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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미령에서 다부동까지 ‘피(血)로 버틴 遲延作戰’[停戰 70年, 끝나지 않은 6·25]|東亞日報

죽미령에서 다부동까지 ‘피(血)로 버틴 遲延作戰’[停戰 70年, 끝나지 않은 6·25]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6月 28日 11時 00分


코멘트

[6回]洛東江 防禦戰線

烏山 죽미령 平和公園의 ‘時計 造形物’에 午前 8時부터 午後 2時 15分까지 戰鬪가 벌어진 時間이 標示되어 있다. 烏山=구자룡 記者
京畿 오산시 ‘烏山 죽미령 平和公園’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戰鬪가 벌어진 1950年 7月 5日 午前 8時부터 午後 2時15分까지를 標示한 時計 造形物이다. 當時 世界 最强國 美國과 韓半島 北部를 차지하고 있던 ‘北韓 傀儡 集團’間 첫 戰鬪치고는 너무 짧은 時間이다. 더욱이 美軍은 北韓軍에 겨우 半나절 假量 버틴 敗北였다. 9月 初 洛東江 防禦線까지 後退를 거듭한 ‘遲延作戰’의 始作이었다.

烏山 죽미령 平和公園의 舊 ‘유엔 秒前 記念碑’. 스미스 部隊院 數字인 約 450個의 돌을 쌓은 모습이다. 烏山 =구자룡 記者


● 한나절 戰鬪에 兵力 3分의 1 損失된 대패
맥아더는 6月 29日 漢江 防禦線을 視察하고 돌아간 뒤 바로 地上軍 投入을 決定했다. 韓國軍의 防衛 能力은 이미 消滅해 北韓軍이 釜山까지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判斷에 따른 것이었다.(맥아더, 169쪽). 맥아더가 처음 投入한 部隊는 日本에 駐屯하고 있던 美 24師團. 釜山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 구마모토에 있던 21聯隊 1大隊(스미스 特殊任務部隊)가 첫 美 地上軍으로 緊急 投入됐다.
7月 1日 釜山 水營飛行場에서 市民歡迎大會를 받은 後 2日 大田을 거쳐 誤算 北쪽 5km 地點의 죽미령에 到着한 것은 5日 午前 3時였다. 道路는 後退하는 國軍과 避難民들로 가득 차 人波를 逆流하면서 올라갔다.

烏山 죽미령 平和公園의 ‘유엔軍 初戰記念碑’. ‘初戰’은 6·25 戰爭에서 유엔軍과 北韓軍의 첫 戰鬪 場所라는 意味다. 烏山=구자룡 記者
午前 8時 後方에 配置된 52砲兵 大隊가 北韓軍 先頭의 T-34 탱크를 向해 砲擊을 始作했다. 前衛部隊는 對戰車砲와 無反動銃을 發射했다. 탱크 4臺가 破壞되었지만 다른 29代는 防禦線을 突破해 줄지어 내려왔다. 스미스 大隊는 後方의 師團 本隊와 通信網도 構築하지 못한 채 戰鬪를 벌였다. 氣象 狀態가 안 좋아 空中 支援도 받지 못했다. 結局 戰鬪 始作 6時間 餘 만에 退却, 撤收했다. 兵力이 分散돼 包圍 攻擊을 받았다. 모든 公用火器는 챙길 틈도 없었다. 部隊員이 天安에 集結했을 때 戰死 浮上 失踪 等 人員 損失이 150餘 名으로 450餘名 스미스 部隊員의 3分의 1에 達했다.
죽미령 戰鬪 戰死者 中에는 나이 어린 10代 少年 兄弟도 있었다. 랜섬과 버질 월포드는 各各 14살과 16살에 軍에 入隊해 죽미령 戰鬪 때는 16살과 18살이었다. 아버지가 自動車 事故로 死亡해 어린 나이에 家族을 扶養하기 위해 軍에 入隊했다. 美軍은 이들 兄弟를 되돌려 보내려 하던 中 죽미령 戰鬪에 參戰했다가 兄弟 모두 목숨을 잃었다.

