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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영의 同伴者 김재수 山岳 大將|新東亞

고미영의 同伴者 김재수 山岳 大將

“微影氏가 힘들어할 때 업고라도 下山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 이혜민│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behappy@donga.com│

    入力 2009-09-11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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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山을 오를 수 있지만 아무나 히말라야 登攀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 ‘한 發은 苦痛이고 한 發은 希望이다’ 繼續 그렇게 呪文을 걸고 간다
    • 나하고 같이 간 隊員이 또 問題가 있으면 힘들어 못 산다
    • 나는 나 自身의 삶을 위해 히말라야에 간다
    고미영의 동반자 김재수 산악 대장
    釜山 龜浦驛, 나무처럼 길쭉한 두 다리가 위태로이 서 있다. 얼마 前 死亡한 山岳人 고미영의 同伴者(同伴者·어떤 行動을 할 때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 김재수 山岳大將은 담배를 손에 쥔 채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김광석의 노래가 흐르는 그의 車에 오르자 語塞한 雰圍氣를 깨려는 듯 그가 먼저 아이들 얘기를 꺼낸다.

    필리핀에서 돌아와 아빠 事業을 돕고 있는 큰아이, 醫大 다니는 둘째, 高等學校 다니는 막내…. 그의 아파트에 到着하자 세 아이의 寫眞과 함께 눈 덮인 山 寫眞이 손님을 반긴다. 좋은 追憶부터 꺼내 보면 마음이 便해질까 싶어 登山 契機부터 물었다. 줄담배를 피우던 그가 慶尙道 말套로 나직하게 말했다.

    ▼ 山에는 언제부터 가셨습니까.

    “열일곱 살 때, 누님이 勸하셨어요. 成人은 스스로를 責任질 수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되려면 趣味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처음엔 別 재미가 없더라고요. 힘만 들고. 그러다 자그마한 山에서 새벽에 텐트 밖으로 나와 해가 막 떠오르려는 瞬間을 봤어요. 山골짜기에 안개가 자욱한데 봉우리 사이로 햇살이 퍼지며 해가 떠오르는 그 光景이 가슴에 확 와 닿더라고요. 섬에 와 있는 것 같고. 이런 光景만 볼 수 있다면 登山을 趣味로 삼아도 되겠다 싶어 그때부터 다녔죠. 山洞네에서 자라 처음부터 잘 올랐습니다. 몸도 適當하고요. 30年 동안 175cm 61kg 허리 28인치 그대로니까요.”

    ▼ 專門 山岳人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던 건 아니네요.



    “當時에는 없었죠. 그러다 1977年 高相敦 先輩님이 에베레스트를 登頂했다는 消息을 듣곤, (釜山) 보수동 헌冊房 골목에서 日本의 ‘山과 溪谷’, 美國의 ‘클라이밍’ 雜誌를 사다 보면서 ‘나도 이런 거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1989年에 海外旅行이 自律化되자마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갔는데 그때 나이가 스물 아홉입니다. 登攀 퍼미션(許可書)을 얻으려면 3000달러 程度가 들어 하루에 20달러 하는 트레킹 퍼미션으로 山자락만 돌다 왔는데, 더없이 아름다운 山이었습니다.”

    ▼ 저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와도 別 感興이 없던데, 어떤 點이 좋으셨나요.

    “안나푸르나는 처음에 모든 걸 보여주지만, 에베레스트는 한 발짝 들어갈 때마다 조금씩 보여줍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쫘악 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죠. 그런데 처음 가서 그런지 高所症으로 浮腫도 생기고 嘔吐도 甚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韓國으로 돌아온 뒤 每日 아침저녁으로 20㎞씩 뛰었습니다. 이듬해 釜山오사카合同大 隊員으로 參加해 에베레스트 頂上을 다녀왔지요. 그런데 내 얘기만 합니까.”

    ▼ 에베레스트를 征服하셨군요.

    “征服이 아니라 登頂(登頂)입니다. 山岳人은 그런 表現 안 씁니다. 山꼭대기에 暫時 머물다 오는데 어떻게 征服이란 表現을 씁니까. 오를 等, 봉우리 精子를 씁니다.”

    ▼ 네, 다시 質問 드리겠습니다. 에베레스트 登頂이 쉬운 건가요?

