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은 ‘사랑도 技術’이라고 했다. 프롬은 사랑은 練習하면 할수록 向上되는 技術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랑은 經驗’이라고 생각한다. 첫아이를 낳고서는 本能的인 母性愛를 느끼기도 前에 새 生命에 對한 당황스러움으로 어찌할 바 몰라 쩔쩔맸다. 그러나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살을 비비면서 徐徐히 엄마로서의 本能을 느끼고 充滿한 사랑을 經驗하게 됐다.
둘째아이는 첫애의 經驗이 밑거름이 됐는지 아이와 交感하며 느끼는 幸福함이 나를 꽉 채우고도 넘치게 했다. 무엇보다도 感謝할 일은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커지는 사랑이 子息에게만 멈추지 않고 자꾸 勢를 넓힌다는 것이다.
첫째로 낳아주신 父母님에 對한 치사랑이다. 아이에 對한 사랑을 經驗하면 할수록 數十年 前부터 只今껏 子息에게 보내는 한결같은 父母님의 사랑이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몹시도 저린다. 어리석게도 父母의 立場이 된 이제서야 그분들의 사랑을 알 것 같다. 난 아직 그분들의 사랑에 100分의 1도 못 미칠 터이니 앞으로 더 큰 사랑을 經驗하며 얼마나 가슴저린 일들이 많아질까 싶다.
둘째는 生命에 對한 사랑이다. 이 世上 모든 父母가 다 나 같은 마음일 테니 그 生命 하나하나가 얼마나 所重하고 貴한 것인가. 이 世上의 모든 生命의 尊貴함은 굳이 天賦人權이니 人間尊重이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사랑의 經驗으로 느낄 수 있다.
셋째는 바로 나에 對한 사랑이다. 아이를 낳고 그 經驗을 빌려 父母의 사랑을 斟酌하고 生命에 對한 敬畏感을 느끼면서 바로 나라는 사람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어렸을 적 自身에 對한 傲慢에 가까운 自信感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謙遜하며 父母의 子息으로서, 아이의 엄마로서 나는 正말 所重한 存在임을 느끼고 感謝하게 한다. 結局 나를 사랑하는 것이 父母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지내온 지 겨우 6年. 育兒칼럼을 쓰면서도 참 모자란다는 걸 느낀다. 또 아이를 키우면서 經驗하는 사랑의 깊이와 크기에 새삼 놀란다. 아이를 養育한다는 것은 結局은 내가 바르게 사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의 始作은 父母에게 있다. 듣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자란다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며 느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經驗하는 사랑이 漸漸 더 커져 나와 내 아이뿐만 아니라 이웃과 모든 아이에 對한 사랑으로 發展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