烏山 죽미령 平和公園에 세워진 스미스 部隊院 450餘名의 이름을 새긴 ‘워터 커튼’. 烏山 = 구자룡 記者


● 서로를 모르며 벌였던 秒前(初戰)
정일권 當時 陸軍參謀總長은 大田에 到着한 스미스 部隊를 처음 보고 失望했다. 北韓 T-34 탱크를 制壓할 對戰車 武器가 없는데다 實戰 經驗者도 部隊員의 6分의 1에 不過했다. T-34 탱크는 美軍이 發射한 對戰車 砲彈을 ‘고무공을 튕겨내듯’ 했다.(정일권, 1986, 54쪽).
美 24師團은 3個 連帶 中 한 個 連帶는 日本에 남겨두고 왔다. 部隊員들은 여름用 軍服을 準備하라고 했다. 初戰에 北韓軍을 擊破한 뒤 서울에서 改善 行進을 하려면 여름用 軍服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程度로 北韓軍을 얕보고 準備가 安易했다.(핼버스탬, 208쪽)

<죽미령 戰鬪 當時 避해 比較>
部隊
스미스 特任部隊 (1大隊와 52砲兵大隊)
北韓軍 4師團
被害
戰死 120名
死亡 42名
捕虜 및 失踪 36名
浮上 150餘名
浮上 85名
重火器 : 完全 遺棄
戰車 4代 破損

美 地上軍이 北韓軍과 처음 戰鬪를 벌였던 죽미령에 세워진 ‘유엔軍 秒前(初戰) 記念館’ . 幼稚園 아이들이 見學을 왔다. 烏山 = 구자룡 記者


● 美 陸軍 事例로 硏究되는 죽미령 戰鬪
죽미령 戰鬪는 美 웨스트포인트(陸軍士官學校) 戰死 敎育에서 硏究 事例라고 한다. 相對에 對한 情報없이 얕잡아보고 戰鬪에 臨하는 것이 얼마나 危險한지 깨닫게 하는 戰鬪로 꼽힌다.(남도현, 106쪽). 美軍은 自身들이 參戰한 것을 알면 怯먹고 戰鬪를 抛棄할 것이라는 者만도 있었다.
北韓은 美軍과의 첫 戰鬪에 對해 ‘朝鮮人民軍 不敗의 威力을 온 世上에 示威하였으며 이른바 世界 最强을 자랑해 온 美製 侵略軍의 倨慢한 콧대를 꺾었다’고 自評했다. (이상호, 171?3쪽)
죽미령 戰鬪는 敗北했지만 北韓軍이 豫想했던 時期보다 훨씬 빨리 美國이 地上軍을 投入해 主力 部隊의 南珍 速度를 늦춰 美軍 後續 部隊를 展開하는 時間을 確保하게 했다. 맥아더는 北韓軍이 韓半島 全域을 手中에 넣기 前에 前進 速度를 늦추기 위해 小規模라도 迅速하게 地上軍 部隊를 派遣해야 한다고 判斷했다. 그래야 敵 司令官이 操心하게 될 것이고 時間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봤다.(맥아더, 173쪽)
낙동間 戰線에서 捕虜가 된 한 北韓軍 將校는 “美軍의 參戰 可能性에 對해 들은 바 없었는데 烏山에 美軍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우리로서는 衝擊이었다”고 陳述했다.(‘1129일간의 戰爭’, 541쪽). 비록 奇襲 南侵을 받아 밀리면서도 北韓軍의 南珍 速度를 줄이는 ‘遲延作戰’으로 洛東江 防禦線을 構築하는 時間을 벌어주었다.