    “世界에서 가장 높은 山이니 쉽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갔다 오고 보니 虛無하더라고요. 내가 고작 이걸 하려고 그 努力을 했나 싶고. 그래도 뭔가 더 있을 것 같아 다음해에는 대한산악연맹 遠征隊 隊員으로 시샤팡마 頂上에 올랐습니다.”

    ▼ 그 뒤부터는 虛無하지 않으셨나요?

    “예. 宿命이라고 할까, 運命이라고 할까. 히말라야를 繼續 가야겠다는 熱情이 생기더라고요. 當時 애가 둘이고, 비닐하우스 한 동은 事業體로 쓰고 나머지 한 棟을 집으로 쓸 때인데도, 山에 對한 熱望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세 番째로 갈 때는 제가 팀을 꾸렸습니다.”

    ▼ 大將을 맡아보니 어떠셨습니까.

    “리더로서 資質이 不足했습니다. 올라가고자 하는 欲心 때문에 後輩들을 올려 보내지 않고 제가 올라갔어요. 食糧도 不足하고 여러 가지 問題로 人員 全體가 登頂하기는 어렵거든요. 普通 1次, 2次, 3次로 나누는데, 1次 隊員들이 다녀오면 부담되죠, 或是 事故가 나진 않을까 하고. 그 뒤에는 金錢的인 理由도 있고, 4,5個月씩 나가 있기도 그래서 혼자 짧게 다녔습니다.”

    ▼ 金錢的인 問題요?

    “大將으로 갈 때 慈悲 2000萬원을 들였습니다. 先輩님들은 基本 經費를 負擔하셨지만 後輩들한테는 經費 부담시키기가 어려워서…. 팀을 리드한다는 건 그 사람들을 책임진다는 건데. 그런데 너무 내 얘기만 하는 거 아닙니까.”

    ▼ 마저 여쭙겠습니다. 혼자 어디를 다니셨나요.

    “러시아 쪽에서 두 番, 티베트 쪽에서 한 番 7000m級을 올라갔는데, 혼자 다니면 내 몸 狀態에 맞게 움직일 수 있지만 不便한 點도 있더라고요. 危險에 빠질 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는 거. 그 뒤로는 같이 다니면서 1年에 2個月假量은 山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1999年에 街세르브룸에 갔을 때 大將인 제가 아닌 隊員 2名을 頂上에 보냈고 그 뒤로는 리더로서 名譽를 얻었다고 봐야죠.”

    고미영의 동반자 김재수 산악 대장

    고미영氏는 히말라야 8000m 高峯 14座 登頂을 目標로 했다. 金 大將은 高氏가 오른 11個 봉우리 中 10個 봉우리를 2年 半 동안 함께 올랐다.

    ▼ 왜 後輩를 보내셨습니까.

    “韓國 山岳界를 위해서는 이런 登攀을 할 수 있는 後輩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者일(로프)의 情’이란 노래도 있듯이 우리는 로프라는 핏줄로 맺어진 兄弟입니다. 어떻게 보면 兄弟보다 더 애틋한 사이입니다. 누군가 묶은 그 로프를 함께 잡고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 그때도 費用을 對셨나요?

    “當然하죠. 萬若 後輩가 냈다, 그럼 ‘빳따’(몽둥이) 맞을 짓입니다. 先輩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先輩는 先輩입니다. 제가 어릴 때 周圍에 많은 先輩 분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財政的으로 餘裕 있지는 않았죠. 造船所에서 鎔接하는 사람, 막일하는 사람, 조그마한 中小企業 現場에서 勤務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先輩님들과 山에 갔다 오면 뒤풀이를 해주시는데, 없는 돈으로 튀김 1000원어치에 燒酒 한 甁을 선뜻선뜻 사주셨어요. 오비베어 같은 데 가서 (麥酒) 500cc 한 잔이랑 닭튀김度 사주시고, 가는 길에 택시 타라며 1000원 2000원 손에 쥐여 주셨죠. 제게는 그게 只今의 1億, 2億원보다 價値 있습니다. 그분들께 받은 거 後輩들한테 돌려줘야죠.”

    ▼ 恩惠는 도움 준 先輩한테 갚아야지 왜 後輩들에게 갚습니까.

