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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를 통해 본 大韓民國 近現代史] <14>1987年 民主化 물꼬 트다|동아일보 </14>

[동아일보를 통해 본 大韓民國 近現代史] <14>1987年 民主化 물꼬 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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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入力 2010年 10月 11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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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물拷問 窒息死” 特種報道… 6月抗爭 불씨 댕겨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동아일보의 심층취재가 아니었다면 덮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불씨가 됐다. 담당 수사관
의 고문 사실을 공식 인정한 당국의 발표를 보도한 동아일보 1987년 1월 19일자 1면,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 축소 조작됐음을 보도한 같은 해 5월 22일자 1면, 사건
뒤 이를 묘사한 동아일보 삽화(왼쪽부터).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서울대生 박종철 君이 警察의 물拷問으로 死亡했다는 事實은 동아일보의 深層取材가 아니었다면 덮일 事件이었다. 이 事件은 1987年 6月抗爭의 불씨가 됐다. 擔當 搜査官 의 拷問 事實을 公式 認定한 當局의 發表를 報道한 東亞日報 1987年 1月 19日子 1面, 박종철 君 拷問致死事件이 縮小 造作됐음을 報道한 같은 해 5月 22日子 1面, 事件 뒤 이를 描寫한 東亞日報 揷畵(왼쪽부터). 동아일보 資料 寫眞
‘물拷問 途中 窒息死.’

衝擊的인 題目이 1987年 1月 19日子 東亞日報 1面 머리記事로 올랐다. 서울대生 박종철 君의 死亡이 搜査官의 물拷問 때문이었음을 認定하는 警察의 公式 發表와 함께 事件의 全貌를 傳하는 記事였다. 강민창 治安本部長은 이날 午前 記者會見을 열고 “自體 特別調査團을 構成해 朴 君의 死亡 原因을 糾明한 結果 擔當 搜査官의 拷問에 依한 死亡임이 確認됐다”고 밝혔다. 이 事件은 歷史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 놓은 1987年 6月抗爭의 불씨가 됐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深層 取材가 없었다면 자칫 묻혀 버릴 수도 있었던 事件이었다.

서울대 言語學科 3學年이던 21歲의 朴 君은 14日 主要 手配者인 親舊의 素材를 把握하려는 警察에 强制로 끌려간 뒤 목숨을 잃었다. 警察은 朴 君이 食事 後 調査가 始作된 지 30分 만에 갑자기 쓰러져 病院으로 옮기던 中 車 안에서 숨졌다고 發表했다. 이른바 “冊床을 ‘탁’ 치니 ‘億’ 하고 쓰러졌다”는 當時 流行語가 여기서 생겼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1月 16日子 報道에서 朴 君의 三寸 박월길 氏의 證言을 引用해 ‘숨진 朴 君은 頭皮 아래 出血과 목 가슴 下腹部 사타구니 等 數十 군데에 멍자국이 있었다’고 反論을 提起하며 그의 죽음이 單純한 쇼크死가 아님을 처음 主張했다. 社會面에 ‘大學生 警察調査 받다 死亡’이라는 題目의 記事를 실으며 ‘拷問 드러나면 搜査官 拘束’이라는 副題를 붙여 拷問으로 숨졌을 可能性을 提起한 것이었다. 이어 17日子부터는 朴 君의 屍身을 처음 본 중앙대 附屬病院 醫師 오연상 氏와 剖檢에 立會한 한양대 附屬病院 박동호 氏의 證言을 詳細히 報道하면서 拷問이 있었을 蓋然性이 높다는 事實을 거듭 强調했다.

16日子 ‘김중배 칼럼’은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題目으로 朴 君 死亡 事實을 다뤘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凝視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그의 죽음은 이 하늘과 이 땅과 이 사람들의 回生을 呼訴한다. 正義를 가리지 못하는 하늘은 제 하늘이 아니다. 平和를 심지 못하는 땅은 제 땅이 아니다. 人權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사람들이 아니다.…’

동아일보를 읽은 讀者들은 編輯局으로 電話를 걸어 울먹이며 “朴 君의 死因을 꼭 밝혀 달라” “동아일보를 믿는다”며 付託했다. 동아일보가 特別取材班을 構成해 總力 取材에 나선 가운데 警察은 19日 拷問에 依한 死亡임을 처음으로 認定했다.

拷問이 單純한 司法的 人權의 次元을 넘어 國家權力의 道德性 問題로까지 飛火한 데는 이에 앞서 1986年에 벌어진 두 事件이 징검다리가 됐다. 富川警察署 性拷問 事件과 김근태 民主化運動靑年聯合 議長 拷問事件이다. 이 두 事件의 延長線上에서 朴 君 事件은 政權에 對한 社會的 憤怒를 極大化했다.

