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張英姬,
1952年
9月 14日
~
2009年
5月 9日
)는
大韓民國
의 隨筆家이자, 飜譯家, 英文學者이다.
서울
出身으로
1975年
에
서강대학교
英文學科를 卒業하고,
1977年
에 洞 大學院에서 碩士 學位를 取得했으며,
1985年
에 '
19世紀
美國
作家들의 槪念世界와 現實世界 사이의 自我旅行(Journeys between Real and the Ideal)'이라는 論文으로
뉴욕 州立大學校 올버니
에서 博士 學位를 取得하였다.
1985年
부터 母校인
서강대학교
英語英文學科 敎授로 在職하였으며,
코리아 타임즈
(
1987年
부터)와
中央日報
(
2001年
부터) 等 主要 日刊紙에 칼럼을 寄稿하였고 韓國 호손學會(
1995年
부터)와 韓國 마크 트웨인 學會(
2003年
부터) 等에서도 理事 및 編輯理事로 活動하였다. 2004年 財團法人 韓國障礙人 財團 監査로 活動하였고, 2006年 동아일보 ‘동아廣場’의 執筆陣으로 活動하였다. 서울大學校 英文科 敎授였던 英文學者
장왕록
의 次女이다.
[1]
그 外에도 高等學校 英語 敎科書를 執筆하기도 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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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났을때부터 小兒痲痹에 걸렸다. 肝癌으로 死亡했다.
差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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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技士들의 差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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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後 1年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小兒痲痹
에 걸려 1級 障礙人
[2]
判定을 받았기 때문에 非障礙人들의 差別과 싸워야 했다.
그女는 어린 時節 겪은 非障礙人들의 差別을 다음과 같이 記憶했다.
“
|
中學校
까지는 學校가 가까워서 엄마가 데려다 줬어요. 그때 오빠가
大學生
이어서 間或 저를 데려다 주고는 했지요. 그러다 中學校 3學年때부터
택시
를 타야 되는 거리가 되었어요. 그 當時만 해도 택시 運轉手들이 아주 不親切했거든요. 基本料金 나온다고 驅迫하고, 골목으로 들어간다고 驅迫하고, 그래서
土曜日
같은 때에는 택시를 못 잡아서 다섯時間동안 길거리에 서 있어야 한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게 第一 힘들었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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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校들의 差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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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學校에서 工夫하려고 할 때에는 入學 試驗을 보지 못하게 하는
差別
탓에 工夫할 大學校가 없었다. 아버님인
장왕록
서울大學校
敎授가
로마 가톨릭 예수회
大學校인
서강대학교
의 英文科長이던 브루닉 神父를 찾아가 試驗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했다. 브루닉 神父는 이런 말로 入學試驗을 보도록 許諾했다.
“
|
무슨 그런 異常한 質問이 있습니까?
試驗
을 머리로 보는 것이지, 다리로 보나요? 障礙人이라고 해서 試驗보지 말라는 法이 어디 있습니까?
|
”
|
[3]
美國 留學의 契機,博士課程에서의 差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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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희 敎授가
博士
課程을 工夫하려고 다른 大學校에서 工夫하려고 하니
敎授
들이 받아주지 않았다. 그날 部로
英語
工夫를 해서 그 다음해
美國
뉴욕州立大學校 올버니
로 留學길에 올랐다.
[4]
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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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年
에
乳房癌
宣告를 받고 3番의 手術과
放射線
治療를 받은 끝에 回復되었으나
2004年
에 다시
脊椎
에서
癌
이 發生하여
2006年
에 回復되었으나, 마지막으로
2008年
에는
肝癌
까지 發病하여 學校를 休職하고 治療를 받았으나 2009年 死亡하였다. 이렇게 세 次例 癌이 發病하였으나 希望을 버리지 않았고, 鬪病 渦中에도 여러 冊을 펴내었다.
[5]
信實한 로마 가톨릭 敎人인 장영희 敎授는 自身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다시 일어서는 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라고 했다.
障礙人
權利 保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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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年
美國
하버드대학교
訪問敎授로 있었을 때, 當時 居住했던 7層짜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가 故障이 나 꼭대기 層에 살았기 때문에 3週 동안 階段을 오르내려야 했었다. 이에 그 아파트를 管理하던 不動産 會社를 相對로 싸워 謝過와 함께 補償을 받아냈다.
'보스턴 글로브'는 이 이야기를 머리記事로 紹介했고,
NBC
TV
와 地域
放送
들도 앞다투어 紹介하였다.
死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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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年
5月 9日
에 肝癌으로 死亡하였다. 그 當時에 그女는 56歲였다.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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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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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韓民國障礙人文化藝術對象 (2009年)
- 올해의 문장상 (
2002年
) - 隨筆集 <內 生涯 單 한番>으로 受賞
- 韓國文學飜譯賞 (
1981年
) - 金顯承의 詩를 飜譯해 受賞
남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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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運命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基本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時間에 차라리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 길이다.” ~ 《살아온 奇跡, 살아갈 奇跡》 (p. 141)
- “於此彼 人生은 障礙物 競技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드라마의 連續이고, 障礙物 하나 뛰어 넘고 이젠 됐다고 安堵의 한숨을 몰아 쉴 때면 생각지도 않았던 또 다른 障礙物이 나타난다. 그 障礙가 身體障礙이든, 人間關係이든, 돈이 없는 障礙이든, 돈이 너무 많은 障礙이든.” 《文學의 숲을 거닐다》 (p. 228)
- “希望을 가지지 않는 것은 罪이다.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自身을 어둠의 監獄 속에 가두어버리는 自殺行爲와 같기 때문이다.”~ 《내 生涯 單 한番》 (p. 89)
- “어쩌면 우리 삶 自體가 試驗인지 모른다. 우리 모두 삶이라는 試驗紙를 앞에 두고 正答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것은 勇氣의 試驗이고, 忍耐와 사랑의 試驗이다. 그리고 어떻게 試驗을 보고 얼마만큼의 成跡을 내는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내 生涯 單 한番》 (p. 135)
- '헨리 제임스의 <美國人>이라는 冊의 앞部分에는 한 男子 人物을 紹介하면서 '그는 나쁜 運命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表現한 文章이 있다. 나는 그때 마음을 定했다. 나쁜 運命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運命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運命, 좋은 運命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堂堂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 라고.(살아온 奇跡, 살아갈 奇跡 後聞 中)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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