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를 嫌惡하나(1) ‘극혐’ ‘○○衝(蟲)’ 같은 嫌惡 表現들은 꽤 不快하고 過激한 表現이지만, 이젠 日常用語처럼 널리 쓰인다. 누군가를 極度로 嫌惡하고, 벌레 取扱하는 일이 잦다는 건 우리 社會에 그만큼 便가름과 差別이 深刻하다는 意味일 것이다. 特히 온라인에서는 政治 理念, 性別, 人種, 宗敎 等이 다르다는 理由로 露骨的인 嫌惡를 쉽게 드러낸다.사회 全般에 共感이 不足한 탓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共感 過剩’의 問題로 볼 수 있다. 關鍵은 共感의 方向이다. 내가 屬한 ‘우리 便’에만 過한 共感이 쏠리면, 相對便에게는 差別과 嫌惡가 생기기 마련이다. 男性을 卑下하는 ‘韓男蟲’이나 女性을 卑下하는 ‘김치女’ 같은 嫌惡 表現들이 代表的이라고 할 수 있다. 徹底하게 우리 便 立場만 共感하며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리다’는 事故가 鞏固해지면, 相對便은 ‘극혐’의 對象이 된다. 이같은 選擇的 共感은 所屬感을 强化時키祈禱 하지만, 同時에 많은 敵을 만들기도 한다.더러운 것 보면 逃亡…生存 反應으로서의 ‘嫌惡’事實 嫌惡感은 生存과 直結된 原初的 感情이다. 다만 原始時代 嫌惡의 對象은 눈, 코, 입으로 느낄 수 있는 1次元的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當時엔 傷한 飮食, 動物 死體, 排泄物 等을 잘못 接觸하면 感染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人間은 먼 옛날부터 五感으로 不快함을 感知해 혐오스러운 것들로부터 도망쳐 살아남았다. 進化學者人 찰스 다윈은 그의 著書 ‘人間과 動物의 感情 表現’에서 嫌惡感을 恐怖, 슬픔, 憤怒 等과 같은 人間의 基本 感情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生存을 위해 必要한 感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如前히 혐오스러운 것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손짓으로 空中을 휘휘 젓고, 침을 뱉거나, 吐할 것 같은 입 模樣을 한다. 이는 더러운 것을 뱉거나, 멀리 밀쳐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回避 反應이 只今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1980년대부터 嫌惡感을 硏究해 온 폴 로진 美國 펜실베이니아對 心理學科 名譽敎授는 이와 비슷한 脈絡에서 1次元的 嫌惡感을 說明한다. 그는 嫌惡感이란, 더러운 것이 입 안으로 넘어올 것 같은 狀況에서 느끼는 不快感으로 定義한다.이런 定義는 道德性과 같은 抽象的인 問題에도 擴大 適用된다. 우리는 道德的, 社會的 脈絡에서 判斷했을 때 혐오스러운 것에 對해서도 ‘썩었다’ ‘逆겹다’ ‘土 나온다’ ‘惡臭가 난다’ 等의 表現을 쓴다. 그 對象이 ‘汚染’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는 傷한 飮食이나 썩어가는 動物 死體처럼 누가 봐도 혐오스러운 게 아니라, 個人的 或은 文化的 脈絡에 따라 判斷이 달라질 수 있다. 嫌惡의 基準이 生存이라는 本能的 反應이 아니라, 個人의 價値觀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各自 다른 嫌惡의 基準으로 世上을 바라보게 되니, 意見이 다른 이들 사이에선 葛藤과 紛亂이 일어난다.“우린 맞고, 너흰 틀리다”…우리 便만 共感 ‘올인’폴 로진 敎授에 따르면, 嫌惡感은 外部의 더러운 것이 내 몸 안으로 境界를 넘어오려고 할 때 發生한다. 甚至於 元來 내 몸에 있던 唾液이나 大便도 一旦 外部로 排出되고 나면, 나의 境界 밖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徹底히 內 境界 안에 있을 때만 혐오스럽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혐오를 느끼는 境界가 우리의 肉體에서 社會的 規模로 커지면 ‘내 篇’과 ‘남의 便’李 나뉜다. 이때 내가 屬한 內集團에 偏愛와 共感이 過剩 集中되고, 나와 立場이 다른 外集團은 差別과 嫌惡의 對象이 될 수 있다. 保守와 進步, 地域主義, 男과 女의 葛藤 等 많은 分野에서 嫌惡感이 噴出되고 있는 것도 이런 次元에서 理解할 수 있다. 폴 블룸 美 예일大 心理學科 敎授는 이런 理由로 “共感에 反對한다”고 主張한다. 모든 共感에 反對한다기보단 共感의 ‘誤用’에 反對한다는 意味다. 그는 著書 ‘共感의 背信(Against empathy)’에서 “共感은 只今 여기 있는 特定 人物에게만 焦點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라고 說明한다. 우리가 共感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게는 共感 能力이 發揮되지 않기 때문이다. 地域, 人種, 宗敎, 政治 理念, 性別 等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共感하기 始作하면, 그 反對에 있는 사람들에겐 暴力을 저지를 수 있다. 甚한 境遇엔 戰爭을 벌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는 大部分 우리가 느끼는 共感 程度에 差異가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境遇가 많다.혐오는 便 가르기를 부추긴다혐오감을 느낄수록 內集團과 外集團의 便가르기는 强化된다. 腦의 認知 方式을 살펴보면 그 原理를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에는 外部에 敵(嫌惡 對象)이 나타났을 때 내 便을 지켜야겠다는 欲求가 同時에 일어나는 作動 原理가 있기 때문이다.