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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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作家 情報
出生 1952年 9月 14日
서울特別市 鍾路區 관훈동
死亡 2009年 5月 9日 ( 2009-05-09 ) (56歲)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新村洞 세브란스病院
國籍 大韓民國
職業 大學敎授 , 隨筆家 , 飜譯家
學歷 뉴욕州立大學校 올버니 大學院 英文學 博士
本館 結成
宗敎 天主敎 (洗禮名 : 마리아)
父母 父親 장왕록 博士 (前 서울大 名譽敎授)
配偶者 없음(독신)

장영희 (張英姬, 1952年 9月 14日 ~ 2009年 5月 9日 )는 大韓民國 의 隨筆家이자, 飜譯家, 英文學者이다.

서울 出身으로 1975年 서강대학교 英文學科를 卒業하고, 1977年 에 洞 大學院에서 碩士 學位를 取得했으며, 1985年 에 ' 19世紀 美國 作家들의 槪念世界와 現實世界 사이의 自我旅行(Journeys between Real and the Ideal)'이라는 論文으로 뉴욕 州立大學校 올버니 에서 博士 學位를 取得하였다.

1985年 부터 母校인 서강대학교 英語英文學科 敎授로 在職하였으며, 코리아 타임즈 ( 1987年 부터)와 中央日報 ( 2001年 부터) 等 主要 日刊紙에 칼럼을 寄稿하였고 韓國 호손學會( 1995年 부터)와 韓國 마크 트웨인 學會( 2003年 부터) 等에서도 理事 및 編輯理事로 活動하였다. 2004年 財團法人 韓國障礙人 財團 監査로 活動하였고, 2006年 동아일보 ‘동아廣場’의 執筆陣으로 活動하였다. 서울大學校 英文科 敎授였던 英文學者 장왕록 의 次女이다. [1] 그 外에도 高等學校 英語 敎科書를 執筆하기도 했다.

生涯 [ 編輯 ]

小兒痲痹 , 그리고 [ 編輯 ]

태어났을때부터 小兒痲痹에 걸렸다. 肝癌으로 死亡했다.

差別 [ 編輯 ]

택시技士들의 差別 [ 編輯 ]

生後 1年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小兒痲痹 에 걸려 1級 障礙人 [2] 判定을 받았기 때문에 非障礙人들의 差別과 싸워야 했다. 그女는 어린 時節 겪은 非障礙人들의 差別을 다음과 같이 記憶했다.

中學校 까지는 學校가 가까워서 엄마가 데려다 줬어요. 그때 오빠가 大學生 이어서 間或 저를 데려다 주고는 했지요. 그러다 中學校 3學年때부터 택시 를 타야 되는 거리가 되었어요. 그 當時만 해도 택시 運轉手들이 아주 不親切했거든요. 基本料金 나온다고 驅迫하고, 골목으로 들어간다고 驅迫하고, 그래서 土曜日 같은 때에는 택시를 못 잡아서 다섯時間동안 길거리에 서 있어야 한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게 第一 힘들었죠.

大學校들의 差別 [ 編輯 ]

大學校에서 工夫하려고 할 때에는 入學 試驗을 보지 못하게 하는 差別 탓에 工夫할 大學校가 없었다. 아버님인 장왕록 서울大學校 敎授가 로마 가톨릭 예수회 大學校인 서강대학교 의 英文科長이던 브루닉 神父를 찾아가 試驗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했다. 브루닉 神父는 이런 말로 入學試驗을 보도록 許諾했다.

무슨 그런 異常한 質問이 있습니까? 試驗 을 머리로 보는 것이지, 다리로 보나요? 障礙人이라고 해서 試驗보지 말라는 法이 어디 있습니까?