    “도와준 先輩님이 無數히 계신데, 富者 된 사람이 社會에 還元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가난해도 되돌려줄 줄 아는 사람이 眞正으로 後輩를 아는 사람이죠.”

    ▼ 先輩들이 도와주셨다는 게 뭔지….

    “…그분들이 先驅者的인 役割을 하지 않았습니까. 劣惡한 環境에서 登攀 루트를 만들고, 山길을 만들고, 資料로 地圖를 만들고. 그 記錄이 있어서 우리가 安全하게 다닐 수 있어요. 그분들 德分에 우리가 있는 겁니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表現하겠습니까. 다 代물림이거든요. 대한산악연맹의 支援으로 내가 얻은 名譽를 後輩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私費 2億원을 들여 2007年에 에베레스트遠征代를 꾸렸습니다. 後輩들에게 ‘에베레스트 頂上에 올랐다’는 名譽를 주면, 登頂을 수월하게 推進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에베레스트나 K2는 누구나 아니까 거기 올랐다 하면 認定해주죠. 遠征隊 20名 中 10名이 登頂했습니다. 히말라야 後輩를 9名 기른 겁니다. 2008年 K2에 오를 때도 마찬가지였고. 내려오다 墜落死한… 後輩 세 名과 고미영, 나 이렇게 다섯이 頂上에 올라갔습니다.”

    ▼ 大將님의 目標는 무엇이었습니까.

    “가고 싶은 山에 時間 내서 간다는 거였어요. 職業도 있고 家庭도 있으니까 욕심내기가 어려웠죠. 고미영氏 만나기 前에 8000m級 봉우리 4個를 登頂했고, 60歲 되면 8000m 14個를 다 오르지 않겠느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제 얘기만 하는 거 아닌가요?”

    ▼ 이제 고미영氏 얘기를 하겠습니다. 두 분이 戀人 關係였다는 所聞이 있던데.

    “所聞 안 나면 제가 病身이라고 했잖아요. 戀人을 뛰어넘은 關係였던 건 맞습니다. 나보다 나은 山岳人도 많은데 그中에 나를 믿고 認定해준 사람인데, 어떻게 애틋하지 않겠어요. 微影氏가 힘들어할 때, 걷지 못하는 狀況이 벌어진다면 업고라도 下山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1993年 에베레스트 登攀하던 外國 山岳人도 같이 온 사람을 살리다 죽었는데, 나를 믿어주는 同僚를 위해서 내가 왜 못 죽습니까. 男子들 社會는 그렇지 않습니까. 다 손가락질해도 누군가 나를 믿어주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히말라야 8000m級 봉우리 14個를 다 오르고 나서 結婚式을 올릴 거라는 報道가 있었는데요.

    “그렇게 報道한 言論社한테 謝過, 다 받았습니다. 事實이 아니에요. 저도 아내와 헤어진 사람이라 問題될 건 없어요. 微影氏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3年間 그렇게 붙어 있어도 이런 感情은 서로 얘기해보질 않았어요. 微影氏가 外向的이지만 眞情으로 속마음을 얘기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勿論 내한테는 이것저것 많이 얘기했죠. 糖尿로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 山에서 만났지만 經濟 問題로 離婚한 男便 얘기, 앞으로 만들고 싶은 登攀學校 얘기…. 제가 微影氏네 집으로 相見禮 갔다는 報道가 나오는데, 김장할 일손이 不足하다고 해서 갔던 겁니다.

    그런데 이番에 微影氏 母親이 그러시더라고요. 昨年 여름에 와서 좋은 사람이 있다고 그랬다고…. 사람들이 저보러 自己 살 窮理하려 빠진다고 하지만 이게 事實입니다. 그래서 戀人이다 아니다 否定하기 어렵죠. 말이 오가는 過程에 家族들은 傷處 받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關係가 發展할 수도 있었으니 否定할 수만도 없습니다.”