세미르 제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生命科學部 敎授 硏究팀은 興味로운 硏究를 進行했다. 硏究팀은 成人 17名을 對象으로 知人 中에 嫌惡하는 사람, 별다른 感情이 없는 中立的인 사람의 寫眞을 各各 보여주면서 腦 反應을 fMRI(機能的 磁氣共鳴映像)로 撮影했다. 實驗 前에 參加者들로부터 헤어진 前 愛人, 職場의 라이벌 同僚 等 싫어하는 사람들의 寫眞을 미리 받았다. 또 알고는 지내지만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寫眞도 함께 받았다.싫어하는 사람 얼굴을 볼 땐 腦에서 憤怒, 두려움, 攻擊性을 느끼거나, 攻擊이나 防禦를 위한 身體的 運動能力을 發揮하도록 몸을 準備시키는 領域이 活性化 됐다. 嫌惡하는 對象을 보면 憤怒, 恐怖, 攻擊性이 誘發된다는 意味다. 이 領域들은 별다른 感情을 느끼지 않는 다른 知人들의 寫眞을 볼 땐 活性化되지 않았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같은 腦의 ‘憎惡 回로’가 사랑을 느낄 때 活性化되는 回路와 相當 部分 겹친다는 點이다. 共通的으로 活性化되는 部分 가운데 하나인 뇌섬(insula)이라는 部位는 혐오스럽고 不快한 刺戟을 評價하는 곳이다. 硏究팀은 “뇌섬은 嫌惡하는 競爭者가 威脅을 加할 때도 活性化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苦痛에 處해 괴로워하는 表情을 지을 때도 活性化될 수 있다”고 說明했다. 卽, 腦에서 ‘혐오스럽다’는 判斷을 내리면, ‘敵에게 攻擊態勢를 갖추자’는 反應과 ‘내 篇을 지키자’는 反應이 同時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과 내 便을 지키기 爲한 準備가 거의 同時에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嫌惡感을 느낄 땐 우리 便과 相對 篇의 境界가 確實해 지는 結果를 낳는다. 相對는 攻擊하고, 내 便은 더 保護하는 쪽으로 말이다. 意見이 맞는 사람들만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더욱 公告하고 結束하게 만든다.상대편 困境에 處해도…“안 도와줄 것” 內集團과 外集團에 對한 選擇的 共感은 日常의 많은 部分에서 일어난다. 그 結果는 꽤 冷淡하다. 外集團에 屬한 사람이 苦痛당하고 있을 때 苦痛에 共感하는 程度가 鈍感해지고, 도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고통스러운 狀況에 있을 때, 손을 뻗어 도움을 請한 對象이 何必 나를 性別, 政治 理念, 宗敎, 人種 等으로 差別할 準備가 돼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은가. 甚至於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눈 앞에서 苦痛을 즐기기까지 한다니 섬뜩하기까지 하다.스위스 취리히代 硏究팀은 特定 地域 축구팀을 熱烈히 應援하는 男性 16名을 對象으로 實驗했다. 硏究팀은 이들 中 같은 팀을 應援하는 사람끼리 該當 팀의 象徵이 새겨진 손목 밴드를 하게 했다. 參加者들끼리는 같은 팀 팬이 누구이고, 競爭팀 팬은 누구인지 손목 밴드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기서 內集團은 같은 축구팀을 應援하는 實驗 參加者이고, 外集團은 競爭팀을 應援하는 實驗 參加者가 된다.보다 쉬운 感情移入을 위해 蹴球 韓日戰을 생각해 보자. 實驗 參加者 一部는 붉은 惡魔를 象徵하는 빨간色 손목 밴드를, 다른 一部는 日本 축구팀을 應援하는 파란色 손목 밴드를 하고 있다고 假定하자.그리고 硏究팀은 各各 같은 팀을 應援하는 이들끼리 便을 나누고, 競爭팀과 퀴즈 게임을 해서 競爭意識을 限껏 高調시켰다. 眞짜 硏究는 그다음부터였다. 硏究팀은 各各의 實驗 參加者들이 다른 參加者가 손등에 電氣 衝擊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 보게 했다. 그리고 이때 腦에서 일어나는 活動을 觀察하기 위해 fMRI로 撮影했다. 參加者들은 內集團 參加者가 苦痛받을 땐 共感과 關聯된 腦의 轉側 腦旋葉耳 活性化됐다. 또 이들은 內集團 參加者가 받는 電氣 衝擊의 强度를 半半 나눠 같이 苦痛을 나누겠다고 나섰다. 이와 反對로 外集團 參加者가 苦痛받고 있는 것을 볼 땐, 共感과 關聯한 腦 活動이 눈에 띄게 減少했다. 相對方의 苦痛에 共感하지 못하니, 이들을 돕겠다는 意思를 밝힌 比率도 떨어졌다. 더 놀라운 대목은 外集團 參加者가 電氣 衝擊으로 苦痛받을 땐 腦의 側座核 部分이 活性化됐다는 것이다. 이 部位는 補償과 關聯한 領域으로 도파민이 分泌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關聯돼 있다. 硏究팀은 “該當 部位는 또 다른 硏究에서 다른 사람의 不幸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낄 때도 똑같이 活性化가 觀察된 領域”이라며 “外集團 構成員이 苦痛받는 것을 보는 것이 腦에서는 補償과 같은 方式으로 處理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說明했다. 뿌리 뽑기 어려운 社會의 嫌惡感이 어디에서부터 왔고, 어떤 잘못된 方式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봤습니다. 다음週 記事에서는 △進步-保守 主義者는 서로 생긴 것부터 ‘혐오스럽다’고 느낀다 △다친 示威隊, 相對 政黨 支持者라면 도울까? △짐승·벌레 取扱…‘非人間化’가 殘酷함을 더한다 等 政治 領域에서 나타나는 嫌惡感에 對한 다양한 硏究를 紹介할 豫定입니다. 最高야 記者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