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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齊 象徵 ‘魚袋戰記念碑’ 무너뜨리고… 3次 示威때 30餘名 殉國|東亞日報

一齊 象徵 ‘魚袋戰記念碑’ 무너뜨리고… 3次 示威때 30餘名 殉國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6月 1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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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運動 臨政 100年, 2020 동아일보 創刊 100年]
3·1運動 100年 歷史의 現場 2部 <제58화> 慶北 安東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3월 1일 경북 안동에서 열린 만세운동 재현행사에서 태극기를 손에 든 참가자들이 임청각을 향해 ‘육사로’ 도로를 행진하고 있다. 안동시 제공
3·1運動 100周年인 올해 3月 1日 慶北 安東에서 열린 萬歲運動 再現行事에서 太極旗를 손에 든 參加者들이 임청각을 向해 ‘陸士로’ 道路를 行進하고 있다. 安東市 提供
‘日帝의 無慈悲한 銃칼에 맞서 奮然히 일어선 우리의 熱火 같은 意志를 누가 敢히 막을 수 있었으랴.’(안동 三一運動 記念碑)

慶北 安東은 獨立運動의 聖地로 불린다. 1894年 日本軍이 景福宮을 侵奪한 甲午變亂 直後 全國에서 가장 먼저 義兵이 일어난 곳이 安東이었다. 公州 儒生 서상철이 安東 一帶에서 일으킨 2000餘 名의 義兵은 舊韓末 抗日義兵의 嚆矢였다. 1910年 日帝가 韓半島를 强制 倂合한 以後 滿洲로 건너가 武裝獨立鬪爭을 主導한 獨立運動家들 中에도 安東 出身이 많았다.

臨時政府 初代 國務令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建國訓長 독립장)과 西路軍政署와 正義府 參謀長을 歷任한 일송 김동삼(1878∼1937·建國訓長 大統領章)이 代表的이다. 耕學社(獨立運動團體), 부민단(自治機關), 新興武官學校(獨立軍 養成 學校) 等으로 이어진 滿洲의 獨立運動은 安東 出身 100餘 家口가 亡命하면서 터전이 마련됐다는 評價를 받는다.

國家報勳處에 따르면 올해 3月 1日 基準 獨立有功者는 모두 1萬5511名. 이 中 安東 出身이 359名이다. 基礎自治團體들 中에선 安東이 全國에서 가장 많고, 廣域自治團體들(서울 416名, 咸鏡北道 411名, 濟州 164名)과 比較해도 크게 差異나지 않는다. ‘安東의 獨立運動史’가 發行된 1999年에는 安東의 獨立有功者 수(247名)가 서울(202名)보다 많았다.

慶北獨立運動記念館 김희곤 館長은 “韓國의 獨立運動史는 1894年 甲午義兵부터 1945年 光復 때까지 51年 동안 展開됐다”며 “安東 出身 獨立運動家들은 特히 滿洲 地域의 抗日鬪爭에서 큰 足跡을 남겼다”고 評價했다.

안동시는 3·1運動 100周年을 맞아 올해 8月에 ‘抗日鬪爭記 滿洲地域과 慶北人’이라는 主題로 韓中 國際學術會議를 開催한다. 中國 지린(吉林)省 延邊(延邊)大와 沿邊博物館 所屬 敎授 3名이 參席해 國內 專門家들과 함께 主題 發表를 하고 討論할 豫定이다.

○ 激烈했던 己未年 安東 萬歲示威

동아일보와 안동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가 세운 ‘안동 삼일운동 기념비’.
東亞日報와 安東3·1運動記念碑建立委員會가 세운 ‘安東 三一運動 記念碑’.
全國的으로 萬歲運動이 펼쳐졌던 1919年 安東의 萬歲示威는 特히 激烈했다. 3·1運動 當時 慶北에서 日帝 警察·憲兵官署 攻擊이 12次例, 一般官署 攻擊이 6次例 發生했는데 安東에서만 各各 3次例, 5次例가 있었다.(‘경북독립운동사3-3·1운동’) 1919年 3月 13∼27日 사이에는 安東에서 無慮 14次例에 걸쳐 萬歲示威가 일어났다. 3·23 안동면 示威 땐 日帝 軍警의 發砲로 30餘 名이 숨졌을 程度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85年 安東3·1運動記念碑建立委員會와 동아일보가 함께 세운 記念碑가 洛東江邊 月影公園에 서 있다.