    ▼ 生前에 고미영氏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당찬 사람이었어요. 執拗하게 電話해서 다 꾸려진 에베레스트遠征臺에 參與하겠다고 하고, 내려와서는 히말라야 14座 目錄이 적힌 종이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自己 目標라고 도와달라고 하고. 제가 머뭇거리니까 國際電話로 會社에 電話해 김재수 大將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많습니다. 自己가 目標 세웠다 하면 自己 혼자만 아는 게 아니라 만나는 사람에게 다 얘기하고, 낯선 사람에게도 計劃表에 사인하곤 ‘제 計劃이 이렇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이 山에 두 番 오기 싫다고, 目標地點까지 한 番에 가겠다고 당차게 웃는 그런 山岳人이었습니다. 이런 後輩를 키우는 것도 意味 있겠다 싶어 매니저가 되었고요. 三겹살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구운 돼지고기를 못 먹는데, 微影氏는 點心때高 저녁때高 구워 먹었어요. 과일캔度 좋아하고, 구운 오징어는 한 마리씩 가지고 다녔어요.”

    고미영의 동반자 김재수 산악 대장

    金 大將은 고미영氏를 “等定하지 못하고 下車한 後輩에게 에델바이스를 十字繡로 만들어준 따뜻한 사람”이라 回顧했다.

    ▼ 고미영氏에게 큰소리도 치셨나요.

    “로프를 安全하게 設置하지 못한다거나, 八字로 걸으면 혼냈습니다. 힘들면 八字걸음으로 걷기 쉬운데 山岳人은 두 발끝이 조금 안쪽을 向하게 걸어야 합니다. 로프에 옷이 찢어지거나 넘어질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큰 事故가 날 수 있으니 몹시 혼냈죠. 平素 서로 敬語를 썼지만 화낼 때만큼은 半말했습니다. 그럴 때면 微影氏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듣고만 있어요. 메모한 걸 보니 이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같이 있을 때는 든든해서 좋았고, 火를 낼 때는 나를 돌아볼 수 있는 契機가 되어 좋았다고…. 그 추운 데서 얇은 綿掌匣 하나 끼고 動映像 撮影하고 있는데, 힘들다고 協助 안 해도 火냈습니다. 힘들어도 내가 더 힘든데 高度가 얼마고 傾斜가 얼마고 地點이 어디란 것만 말하면 되는데… 그래도 알죠, 微影氏 힘든 거.”

    ▼ 고미영氏의 生前 인터뷰 末尾에 金 大將님께 感謝하다는 멘트가 많던데요.

    “같이 山에 올라도 늘 그림자 取扱 받는 節 안쓰러워했던 사람입니다. 山에 오르는 것이 힘들지만, 아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自己 도와주느라 動映像 찍는다면서 손가락 발가락 凍傷 걸리고, 아무런 榮光도 없이 있는 그 사람을 봤을 때 더 힘들다고…. 인터뷰 中에 눈물 비치던 사람입니다. 또 생각 나네요…. 나로서는 그래도 마 女性 山岳人을 하나 키운다는 보람이라도 있지만…, 외로움 안 느낀다면 거짓말이겠죠…. 計劃부터 登頂까지 많은 걸 이끌었는데, 公式的인 자리에 가도 人事도 못 받고, 寫眞 數萬張을 찍어도 이름 한 字 못 올리고… 그럴 때마다 옆에서 저를 챙겨주던 사람입니다. 저도 나름대로 世界 初等(初登)도 하고, 韓國 初等도 한 적 있는데 紹介할 때마다 除外되니까 自己는 따라간 것밖에는 없는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未安하다고 하던 고마운 사람이에요. 等定하지 못하고 下車한 後輩에게 도와준 德分에 登頂했다면서 十字繡로 에델바이스를 만들어주던 사람이죠.”

    ▼ 그럼 이제 사고 얘기를 여쭙겠습니다. 너무 無理하게 하다 事故가 났다고들 합니다.

    “無理가 아닙니다. 많은 팀이 한 個만 目標로 해서 가지 않습니다. 한 山에 올랐다가 내려와 都市에서 며칠 쉬고, 다시 헬기 타고 베이스캠프로 가서 며칠 適應하다 山에 오르는 게 世界的 趨勢입니다. 事實 韓國에 들어와 여러 스케줄을 消化하는 것보다 現地에서 머물다 오르는 게 體力 面에서 더 낫습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現象 維持만 可能하기 때문에 普通은 中間에 都市로 가서 體力을 補强했습니다. 이런 計劃이 無理라고 생각했으면 振作 指摘했어야 합니다. 갈 때 操心하라 한마디 해놓고, 이제 와서 내가 操心하라 그리 일렀는데 無理했다고 말하는 先輩들은 그렇게 말할 資格 없습니다. 나가기 前에 밥 사 먹으라고 돈 萬원 준 적 없고, 지나가다 偶然히 만나서야 수고했다 말 한마디 했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죠.