이런 狀況에서도 當時 전두환 大統領은 4月 13日 改憲協商을 白紙化하고 間選制 憲法대로 大統領 選擧를 實施하겠다는 ‘護憲回歸(護憲回歸)’를 發表함으로써 들끓는 民心에 기름을 끼얹었다.

동아일보는 朴 君이 顧問으로 死亡했다는 事實뿐 아니라 警察 高位幹部들이 이를 縮小 隱蔽 造作했다는 事實을 連이어 暴露했다. 5月 22日에는 1面 머리記事로 ‘治安本部 幹部들이 犯人縮小 造作을 謀議했다’는 內容을 特種 報道했다. 이튿날에는 ‘法務部와 檢察 高位 關係者들이 이미 2月부터 警察 上級者들의 犯人縮小 및 事件隱蔽 造作 事實을 알고도 搜査指揮權 發動을 抛棄했다’고 暴露했다.

이 一連의 報道는 엄청난 회오리를 몰아왔다. 野黨과 在野團體는 卽刻 ‘朴 君 拷問殺人 隱蔽造作 糾彈 汎國民大會 準備委員會’를 構成하고 6月 10日 全國 規模의 糾彈大會를 開催하기로 決定했다. 6月抗爭의 始發이었다. 동아일보의 報道가 抗爭의 불씨가 된 셈이다.

동아일보는 報道에만 그치지 않았다. 동아일보 記者 132名은 5月 25日 ‘民主化를 위한 우리의 主張’을 採擇했다. 政府의 言論統制 撤廢, 拘束된 言論인 釋放을 促求하고 言論自由 回復과 公正報道를 다짐하는 聲明이었다. 言論界에선 처음 나온 이 時局聲明은 다음 날 日本 아사히신문에 詳細히 報道됐고 AP通信을 통해 世界로 傳해졌다.

6月 10日 護憲糾彈 國民大會가 서울을 비롯한 全國 22個 都市에서 一齊히 열리면서 6月抗爭의 幕이 올랐다. 하루 前인 9日 연세대生 이한열 軍이 示威 途中 催淚彈을 맞고 意識不明 狀態에 빠지는 事件이 發生했다. 그 모습이 言論에 報道되자 國民의 憤怒와 抵抗感은 더욱 커졌고 抗爭의 熱氣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 君이 結局 숨을 거둔 뒤 7月 9日 열린 이 君의 葬禮 때는 全國에서 150萬 名이 거리로 나와 哀悼 물결에 合流했다.

동아일보는 ‘6·10 示威 全國 3831名 連行’ ‘22個 都市 大行進 强行 超緊張’ ‘37個 市邑에서 大行進 攻防 大都市 深夜까지 激烈示威’ 等의 題目으로 6月 抗爭과 關聯한 內容을 6月 한 달 동안 22次例나 1面 머리記事로 報道했다. 네 番의 日曜 休刊을 勘案하면 事實上 거의 每日 6月 抗爭 記事를 1面 톱으로 다룬 셈이다.

政府는 더 버티기 어려웠다. 6月 29日 午前 10時 노태우 민정당 代表는 ‘直選制 改憲 約束’을 包含한 ‘6·29宣言’을 發表했다. 民權이 마침내 勝利를 이룬 것이었다. 이날 동아일보는 ‘民主化를 向한 大決斷’이라는 題目의 社說로 6月 抗爭 集中 報道를 마무리했다. 社說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1987年 6月 29日이 民主發展史에 빛나는 첫 페이지가 되도록 與野 政治人과 國民 모두가 다 함께 힘을 合해 努力하자.’

금동근 記者 gold@donga.com

▼ 安企部 “이후락 인터뷰 빼라” 新東亞 印刷막아 ▼

1987년 국가안전기획부가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 내용을 담은 ‘신동아’ 10월호 인쇄를 중단시키자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이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다. 7박 8일의 철야농성은 신동아 정상 제작이라는 승리와 함께 자유언론의 터전을 넓히는 성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87年 國家安全企劃部가 ‘김대중 拉致事件’과 關聯해 이후락 前 中央情報部長의 證言 內容을 담은 ‘신동아’ 10月號 印刷를 中斷시키자 東亞日報 出版局 記者들이 抗議籠城을 벌이고 있다. 7泊 8日의 徹夜籠城은 新東亞 正常 製作이라는 勝利와 함께 自由言論의 터전을 넓히는 成果로 이어졌다. 동아일보 資料 寫眞
1987年 9月 20日 午後 9時 30分頃 當時 國家安全企劃部(現 國家情報院) 搜査要員 7名이 동아印刷工業의 尹前室을 占據해 時事月刊誌 ‘신동아’ 10月號의 印刷를 物理的인 힘으로 中斷시켰다. 신동아 10月號에는 이후락 前 中央情報部長을 最初로 인터뷰해 그로부터 ‘김대중 拉致事件’의 全 過程을 담은 생생한 證言 記事를 싣기로 돼 있었다. 安企部는 記事가 韓日 間 外交 問題를 일으킬 憂慮가 있다는 것을 理由로 들었다.

