해주셨다. 나는 가운을 입고 일하는 멋진 모습을 想像했고. 그래서 化學科에 入學했는데 適性과는 잘 맞지 않더라(웃음). 그래서 卒業 後 廣告會社에 다녔다. 어머니도 이화여대 藥大를 다니다 結婚 後 學業을 中斷하셨는데, 어느 날 卒業生 名簿에 이름이 실린 걸 보고 한참 웃은 記憶이 난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말씀이 거의 없으셨다. 日帝强占期 아버지는 ‘朝鮮에서 第一 나쁜 놈의 아들’이라는 敎師들의 非難과 함께 왕따를 當해야 했다. 敎師들이 恒常 非難을 하니 轉學이 잦았고, 漸次 말數도 줄었다. 光復 以後 金九 先生의 도움으로 성균관대 經濟學科 1回 卒業生이 됐다. 以後 農林部에서 公職生活을 하시다가 내가 初等 6學年 때쯤 公職을 그만두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나쁜 사람의 子息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하겠다’는 말을 座右銘으로 삼을 程度였다. 이런 아버지의 삶은 우리에게 最高의 遺産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 理由는 뭔가. 生計가 어려웠겠다.

    “사람들이 ‘人間 允從’으로 보는 게 아니라 ‘尹奉吉 醫師의 아들’로 보는 게 힘드셨던 거 같다. (金九 先生의 아들인) 김신 先生님께서 金浦空港에 스낵코너를 마련해줘 生計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報勳對象이어서 學費는 奬學金으로 充當할 수 있었고….”

    -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아들을 돌보지 못하고, 孫女 머리도 쓰다듬어 주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全혀 怨望하지 않았다. 오히려 男便(尹 醫師) 얘기하는 걸 무척 조심스러워하셨다. 산 사람이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함부로 해서 돌아가신 분의 靈魂이 或是라도 해를 입을까 操心하는 모습이었다. 當身이 겪었던 苦楚에 對해서도 얘기를 안 했다.”


    强靭한 曾祖할머니, 沈默한 할머니

    - 日帝 時期 ‘沈默’을 强要받았기 때문일까. 

    “光復 以前까지만 해도 우리 家族을 곱게 보지 않던 사람들이 光復 以後 變하는 모습을 보면서 沈默이 더 낫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나도 世上을 살면서 이런저런 葛藤을 겪다 보니 ‘할머니의 沈默’이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러나 曾祖할머니(尹 醫師의 母親 김원상 女史)는 아주 剛한 분이셨다고 들었다. 아들의 依據 以後 日本 巡査들이 隨時로 집을 뒤지면 ‘나부터 죽여라’고 抗議하고, 鬱憤으로 흙壁에 머리를 받으면 壁이 움푹 들어갈 程度로 强靭한 분이었다. 曾祖할머니는 집안의 기둥이었고, 曾祖할아버지(尹 義士의 父親 尹煌)는 家族을 위해 默默히 農事를 지으며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셨다.” 

    尹奉吉 醫師는 100年 前 3·1運動을 겪으면서 日帝 敎育(德山普通公立學校 在學)을 拒否하고 漢學을 배웠고, 以後 東亞日報와 ‘開闢’ 等을 통해 신문물과 新思想을 接했다(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資料). 1926年 書堂(오치서숙)을 卒業하고 夜學을 열어 討論會와 講演會를 연 것도 이웃들의 無知를 깨우고 實力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農村啓蒙書인 ‘농민독본’ 3卷을 執筆했고, 農村 振興을 目標로 ‘월진회(月進會)’를 組織해 農家 副業 等 다양한 活動을 폈다. 

    - 尹 義士가 中國으로 건너가기 前 農村啓蒙運動을 펼친 것도 父母의 影響일까. 