安東의 獨立萬歲運動에 불을 지핀 것은 日本 도쿄 留學生들이다. 도쿄에서 2·8獨立宣言이 있은 지 8日 뒤인 1919年 2月 16日, 留學生 강대극이 2·8獨立宣言書를 갖고 安東 땅을 밟았다. 그는 알고 지내던 安東郡廳 書記 김원진을 만나 2·8獨立宣言 消息을 알리고 安東에서도 擧事를 일으킬 것을 提案한다. 日帝 支配에 不滿을 품고 있었던 김원진은 積極 同參 意思를 밝힌 뒤 安東敎會 김영옥 牧師와 이중희 長老를 만나 3月 13日 場날을 巨事日로 定했다. 太極旗와 檄文이 祕密裏에 製作돼 配布되는 等 準備는 着着 進行됐다. 하지만 擧事 하루 前인 3月 12日 日帝의 豫備檢束에 강대극을 비롯한 主動者 4人이 모두 逮捕되며 計劃은 霧散될 危機에 處한다.

이때 臨時政府 初代 國務令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동생 이상동(建國訓長 愛族章)李 나섰다. 그는 13日 午後 안동면 市場에서 ‘大韓獨立萬歲’ 글씨가 적힌 大型 太極鳶을 날리며 萬歲를 외치는 1人 示威를 벌였다. 그는 붙잡힌 뒤에도 車 위에서 “韓國은 獨立될 것”이라며 萬歲를 불렀다. 大邱覆審法院 判決文에 따르면 이상동은 ‘只今이 人心(人心)과 천의(天意)를 明白하게 標示할 正當한 機會다. 同胞들은 눈을 들어 獨立 對韓國 國旗를 보라’고 적힌 檄文도 携帶하고 있었다. 不發에 그칠 뻔한 擧事를 살려낸 以上同意 1人 示威는 以後 安東과 周邊 地域에서 펼쳐진 잇따른 萬歲運動의 起爆劑가 됐다.(‘안동사람들의 抗日鬪爭’)

○ 强勁 鎭壓에 漸次 攻擊的 示威火

以上同意 1人 示威에 이은 안동면의 2次 示威는 3月 18日에 있었는데 規模面에서 1次와 크게 달랐다. 이날 正午 무렵 安東市場에서 30餘 名으로 始作한 萬歲示威는 儒林 및 基督敎 勢力과 協同學校·洑문의숙·童話學校 敎師와 學生들이 加擔하면서 規模가 늘어나기 始作했다. 主動者 14名이 逮捕되면서 暫時 주춤하는 듯했던 示威는 해가 지면서 郡廳·警察署·大邱地方法院 安東支廳 앞에서 拘束者 釋放을 要求하며 繼續됐다.

參加者가 繼續 늘면서 밤 12時를 넘긴 19日 0時 50分頃 示威隊 規模는 2500餘 名에 이르렀다. 當時 안동면 人口가 5500餘 名인 點을 考慮하면 成人 面民 大部分이 모인 셈이다. 投石戰이 펼쳐지는 等 示威가 漸漸 激化되자 日本軍 守備隊는 銃을 쏘며 示威隊를 解散시켰다.

當時 現場을 둘러본 손병선 光復會 안동지會長은 “子正을 넘긴 深夜에 2500餘 名이나 모인 것은 매우 異例的인 日”이라며 “安東은 氏族社會 傳統이 强해 指導者들이 指示하면 다 같이 움직이는 構造였기에 可能했다”고 說明했다.