資料 : ‘6·25 戰爭 1129日’(이중근 編著)


● 聯隊長 死亡, 師團長 被拉, 大田戰鬪 敗北
죽미령 敗北 後 美 24師團은 天安에서 34聯隊長을 로버트 마틴으로 交替 投入했는데 그는 2.36인치 로켓砲를 들고 直接 T-34 탱크로 달려갔다가 탱크 銃擊에 死亡했다. 美 24師團이 19日 大田까지 밀려왔을 때는 北韓軍 3,4師團과 105戰車師團이 3個 方面에서 攻擊해 왔다. 윌리엄 딘 師團長은 直接 3.5인치 對戰車砲를 들고 戰車사냥에 나섰으나 衆寡不敵이었다. 이틀 만에 對戰을 北韓軍에 내줬다. 딘은 撤收 過程에서 夜間에 負傷兵에게 물을 떠다주려다 산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는 部隊와 헤어진 뒤 失踪됐다가 捕虜로 잡혔다. 그는 休戰 後 捕虜 交換으로 돌아왔다. 24師團은 7月 21日 後退하면서 沃川 戰鬪에서도 敗北해 첫 戰鬪 以後 보름餘 만에 1萬6000名 兵力 中 約 7000名을 잃었다.

윌리엄 딘 美 24 師團長


●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
資料 : 仁川上陸作戰 記念館
워커 美 8軍 司令官은 7月 26日 洛東江 防禦線으로 8月 1日까지 撤收하라는 命令을 내렸다. 7月 29日 尙州 美 第25師團 司令部에서는 ‘버티느냐 죽느냐’의 戰線死守 命令으로 有名한 訓示를 했다. “우리 뒤에는 後退할 곳이 남아있지 않다. 덩케르크의 慘敗가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

美軍은 8月 1日 馬山?倭館?낙동리?靑松?盈德을 잇는 約 240km의 最初 洛東江 防禦線을 設定했다가 11日 馬山?倭館?浦項을 잇는 180km로 縮小했다. 部隊間 距離를 좁혀 敵의 迂廻 突破를 막고 防禦線을 短縮해 豫備 兵力을 確保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긴스는 “兵力이 不足한 狀況에서 큰 半圓形으로 軍을 配置할 수 있었던 것은 워커 將軍의 功勞”라고 評價했다.(히긴스, 160쪽)

‘護國의 다리’로 불리며 步行道路로 使用되고 있는 칠곡 왜關鐵橋 . 中間에 아치가 없는 곳이 6·25 戰爭 當時 8月 3日 美軍이 北韓軍의 洛東江 渡河를 막기 위해 破壞한 곳이다. 漆谷 = 구자룡 記者
洛東江 防禦線은 倭館을 分岐點으로 馬山에서 倭館까지 西部 120km의 防禦線(X선)은 美軍 4個 師團, 倭館부터 浦項까지 80km(Y선)는 國軍 5個 師團이 擔當했다.

北韓은 8月 初中旬까지는 大邱와 馬山을 集中 攻擊하다, 中下旬에는 모든 戰線을 攻掠했다.한 곳이라도 뚫리면 大邱를 占領하겠다는 意圖였다. 洛東江은 둑이 가파르고 江幅이 400?800m로 攻擊보다 防禦者에게 有利한 天惠의 防禦線이었다.(백선엽 2卷, 249쪽) 8月 16日 美 8軍은 B-29 98臺가 絨緞爆擊으로 爆彈 960t을 쏟아부었다. 爆擊을 指揮한 스트레이트마이어 極東空軍司令官은 “只今까지 가장 强力한 爆擊 作戰이었다. 倭館 西北쪽 가로 3.5마일, 세로 7.5마일 地域에 投下했다. 肉眼 爆擊이 可能해 10時 50分 始作해 13時 終了했다”고 記錄했다.(스트레이트마이어, 8月 16日子 日記)

漆谷 護國平和塔 뒷壁에 새겨진 美軍의 洛東江 防禦線 外郭 絨緞爆擊 場面 浮彫物. 2次 大戰 以後 最大 規模라는 說明이 붙어있다. 漆谷 = 구자룡 記者
洛東江 防禦線에서 國軍과 美軍이 北韓軍과 對峙하고 있던 8月 29日 홍콩에 駐屯하고 있던 英國軍 27旅團이 들어왔다. 16個 戰鬪兵 參戰國 中 美國에 이어 英國이 參與하면서 ‘多國籍 유엔軍’의 面貌를 갖추기 始作했다.