    自肅하고 反省해야 할 때 왜 인터뷰하느냐고들 하는데 이 部分을 明確히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봉우리 하나 오를 때마다 1億원씩 준다고 해서 그랬다는 所聞도 도는데, 내 뭘 보고 會社에서 돈을 줍니까. 遠征 經費만 받았습니다. 사람이 아까운 겁니다. 스포츠클라이밍 氷壁登攀을 世界的인 水準으로 할 수 있는 사람, 히말라야 高峯을 2年6個月에 11個 오를 수 있는 사람, 生存해 있으면 世界的인 英雄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正말로 좋은 陶瓷器를 만들었는데 失手로 깼습니다. 이 얘기밖에 할 수 없어요. 너무너무 아까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하고는 比較가 안 됩니다. 10年, 20年 登攀해온 사람이 아니라, 뒤늦게 始作해 한 分野의 頂點에 있다 다른 頂點으로 가던 中이었는데….”

    ▼ 오은선氏와 過度한 競爭을 했던 點도 指摘되던데요.

    “寫眞 찍는 分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찍고 싶은 마음이 안 듭니까. 글 쓰시는 분도 그렇지 않아요? 微影氏度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더 잘해보려는 마음이 들지요. 프로는 競爭에서 自由로울 수 없습니다. 勿論 매니저가 코치이니 競爭에서도 잘할 수 있게 이끄는 點이 있죠. 登頂 計劃을 짜고 눈길을 내고 그 努力을 映像으로 記錄하는 게 제 일인데요. 그렇지만 計劃을 無理하게 짜진 않습니다. 競爭만이 登頂의 目的은 아닙니다. 安全이 最優先입니다.”

    ▼ 事故 當時 狀況을 다시 말씀해주세요.

    “7月10日 午後 7時11分에 낭가파르바트 頂上에 섰습니다. 强한 바람 때문에 하산이 늦어졌고 正常과 캠프4 사이에서 告訴 포터가 甚한 高所症으로 全혀 擧動을 할 수 없어서 前 隊員이 合心해 告訴 포터를 캠프4까지 데려다주느라 하산이 더 늦어졌습니다. 캠프3에서 캠프2까지는 全 루트가 로프로 連結돼 있는데 캠프2의 30m 위쪽 緩傾斜 地點에 로프가 묻혀 있었습니다. 먼저 내려오면서 그 로프를 드러내려고 했지만 3m만 드러났고 나머지 10m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로프 없이도 내려왔기 때문에 저는 먼저 내려와 뒷사람을 위해 물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微影氏가 그 地點을 지나다 신발 밑의 아이젠 部分이 옷이나 다른 쪽 신발의 아이젠 끝에 걸려서 墜落한 것 같습니다.”

    ▼ 救助 過程은 어땠습니까.

    “事故 다음날 헬기로 搜索하는데 前날 보였던 屍身이 視野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周圍를 네 바퀴 돌고 못 찾아 돌아가려는데 제 눈에 뭔가 걸렸습니다. 그래도 微影氏랑 나랑 因緣이 있기는 했는가 봐요…. 救助하려고 하는데 救助하다 또 事故가 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헬기로 救助하려고 했는데 파키스탄 헬기會社 쪽에서 飜覆하는 바람에 3日 만에 우리가 直接 들어가게 됐습니다. 우리보다 山 오르는 技術이 없는 파키스탄 포터들이 自己들이 收拾해서 올 테니 1萬달러를 달라고 했는데, 차마 못하겠더라고요. 그 사람들도 人間이고 우리도 人間인데. 그래서 찾으러 나섰습니다. 微影氏 있는 地點이 (午前) 9時 半 以後엔 눈이 녹아 危險해질 것 같아 딱 計算해서 다섯 番으로 나눠 새벽 3時에 出發해 로프를 設置하면서 들어갔습니다. 첫 番째 두 番째 마디는 박희용이란 親舊가 하고, 나하고 같이 있던 後輩 윤치원이가 그 다음 區間을 하고, 문철환이란 親舊가 그 다음 區間하고, 마지막 區間은 제가 했습니다. 微影氏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더라고요.”