○ 植民統治機關 안에서 萬歲示威 謀議

안동면 2次 示威 하루 前인 3月 17日에 일어난 예안면 示威도 日帝에 큰 衝擊을 줬다. 大膽하게도 植民統治機關인 面事務所 안에서 萬歲運動이 計劃되고 準備됐기 때문이다. 現職 面長이 主動者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예안면腸 신상면(建國訓長 愛族章)은 3月 11日 밤 이시교 이남호 等 平素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을 面事務所 宿直室로 불러 場날인 3月 17日에 擧事할 것을 提案했다. 뜻을 모은 이들은 同志들을 糾合하고 面事務所 宿直室에서 太極旗와 獨立宣言書를 謄寫했다.

3月 17日 午後 3時 半頃 示威隊 30餘 名이 面事務所 뒤便 先성산에 올라가 日帝가 다이쇼 日王의 卽位를 記念해 세운 ‘魚袋戰記念碑’를 부서뜨린 뒤 萬歲를 외쳤다. 이들의 萬歲 喊聲을 信號로 示威가 始作됐다. 示威 現場에서 15名이 逮捕되자 示威隊는 駐在所로 몰려가 돌멩이와 기왓張을 던지며 拘禁者 釋放을 要求했다. 이 過程에서 25名이 追加로 붙잡히기도 했다. 逮捕를 免한 예안면 示威隊 600餘 名은 山을 넘어 3·18 안동면 2次 示威에 加擔했다. 示威를 이끌었던 신상면 面長은 逮捕돼 懲役 1年 6個月 刑을 宣告받고 獄苦를 치렀다.

강윤정 慶北獨立運動記念館 學藝硏究部長은 “日帝 侵略을 象徵하는 魚袋戰記念碑를 무너뜨리는 것을 信號로 萬歲示威를 始作한 것은 剛한 抗日·反日 意識을 보여준 것”이라며 “現職 面長이 示威에 積極 加擔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3月 21日엔 임동·林下·길안면 等 3個 面에서 駐在所와 面事務所를 襲擊하는 攻擊的 示威가 펼쳐졌다. 特히 임동면 示威隊는 一齊 巡査와 巡査補를 制壓한 뒤 駐在所에 있던 武器들을 빼앗아 몽땅 우물에 던져버렸다.

○ 日本軍의 實彈 射擊에 하루 새 30餘 名 殉國

1919년 3월 23일 안동 3차 시위 당시 일본군의 발포로 30여 명이 숨진 안동경찰서와 법원 터를 알려주는 동판. 안동=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1919年 3月 23日 安東 3次 示威 當時 日本軍의 發砲로 30餘 名이 숨진 安東警察署와 法院 터를 알려주는 銅版. 安東=성동기 記者 esprit@donga.com
日帝는 安東 地域에서 示威가 잇따르고 强度가 세진 것은 初期 對應이 물렀기 때문이라고 自體 分析했다.(‘안동의 獨立運動史’) 以後 日帝 軍警은 여러 面의 聯合示威 性格을 띤 3·23 안동면 3次 示威 때에는 强勁한 鎭壓作戰에 나선다. 日帝 軍警은 示威 直前 對策會議를 갖고 役割을 分擔하는 等 緻密하게 準備했다. 日本 民間人들로 構成된 自警團度 곡괭이 等을 휘두르며 示威隊 鎭壓에 加勢했다.

3次 安東 示威는 現在의 경안高等學校 자리인 美國 宣敎師 住宅 附近에서 始作됐다. 23日 午後 7時 30分 피워진 불이 信號였다. 安東郡의 여러 面에서 온 示威隊들이 200∼300名씩 나뉘어 움직였다. 郡廳·警察署·大邱地方法院 安東支援을 包圍한 示威隊 3000餘 名은 “警察署와 法院 安東支援을 破壞하고 拘禁된 者를 救出하자”고 口號를 외치며 두 機關으로 밀고 들어갔다. 空砲彈을 쏘던 守備隊가 實彈 射擊을 始作하면서 30餘 名이 숨지고 50餘 名이 負傷했다. 慶北 市郡 가운데 가장 큰 人命 被害였다. 示威를 멈추고 山 위로 撤收한 視角이 새벽 4時頃이었다.(‘안동의 獨立運動史’)