● 구멍많은 洛東江 防禦線
漆谷地球 戰績碑. 漆谷 = 구자룡 記者
絨緞砲擊 이틀 後인 18日 大邱 北方 加算酸性을 占領했던 北韓軍이 迫擊砲를 發射해 7發이 大邱驛에 떨어져 驛務員 1名이 死亡했다. 李承晩 大統領은 프란체스카 女史에게 도쿄로 避身할 것을 勸했다가 거절당했다. “大統領이 나를 불러 도쿄의 맥아더司令部로 떠나라고 했다. 거의 命令調였다. ‘敵이 大邱防禦線을 뚫고 오면 第一 먼저 當身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돼요. 當身만은 여기를 떠나주시오.” (프란체스카 7月 29日 日記)

프라체스카 女史의 ‘亂中日記’에는 洛東江 防禦線의 急迫한 狀況이 이어졌다. ‘洛東江 戰線 17個 地點에서 敵軍이 我軍 沮止線을 突破했다는 나쁜 消息이 파우치로 傳해졌다. 敵이 倭館에 侵入했다고도 한다’(9월 2日 日記). ‘北傀軍 遊擊隊가 大邱까지 浸透했다. 그들은 自由地域(防禦線 內의 地域) 어느 곳에나 퍼지고만 것이다’(9월 5日 日記)

● 詩山穴下(屍山血河) 다부동 戰鬪
탱크 模樣 外觀의 다부동 全的記念館. 年中無休 門을 열어놓고 있다. 漆谷 = 구자룡 記者
美軍과 國軍이 接하는 倭館의 다부동은 白善燁의 第1師團이 맡았다. 1師團의 3個 連帶는 北韓軍 3個 師團을 맞아 數的으로는 連帶와 師團의 싸움이었다. 小隊長이 補充되는 新兵을 밤에 戰線에서 처음 보고 손電燈으로 얼굴을 비추며 “내가 小隊長이다”고 紹介한 뒤 戰鬪를 벌였다. 戰死하면 이름이라도 確認하려고 身柄 이름을 畫廊 담배값 쪽紙에 적었다. 하지만 戰線에 올라간 뒤 내려오지 않은 新兵의 이름은 確認이 쉽지 않았다. 이름을 적었던 小隊長 또한 戰死한 境遇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부동 戰鬪의 無名勇士들은 그런 兵士들이었다.(백선엽 2卷, 258쪽)

다부동 戰鬪의 最大 激戰地 中 한 곳이었던 유학산 中턱의 戰死者 遺骸發掘 記念 地域 案內 標識板. 無名勇士의 遺骸 發掘은 只今도 進行形이다. 漆谷 = 구자룡 記者
유학산 頂上의 유학정 앞에 海拔 839m 標識石이 세워져 있다. 유학산은 國軍이 奪還하기 위해 올랐던 南쪽 斜面은 傾斜度가 매우 커서 戰鬪 當時 마치 攻城戰을 펴는 것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漆谷 = 구자룡 記者
北韓軍 3個 師團은 大邱 占領 目標를 세우고 關門인 다부동 突破를 試圖했다. 328高地와 839高地 遊學酸度 占領했다. 美國은 美 25師團 27連帶를 1師團에 配屬했다. 美軍을 韓國軍에 配屬시키는 것은 매우 異例的으로 다부동 狀況이 그만큼 尋常치 않았다. 兩側間에 피바다의 一進一退 攻防戰이 벌어졌다. 洛東江에는 彼我를 區分할 수 없는 戰死者의 屍體가 떠내려갔다. 다부동 全的記念館 內部에 展示된 高地의 主人이 15番 바뀐 328高地 戰鬪와 수암산 戰鬪, 街山酸性 戰鬪, 유학산 戰鬪 等이 當時의 悽絶한 戰鬪 狀況을 보여준다.

