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識人의 現實參與 모델로 받아들여지는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그와 가장 가까운 이념적 同志였던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 그들과 함께 ‘앙가주망’(參與)을 標榜하며 1945年 10月에 創刊된 ‘現代’誌에 同人으로 參與했던 레이몽 아롱(1905∼1983).
한때 知識人의 現實參與를 모토로 한 배를 탔던 이들이 갈라선 背景에는 1950年 6月25日 프랑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勃發한 戰爭이 놓여 있었다.
6·25戰爭이 프랑스 知識人社會에 어떤 影響을 끼쳤는지를 分析하면서 요즘 現實參與 목소리를 높이는 韓國 知識人社會에 冷靜한 省察을 要求하는 冊이 出刊됐다. 정명환 가톨릭대 待遇敎授와 張 프랑수아 시리넬리 파리國立政治大 敎授 等의 共著로 出刊된 ‘프랑스 知識人들과 韓國戰爭’(민음사). 프랑스 知識人 사이의 理念論爭 過程에서 6·25戰爭이 間歇的으로 言及되기는 했지만 이를 本格 趙明河基는 이 冊이 처음이다.
著者들은 韓國의 解放空間에서 極甚한 左右對立이 벌어졌듯이 2次 世界大戰 後 프랑스 知識人社會度 親共(親共)과 反共(反共)의 選擇을 놓고 極甚한 分裂相을 드러냈다고 說明한다.
그 渦中에서 사르트르가 自身의 자리를 ‘메를로퐁티의 오른쪽, 카뮈의 왼쪽’이라고 述懷할 만큼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보다 더 左翼에 기울어 있었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의 高等師範學校 後輩로 두 사람은 2次大戰이 한창이던 1941年 함께 對獨(對獨) 鬪爭을 벌이며 가까워졌고 ‘現代’誌를 創刊할 때 共同編輯者로 나서며 精神的 同志가 된다. 그러나 6·25戰爭은 둘의 關係를 바꿔놓았다.
사르트르는 처음에는 韓國戰爭이 ‘南韓에 依한 北侵’이라는 프랑스共産黨의 意見을 따랐고 나중에는 “北韓이 南韓과 美國의 計略에 빠져 南韓을 攻擊했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北韓을 使嗾해 南韓을 侵攻한 스탈린의 有罪를 認定하면서 反共主義者로 轉向한다. 1953年 사르트르가 ‘資本主義의 矛盾’을 ‘現代’誌에 揭載하는 問題를 둘러싸고 둘은 訣別한다.
사르트르와 高等師範學校 同期이자 軍服務를 함께 했던 레이몽 아롱은 서로가 서로를 知的으로 단련시키는 ‘特權的인 對話相對者’로 여길 만큼 切親했다. 그러나 共産主義에 對한 立場 差로 1947年 아롱은 사르트르와 正反對의 길을 걷게 된다.
아롱은 6·25街 勃發하자 “北韓의 軍隊가 南韓을 侵略한 것은 2次大戰 以後 일어난 가장 重大한 事件”이라고 規定하고 이 戰爭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計劃 아래 이뤄진 南侵임을 거듭 强調했다. 아롱과 사르트르의 訣別은 6·25 前에 이뤄졌지만 6·25를 起點으로 사르트르는 共産主義와 舊蘇聯에 더 가까워지게 되고 아롱은 自由民主主義를 標榜하는 美國 쪽으로 더욱 警査된다.
이 冊은 억압당한 階級과의 協力을 통해 階級 없는 社會의 到來에 知識人이 一翼을 擔當해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參與를 ‘革命的 유토피아’로, 政治的 現實과 道德的 要請을 嚴格하게 區別하면서 平生 參與하는 傍觀者로 一貫한 아롱의 參與를 ‘批判的 現實主義者’로 各各 規定하고 있다.
代表執筆을 맡은 정명환 敎授는 “사르트르의 現實參與가 道德的 動機에 依해 觸發된 뜨거운 熱情의 産物이었다면 아롱은 現實과 冷靜한 距離를 둔 ‘傍觀者的 參與’를 固守했다”면서 “韓國의 知識人들이 사르트르의 幻想이 어떤 結果를 가져왔는지를 反芻하고, 아롱의 共産體制에 對한 批判的 態度를 되새겨 他山之石의 智慧를 얻기 바란다”고 밝혔다.
권재현記者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