    “나는 그렇게 본다. 父母의 絶妙한 調和, ‘尹 두더지’라고 불릴 程度로 억척같이 땅을 파며 現實을 일군 아버지와 ‘허리를 펴고 하늘을 봐라’라며 以上을 알려준 어머니 사이에 아들 尹 義士가 걸어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現實을 딛고 以上을 이뤄야 한다는 어떤 義務感…. 生前 할머니께 들어보니 當時 啓蒙運動을 펼칠 때 할아버지는 아침에 놋주발에 밥飯饌을 싸 들고 나가면 한밤中이 다 돼 돌아올 程度로 熱心이었다고 하더라. 特히 할아버지가 結成한 월진회는 只今도 故鄕(忠南 豫算)에서 이어져 내려온다. 한 달에 5000원씩 내는 會員이 늘고 있고, 管轄 敎育廳은 學生 人性敎育 過程으로 多樣한 프로그램을 運營하고 있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1930年 3月 6日 ‘장부출家生不換’(丈夫出家生不還·大丈夫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前에는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上海로 떠나기 前까지 다양한 農村啓蒙運動을 펼쳤다. 이러한 活動에 對해 아는 분은 많지 않다.”


    人生은 自由의 世上을 찾는다

    - 暗黑의 時期에 農村啓蒙運動의 限界를 깨달았을까. 

    “오랜 時間 自身의 삶을 바쳐 現實을 克服하려고 努力했지만, 結局 獨立을 하지 않으면 現實 克服은 어렵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사람은 왜 사느냐, 以上을 이루기 위해 산다’(1930년 中國 칭다오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便紙)거나, ‘너희도 萬一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朝鮮을 위하여 勇猛한 鬪士가 되어라’(아들에게 보낸 遺囑詩 中), ‘人生은 自由의 世上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天賦의 自由가 있다’ 같은 할아버지가 남긴 語錄을 보면 單純한 悲憤慷慨 때문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 할아버지가 어떻게 記憶되길 願하나. 


    “國民 저마다 다양하게 記憶하겠지만, 나는 ‘自身의 몸을 움직여 日帝 植民支配라는 巨大한 흐름을 바꿔 後世가 살아가는 世界는 以上이 꽃피는 世上으로 움직이게 하려던 永遠한 靑年’으로 記憶됐으면 좋겠다. 그러한 뜻을 기리고 알리는 데 最善을 다하겠다.” 

    그의 말처럼 1932年 훙커우 公園 依據 以後 日本 憲兵隊 新聞 內容을 보면 當時 尹 醫師의 國際情勢 判斷과 先見之明이 잘 나타나 있다. 

    “現在 朝鮮은 實力이 없기에 積極的으로 日本에 反抗해 獨立함은 不可能하다. 그러나 世界大戰이 到來해 强國 疲弊의 時期가 到來하면 그때야 朝鮮은 勿論 各 民族이 獨立할 것이다…우리들 獨立運動者는 國家盛衰의 循環을 앞당기는 것으로 그 役割을 삼는다… 따라서 金會議 事件(尹 義士의 義擧)李 當場 獨立에 直接 效果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朝鮮人의 覺醒을 促求하고 世界로 하여금 朝鮮의 存在를 明確히 알게 하는 데 있다…현재 世界地圖에 ‘朝鮮’은 日本과 同色으로 彩色되어 朝鮮의 存在를 認定하지 않는 狀況이지만, 此際에 朝鮮이라는 槪念을 이러한 사람들의 腦裏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將來 우리들의 獨立運動에 決코 헛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記者는 이즈음 政治權 이야기로 話題를 돌렸다. 그는 매헌尹奉吉醫師記念事業會와 獨立記念館 理事를 지내다 2012年 第18代 大統領選擧 새누리당 100%大韓民國臺統合委員會 副委員長과 以後 大統領直屬 臺統合委員會 委員을 지냈다. 

    “獨立運動家들의 抗日運動이 當時 國民의 統合을 이뤄냈듯이 産業化와 民主化, 地域과 世代를 統合해 先進國으로 나아가는 데 役割을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했다. 産業化의 땀과 民主化의 피의 價値를 尊重하고, 조화로운 世上 만들기에 役割을 하고 싶었다. 獨立記念館을 訪問한 脫北 學生들에게도 ‘여러분이 獨立運動 歷史를 잘 記憶해 統一이 됐을 때 南北이 하나 되는 役割을 해달라’고 當付하기도 했다. 올해가 3·1運動 100周年인 만큼 南北이 함께하는, 마음이 하나 되는 契機가 됐으면 좋겠다.”