다부동 戰績 記念館 內部의 主要 戰鬪 안내. 짧은 期間 熾烈한 戰鬪가 繼續됐음을 보여준다. 漆谷 = 구자룡 記者
다부동 戰績 記念館 入口의 ‘55’는 8月 1日부터 9月 25日까지를 다부동 戰鬪 期間으로 잡은 것이다. 漆谷 = 구자룡 記者
‘東洋의 베르됭 戰鬪’로 불리는 다부동 戰鬪에서 我軍은 1萬 餘名, 北韓軍은 3萬 餘名이 戰死했다. 特히 유학산 戰鬪에서만 我軍 2300名이 戰死하고 赤軍 5690名이 射殺돼 다부동 最大의 激戰地였다. 그야말로 屍體가 山을 이루고 피가 江을 만들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洛東江 戰鬪에서 北韓軍 最前線에 나섰던 兵力의 相當數는 北韓軍이 南韓에서 徵發한 사람들이었다는 點이다. 北韓은 그들을 銃알받이로 앞에 세웠다. 안타까웠지만 國軍은 그들을 向해 銃을 겨눌 수 밖에 없었다.(백선엽 2卷, 236쪽)

다부동 全的記念館 外壁에 새겨진 戰鬪에 參加한 將兵의 이름. 右側에 1師團長 白善燁 准將이 보인다. 漆谷 = 구자룡 記者
다부동 戰鬪가 한창인 8月 21日 한 美 8軍 將校가 韓國軍이 戰線에서 물러나면 美軍도 撤收하겠다고 했다. 백선엽 將軍은 11聯隊 1大隊가 防禦하는 千坪桐 溪谷으로 달려갔다. 그는 高地를 버리고 물러서는 部隊에 “앞장설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며 兵士들을 督戰했다. 적은 後退했던 兵力이 다시 쏟아져 올라오자 增員 兵力이 왔다고 錯覺했다고 한다.

千坪桐 溪谷을 두고 南北 兩쪽에서 美軍의 徹甲彈과 北韓軍의 砲彈이 交叉하며 날아다녔다. 5時間 假量 持續된 이 場面을 두고 外信 從軍記者들이 ‘볼링 앨리(Bowling Alley)’라고 불러 熾烈한 다부동 戰鬪의 代名詞가 됐다.(백선엽 2卷, 290쪽)

다부동의 美軍 傳承碑. 國軍 1師團과 함께 싸운 美 步兵 27聯隊의 武勳을 기리는 傳承碑에 英文으로 ‘볼링 앨리 勝利’로 表記되어 있다. 豫備機動部隊로 運營된 美 27聯隊는 洛東江 防禦線 곳곳을 支援하며 구멍 뚫리는 것을 막아 ‘消防隊’라는 別名을 얻었다. 漆谷 = 구자룡 記者
洛東江 防禦線에서 美軍 擔當 X線의 南端인 馬山에서의 戰鬪는 다부동 戰鬪나 永川戰鬪 等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釜山까지의 距離가 50km에 不過한 이곳이 뚫렸다면 仁川上陸作戰이 進行되지 못하는 等 戰況은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 美 25師團은 38線을 넘은 뒤 湖南을 거쳐 洛東江 戰線으로 밀고 온 방호산 師團長의 北韓 6師團을 맞아 國軍 海兵隊와 함께 2個月 假量 熾烈한 戰鬪를 벌여 馬山을 지켜냈다. 馬山戰鬪는 ‘60日間 하루도 쉬지 않고 싸웠고, 我軍은 1千名, 敵軍은 4千名이 죽은 大血戰이었다’.(배대균, 10쪽).