이러한 當局의 强壓的인 制裁 措置에 東亞日報 出版局 記者들은 21日 記者總會를 열어 ‘신동아 製作 彈壓을 卽刻 中止하라’는 聲明을 發表하고, 事態가 完全히 解決될 때까지 無期限 徹夜籠城에 突入했다. 出版局 記者들은 “이후락 氏 證言 收錄은 그동안 가려져 온 眞實을 밝혀 歷史의 敎訓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라며 “이番 關係 當局의 ‘신동아’ 製作 沮止 行爲는 또다시 言論自由를 蹂躪하려는 重大한 挑戰”이라고 밝혔다. 政府 側이 이 記事를 削除하면 要員들을 撤收하겠다고 提議했지만 記者들은 斷乎했다. 22日부터는 編輯局 記者들과 出版營業局 職員들도 徹夜籠城에 同調했다.

‘신동아 事態’는 동아일보가 9月 23日子 社會面에 이 事實을 報道하면서 새 局面을 맞았다. ‘신동아 記者 等 80名 3日째 籠城’이라는 題目과 ‘이후락 氏 證言記事 關聯 當局 印刷沮止 抗議’라는 副題를 단 記事는 5共和國 들어 言論彈壓에 對한 言論人들의 組織的인 抵抗을 報道한 첫 事例로 큰 反響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階層에서 激勵 電話가 殺到했으며 在野團體와 다른 言論社들도 支持 聲明을 採擇했다.

AP, 로이터, AFP通信 等 外國 言論도 이 事態를 集中 報道했다. AFP通信은 “韓國 記者들이 政府 當局의 記事 報道禁止 措置에 抗議함으로써 言論自由를 위한 鬪爭에 拍車를 加하고 있다”고 報道했다.

이 事態는 民主化推進協議會의 眞相調査, 민주당의 調査委員會 構成, 韓國出版文化運動協議會의 彈壓中止 促求 聲明, 國會 文公委 開會, 黨政 協議 等을 거쳐 28日 安企部 側이 印刷中止 措置를 撤回함으로써 一段落되었다.

동아일보사 記者들은 마무리 聲明을 통해 “國益 侵害 與否는 政府의 恣意的 解釋에 맡길 수 없으며 國民의 알 權利와 比較 較量해 判斷해야 할 問題”라고 밝히고, “言論自由 爭取를 위해 主體的으로 싸움의 隊列에 參與했던 것을 謙虛한 마음으로 되돌아본다”고 맺었다. 신동아 10月號는 40萬 部가 販賣됐다. 이는 當時 웬만한 日刊新聞 有料 購讀 部數를 뛰어넘는 數字였다.

‘신동아’가 政權에 對한 批判 報道 때문에 權力으로부터 彈壓을 받았던 것은 이뿐 아니었다. 1984年부터 1987年까지 신동아는 當局으로부터 20次例에 걸쳐 制裁를 받았다. 連行調査 4次例, 記事 全面 削除 7次例, 部分 削除를 包含한 修正이 9次例였다.

1984年 10月號 發刊을 앞두고 신동아 編輯陣은 ‘對討論 1988年’을 마련했다. 未來 志向的인 姿勢로 韓國의 現實을 分析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摸索하려던 이 公開討論의 內容 揭載는 當局의 制裁로 霧散됐다.

1986年 5月 安企部는 6月號 ‘改憲 對討論’ 特輯記事 가운데 ‘김대중 氏가 말하는 改憲 方向’의 削除를 要求했다. 신동아가 拒否하자 安企部 搜査要員 4名을 印刷處인 동아印刷工業에 派遣해 印刷 工程을 中斷시키고 記事를 削除하도록 했다. 그해 9月號 ‘富川署 性拷問 事件’ 記事는 安企部의 制裁로 折半 以上 削除됐으며, 12月號에서 民主化 鬪爭에 나섰던 박형규 牧師의 인터뷰와 ‘維新 體制下의 拷問’ 記事가 실리지 못했다.

1987年 1月號에서는 ‘코리아게이트’에 對한 김한조의 證言 ‘나는 朴 大統領의 對美 密使였다’를 削除하라는 安企部의 壓力에 따라 記事를 빼고 表紙와 目次를 지운 뒤 다시 作業해 發行해야 했다.

박희창 記者 ramblas@donga.com

김지영 記者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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