▼ 一齊 “獨立運動 맥 끊겠다”며 臨淸閣 마당 가로질러 鐵路 設置 ▼

석주 이상룡 先生의 生家 ‘임청각’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 바로 앞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일제가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부설한 중앙선 철로는 내년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안동시 제공
臨時政府 初代 國務令 이상룡 先生의 生家인 臨淸閣 바로 앞으로 汽車가 지나가고 있다. 日帝가 臨淸閣 마당을 가로질러 敷設한 中央線 鐵路는 來年에 다른 地域으로 移轉될 豫定이다. 安東市 提供
“日帝에 國權을 빼앗기자 이상룡 先生은 家族들을 이끌고 滿洲로 건너가 獨立運動을 펼쳤습니다.”

지난달 15日 찾아간 慶北 安東의 臨淸閣에는 團體觀光客들로 붐볐다. 固城 李氏 宗宅인 臨淸閣은 安東 出身 獨立運動家로 臨時政府 初代 國務令을 지낸 석주 이상룡 先生(1858∼1932·建國訓長 독립장·寫眞)의 生家다. 석주는 이곳에서 庚戌國恥 이듬해인 1911年 獨立運動에 邁進하기 위해 一家族과 함께 西間島로 亡命하기 前까지 살았다. 이곳을 案內하던 文化觀光解說師는 “석주가 亡命 直前 祠堂에 올라가 神主와 祖上 位牌를 땅에 묻으며 獨立하기 前에는 絶對 歸國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事實도 紹介했다.

臨淸閣은 獨立運動家의 産室이기도 하다. 석주를 包含해 臨淸閣에서 태어난 9名과 석주의 夫人 김우락 女史, 孫婦 허은 等 모두 11名이 獨立有功者로 指定됐을 程度다.

當然히 임청각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日帝는 蠻行을 저지른다. 臨淸閣 홈페이지에 따르면 日帝는 不逞鮮人(不逞鮮人·日帝가 自身들의 말에 順從하지 않는 朝鮮人을 指稱한 말)들이 多數 出生한 임청각의 脈을 끊겠다며 1941年 마당을 가로질러 中央線 鐵路를 設置한 것이다. 이로 인해 行廊채와 附屬 建物들이 撤去됐고, 99칸이었던 臨淸閣은 70餘 칸으로 規模가 줄었다. 只今도 臨淸閣에선 옆으로 汽車가 지나가면 옆 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程度로 不便을 겪고 있다.

‘國務令이상룡記念事業會’ 김호태 事務局長은 “1940年代는 日帝가 戰爭을 할 때였다”며 “젊은이들을 入隊시키기 爲해 (日帝에 맞선) 獨立運動家 집안이 亡해가는 모습이 必要했던 것”이라고 說明했다.

記念事業會에 따르면 3·1運動 100周年을 맞아 獨立運動의 象徵인 임청각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어린이날 連休였던 지난달 4日엔 1000名 以上이 訪問했을 程度다. 석주의 曾孫子인 이항증 前 光復會 慶北支部長은 “석주 先生이 世上에 模範을 보여준 분이었다는 事實을 요즘 사람들이 많이 보고 알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청각을 原狀대로 復元하려는 政府 計劃도 速度를 내고 있다. 文化財廳과 慶尙北道, 안동시는 올해부터 2025年까지 7年間 280億 원을 投入해 임청각을 지나가는 鐵路를 撤去하고, 建物 一部를 다시 짓고, 석주의 獨立精神을 알리는 記念館을 建設할 計劃이다. 金 局長은 “6月부터 無許可 建物들에 對한 補償이 始作되고 來年 中에는 臨淸閣 안으로 지나가는 中央線 鐵路 路線이 옮겨질 豫定”이라고 말했다.

安東=성동기 記者 esprit@donga.com
#安東 三一運動 #魚袋戰記念碑 #臨淸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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