● 洛東江 最後 決戰 永川 戰鬪와 ‘링크業 作戰’
永川地球 戰績碑. 피를 흘리며 死亡한 戰友를 무릎에 안고 있는 兵士의 表情이 決然하다. 永川 = 구자룡 記者
洛東江 攻防戰의 最後의 決戰은 仁川上陸 이틀前인 13日까지 열흘間 치러진 永川戰鬪였다. 國軍 2軍團이 두 番 뺏기고 두 番 빼앗는 끝에 지켜냈다. 永川 戰鬪 勝利로 유엔軍이 한 때 考慮했던 韓半島 全面撤收 計劃은 白紙化됐다. 永川에서 敗北해 洛東江 防禦線에 구멍이 뚫리면 仁川上陸作戰도 抛棄해야 하는 狀況이었다. 國軍은 끝내 永川을 奪還해 버텨주면서 上陸作戰도 豫定대로 進行할 수 있게 됐다. 李承晩 大統領이 永川 奪還 前이 繼續되고 있는 7日 河孃의 2軍團 司令部를 찾아 激勵했다.

永川地球 傳承碑. 仁川上陸直前 금오江邊에서 敵을 包圍 殲滅하는 等 反擊 作戰으로 洛東江 防禦線이 둟리지 않도록 했던 過程이 記錄되어 있다. 永川 = 구자룡 記者
仁川上陸作戰이 成功한 뒤 洛東江 防禦線의 國軍과 美 8軍의 總反擊 作戰 課題는 上陸한 部隊가 孤立되지 않도록 밑에서 치고 올라가 挾攻하는 것이다. 一名 ‘링크 業(link up)’ 作戰으로 上陸部隊와 支援部隊의 랑데뷰 作戰이었다. 開戰 以來 防禦에 注力하던 我軍이 本格的으로 攻勢로 轉換하는 것이기도 했다.
仁川上陸作戰의 美 第 10軍團과 洛東江 戰線에서 反擊해 올라온 美 8軍이 京畿道 烏山에서 9月 26日 合流했다.


● 秒前에 敗했던 烏山에서의 美軍 ‘랑데뷰’
9月 16日 總反擊에 나선 美 第1起兵師團이 20日 倭館을 奪還해 洛東江 防禦線을 막고 있던 北韓軍 包圍網에 구멍이 뚫렸다. 北韓軍은 急速度로 崩壞되어 逃走했다. 我軍은 北韓軍이 再編成할 時間을 주지 않기 위해 하루 40km 異常을 前進하며 몰아쳤다. 9月 26日 烏山에서 仁川上陸作戰 部隊와 랑데뷰하고 30日에는 原州까지 밀고 올라갔다.
백선엽 將軍은 當時 一敗塗地(一敗塗地)하던 北韓軍의 모습은 寒心했다고 한다. 駐屯했던 眞摯와 部隊 指揮所에는 重火器와 彈藥, 補給品이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士氣가 꺽일까 두려워 알려주지 않아 仁川上陸作戰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後退하거나, 上陸作戰으로 後方이 遮斷된 것을 알고 魂이 나간 모습 等 다양했다. 北韓軍 機關銃 射手들은 발목에 쇠사슬이 묶여 있어 도망가지 못하고 最後의 抵抗을 하도록 했지만 오히려 順順히 降伏을 했다.(백선엽 1卷, 314쪽). 洛東江까지 내려왔던 北韓軍 7萬 餘名 中 38線 以北으로 撤收한 兵力은 2萬5千∼3萬 名에 不過했다. 나머지는 死亡, 捕虜 或은 山속으로 避身해 武裝 共匪가 되었다.(‘1129일 戰爭’, 122쪽).