    피우진 ‘辭退 慫慂’의 眞實

    - 1月 7日 自由韓國黨은 피우진 國家報勳處長과 A 國葬(現 地方報勳廳腸)을 尹 館長 任期 滿了 前에 辭表를 慫慂한 嫌疑(職權濫用)로 檢察에 告發했는데. 

    “….” 

    尹 前 館長은 말없이 한동안 茶盞을 만지작거렸다.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고, 그런 얘기(辭退 慫慂)를 들은 自體가 率直히 부끄럽다. 그래서 말하기 조심스러웠다. 退任 直前인 2017年 11月 國會 政務委員會 마지막 國政監査에서 議員들이 所懷를 묻기에 ‘지난 3年間 獨立運動家 後孫으로 自負心 갖고 일할 수 있어 幸福했다. 더 많은 獨立運動家 後孫들이 公職에서 일할 機會를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좋게 마무리했고, 政務위의 한 野黨 議員室에서 辭退 慫慂과 關聯한 問議가 왔을 때에도 ‘報勳處 職員의 過慾으로 한 걸로 생각해주세요’라고 撫摩하고 넘어갔다. 韓國黨이 告發했다는 事實도 제부(弟夫)가 보내준 뉴스 映像을 보고 알았다.”

    獨立運動家 後孫에 對한 禮遇 問題

    2017년 8월 25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의 사퇴를 종용했다’고 시인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록.

    2017年 8月 25日 피우진 國家報勳處長이 ‘尹柱卿 獨立記念館長의 辭退를 慫慂했다’고 是認한 國會 豫算決算特別委員會 會議錄.

    그가 다시 茶盞을 만지작거렸다. 任期 滿了 2個月 前인 2017年 7月頃 ‘辭退 慫慂’을 받은 事實 自體가 그에게 큰 衝擊인 듯했다. 獨立運動家와 그 後孫을 禮遇해야 할 國家報勳處가 任期를 남겨둔 獨立運動家 後孫에게 辭退를 慫慂한 事實은 묻는 記者나 인터뷰이나 難堪하긴 마찬가지다. 暫時 뒤, 그에게 國會 會議錄에 나타난 피 處長의 發言에 對해 물었다. 2017年 8月 25日 國會 豫算決算特別委員會 會議錄에는 백승주 韓國黨 議員과 피우진 報勳處長 間 質疑 應答이 담겼다. 

    - 豫決特委 會議錄에 對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내게 피 處長이 直接 辭退 慫慂을 한 건 아니다. 任期 滿了를 두 달 앞둔 2017年 7月頃 A局長이 찾아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辭表 낼지 안 낼지 只今 決定하고 辭表는 一週日 內에 내달라’고 했다.” 

    - 任免權者는 大統領인데 報勳處 局長이…. 

    “‘BH(靑瓦臺) 뜻’이라고 했다.” 

    - 뭐라고 答했나. 

    “(後任 館長 任命을 위한) ‘任員推薦委員會를 構成하고 後任 館長 人選 作業을 해도 내 任期(2017年 9月)는 다 끝나는데 왜 辭表를 내라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別말 없다가 ‘빨리 (尹 館長의 去就를) 決定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 피 處長에게 確認했나. 

    “當時 言論은 ‘公共機關長 任期가 3個月 以內이면 任期를 채우도록 한다’고 報道하던 時點이라 좀 疑訝했다. 確認해야겠다 싶어 피 處長에게 메모를 남겼더니 얼마 뒤 連絡이 왔다.” 

    - 뭐라고 했나. 

    “‘(辭表 慫慂에 對해) 너무 深刻하게 생각하지 말라. 다른 곳(報勳處 傘下 3個 公共機關)도 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 

    尹 前 館長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獨立記念館長은 大部分 獨立運動家 後孫들이 맡는 象徵性 때문에 政權이 바뀌어도 모두 任期를 채웠다. 獨立運動은 名譽로운 大韓民國 歷史이고, 館長은 國民과 자랑스러운 獨立運動 歷史를 共感하는 일을 하다가 명예롭게 退陣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랑스러운 歷史를 알리는 役割을 하는 館長이 政權 交替와 어떤 聯關性이 있나. 辭表를 내는 건 問題도 아니었지만, 官長으로서 獨立運動家들의 後孫을 代表한다는 생각에 ‘이건 後孫들에 對한 禮遇도 아니고, 잘못된 先例를 남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獨立記念館 理事 時節 한 敎授님이 ‘獨立記念館의 獨立性을 지켜야 한다’고 熱辯을 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靑瓦臺의 뜻’

    - 靑瓦臺의 ‘뜻’도 確認했나. 