    고미영의 동반자 김재수 산악 대장

    고미영氏는 最强의 스포츠클라이밍 選手이자 韓國을 代表하는 女性山岳人이었다. 2001年 스포츠클라이밍 월드랭킹 5位, 2003年 아이스클라이밍 월드랭킹 5位를 記錄했다.

    ▼ 왜 보여주기 싫었습니까.

    “보여주기 正말 싫었어요. 平常時에 그 좋은 모습들만 記憶하라는 意味도 있고. 예쁜 모습 보여주고 싶지 그런 모습은…. 보니까 半쯤만 露出됐는데 外傷은 없더라고요. 가슴 쪽에 浮腫이 있는 걸로 봐서, 가슴 아픈 얘기인데, 한두 時間은 血液이 돌았던 것 같아요. 머리를 다쳤으니 苦痛은 없는 狀態였겠지만, 醫學的으로 그렇다고 하대요. 입술은 까맣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는데… 많이 變했더라고요. 그래서 20年 동안 제가 쓰고 다니던 粉紅色 帽子를 벗어서 씌어줬어요. 바라크바라고 하는 某者데 뒤집어씌우면 얼굴이 안 보입니다. 뒤를 보니까 陷沒되어 있더라고요. 물이 흐르는 地域이니까 그 안에 물이 고여 있었고…. 얼어 있는 狀態라 몸이 묶여지지 않았는데 時間이 지나니까 부드러워졌습니다. 근데 제가 微影氏랑 첫 登頂하고 나서 사준 목걸이가 보이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디로 떨어졌나 했죠. 액세서리가 하나도 없길래, 고미영의 m이고 마운틴의 m이라면서 준 건데, 늘 하고 다녔는데…. 그런데 파키스탄 病院에서 男便이라고 말하고, 옷 갈아입히는데 그게 딱 나오는 거 있죠. 그 목걸이가 일부러 풀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건데. 微影氏 家族들 만나 보여주고, 다른 건 몰라도 이 목걸이는 제가 가지고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只今 제가 걸고 있는 게 그 목걸이입니다. 코오롱, 正말 義理 있는 會社입니다. 사람이 보이질 않아 헤맬 때도 代表 분이 그러셨습니다. 돈이 얼마가 들든지 間에 屍身은 찾는다고요. 只今도 고마움 잊지 않고 있습니다.”

    ▼ 結果的으로 大將님과 함께 2008年 K2를 登頂한 山岳人 4名이 모두 떠났습니다.

    “微影氏 永訣式 마치고 (K2에 오르다 死亡한 대원 3名의) 1周忌 追慕式에 參席했습니다. 머리를 못 들겠더라고요. 참 正말 힘들더라고요…. 遺家族이 저 놈我慢 가면 事故 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充分히 그럴 수 있습니다. K2는 自然災害高, 微影氏는 失手인데. 내가 떠민 것도 아니고 잡아당긴 것도 아닌데…. 어느 누가 慰勞해도 내 귀에는 안 들어옵니다. 스스로에게 慰勞해야지….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는 슬프긴 했지만 哀惜하다 조금 더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했지, 이렇게 속에 꽉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요, 罪責感이나 負債感, 이런 거 있습니다. 그 後輩들이 나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 隊員들이 事故를 當했는데도 山이 무섭지 않습니까.

    “危險하다는 건 알지만 무섭지는 않습니다. 山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눈沙汰 때문에 움직일 수는 있지만 山 自體는 그대로거든요. 저도 正말로 힘듭니다. 昨年에 그랬고, 올해 그랬고…. 그래도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두 番 다시 山을 쳐다볼 수 없을 것 같고, 山의 바깥 테두리에 있는 사람밖에 안 되고, 登攀을 통해서 그 試鍊을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 그냥 잊으면 되지 왜 山에 갑니까.

    “저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苦悶했습니다. 負債感, 그렇죠. 못했던 거를 代身이라도 해주자는 생각. 이걸로 해서 名譽를 얻자는 게 아니라, 얘들이 하고 싶어했던 登攀을 내가 한番 해보자, 代身이라도 해서 거기에 내가 慰安을 얻자. 어떻게 보면 利己的이죠. 내가 했지만 너희가 한 것처럼 생각하는 거죠. 히말라야를 죽기 살기로 가고 또 가는 게 理解가 됩니까.”