가뭄의 단비같은 두 勝利, 동락리와 花翎腸
北韓軍 兵力 數가 많고 裝備面에서 優勢한 데다 奇襲 攻擊을 當해 國軍이 미처 對備하지 못하는 사이 北韓軍은 빠른 速度로 南進했다. 北韓軍 6師團은 별다른 抵抗없이 湖南을 쓸고 내려갔다. 서울?大田∼大邱의 中心軸에서도 北韓의 主力 部隊가 氣勢를 올렸다. 다만 東部戰線에서는 國軍이 北韓軍을 沮止하는 快擧가 있었다.

同樂傳承碑
春川戰鬪에서 宣傳했던 6師團 7聯隊는 忠北 陰城郡 무극리와 동락리에서 벌인 동락리 戰鬪(7月 5~8日)에서 北韓軍 15師團을 擊破했다. 同樂初等學校 김재옥(當時 19歲) 敎師는 國軍이 後方으로 떠났다고 거짓으로 알려주어 北韓軍 15師團 48聯隊 兵力은 警戒를 풀고 校庭에서 休息을 取했다. 學校를 빠져나온 김재옥은 隣近 부용산으로 올라가 4時間 假量 國軍 7聯隊 兵力을 찾아 헤맨 끝에 敵 情報를 提供했다. 7聯隊는 奇襲攻擊으로 敵 1個 連帶를 壞滅시키는 戰果를 올렸다. 2000餘名을 射殺하고 132名을 捕虜로 잡았으며 122mm 野砲 6門 等 多數의 裝備를 鹵獲했다.(김철수, 119쪽). 김재옥 敎師의 活躍相은 映畫 ‘戰爭과 女敎師’로 만들어졌다. 李承晩 大統領은 第7聯隊 全 將兵에게 1階級 特進의 榮光을 주었다.

김재옥 교사의 활약을 담은 영화 ‘전장과 여교사’ 포스터
김재옥 敎師의 活躍을 담은 映畫 ‘戰場과 女敎師’ 포스터
동락리에서 괴멸당한 北韓軍 15師團의 48聯隊 殘餘 兵力과 49聯隊는 慶北 尙州의 花翎腸 戰鬪(7月 17∼21日)에서도 國軍 2軍團 所屬 17聯隊에 3個 大隊 兵力이 殲滅當했다. 國軍은 地域 住民과 避難民들로부터 敵 部隊의 進行 方向에 對한 情報를 蒐集한 뒤 미리 埋伏하고 있다가 敵을 打擊했다.(온창일, 50쪽). 동락리 戰鬪의 7聯隊에 이어 花翎腸 戰鬪의 17聯隊도 全 將兵이 1階級 特診했다. 17聯隊는 開戰 時 甕津半島에서 北韓軍에 밀려 서둘러 撤收했던 敗北를 되갚았다.(‘1129일간의 戰爭’, 234쪽). 17連帶는 美 7師團에 配屬돼 仁川上陸作戰에도 參加한다.

參考 文獻

金哲秀 지음, 『그 때는 戰爭, 只今은 休戰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戰爭』, 플래닛미디더, 2010.
배대균 飜譯, 『馬山防禦戰鬪』, 請미디어, 2020.
白善燁 지음, 유광종 整理, 『白善燁의 6·25 戰爭 懲毖錄』 2卷. 2020.
온창일 等 지음,『6·25 戰爭 60代 戰鬪』, 黃金알, 2010.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韓國戰爭』, 푸른역사, 2012.
李承晩 口述,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기파랑, 2010.
이중근 編著, 『6·25 戰爭 1129日』, 우정문高, 2014.
정일권 지음, 『戰爭과 休戰- 6·25 비록 정일권 回顧錄』, 東亞日報社, 1986.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回顧錄』, 1, 2卷, 一身書籍, 1993.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自由를 위한 犧牲』, 코러스, 2009.
윌리엄 T. 와이블러드 엮음, 문관현 等 옮김, 『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將軍의 韓國戰爭 日記』, 플래닛미디어, 2011.
1129日間의 戰爭 6·25』,陸軍本部 陸軍軍事硏究所, 2014.

구자룡 記者·花亭平和財團 21世紀平和硏究所長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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