[3]

美國 留學의 契機,博士課程에서의 差別 [ 編輯 ]

장영희 敎授가 博士 課程을 工夫하려고 다른 大學校에서 工夫하려고 하니 敎授 들이 받아주지 않았다. 그날 部로 英語 工夫를 해서 그 다음해 美國 뉴욕州立大學校 올버니 로 留學길에 올랐다. [4]

[ 編輯 ]

2001年 乳房癌 宣告를 받고 3番의 手術과 放射線 治療를 받은 끝에 回復되었으나 2004年 에 다시 脊椎 에서 이 發生하여 2006年 에 回復되었으나, 마지막으로 2008年 에는 肝癌 까지 發病하여 學校를 休職하고 治療를 받았으나 2009年 死亡하였다. 이렇게 세 次例 癌이 發病하였으나 希望을 버리지 않았고, 鬪病 渦中에도 여러 冊을 펴내었다. [5] 信實한 로마 가톨릭 敎人인 장영희 敎授는 自身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다시 일어서는 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라고 했다.

障礙人 權利 保護 [ 編輯 ]

2001年 美國 하버드대학교 訪問敎授로 있었을 때, 當時 居住했던 7層짜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가 故障이 나 꼭대기 層에 살았기 때문에 3週 동안 階段을 오르내려야 했었다. 이에 그 아파트를 管理하던 不動産 會社를 相對로 싸워 謝過와 함께 補償을 받아냈다.

'보스턴 글로브'는 이 이야기를 머리記事로 紹介했고, NBC TV 와 地域 放送 들도 앞다투어 紹介하였다.

死亡 [ 編輯 ]

2009年 5月 9日 에 肝癌으로 死亡하였다. 그 當時에 그女는 56歲였다.

著書 [ 編輯 ]

  • 《살아온 奇跡 살아갈 奇跡》 ( 2009年 )
  • 《工夫의 즐거움》 (共著, 2006年)
  • 《生日》 ( 2006年 )
  • 《祝福》 ( 2006年 )
  • 《文學의 숲을 거닐다》( 2005年 )
  • 《내 生涯 單 한番》 ( 2000年 )

賞勳 [ 編輯 ]

  • 大韓民國障礙人文化藝術對象 (2009年)
  • 올해의 문장상 ( 2002年 ) - 隨筆集 <內 生涯 單 한番>으로 受賞
  • 韓國文學飜譯賞 ( 1981年 ) - 金顯承의 詩를 飜譯해 受賞

남긴글 [ 編輯 ]

  • “아무리 運命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基本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時間에 차라리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 길이다.” ~ 《살아온 奇跡, 살아갈 奇跡》 (p. 141)
  • “於此彼 人生은 障礙物 競技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드라마의 連續이고, 障礙物 하나 뛰어 넘고 이젠 됐다고 安堵의 한숨을 몰아 쉴 때면 생각지도 않았던 또 다른 障礙物이 나타난다. 그 障礙가 身體障礙이든, 人間關係이든, 돈이 없는 障礙이든, 돈이 너무 많은 障礙이든.” 《文學의 숲을 거닐다》 (p. 228)
  • “希望을 가지지 않는 것은 罪이다.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自身을 어둠의 監獄 속에 가두어버리는 自殺行爲와 같기 때문이다.”~ 《내 生涯 單 한番》 (p. 89)
  • “어쩌면 우리 삶 自體가 試驗인지 모른다. 우리 모두 삶이라는 試驗紙를 앞에 두고 正答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것은 勇氣의 試驗이고, 忍耐와 사랑의 試驗이다. 그리고 어떻게 試驗을 보고 얼마만큼의 成跡을 내는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내 生涯 單 한番》 (p. 135)
  • '헨리 제임스의 <美國人>이라는 冊의 앞部分에는 한 男子 人物을 紹介하면서 '그는 나쁜 運命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表現한 文章이 있다. 나는 그때 마음을 定했다. 나쁜 運命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運命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運命, 좋은 運命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堂堂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 라고.(살아온 奇跡, 살아갈 奇跡 後聞 中)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