    “任免權者인 大統領 뜻이었다면 辭表를 냈을 거다. 그래서 周邊에 알아보니 ‘靑瓦臺가 獨立記念館長 退職을 慫慂할 程度로 閑暇하지 않다’는 反應이었다. 直接 大統領에게 確認할 순 없었지만 ‘靑瓦臺는 그런 오더 내린 적 없다’는 말을 傳해 들었다. 當時 文在寅 大統領도 8·15 慶祝辭에서 獨立運動家에 對한 尊敬을 표했는데 이런 式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文 大統領은 2017年 8月 15日 第72周年 光復節 慶祝辭에서 “獨立運動家들을 모시는 國家의 姿勢를 完全히 새롭게 하겠습니다. 最高의 尊敬과 禮儀로 報答하겠습니다. 獨立運動家의 3代까지 禮遇하고 子女와 孫자녀 田園의 生活 安定을 支援해서 國家에 獻身하면 3代까지 待接받는다는 認識을 尋常습니다”라고 말했다. 

    - 辭表 慫慂은 언제까지 이어졌나. 

    “一週日 사이에 整理됐다. 辭退 慫慂 一週日 뒤 피 處長은 ‘館長님 (任期 保障을 要求하는) 電話가 너무 많이 오네. 館長님은 辭表 내지 마’라고 하더라. ‘報勳處 改革을 위해 于先 3個 傘下機關을 改革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사퇴 慫慂) 됐다’고 했다.” 

    - 獨立運動家 後孫에 對한 禮遇치고는…. 


    “내가 (辭表 慫慂에) 土 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政權이 바뀌면 通常的으로 이런 式으로 (機關長 交替가) 이뤄져서 그런 건지 疑訝했지만, 報勳處는 自身들이 뭘 해야 하는 곳인지에 對한 認識이 不足했던 거 같다. 피 處長 解明을 들으면서 모든 部處가 이런 式으로 辭表를 받는다면 文 大統領이 誤解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多幸히 많은 분이 獨立記念館長의 象徵性에 對해 얘기를 해줘 任期를 채우고도 後任 館長 오기 前까지 2個月餘 더 일했다.” 

    - 報勳處는 任期를 채우고도 더 일했다고 强調한다. 

    “定款에 따라 後任 館長이 올 때까지 일을 맡은 거다. 結果的으로 任期가 늘어났다고 해서 辭退 慫慂 事實 自體가 사라지는가. 제때 後任 館長 任命도 못하는데 왜 早期 辭退를 慫慂했는지…. 나는 先烈들이 꿈꾼 大韓民國을 위해 獨立運動家 後孫들의 名譽를 지키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쓴 農民讀本에 ‘世上 바꾸려거든 내 몸부터 움직여라’는 글句가 가슴에 와닿았다.” 

    記者는 여러 次例 當時 狀況을 되물었지만 尹 前 館長의 答辯은 一貫됐다. 吳 局長과 처음 만난 因緣부터 피 處長의 말套까지 그는 또렷이 記憶하고 있었다. 이와 關聯해 報勳處는 ‘신동아’에 보내온 答辯書를 통해 “이 事案(尹 前 館長 辭退 慫慂 告發 件)은 韓國黨 議員들의 告發에 따라 檢察에 繫留 中”이라며 “搜査 對象인 事件에 對해 報勳處의 公式的인 立場을 밝히는 것은 適切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尹 前 館長 任期는 3年(2014年 9月 22日~2017年 9月 21日)이지만 獨立記念館 定款에 따라 後任者가 任命될 때(2017年 12月 17日)까지 繼續 職務를 遂行했다”며 ‘參考하라’고 敷衍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