    ▼ 이番 登攀은 혼자 하십니까.

    “부담스럽게 다른 사람 데리고 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마음이 힘듭니다. 나하고 같이 간 隊員이 또 問題가 있으면 나 힘들어 몬 삽니다. 차라리 問題가 있더라도 나 혼자 죽지. 혼자 가더라도 山에 가면 다른 나라 隊員들하고 같이 다니겠죠. 그 큰 山에 혼자 로프를 깔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8000m 山 오르려면 로프 3000m를 들고 가야 할 겁니다. 8月 27日에 안나푸르나로 들어갑니다. 微影氏가 오르지 못하고 남겨둔 봉우리 세 個를 오를 생각입니다. 來年 여름까지는 다 끝날 것 같네요.”

    ▼ 그러다 事故가 나면…

    “말씀 잘 하셨습니다. 覺悟하고 가는 겁니다.”

    ▼ 山에서 목숨을 잃어도 괜찮습니까.

    “괜찮기는 하지만 땅에서 便安하게 죽고 싶습니다.”

    ▼ 山에 오르는 理由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山마다 다르겠지만, 山에 올라가면서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으면 오히려 山이 아니죠. 땀을 뻘뻘 흘리다 모퉁이를 지나 바람을 맞으면 누구나 시원하다고 말합니다. 작은 것에 感謝할 줄 아는 마음이 드는 거죠. 큰 山이나 작은 山이나 오르고 나면 이런 잔잔한 滿足感이 듭니다.”

    ▼ 그럼 왜 큰 山에 갑니까.

    “事業하는 사람한테 작게 하지 왜 크게 하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느끼는 感情은 같지만 成就感은 다르죠.”

    ▼ 무슨 생각을 하며 山에 오릅니까.

    “落石, 눈沙汰 같은 것들이 나를 避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安全에 對해서도 생각하고. 그건 히말라야 오르는 사람 누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높은 山에 오르다보면 苦痛스럽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番이 아닌데, 스스로 呪文을 겁니다. ‘한 發은 苦痛이고 한발은 希望이다’ 繼續 그렇게 呪文을 걸면서 갑니다. 憂鬱한 마음으로 山에 오르진 않습니다. 내 좋아하는 山인데 가서 憂鬱하면 되겠습니까.”

    ▼ 神을 믿습니까.

    “나는 宗敎는 없지만 나를 管掌하는 神이 分明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管掌하는 神께 感謝합니다.”

    ▼ 일부러 險한 山에 가는 건 아닌가요.

    “더 險한 目標物을 擇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러 危險한 쪽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安全을 첫째로 합니다. 海外 山岳臺에 비해서 韓國은 히말라야 登山에 置重한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 40,50年 程度 뒤진, 걸음마 段階입니다. 그러니 우리 水準에 맞지 않게 外國과 비슷하게 가라는 건 죽으러 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8000m를 가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酸素桶을 쓰는 것도 같은 理由입니다. 微影氏度 처음 몇 番은 身體를 保護할 能力을 갖추기 위해 酸素桶을 썼습니다.”

    ▼ 險한 山에 오르는 山岳人에 對한 否定的인 視線이 있습니다.

    “世界 各國이 다 하는 겁니다. 山岳人이 일을 안 한다고 해서 國家 經濟가 안 돌아가는 거 아닙니다. 世界化에 발맞추려면 해야 합니다. 사람한테는 各其 제 몫이 있어요. 山岳人이 이렇게 登頂함으로써 사람들의 挑戰意識을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大將님에게 山은 무엇입니까

    “山은 삶의 一部이면서 全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 안 가면 왠지 내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疏外된 것 같고, 살면서 뒤지는 느낌이 들어요. 삶이 無意味하다고 할까. 내가 살아가는 理由 中 90% 以上이 登山입니다. 산이 엄마 품 속 같다던 微影氏는 自己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山에 오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저 亦是 마찬가지입니다. 32年 동안 登山을 해왔으니까 그 自體가 삶이 된 겁니다.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山에 오를 수 있지만 아무나 히말라야 登攀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내가 選擇되었고, 내가 할 수만 있다면 熱心히 하고 싶어요.”

    ▼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내 自身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前 名譽를 위해 다니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나 自身의 삶을 위해서 山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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